법성스님을 만난 것은 1975년 겨울 화엄사에서였다. <제법집요경>은 10권으로 되어 있다. 교리 중에서 요점을 묶어놓은 경이라는 뜻이다. 목제번뇌품, 설법품, 염리자신품 등 36개 품으로 이루어진 이 경의 요체는 중생이 지혜의 눈을 떠서 번뇌를 끊는라는 것이다. 육신의 애착은 무엇인가, 변화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탐욕은 무엇인가, 보시는 무엇인가 등 <제법집요경>은 이 평범한 물음들에 차근차근 답해주고 있다. 이창경/신구전문대 교수
학승 일칭스님이 번역한 <제법집요경(諸法集要經)>을 만난 것도 바로 그 겨울 산사에서였다. <제법집요경>은 윤회, 번뇌, 무상 등 불교 기초교리와 수행자로서 바르게 행할 바를 밝혀놓은 경전이다. 해이해진 마음, 느슨해진 신심을 곧추세워 다시금 용맹정진할 수 있도록 힘을 준 경전이다. 나는 <제법집요경>과 법성스님을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다. <제법집요경>을 통해 스님을 만날 수 있었고, 스님을 통해 <제법집요경>을 만났기 때문이다.
1975년 대학캠퍼스는 스산했다. 최루탄 가스로 뒤덮이는 날이 많았고 굳게 닫힌 교문은 전경들이 지키는 날이 많은 그런 때였다. 터져버릴것 같은 답답함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던 그해 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12월 어느날 화엄사에서 겨울 수련회를 갖는다는 불교학생회의 안내문을 게시판에서 보았다. 무엇인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고통이 자연스럽게 화엄사로 향하게 했다.
서울을 출발할 때부터 내리던 눈은 구례에 도착해서도 그치지 않았다. 흰눈을 뒤집어쓰고 도착한 우리를 처음으로 맞아주신 스님이 바로 법성스님이었다. 일주문 밖까지 나와 눈을 맞으며 우리를 반겨주신 스님에게서 알 수 없는 평온이 느껴졌다. 스님과 정식으로 인사를 한 것은 이튿날 경전강독시간이었다. 법성스님이 강의를 맡았는데, 그 경전이 바로 <제법집요경>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때가 바로 그때였던 것 같다. 수행을 지도해 주시는 스님의 행동 하나하나, 경전의 내용,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소리 모두가 감동이었다. 몰두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부처임을 깨달았다.
별이 총총한 새벽, 계곡의 얼음을 깨고 찬물로 세수한 후 법당에 꿇어 앉아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니 정신이 새벽별처럼 맑아졌다.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머리 속에서 나와 법당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새벽 바람을 쐬고 돌아와 차근차근 제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예전 그대로가 아니었다. <제법집요경>에서 본 부처님의 말씀이 그대로 떠올랐다.
“탐욕은 캄캄한 어둠과 같은 것이다. 지혜의 밝은 빛이 있어야 이를 없앨 수 있다. 또 탐욕은 잡풀 무성한 숲과 같아 지혜의 예리한 칼이 있어야 베어버릴 수 있다. 탐욕은 검푸른 강물과도 같아 지혜의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다.” 지혜의 빛, 지혜의 칼, 지혜의 배는 어디에 있는가. 어둠과 무명을 단칼에 잘라버릴 그 무서운 힘을 지닌 지혜의 칼은 정말 있기는 한 것인가. 있다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스님은 <제법집요경>을 강독하시며 누구나 의지만 있으면 분명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셨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만해지고, 어떤 사람은 침울해 합니다. 그러나 그게 자신의 전부입니까. 거울에 비치지 않은 다른 곳에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허상에 얽매여 있다는 뜻입니다”
5일간의 수행을 마치고 난 마지막 밤, 일주문을 벗어나며 우리는 스님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거기에서 우리는 스님이 아닌 사람을 보았다. 초발심의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는 바른 수행자가 거기 서 있음을 보았다. 그 후 스님을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내 젊은 혼돈의 시절, 버리는 것이 더 큰 얻음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스님이기에 가끔은 <제법집요경>을 뒤적이며 스님의 흔적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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