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보면 인간의 삶은 시간이란 베틀에다 천을 짜듯 문양을 새기는 것이 아닐런지. 밀원/조계종 불학연구소장
그래서인가? 곁에 두고 펼쳐보는 경전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회의와 의심이 미덕일 수 있었던 20∼30대 젊은 시절에는 명징한 논리와 깊은 사유가 요구되는 <금강경(金剛經)>이나 <능엄경> 같은 류의 경을 자주 펼치더니만 불혹고개를 넘다보니 지금에는 평이한 문체에 이야기가 있는 경전을 가까이 하게 된다. 그 중 즐겨 보는 경이 <현우경>이다.
이 경은 십이분교(十二分敎) 중 아바다아나(비유의 이야기를 모은 경전)에 속한다. 그 내용과 구성을 보면 현재의 행위를 과거사의 이야기로써 설명한 것, 미래를 예언하는 수기, 현재의 행위에 따른 현재의 과보, 부처님이 되기까지의 부처님 전생이야기인 본생담 등 다양한 내용이 비유와 우화 형식으로 꾸려져 있다.
내가 <현우경(賢愚經)>을 가까이 두고 좋아하는 이유를 몇가지 이야기해 본다면, 우선 <현우경>에는 우리네 중생들 세상살이가 그대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현우경>을 읽다보면 내가 마치 무대 위에 선 배우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맡은 배역은 참으로 다양하다. 때론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해 신명을 바치는 구도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미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스승 부인의 유혹을 거절한 연유로 백 개의 손가락을 자르러 다니는 봉두난발의 앙굴리말라가 되기도 하고 오백 명의 거지 중 하나가 되어 구걸하다가 부처님을 만나 환희심으로 발심출가하기도 한다. 또 어느새 인도 최강의 나라 국왕이 되어 만천하를 호령하기도 하며, 천하절색의 미인이 되어 뭇남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호랑이, 코끼리, 소, 앵무새 등이 되었다가 용왕이나 천인(天人)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는 드디어 부처님이 되어 미혹에 쌓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기도 한다.
또한 이 경은 과보의 성취와 깨달음에 대한 사행심을 없애준다. 어느 스님은 ‘도박같은 돈오돈수’라는 시에서 ‘……/ 어제의 무지함이 오늘을 돌고/ 오늘의 집착이 내일의 약속 장소로/ 있는 곳도 모르는 채/ 지옥과 극락을 헤매이다/ 한가닥 인연으로/ 한판 도박이라도 하는 듯/ 돈오돈수를 잡으려 한다’고 노래했다. 출가사문이라면 어느 누군들 돈오돈수의 매력에 이끌리지 않겠는가?
나 <현우경>에서는 깨달음은 도박이 아니라고 구구절절히 이야기한다. 부처님같이 수승한 근기를 지닌 분도 아승지겁의 세월을 수행하여 비로소 부처를 이루신 것이라고.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수행이라도 헛되지 않는 것이라고. 깨달음은 순간의 일이나 아승지겁의 세월이 그 순간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우경>은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아승지겁의 수행을 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경박한 이들에겐 진중함을, 지나치게 진중한 이들에겐 삶의 여유를 준다.
어느 서양 문학가는 존재의 뿌리와 정신의 축을 잃고 부유하는 현대의 군생들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상태라 규정하기도 했다. 이런 이들에게 <현우경>은 사람살이가 팔랑팔랑 부유하는 깃털같은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반대로 지나친 존재의 무게를 떠받고 사는 출가사문같은 이들에겐 사람살이가 늘 무거운 것만은 아니라고 가르쳐 준다. 내 경우 한없이 아득한 空의 심연, 중중무진으로 펼쳐진 화엄의 광활함, 이런 무거움으로부터 조금 비켜나고 싶을 때, 그 때 <현우경>을 펼친다.
<현우경>은 천상으로부터 날짐승 길짐승, 지옥중생에 이르기까지의 육도 중생들이 때로 현명하게 때로 어리석게 엮어나가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세계를 열어보임으로써, 어리석고 못난 이들도 수행하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깨달음의 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눅들지 않게 해준다. 또 깨달음에 대한 열정으로 조급하디 조급한 이들에겐 느림의 미학인 아승지겁의 수행을 가르친다. 그래서 이 생에서 생사를 결판내지 못했다는 자책과 자괴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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