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만약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지계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죄와 죄 아닌 것을 얻을 수 없다 하는가? |
[답] 사견과 거친 마음을 일컬어 얻을 수 없다 말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깊이 모든 법상에 들어가 공삼매(空三昧)를 행한다면, 지혜의 눈으로써 관하는 까닭에 죄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죄를 얻을 수 없기에 계율 역시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이는 죄가 있는 까닭에 곧 계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죽임의 죄가 없다면 또한 계율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문] 지금 현재 중생이 있는데 어찌하여 중생을 얻을 수 없다 하는가? |
[답]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만일 지혜의 눈으로 관찰한다면 중생을 얻을 수 없으리니, 마치 앞의 보시[檀] 가운데서 말한 바와 같다. 곧 베푸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으며, 베푸는 물건도 없으니, 이 역시 이와 같다. |
또한 만약에 중생이 있다면 이것은 5중(衆)인가, 아니면 5중을 여의었는가? |
[554 / 805] 쪽 |
만일 5중이라면, 5중은 다섯이고 중생은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다섯은 하나가 되고 하나는 다섯이 될 수 있어야 한다. |
비유하건대 시장에서 물건을 바꾸는 것과 같다. 곧 값이 다섯 필(匹)인 것을 한 필만 주고 취하려 한다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는 다섯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중은 한 중생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
또한 5중은 생멸하여 항상된 모습이 없는데, 중생의 법은 전생으로부터 와서 내생에 이르며, 죄와 복을 삼계에서 받는다.
만일 5중이 곧 중생이라면, 마치 초목이 저절로 생기고 저절로 멸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죄나 속박은 없고 해탈도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5중이 곧 중생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만일 5중을 떠나서 중생이 있다면 마치 먼저 말하기를 “신(神)이 항상하고 두루한다”고 하는 가운데 그 이치가 어긋남과 같다. |
또한 5중을 여의었다면 나라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터인데, 만일 5중을 여의고도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상견[常]에 떨어지는 것이요, 상에 빠지면 생도 없고 사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생이란 ‘전에는 없던 것이 이제 있는 것’이요, 사란 ‘이미 생한 것이 멸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중생이 항상하다면 다섯 길[吾道] 가운데 두루 차 있어야 한다.
먼저부터 이미 항상 있거늘 어찌 이제 다시 와서 태어나는 것인가. 만일 생이 없다면 곧 죽음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
[문] 결정코 중생이 있거늘, 무슨 까닭으로 없다 하는가? 5중의 인연으로 중생의 법이 있는 것은 마치 다섯 손가락의 연연으로 주먹의 법이 생기는 것과 같다. |
[답] 그 말은 옳지 못하다.
만일 5중의 인연으로 중생의 법이 있다고 한다면, 5중을 제하고 달리 중생의 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눈으로 스스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알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법을 알거니와 공하여 나라는 법이 없으니, 이 여섯 가지 일을 여의면 다시 중생이라 할 것이 없다. |
외도의 무리들은 뒤바뀐 소견 때문에 ‘눈으로 색을 보는 것이 중생이라 하고, 나아가서는 뜻으로 법을 아는 것이 중생이라 하고 또한 능히 기억하거나 고락을 받는 것이 중생이다’ 한다.
다만 이런 소견을 내는 중생의 실체는 알지 못한다. |
[555 / 805] 쪽 |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장로 대덕 비구의 경우와 같으니, 사람들은 그를 아라한이라 하여 많은 공양거리를 바쳤다.
나중에 그가 병들어 죽으니, 제자들은 공양을 잃을 것을 걱정하여 밤에 몰래 시신을 몰래 들어내어 장사지내고, 그가 누웠던 자리에 이부자리와 베개를 두어 마치 그 스승이 살아 있는 것과 같이 만들어 놓았다. |
혹 사람들이 문법을 하며 “스승이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어오면 제자들은 말하기를 “그대는 저 침상에 있는 이부자리와 베개가 보이지 않으시오?”라고 했다. |
어리석은 이들은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스승께서 앓아 누우셨다’ 하면서 크게 공양을 바치고 돌아갔다. 이렇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
그런데 어떤 지혜로운 이가 와서 묻거늘 제자들은 전과 같이 대답했더니,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
“나는 이부자리ㆍ베개ㆍ침상ㆍ옷자락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 |
그리고는 이불을 들치고 찾으니, 결국 사람은 없었다. |
여섯 가지 일[六事]의 모습을 제하면 달리 나와 남은 없으며, 아는 자와 보는 자도 역시 이와 같다. |
또한 만약 중생이 5음의 인연으로 있다고 할 때, 5음이 무상하다면 중생도 무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과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이 무상하다면 내생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
또한 만일 그대의 말과 같이 ‘중생이 본래부터 항상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중생은 응당 5음을 내야 하고, 5음은 중생을 내지 말아야 한다. |
지금 5음의 인연 때문에 중생이란 이름이 생겼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이름을 좇아서 진실을 구한다. 이런 까닭에 중생은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생이 없다면 죽이는 죄도 없을 것이요, 죽이는 죄가 없기 때문에 또한 계를 지니는 일도 없다. |
[556 / 805] 쪽 |
또한 이 5음에 깊이 들어가서 관찰하고 분별하여 공함을 안다면, 마치 꿈 속에서 보는 것과 같고, 거울 속의 모습 같다.
만약 꿈속에 보는 것이나 거울 속의 상을 죽인다면 죽임의 죄는 없으니, 5음이 공한 모습인 중생을 죽이는 것 역시 이와 같다. |
또한 어떤 사람이 죄를 원하지 않아 죄 없기를 탐착하면, 이 사람은 파계한 사람을 보면 곧 업신여기고 계를 지키는 착한 사람을 보면 곧 사랑하고 공경하게 된다.
이렇듯 계를 지니는 일은 곧 죄를 일으키는 인연이 되기에 말하기를 “죄와 죄 아님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시라바라밀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
대지도론(大智度論) 141. ★ 지혜의 눈으로 관찰한다면 중생을 얻을 수 없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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