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스크랩] 경허 스님 수행일화 21.22.23.24.25.26.

수선님 2019. 1. 13. 12:58

.

 

 

어려서 벗은 몸이나 커서 벗은 몸이나

 

경허 스님 수행일화 <21>, <22>, <23>

 

 

 

 

 

 

세상풍속도 마음따라 달라

어려서 예쁜 것 커서 싫다니

경허 스님 어머니 노기는

특별 법문에 대한 상놀음

 

<21> 모친 위한 해탈 법문

 

하루는 천장사에서 경허 스님이 어머니를 위해 법문을 한다고 대중을 불러 모았다.

 

“우리 어머니를 모셔 오도록 하라.”

시자는 스님의 뜻을 연만한 할머니께 전하며, 큰스님으로 존경받는 아드님의 법회에 가시기를 청했다. 모친 되시는 할머니 또한 희색이 만연해 옷을 갈아 있고 대중이 모인 큰 방에 들어가 향을 피우며 정성을 다해 경의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우리 경허가 나를 위해 법문을 설한다 하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구나”하며 특별 법문을 청했다.

 

그 때 스님은 잠자코 앉아 있다가 어찌된 셈인지 어머니를 맞이해 부시럭부시럭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완전히 벌거벗은 알몸이 되자,“어머니, 저를 보십시오”하고 그대로의 나신(裸身)을 보였다.

 

그 어머니는 무슨 심오한 설법을 자기를 위해 해줄 줄로만 알고 크게 기대하고 있다가 해괴한 모습을 보고는 크게 노했다.

 

“대체 무슨 법문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별 발칙한 짓도 다하는구나!”

 

할머니는 법석을 박차고 나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는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에 스님은, “저래 가지고 어찌 남의 어머니 노릇을 한단 말인가. 내가 아주 어려서는 이 몸을 벌거벗겨 씻기며 안고 빨고 하시더니, 지금은 왜 그렇게 못하실까. 세상 풍속 참으로 한심한 일이로군”하고 짐짓 쓴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스님의 모친은 노발대발해“그래, 나를 위해 법을 설한다고 하더니, 그게 무슨 짓이란 말이냐?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하고 탄식하며 좀처럼 노기를 풀지 않았다. 대중이 전부 몰려가서 아뢰었다.

 

“할머니, 그게 바로 스님의 큰 법문이랍니다. 특별 설법이었어요. 그러니, 어서 노여움을 푸십시요”하고 거듭 빌어야 했다.

 

 

<22> 벌 드나드는 콧구멍

 

하루는 경허 스님이 큰 방에서 정진하고 계시는데 만공 스님이 스님에게 넌지시 물었다.

“스님, 저는 콧구멍이 간질간질합니다.”

경허 스님이 물었다.

“왜 그런가?”

경허 스님이 되물은 즉 만공 스님이 대답했다.

“벌들이 저의 콧구멍 속으로 드나드느라고 그러합니다.”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을 나무랬다.

“이 사람아, 벌이 드나드는 콧구멍은 간지럽지를 않아.”

 

만공 스님은 한 마디 자기의 견처를 과시해 보려고 했으나, 조작된 망상임을 뉘우쳤다. 스님은 경허 스님의 자연스러운 지적에 깊이 깨우쳤다 

 

 

 

만공 스님 망상에 따끔한 지적

유생 행세하던 경허 스님

대자유인으로 유유자적

고향·타향·차안·피안 구분없네

 

<23>무하향의 경지

 

경허 스님이 만년 10년 가까이나 떠돌며 보내던 열반지는 북녘 땅 끝 함경도 갑산ㆍ강계 지방 일대였다.회갑 노년기의 스님이 강계 땅 장뚜루벌을 지나던 때는 1905년 무렵 어느 날 이었다.

 

강계군 종남면 한전동의 시골 선비 담여 김탁은 경허 스님보다 3살 아래인 54세였다. 지방유지였던 김탁은 마침 고향 마을에서 10여 리 거리에 있는 장뚜루벌에 와있었다.

어찌된 셈인지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속인이라 보기도 어렵고, 또 그렇다고 해서 스님이라 보기도 어려운 한 초로의 늙은이를 에워싸고 몰매를 갈기고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런 놈의 영감은 죽여도 그만이야! 나쁜 영감태기 같으니라구.”

청년들의 모습은 살기가 등등했다.김탁은 시끄러운 고함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거리로 나와봤다. 이유인즉슨 아낙네를 희롱했다는 이유로 젊은이들이 펄펄 뛰는 것이었다.

김탁은 청년들의 분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의 무지막지한 폭행부터 뜯어말렸다. 김탁 덕분에 경허 스님은 청년들로부터 봉변을 그칠 수 있었다.

 

이 때였다. 스님이 김탁에게 도리어 목청을 돋구는 것 아닌가.

 

“미친 놈이, 할 일이 없으면 그대로 길이나 갈 것이지, 괘씸하구나! 네 이놈, 이 고얀 놈 같으니라고!

너는 남의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어찌 삯싸움이나 하며 쓸 데 없는 참견을 하러 드는고?”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욕설 섞인 호령부터 하는 경허 스님을 보고 김탁은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서도 김탁은 안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달래며, 스님의 얼굴과 행색을 다시금 눈여겨 보았다.

 

범상치 않은 풍채를 지닌 스님은 드물게 보는 괴이한 걸물이었다. 순간 김탁은 스님의 비범함에 끌렸다.

“이거 어른을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저희 집 누처로 가시겠습니까?”하며 스님에게 동행을 청했다.

 

화가 누그러진 스님은 김탁의 뒤를 따랐다.길을 걸으며 경허 스님과 김탁은 법담을 나눴다. 집에 돌아와서도 밤 새는 줄 모르고, 그 날 밤을 밝히며 스님의 일거일동(一擧一動)에 도취해 버린 담여 김탁은 유생 박난주로 행세하는 경허 스님을 깎듯이 받들어 모셨다.

 

경허 스님은 그 집에 머물며 정성들여 옷 시중을 하는 김탁의 부인 박씨를 계수처럼 부르며 한 집안 식구로 지냈다.

 

어느 날, 스님은 박씨에게 “계수님은 여기 강계에서만 살 분이 아니고, 장차 충청도 수덕사 혹은 천장암 근처로 가서 살 것 같소이다”하는 예언도 했다.

 

김탁의 집에서 스님은 줄곧 유생 박난주로 행세하며 마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면서도 경허 스님은 그 일대 도처에서 거침 없는 시흥(詩興)을 돋구면서 대자유인으로 유유 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경허 스님이 이 때 읊은 시가 여러 수 전한다. 이 가운데에는 김탁과 술자리에서 읊은 시는 7언 율시로

 

돈의 이상향이라 할 ‘무하향(無何鄕)’의 경지가 도도하다.

고향이니 타향이니 하는 구분은 물론 구태여 차안(此岸)이다 피안(彼岸)이다

하는 구분도 없는 선객의 가풍 또한 여실하다.

 

 

 

 

뜻 얻었다면 거리의 한담도 다 진리

 

경허 스님 수행 일화 <24> <25>

 

 

 

 

 

 

“모르면 용궁 경전도 잠꼬대 일뿐”

스님 무애행에 日헌병대장 감탄

관음보살이 북으로 행한 뜻 묻자

법제자 삼아 불조의 밀전 지도

 

<24> 관헌(官憲)에 잡히다

 

을사조약 이후 한일합방으로 일본 경찰들이 치안을 담당할 때의 일이다. 비로관을 크게 만들어 머리에 쓰고 검은 장삼을 걸친 한 스님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구척장신의 그 스님은 맨발에 한손에는 담뱃대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고기를 주장자에 매달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 괴승(怪僧)의 정체는 바로 경허 스님이었다.

 

마침 거리를 순찰하던 일본 헌병 보조원 두 명이 정체불명의 행색을 한 스님의 괴이한 행색에 산적 괴수로 오해해 다짜고짜 경허 스님을 체포했다.

스님을 헌병대로 끌고 가려 하는데 경허 스님이 입을 열었다.

“이놈들아, 끌고가려면 너희들이 나를 메고 가거라.”

 

경허 스님은 땅에 넙죽 주저앉아 버렸다. 두 헌병 보조원은 하는 수 없이 긴 장대를 갖고와 경허 스님의 양다리와 양팔을 밧줄로 꽁꽁 묶어 들쳐 메고 헌병대로 데려갔다.

두 헌병 보조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헌병분견대로 향하는데 이에 대한 경허 스님의 말이 걸작이었다.

경허 스님은 “흥, 경허가 그래도 어지간한가 보구나!”하고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헌병 보조원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한 헌병 보조원이 퉁명스런 말로 “여보 대사(大師). 그 무슨 소리요?” 했다.경허 스님이 다시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나를 너희들이 이렇게 메고 가야지 내발로 걸어 갈 수야 있겠느냐. 이놈들아”

 

더욱 화가 난 헌병 보조원들은 경허 스님을 내려놓고 손발에 동여 맨 밧줄을 풀었다.

“그럼 걸어갑시다.”

 

헌병 보조원들은 경허 스님에게 발길을 재촉했다. 경허 스님은 한참을 걷다가 다시 크게 웃었다.

“흥, 흥! 경허가 그래도 어지간하다. 이놈들아, 내가 내발로 걸어가야지 너희들에게 메어가서야 어디 되겠느냐?”

 

헌병분견대에서 일본 헌병대장이 직접 경허 스님을 취조했다. 독립군의 수뇌나 산적두목으로 알아본 것이었다.취조에서 아무 표정 없이 묵비권을 행사하던 경허 스님이 갑자기 지필묵을 청했다.

헌병대장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지필묵을 갖다 주게 했다.경허 스님은 헌병들에게 양쪽에서 두루마리를 붙들게 하고 가져다 놓은 붓에 먹물을 찍어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의 휘호를 써 갈겼다.

 

스님의 글 쓰는 자세를 보던 헌병대장은 깜짝 놀라 자세를 정중히 했다. 헌병대장은 글을 다시 읽어보아도 그 깊은 뜻을 알 수 없었지만 경허 스님이 큰 도인임을 짐작했다. 헌병대장이 큰 절을 하며 경허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경허 스님은 일제 치하에서 이런 일이 비일 비재 했다.

강계(江界) 땅에서는 박진사로 행세하던 중 일본 경찰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공주(公州) 경찰서에서 경허 스님을 취조한 야마모토(松山) 경찰서장에게 경허 스님은 붓과 종이를 청해 일필휘지의 글을 남겼다.

 

“그 뜻을 얻었다면 거리의 한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요, 말하는 주인을 알지 못하면 용궁(龍宮)에 간직된 보배로운 경전도 한 낫 잠꼬대일 뿐.”

 

야마모토 서장은 경허 스님의 글의 깊은 뜻을 알아보고 스님을 자기 집 내실로 모셨다. 야마모토 서장은 자기 부인에게 일렀다.

 

“이 어른의 시봉을 잘 해드리고 어떤 행동을 하시든 언제나 원하시는 대로 모시도록 하시오.”

야마모토 서장은 집안 하인들에게도 행여나 조금도 경허 스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도록 극진히 봉대토록 했다.며칠을 융숭한 대우를 받던 경허 스님은 놀라운 행동을 보였다. 서장 집에 보관된 금고를 털어 시가(市街)에서 술을 사 먹은 것이었다.

 

경허 스님은 그 뿐만이 아니라 배고픈 걸인과 주민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하지만 야마모토 서장은 일체 참견 하지 않고 경허 스님이 하는 대로 하게 했다. 도인의 무애행을 그대로 펴게 하는 것이 모시는 도리라고 본 야마모토 서장은 자기 부인에게 누누이 당부해 아무도 제지하거나 흉보는 사람이 없도록 극진히 대접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은 며칠 뒤 아무 말 없이 그 집을 나섰다. 야마모토 서장은 자기가 잘못해 큰 도인을 더 모시지 못했다며 못내 애석하게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25>혜월 스님의 주먹

 

혜월(慧月) 스님이 정혜사(定慧寺)에서 공양주를 할 때였다. 혜월 스님은 역력고명 무형단자(歷曆孤明 無形丹子) 화두에 깊게 들었다. 하루는 의심이 매우 솟아나 뒷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1주일을 앉아 무아지경에 들었다.

 

1주일 뒤 혜월 스님이 홀연히 문을 열고 나와 은사 스님에게 화두를 깨달은 경계를 말했다. 하지만 은사 스님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네 공부를 판단해 줄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은사 스님은 이어 “개심사(開心寺) 경허 스님을 찾아가 네가 공부한 경지를 지도받도록 하여라”고 천거했다.혜월 스님은 그 길로 개심사에 찾아가 경허 스님이 계신 선방 앞에 이르렀다.

 

혜월 스님은 다짜고짜 “스님!”하고 부른 뒤 “관음보살이 북으로 향한 뜻이 무슨 뜻이오리까?”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이에 대해 경허 스님은 눈도 뜨지 않고 답했다.

“그 것 말고 또”

경허 스님은 큰 소리로 되받아 물으면서 동시에 눈을 딱 뜨고 바라보았다.

혜월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주먹 하나를 높이 들고 서 있었다.그제야 경허 스님이 말했다.

“앉으라”

그제야 경허 스님은 불조(佛祖)의 밀전 밀맥(密傳 密脈)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너하고 나만 알자, 내가 죽였다”

 

경허 스님 수행 일화 <26>

 

 

 

 

 

“너하고 나만 알자, 내가 죽였다”

만공 스님, 스승의 뜻밖의 말에 당황

사미승 죽음에 ‘살인누명’

변명없이‘못난 중생 지은 죄 대신 받자’

갑산으로 떠난 후 결백 밝혀져

 

<26> 살인 혐의를 쓰다

 

경허 스님은 화광동진(和光同塵) 직전에 살인 누명을 쓰게 된다.

경허 스님이 시봉인 사미 영주 스님을 데리고 충남 공주 계룡면 양화리에 위치한 연천봉(連天峰) 등운암(騰雲庵)에 갔다 올 때의 일이었다.

연천봉(連天峰)은 계룡산의 한 봉우리로 동학사(東鶴寺)에서 10리 가량 떨어져 있다. 등운암은 초가 한 칸으로 양화리 방향으로 10리 가량을 다시 내려가면 신원사(新元寺)가 나온다.

 

영주 스님이 경허 스님과 함께 등운암에서 신원사로 향하던 때였다. 먼 길을 가야 하기에 영주 스님의 걸망은 퍽 두둑했다.아래쪽에서 젊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동학사에서 심부름과 잡일을 하던 양화 김 도령이라는 이도 있었다.

영주 스님은 김도령을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건넸다.

“아니, 양화 김도령 아닌가유?”

 

양화 김도령은 그저 영주 스님이 멘 두둑한 걸망을 훑어 볼 뿐이었다. 김도령은 경허 스님을 보고 말했다.

“이 사람과 긴밀히 할 얘기가 좀 있구먼요. 잠깐이면 되니까 스님은 먼저 내려가세요. 이 사람도 곧 뒤따라 갈 테니까요”

 

경허 스님은 영주 스님이 김도령 일행과 잘 아는 사이로 알고“그래, 할 말이 있다면 하고, 곧 내려 오거라”하며 별로 의심하지 않고 천천히 산길을 내려왔다.

경허 스님이 한참을 내려와 뒤를 돌아보아도 영주 스님의 기척이 없었다. 의아스러워진 경허 스님은 영주 스님과 헤어진 곳까지 다시 산을 올랐다.

하지만 이미 영주 스님과 김도령,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젊은 사람들은 바로 산적이었다. 산적들은 경허 스님이 하산하자 영주 스님의 걸망을 가로챘다.

“있는 돈 모두 내놓아!”

“가진 거라고는 그 것밖에 없는데유”

“잔말 말고 돈을 내놓지 않으면 네 목숨이 부지하지 못할 줄 알아라.”

 

돈이 없는 영주 스님은 강도 일당에게 두 손 모아 빌 수밖에 없었다.

“양화 김도령! 필요한 돈은 다음번에 만들어 드릴테니 어서 큰 스님을 따라 가게 해주우”

 

애원하는 목소리에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그들은 빼앗은 걸망을 풀어 헤쳤다. 그러나 그 속에는 노잣돈 몇 푼이 있을 뿐 헌 옷가지와 책 몇 권 밖에는 없었다. 강도 일당들은 푼돈을 거두고 나서 닥치는 대로 옷가지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시봉의 몸까지 샅샅이 수색하였지만, 돈이 나올리는 만무했다.산적 무리는 돈이 없자 영주 스님을 폭행했다. 사정없이 스님을 발길로 차 쓰러뜨리고는 저만치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가 잔혹한 살인까지 자행했다. 그들은 영주 스님을 후미진 숲 속 나뭇가지에 매달고는 자취를 감췄다.

한참 만에 다시 올라온 경허 스님은 그 현장을 미처 찾아내지 못하고 “허참, 괴이하구나! 다른 길로 간 모양이군!”하고 중얼거리며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사까지 혼자 넘어 온 경허 스님은 이상한 생각에 갑사(甲寺)에 사람을 시켜 영주 스님이 갑사로 가지 않았는지 물었다. 갑사에서 연락을 받고 영주 스님을 찾았지만 스님의 종적은 묘연했다.그러던 와중 어느 날 한 나무꾼이 깊은 산골에서 나무에 매달린 사람의 시체를 발견했다.

 

바로 영주 스님의 시체였다. 경찰의 현장조사 결과 바랑이 옆에 있고 발갱기(버선이나 양말 대신 발에 감는 좁고 긴 무명천. 주로 먼 길을 걷거나 막일을 할 때 쓴다)로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경허 스님의 시봉이기에 발갱기와 바랑도 경허 스님의 소지품이었다. 경찰은 더 이상의 단서가 없자 경허 스님을 의심했다.

“필시 스님이 살인을 했나 보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경허 스님은 해인사 학명 스님을 만나러 경상도 지역으로 향했다.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시봉에 대한 소문이 해인사까지 전해졌다.

 

그러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줄도 몰랐던 경허 스님은 살인 누명에도 단 한마디의 변명도 없었다. 당시 경찰 수사는 발달되지 못한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진범을 찾을 수 없는 까닭에 경찰과 주변 사람들은 경허 스님을 의심했다. 경허 스님에 대한 수근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경허 스님은 해인사 퇴설당 선방에 내려가 있었다. 서산 개심사 선방의 입승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노스님께서 정말로 영주를 죽인 걸까? 어쩌다 잘못해서 죽였나? 큰스님이 왜 시봉하던 스님을 죽인단 말이냐?’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그 승려는 그 길로 해인사를 찾아 경허 스님을 만났다.

하지만 경허 스님을 보는 순간 ‘생로병사 자체가 마음에 없는 저 어른이 어찌 영주를 죽였겠는가?’는 생각에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다시 돌아와 만공(滿空) 스님을 만나 인사드리자, 만공 스님이 물었다.

“그래, 스승님께서는 잘 계시느냐?”

“소문에 큰 스님께 직접 묻고 싶었는데 부처님께 ‘아난존자를 죽였습니까? 수보리를 죽였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아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왔습니다.”

 

만공 스님이 스승님께 문안인사도 드릴 겸 해인사로 내려갔다. 퇴설당 선방에서 경허 스님을 만나 만공 스님이 살짝 여쭈었다.

“영주 사미의 생사는 어떻게 된 겁니까?”

 

경허 스님이 제자 만공 스님의 손을 꼭 잡으시며 말했다.

“너하고 나하고만 알자. 영주는 내가 죽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만공 스님의 경지에도 경허 스님의 말은 뜻밖이었다.

상당한 시일이 지나 공주경찰서에서 산적 무리를 검거하면서 경허 스님의 결백은 밝혀진다. 경허 스님이 열반의 길을 찾아 함경도 갑산으로 떠나고 만공 스님이 수덕사를 지킬 무렵 산적에 의해 살해됐음이 밝혀진 것이다.

 

경찰 입장에서는 경허 스님의 소지품이 살인도구로 사용됐어도 정황상 경허 스님이 시봉을 해칠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범행 조사 중 산적들이 갑사 영주라는 사람을 죽였다는 자백을 했다. 그 이유는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산적무리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었다. 산적들은 자신들의 출신과 정체를 아는 영주 스님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만공 스님은 경허 스님을 조금이나마 의심했던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며 사흘 밤낮을 울었다.

경허 스님이 사건에 대해 일체 말이 없었던 까닭은 ‘살인을 한 사람을 위해 대신 형무소에 갈 수도 있다’고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중생이 못나서 지은 죄를 대신 받으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