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음악은 Michael Hoppe의 Beloved 입니다.
이러한 불교의 평등관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첫째는 인간과 부처님과의 평등이며,
둘째는 인간과 다른 생명 및 자연과의 평등,
셋째는 인간과 인간과의 평등이다.
첫째, 인간과 부처님과의 평등이란, 중생과 부처가 본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친 사람이다. 존재의 실상, 항상한 진리에 눈뜬 사람을 ‘붓다’(Buddha), 즉 부처님이라고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 역시 정진 끝에 존재의 실다운 모습에 눈떴기 때문에 부처님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 진리에 눈뜨면 역시 깨달은 자[覺者]인 부처님이다.
이씨 성을 가졌으면 이 아무개 부처님이고,
김씨 성을 가졌으면 김 아무개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깨친 사람이고 중생은 장차 깨쳐 부처님이 될 사람이기 때문에 깨쳤는가, 깨칠 것인가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질적으로는 차별이 없다. 이는 불교의 큰 특성이다.
불교의 이런 성격은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서양의 종교에서는 인간과 신이 평등할 수 없다. 신과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한다. 기독교의 경우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 중에 신성(神性)을 갖춘 존재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라는 신성을 나타내는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다.
이것은 4세기 중엽에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못박은 기독교의 기본 입장이다. 따라서 예수님 이외의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것은 이단일 수밖에 없다. 통일교(統一敎)가 기독교로부터 이단시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가 신과 인간의 건널 수 없는 강을 전제하고 있다면, 불교는 사람과 부처의 평등 위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인간과 다른 생명 및 자연과의 평등이다. 인간과 자연은 ‘더불어’ 있는 존재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이러한 불교의 자연관은 우리의 산수화(山水畵)에 잘 나타나 있다. 산수화는 불교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산수화를 보면 산, 물, 하늘, 구름 등의 대자연이 그대로 화폭에 담겨져 있다.
혹 사람이 있다면 자연과 더불어 있는 인간,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이 한 점쯤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불교에서의 자연이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뗄 수 없는 하나이다.
이러한 하나인 자연관은 오늘날 절실히 필요로 한다. 현대 문명은 지금 환경 파괴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 함부로 파헤쳐 온 결과이다. 이러한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에게는 지금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세계관, 자연과 인간이 평등하다는 불교적 자연관이 절실히 요청된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인간과 다른 생명도 평등하다고 본다. 즉, 인간을 수많은 생명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다. 불교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一切衆生)을 살리고 제도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생명을 제도한다는 이상은 불교만이 지니고 있는 한 특성이다.
마지막으로 인간과 인간의 평등이다. 인종과 계급과 빈부를 떠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그것은 모두가 부처의 성품을 갖춘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단일 민족이기 때문에 인종의 차별과 같은 문제는 없지만, 미국과 같은 나라는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 문제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인종차별의 문제가 심각했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는 사회적으로 사성계급(四姓階級)이 엄격했다. 이 사성계급은 아리안족들이 인도에 정착해 가면서 통치 수단으로 형성한 것인데, 종교 의식을 주관하는 사제계급(司祭階級)인 브라만,
정치와 국방을 담당하는 왕족인 크샤트리아, 농 · 상공업에 종사하는 평민인 바이샤, 노예인 수드라 계급으로 구분된다.
이들 계급은 혈통을 중시하여 결혼도 같은 계급끼리만 한다. 노예들은 어떤 경우에도 바라문교를 신앙할 수 없으며 사람 대접도 받지 못했다. 간디 시대에 이르러서야 법적으로나마 평등을 보장받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악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느 미국인이 인도의 시골을 여행하고 나서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대낮인데도 옛날 우리 나라 야경꾼이 가지고 다니며, 신호하던 딱딱이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웬일인가 싶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불가촉(不可觸) 천민이 골목을 지나가면서 자신과 접촉하면 부정을 타니 나오지 말라는 신호라고 한다.
계급의식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요즘도 그 정도인데 부처님 당시의 상황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런 상황 속에서 부처님은 4성이 모두 평등하다고 하였으니, 부처님이야말로 인도 역사상 최초의 평등사상을 주장한 선각자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평등사상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사람의 귀천이란, 인종이나 가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행위에 달려 있을 뿐이다. 출신에 의해 천민이 되는 것이 아니며 출신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네 가지 종족이나 계급은 그 사람의 혈통이나 신분에 따라서 차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누구든지 번뇌가 없어지고 청정한 계행이 성취되어 생사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지혜를 얻고 해탈을 얻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사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사상은 불교적 인간 이해에 입각해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불교의 전통은 인도에서 오늘날 잘 전승되고 있다.
그 한 예로 인도에는 암베드카(Ambedkar) 박사가 이끄는 새 불교도[Neo-Buddhist]란 단체가 있다. 암베드카 박사는 인도의 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한 분이다. 그는 수드라 계급의 천민 출신이다.
그는 평생 사성평등을 위한 인권운동에 헌신했는데, 부처님이야말로 인도 역사상 최초의 평등주의자인 것을 알고 그 숭고한 정신에 감복해서 불교에 귀의하였다. 암베드카 박사가 불교에 귀의하게 되자, 하루아침에 천민출신 몇 십만 명이 함께 귀의하였으며, 지금 인도의 새 불교도는 대략 1천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몇 해 전에 인도에 갔을 때 이 새 불교도들의 센터를 찾은 일이 있다. 빈민촌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들이 외국에서 온 한 불교인의 방문에 몹시도 반가워하면서 뭔가 대접하려고 애쓰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근래 이 새 불교도들은 부처님과 암베드카 박사의 뜻을 이어 인권 운동과 남녀 평등 운동의 기수로 활약하고 있다.
불교는 인간과 부처, 인간과 자연, 인간과 모든 생명, 인간과 인간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 평등의 종교이다. 그것은 하나인 사상을 기초로 모든 존재와 생명이 통해 있다는 연기적 세계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열린 종교이다. 열린 종교란 진리에 대한 독선이 없는 개방적인 종교를 말한다.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은 존재의 참모습을 알리는 종교이다. 이런 열린 태도는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 드러난다.
"연기의 진리는 내가 지은 것도,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진리는 항상한 것이다. 여래는 다만 이 진리를 깨쳐서 중생들에게 설할 뿐이다."
여기에는 누구든지 항상한 진리를 깨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전제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이며, 불교에서는 진리에 대한 독선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열린 불교의 이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한 뗏목의 비유가 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괴로움이 있는 차안[此岸]이다. 이 차안에서 괴로움의 강을 건너 저 평안의 언덕인 피안(彼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뗏목이 필요하다. 그 뗏목, 혹은 배가 다름 아닌 종교이다.
그런데 사람의 취향에 따라 소승(小乘)의 작은 배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대승(大乘)의 큰 배를 타고 갈 수도 있다. 혼자 타는 배이거나 함께 타는 동력선일 수도 있다. 또한 이 배는 불교호일 수도 있고, 기독교호, 힌두교호, 이슬람교호일 수도 있다. 어떤 배를 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특정한 배만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이며, 여기에서 종교적인 편협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서울에서 부산가는 길이 오직 버스길만 있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철도로 가는 길도 있고 비행기 길도 있고 또 걸어서 가는 길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길을 택하느냐는 각자의 취향과 여건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가 있다.
이 비유는 종교의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괴로움이 존재하는 이 언덕에서 괴로움이 사라진 저 언덕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에 뗏목은 그 수단으로써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의 가르침 자체도 마침내는 버려야 할 것이라는 교훈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기까지 자기가 타고 있는 배는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목적지인 저 언덕에 다다랐으면 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배에서 내려야 비로소 저 언덕의 즐거움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배가 소중하다고 해서 배 안에만 머물고 있다면 저 언덕에 도달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유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교법을 배워 그 뜻을 안 후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집착할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이처럼 부처님은 불교라는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않는 열린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종교의 성전(聖典)이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종교 자체가 뗏목이고 배라면 팔만대장경과 성경은 한 장의 항해도이거나 나침반 정도에 비유될 수 있다. 성전(聖典)은 진리를 설명하고 표현한 것일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성전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것은 설하는 시간이나 장소, 또는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내용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2,600년 전 인도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팔만대장경의 모습으로 설해졌고, 또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이라는 시간과 장소에서 성경의 표현이 그렇게 된 것이다. 만약 시간이나 장소가 다르다면 그 설명이나 표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된 그대로가 진리 그 자체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문제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유한하고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무한한 진리가 어찌 표현된 언어나 문자 속에만 있겠는가?
성전의 역할을 알 수 있는 것으로서 달과 손가락의 유명한 비유가 있다.
밤하늘에 달이 떠 있다. 그런데 달을 보는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달을 본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달이 저기 있소’ 하고 달을 가리킨다. 달은 곧 진리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달을 본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보려는 사람의 시선이 손가락에만 머물러 있다면 정작 달은 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손가락과 달을 분간 못하거나 손가락에만 집착한다면 아주 안타까운 일이다.
부처님은 손가락의 유용성을 결코 과소 평가하거나 가볍게 보지는 않았으나 그것에 대한 착각과 오해를 크게 경계하였다. 달을 가리키는 수단으로서 꼭 손가락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막대로 가리킬 수도 있고, 눈짓이나 몸짓으로 가리킬 수도 있다. 이처럼 가르침은 시간과 공간,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유한하고 상대적인 것이다. 그것을 절대화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더구나 달과 손가락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한다면 더 큰 문제에 빠지게 된다. 부처님은 『상응부』 경전에서 아름다운 비유를 통해 가르침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이 코삼비 교외 숲 속을 제자들과 거닐 때의 일이다. 마침 낙엽이 뒹굴고 있는 것을 본 부처님은
그 낙엽을 한 움큼 손에 쥐며 제자들에게 물었다.
“내 손에 있는 나뭇잎과 저 숲 속에 있는 나뭇잎 중 어느 것이 더 많으냐?”
“그야 숲 속의 나뭇잎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다시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설한 가르침은
손바닥의 나뭇잎 정도로 적고,
내가 설하지 않은 부분은
저 숲 속에 있는 나뭇잎처럼 많으니라.”
여기에서 무한한 진리 그 자체와 표현된 것의 유한성을 잘 알 수 있다. 불교는 세계의 어떤 종교보다도 많은 양의 성전을 보유하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45년을 한시도 쉬지 않고 만나는 사람 모두를 위해 간곡하게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대한 경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된 가르침은 손바닥 위에 있는 나뭇잎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달과 손가락의 비유와 더불어 종교에 있어서 성전의 위치를 가리키는 좋은 비유이다.
표현된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무한한 진리를 상대화하고 표현된 것만 진리라고 하면, 표현되지 않거나 혹은 그것과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무지와 독단이 바로 자신의 종교만 ‘유일한 길’ 이라는 종교적 독선을 불러일으킨다.
불교는 ‘손가락’과 ‘뗏목’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길은 ‘여럿″이다. 불교의 관용과 개방성은 오늘날처럼 종교가 다원화된 세계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정신이다. 열린 종교로서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욱 값지다고 하겠다.
칼 야스퍼스는
필자는 이런 종교적 관용을 “본질적인 관용”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관용은 일시적이거나 형편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불교의 본질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교의 전통은 유명한 아쇼카 대왕에게도 전승되어 모든 종교와 신앙을 존중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돌에 새겨진 그의 칙령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은 존중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함으로써
스스로 자기의 신앙을 높일 수 있으며
동시에 다른 이의 신앙에도 봉사할 수 있다.
만약 그와 같이 실천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해칠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신앙도 해친다.
만약 신앙의 이름으로 또 자기 신앙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신앙을 높이고 다른 이의 신앙을 비하한다면
그는 반대로 그 자신의 신앙을 먼저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신앙을 존중하는 것이 나의 신앙을 존중하는 것이며, 반대로 타인의 신앙을 해치는 것이 먼저 자기의 신앙을 해친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불교의 열린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종교간의 상호이해나 바람직한 만남을 위해서도 꼭 음미해 볼 소중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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