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스크랩] 금강경(金剛經) 7

수선님 2019. 1. 20. 12:18
 

 

 

금강경(金剛經)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第 七)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득(如來得) 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阿縟多羅三邈三菩提耶)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여래유(如來有) 소설법야(如來有所說法耶)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언(須菩提言)수보리가 대답하되, 여아해불소설의(如我解佛所說義) 무유정법(無有定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名阿縟多羅三邈三菩提) 역무유정법(亦無有定法) 여래가설(如來可說) 제가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 그 뜻을 알기로는 일정한 정해진 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할 것이 없으며, 또한 일정한 법이 여래께서 가히 설법했다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 개불가취(皆不可取) 불가설(不可說) 비법(非法) 비비법(非非法) 여래께서 설법하신 바는 모두가 잡을(取) 수 없고, 말할(說)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비법(非法)도 아닙니다.

 

 

소이자하(所以者何)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현성개이무위법(一切賢聖皆以無爲法) 이유차별(而有差別) 일체 성현(聖賢)이 모두 무위법(無爲法 생멸변화가 없는 참된 법)으로서 차별(差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게 금강설(金剛說)인데,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것은 불변(不變)이다. 금강(金剛)의 특징(特徵)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 중생(衆生)의 본래(本來) 고향(故鄕)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떠돌이 생활(生活)을 하도 많이 해서 고향(故鄕)을 잊어버린지가 아주 오래 되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오랫동안 객지(客地) 타향(他鄕)생활을 하던 나그네가 고향(故鄕) 이야기를 들을 때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짐작이 전혀 않된다.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說明)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일곱 번째는 의심(疑心)을 하나 끊어주는 것인데, 어떤 의심(疑心)인가?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 5(第 五)에서 ‘불가이신상 득견여래(不可以身相 得見如來)’,‘부처님은 상(몸매)으로서 볼 수가 없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이라고 하였다. ‘상(相)으로서 볼 수가 없고,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본다면 그것은 여래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설법(說法)을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실제(實際)로 성불(成佛)도 하시고 설법(說法)하셨으니까.’ 그것은 ‘상(相)이 아닌 것으로 여래(如來)를 본다.’라고 한 것과는 틀리지 않습니까.]이런 의문(疑問)을 수보리(須菩提)가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모든 상(相)은 허망한 것이다.’ 제상비상 즉견여래(諸相非相 卽見如來)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볼 때, 바로 여래(如來)를 본다.’라고 했는데, ‘실제(實際)로 부처님은 성불(成佛)도 하시고 설법(說法)하셨으니까.’

 

‘그것은 상(相)을 다 여윈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의심(疑心)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성불(成佛)했다’고 하는 그 의심(疑心), ‘설법(說法)했다’라고 하는 그 ‘의심(疑心)을 끊어주는 법문(法問)이다.’ 이런 말씀이다.

 

이런 연유로 그 제목(題目)을 붙여서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고 말한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득(如來得) 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阿縟多羅三邈三菩提耶)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여래유(如來有) 소설법야(所說法耶)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었다. 이 부처님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를 얻었다.’ 이 말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고,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것은 ‘수하성도(樹下成道)’ 보리수(菩提樹) 나무 아래에서 도(道)를 깨우쳤기 때문에 부처님이다.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하면 ‘12월 8일 날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서 성도(成道)하셨다.’ 이것을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수하성도(樹下成道)’를 못했으면 부처님이 아니다. 그리고 또 부처님일 수 있는 것은 녹야원(鹿野園)에서 설법(說法)을 하셨기 때문에 부처님이다.

 

이것을 녹원전법(鹿苑轉法)이라고 하고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처음’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부처님과 같이 설법(說法)하신 분이 없다. 이게 무슨 말인가? 누구도 열반(涅槃)을 말씀하신 분이 없다. 생사(生死)에서 벗어나는 길을 이야기하신 분은 없다.

 

그래서 ‘처음’으로 생사(生死)없는 열반(涅槃)의 세계를 말씀하셨다. 그래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운전(運轉)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서 성도(成道)하시고’, ‘녹야원(鹿野園)에서 설법(說法)하셨다.’

 

이것이 부처님의 아주 근본가풍(根本家風)인데, 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법문(法問)에서는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를 얻은 것이 없고’, ‘보리(菩提)는 깨달음인데 깨달음을 얻은 것이 없고’, ‘부처님이 설법(說法)하신 것이 없다.’ 이래서 금강경(金剛經)이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성도(成道)하시고’, ‘설법(說法)하신’ 것이 근본가풍(根本家風)인데, 어찌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없다.’고 하였는가? 그 이유(理由)는 이 금강경(金剛經)은 근본반야(根本般若)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반야(般若)는 중생(衆生)의 고향(故鄕)이다. 그래서 이 반야(般若)를 말씀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보리(菩提)를 얻은 바가 없고, 부처님이 설법(說法)하신 것이 없다고 한다. 이 문제(問題)가 아주 중요하다.

 

이 문제(問題)가 풀리지 않으면 인생문제(人生問題)는 않풀린다. 이 문제(問題)가 무엇인가? 하면 첫째로 ‘무상(無相)을 알아야 한다.’ 상(相)이 상(相)이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상비상(諸相非相)인 것을 알아야 한다.

 

왜 이 문제(問題)가 걸리는가? 하면 색(色)이 공(空)함을 모르기 때문에 걸리는 것이다. ‘색증시공(色卽是空)’이라고 했는데, 색공(色空)은 무상(無相)한 것이다. 상(相)이 상(相)이 없는 것인데, 금강경(金剛經)은 무상(無相)이다.

 

또 그 다음에 무주(無住)다. 머뭄이 없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머뭄이 없다. 또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아닌 것에도 머뭄이 없다. 현장역(玄奘譯) 같은 곳에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도 머물지 않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아닌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어디에도 머뭄이 없는 것이 무주(無住)이다. 일체 상(相)이 상(相)이 아닌 것을 말씀하는 그것이 무상(無相)이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은 무상(無相)이요, 무주(無住)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그러니 아무리 말을 해도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생각(思)으로 ‘무상(無相)을 한 번도 본적이 없고’, ‘무주(無住)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어서’ 그렇다. 전부 우리가 ‘상(相)만 보았지’, ‘무상(無相)을 못보고’, 늘 ‘어딘가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집착(執着)을 했다’는 말이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모든 현상(現象)에 집착(執着)하지 않으면 떠난 그 무엇에도 집착(執着)을 하고 있었지, 머뭄이 없었던 경험은 한 순간도 해본 일이 없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당황(唐惶)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을 해봅시다. 부처님이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를 얻으셨는데,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가 무엇일까?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몸(身)을 생각할 수가 있다. ‘다 죽어가던 몸을 살렸나?’ 흔히 보면 ‘몸을 살렸다.’ ‘생명을 건져준 은인(恩人)이다.’ 라고 한다. 그러면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몸’이다. 그리고 ‘사람’이다. ‘사람(人)을 얻었나?’ 아니면 물질(物質)을 얻었나? 아니면 허공(虛空)을 얻었나?

 

 

이 세상(世上)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몸(身), 사람(人), 물질(物質) 이것뿐이다. 그런데 이 몸은 나에게 있다. 그런데 왜 이 몸으로 만족(滿足)하지 못하는가? 하면 이 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다. 그래서 자기(自己)도 모르게 항상 불안(不安)한 것이다.

 

이 몸을 얻었다. 어디서 얻었을까?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얻었다. 그런데 불교(佛敎)에서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법률(法律)에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얼마 전에 인터넷 신문을 보니까.

 

나라를 위해 근무(勤務)하다가 목숨(命)을 잃은 병사(兵士)를 위해서 국가(國家)에서 보상(補償)을 하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서로 따로 따로 살았는데, 어머니가 어머니(母) 자격(資格)으로 보상금(補償金)의 반(半)을 수령(受領)해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두 살 때 집을 나가서 출산(出産)만 했지, 양육(養育)은 않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의(異議)를 제기(提起)했다. ‘양육(養育)도 않하고 어릴 때 나간 사람이 어떻게 보상금(補償金)을 받는가?’ 라고

 

우리 나라 법(法)에 부모(父母)의 이혼여부(離婚與否)에 관계없이 그 자식(子息)에 대한 보상금(補償金)의 반(半)은 어머니가 가질 권리(權利)가 있다고 법(法)에 명시(明示)하였다. 그래서 불교(佛敎)에서 이 몸의 반(半)은 어머니에게서 왔고, 반(半)은 아버지에게서 왔다고 하는데 법(法)에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키웠던, 않키웠던 현재(現在) 법률(法律)로서는 어머니 가운데 생모(生母)는 무조건(無條件) 자식(子息)의 보상금(補償金) 반(半)을 수령(受領)할 수 있다. 어머니 자격(資格)으로 받는데, 정당(正當)하다는 것이다.

 

이 몸은 반(半)은 어머니에게서 얻었고, 반(半)은 아버지에게서 얻었다. 그런데 문제(問題)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불안(不安)한 것이다. 또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얻어서 내 사람으로 만든다고 해도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불안(不安)하고, 물질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고 해도 언제 날아갈지 모르니까. 불안(不安)한 것이다.

 

그런데 허공(虛空)은 누가 주고, 않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허공(虛空)은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도 없고, 허공(虛空)은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면 부처님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몸(身), 사람(人), 물질(物質)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을 얻었다고 도(道)를 이루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게 아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얻어서 깨달았는가? 물질(物質)을 얻어서 깨달았는가? 어떤 사람(人)을 얻어서 깨달았는가? 이것은 아니다. 이것이 아니면 얻었어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다.

 

사람(人)을 얻은 것도 아니고, 물질(物質)을 얻은 것도 아니고, 자기 몸을 얻은 것도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런데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면 잃었어도 잃은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얻었어도 얻은 것이 없는 이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바뀐 것이지, 어디서 무엇을 얻어 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소득(無所得) ‘얻은 바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잃은 바는 있는가? 잃은 것도 없다. 그러면 정말로 얻은 것이 없는가? 얻은 바 없이 얻은 것이다. 그게 깨달음이다. 그러면 미혹(迷惑)한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 없이 잃은 것이다. 그것이 미혹(迷惑)한 것이다.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다 잃은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 집에서 꿈을 꾸었다고 했을 때, 그 꿈을 꾸는 순간에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지금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잠들어 있는 본인은 그냥 자기 집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꿈을 꾸는 사람은 잃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사실상 몽땅 다 잃은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얻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사실 전부 다 얻은 것이다. 이런 것을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라고 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이 설법을 했다.’라고 하는데, 그러면 말(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주장(主張)이 있는데, 부처님이 무엇을 주장(主張)했는가? 무엇이 있다고 주장(主張)했나? 없다고 주장(主張)했나?

 

인간은 행복(幸福)하다고 주장(主張)했나? 불행(不幸)하다고 주장(主張)했나? 주장(主張)이 없다면 말이 아니다. 그러면 말은 하되, 어떤 핵심논리(核心論理)가 없으면, ‘저 사람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말을 하고자 하는 의도(意圖)가 없으면 말이 아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설법(說法)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인도(引導)하는 말씀이지, ‘이것이다.’라고 주장(主張)을 한다든지, ‘저것이다.’라고 주장(主張)을 하는 내용(內容)은 아니다.

 

그래서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 개불가취(皆不可取) 불가설(不可說) 비법(非法) 비비법(非非法) 여래께서 설법(說法)하신 바는 모두가 ‘잡(取)을 수 없고’, ‘말할(說)수도 없으며’, ‘법(法)도 아니고’, ‘비법(非法)도 아닙니다.’

 

법(法)이라고 주장(主張)을 한 것도 아니고, 비법(非法)이라고 주장(主張)을 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말한 바가 없다.’ ‘얻은 바가 없다.’고 말씀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왜 모르는가? 그것은 상(相)이 무상(無相)인줄을 몰라서 모르고, 제상비상(諸相非相)인 것을 몰라서 모른다.

 

그리고 무주(無住) 머뭄이 없는 것이 우리 고향심(故鄕心)인데, 우리는 항상 머물러만 있다. 몸(身)에 머물러 있든지, 사람(人)에 머물러 있든지, 물질(物質)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것을 보통 ‘육진경계(六塵境界)에 머문다.’고 한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곳에만 돌아 다닌다. 거기에 머물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무소주심(無所住心)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이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머물지 않으면 바로 우리 고향(故鄕)에 머물게 된다.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하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응생무소주심(應生無所住心)이니라. 약심유주(若心有住)면 즉위비주(卽爲非住) 만약 마음에 머뭄이 있으면 그것은 곧 머무는 것이 아니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보이고 들리는 것에 머물면 우리 본래 고향(故鄕) 마음에는 머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 집이 있는데, 거기에 머물지 않고 온갖 다른 곳으로 해매이고 다니면 자기 집에는 머물지 못한다.

 

우리 마음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곳에만 머물러 있으니까. 그 본래 마음에는 머물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유정법(無有定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名阿縟多羅三邈三菩提) 역무유정법(亦無有定法) 여래가설(如來可說)는 ‘얻었느냐?’에서 ‘제가 부처님의 뜻을 알기로는 일정한 정해진 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할 것이 없습니다.’

 

정해진 법,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유법(有法) ‘있는 법이냐?’ 이것은 정해진 법이다. 무법(無法) ‘없는 법이냐?’ 이것도 정해진 법이다. 그러면 ‘사는 법이냐?’ 이것도 역시 정해진 법이다. ‘죽는 법이냐?’ 역시 정해진 법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을 전부 떠나서 따로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이것이 ‘정해진 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라고 이름할 것이 없다.’ 또 ‘일정한 법이 여래께서 설법했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 개불가취(皆不可取) 불가설(不可說) 비법(非法) 비비법(非非法) 여래께서 설법하신 법은 모두 취(取)할 수가 없다. 가질 수가 없다. 또 설명할(說)수가 없다. 법(法)인가? 법(法)도 아니다.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비법(非法) ‘없는 것’인가?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현성(一切賢聖), 금강경(金剛經)에서 볼 때, 일체현성(一切賢聖)이라고 하는 것은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多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이런 분들을 다 현성(賢聖)이라고 하고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한다.

 

또, 성(聖)은 부처님, 현(賢)은 이런 분들인데, 이런 분들이 다 무위법(無爲法),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서 나온 말인데, 불교용어(佛敎用語)가 아니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은 무위자연(無爲自然), 인간(人間)의 조작(造作)을 하지 않는 것을 무위(無爲)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불교에서 번역(飜譯)을 하면서 열반(涅槃)을 무위(無爲)라는 말로 쓰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 생멸(生滅), 생사(生死)를 유위(有爲)라는 말로 쓰기 시작하였다.

 

유위(有爲)는 생사(生死)이고, 무위(無爲)는 열반(涅槃)이다. 이렇게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일체의 아라한이나 부처님이 다 무위법(無爲法)으로서 차별(差別)이 있다. 열반법(涅槃法)으로서 열반법(涅槃法)에 깊이 들어가면 부처님이고, 열반법(涅槃法)에 조금 들어가면 수다원(須陀洹)이 된다.

 

수다원(須陀洹)보다 더 깊으면 사다함(斯多含)이 되고, 사다함(斯多含)보다 더 깊으면 아나함(阿那含)이 되고, 아나함(阿那含)보다 더 깊으면 아라한(阿羅漢)이 된다. 이것을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장역(玄奘譯)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名阿縟多羅三邈三菩提)’ 이 말을 ‘무유소법(無有少法)’ 이렇게 ‘소법(少法)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라고 할 것이 없다.’

 

‘소법(少法) 적은 법(法)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라고 할 것이 없다.’ 그러니까. ‘깨달았다’고 하니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밖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건강을 얻든지, 내가 건강해지면 그것은 밖에서 얻은 것이다. 다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든지, 무슨 재물을 얻든지, 이런 것뿐이다. 사람이 아니면 물질, 물질 아니면 사람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부가 사람을 얻어도 언제 떠날지 모르고, 물질(物質)을 얻어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고, 몸도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이것을 생사법(生死法)이라고 한다. 얻으면 없어지고, 얻으면 없어지고, 만나면 헤어지고, 만나면 헤어지고, 태어나면 죽고, 태어나면 죽는 이것이 생사법(生死法)인데, 중생(衆生)은 끊임없이 이런 짓만 하려고 한다.

 

이것 이외에는 할 줄도 모르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부처님은 거기서 열반법(涅槃法)을 이루신 것이다.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생사(生死)가 없는 법(法)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생사법(生死法)만 알았는데 부처님은 생사(生死)가 없는 법(法), 열반법(涅槃法)을 얻으셨다.

 

이것을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한다. 그러면 생사법(生死法) 이라고 하는 것은 유위법(有爲法)인데, 유위법(有爲法)을 금강경(金剛經) 끝자락에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고 하였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과 같다고 하였다. 유위법(有爲法)은 꿈과 같고, 꼭둑각시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응당 이와 같이 보아야(觀) 한다.

 

유위법(有爲法)은 나고, 죽는 생사법(生死法) 나고, 죽는 법(法)이다. 꿈과 같고, 꼭둑각시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은 것인데, 중생(衆生)은 항상 이것만 구(求)한다.

 

그래서 이것을 구하다가 또 고통(苦痛)받고, 구하다가 또 고통(苦痛)받고, 그래서 내가 구해서 얻는 자체가 고통(苦痛)인줄을 꿈에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은 생사(生死)가 없는 법(法), 열반법(涅槃法)을 깨달으신 것이다.

 

그러면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어리석음이 바뀌어서 지혜(知慧)가 되었다.’ 어리석음이 변해서 지혜(知慧)가 된 것이지, 어디서 무엇을 얻어 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자기 어리석음을 바꾸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무엇을 자꾸 얻어 오려고 하는 것이 우리 중생(衆生)이다. ‘얻어온 것은 반드시 없어진다.’ 그런데 어리석음이 지혜(知慧)가 되면 없어지지 않는다.

 

지혜(知慧)는 누가 가져갈 수가 없다. 그런데 밖에서 가져온 것은 다 가져갈 수가 있다. 지혜(知慧)는 못 가져간다. 그래서 지혜(知慧)를 닦는 것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최상(最上)의 보물(寶物)을 내가 얻는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리 좋은 것도 그것은 다 없어지고, 누가 가져가 버리니까. 그래서 소용(所用)이 없다. 이 몸(身)이 국가(國家)에 충성(忠誠)한다고 열심히 해서 충성(忠誠)하다가 이 몸이 죽으면 반(半)은 어머니가 가져가고 반(半)은 아버지가 가져간다. 본래(本來) 주인(主人)이니까.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법을 잘 만들어진 것이다. 어떻게 부처님의 법과 잘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몸을 어떤 단체(團體)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이 몸이 그 단체(團體)를 위해서 죽으면 이 몸의 주인(主人)이 부모니까. 반드시 아버지, 어머니가 가져가는 것이다.

 

이렇게 몸(身)도 가져가는데, 물질(物質)은 물질(物質)대로 누가 가져가고, 사람(人)은 사람(人)대로 떠나버린다. 다 없어진다. 그런데 지혜(知慧)는 못 가져간다. 그래서 가져갈 수 없는 것을 무위법(無爲法), 생멸(生滅)하는 변화(變化)가 없는 법(法)이라는 말이다.

 

생멸(生滅)하는 변화(變化)가 있는 법(法)은 유위법(有爲法)이다. 그런데 무위법(無爲法)을 여러 가지로 설명(說明)을 하는데, 간단(間斷)하게 서너 가지만 설명(說明)을 하면, 다음과 같다.

 

생멸(生滅)의 변화(變化)가 없는 첫 번째를 허공(虛空)이라고 한다. 이것을 허공무위(虛空無爲)라고 한다. 허공(虛空)은 이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생멸(生滅)하는 작용이 없다. 그래서 이것을 ‘허공(虛空)은 무위(無爲)다.’ 라고 한다.

 

허공(虛空)은 누가 죽일래야 죽일 수도 없다. 아무리 폭탄을 터트려도 허공(虛空)은 파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아무리 무엇을 잘 만들어 내는 사람도 허공(虛空)은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허공(虛空)은 무조작상(無造作相) 조작상(造作相)이 없다. 이것이 허공무위(虛空無爲)다.

 

그 다음에는 열반무위(涅槃無爲)다. 열반(涅槃)을 한 번 증득(證得)하게 되면 이 열반(涅槃)은 생멸(生滅)이 없다. 그 다음에는 진여무위(眞如無爲)다. 이 진여(眞如)라는 것이 있는데 아무리 아무리 없어져도 그 가운데 없어지지 않는 본성(本性) 본질(本質) 그것이 있다.

 

 

 

생겨도 생기지 않는 본성(本性)이 있다. 그래서 이것을 비유(比喩)로 설명(說明)을 할 때, ‘진여(眞如)는 물(水)과 같고, 생멸(生滅)은 파도와 같다.’ 이렇게 설명(說明)을 한다. 물과 파도는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는 생사법(生死법)이다.

 

물과 파도는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져도 그 가운데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여(眞如)인데, 물과 같다. 파도가 아무리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져도 물은 그대로다. 그래서 이것을 진여(眞如)라고 한다.

 

그러면 진여(眞如)가 생멸(生滅)을 완전히 떠나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파도가 물을 떠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파도는 물을 떠나지 않는다. 다만 바람(風)과 함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물(水)은 바람(風)을 만나면 파도가 되는 것이지, 바람(風)을 만나서 파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물(水)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진여(眞如)라고 한다.

 

진(眞)라고 하는 것은 무망(無妄) ‘허망(虛妄)한 것이 없다.’ 라고 한다. 또 여(如)라고 하는 것은 불변(不變) ‘변화는 것이 없다.’ 고 한다. 그래서 이것을 진여(眞如)라고 한다. 그래서 이 진여(眞如)를 설명(說明)하기가 어렵다.

 

왜, 어려운가? 물과 파도가 완전히 하나인가? 하나는 아니다. 그러면 완전히 다른가? 다른 것은 아니다. 이것을 ‘비일비이(非一非異)’라고 한다. 이러니까. 불교(佛敎)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다르면 다르고 하나면 하나이지, 어떻게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하는가? 얻었으면 얻은 것이고, 못 얻으면 못 얻은 것이지, ‘얻은 바가 없다.’ 고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것이 본래(本來) 우리의 근본(根本)이다.

 

생각으로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머무는 생각이고, 머물 때는 ‘있다.’ ‘없다.’ 이것이 머무는 것이고, 무주심(無住心) 머뭄이 없는 마음이 되면 그것이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어느 분이 법문(法問)을 하는데, 옛날 사람이 한 이야기는 다 빼고, ‘오직 스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이렇게 누가 질문(質問)을 했다. 매일 이야기를 하면, 옛날 사람이 한 이야기만 하니까. 화(嗔)가 났던 것이다. 그래서 ‘옛날 이야기 다 빼고, 오직 스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라고 하니까.

 

물건을 하나 턱 내보이면서 ‘이게 옛날 사람 물건이냐?’ ‘지금 사람 물건이냐?’ 이렇게 물었다. 이게 옛날 사람 물건인가요? 지금 사람 물건인가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꼼짝 못했다. 그래서 옛날과 지금이 조금도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무거무래(無去無來) 역무주(亦無住)’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여래(如來)를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라고 하였다. 그래서 ‘진여(眞如)는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것도 아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고향심(故鄕心)이다. 우리 본래(本來) 우리 마음은 우리 자신(自身)의 불성(佛性), 부처님은 지혜(知慧)인데, 지혜(知慧)의 본성(本性) 그것이 불성(佛性)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법(法)이라고 하는데, 법(法)의 본성(本性)을 법성(法性)이라고 한다.

 

법성(法性)을 불성(佛性)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경전(經典)에 다 설명(說明)하는 법(法)은 불성(佛性)이라고 하지, 법성(法性)이라고는 않는다. 그래서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지, ‘법성(法性)이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佛)에는 지혜(知慧)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여래(如來)가 가지고 있는 열 가지 힘, 이것도 다 지혜(知慧)의 힘이고,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도 지혜(知慧)의 힘이고, 자비(慈悲)의 힘이고, 신통(神通)의 힘이다.

 

이런 여러 가지 지혜, 신통, 원력, 자비의 힘을 가진 분이 부처님인데, 그 ‘본성(本性)을 우리가 가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그 불성(佛性)이 있는데, 중생(衆生)은 중생(衆生)이다. 그러니까. 여래(如來)하고 중생(衆生)하고 같은가? 같지 않다.

 

그러면 다른가? 결코 다르지 않다. 불성(佛性)은 다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같으면 같고, 다르면 다르지, 왜, 말이 애매모호(曖昧模糊)한가?’ 라고 하는데, 이것이 어리석은 중생심(衆生心)이다.

 

왜냐하면, 중생(衆生)은 확실(確實)한 것을 좋아한다. ‘확실(確實)하다.’고 하는 그것이 어리석은 망상(妄相)이다. ‘확실(確實)하다.’이것은 ‘상(相)에 머문다.’는 말이다. 상(相)만 확실(確實)하게 보이지, 무상(無相)에는 확실(確實)한 것이 없다. 그렇다고 불확실(不確實)한가? 불확실(不確實)한 것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혜(知慧)를 닦아야 한다. 그래서 진여무위(眞如無爲)가 있는 것이다. ‘진여(眞如)는 무위법(無爲法)이다.’ 그러면 이게 얼마나 어려워서 더운 날씨에 집에서 쉬지도 않고, 아니면 시원한데 놀러도 가지 않고, 힘들게 왔는데, 법상(法床)에 올라와서 하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알 것도 같지만 생판 모르겠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게 바로 부처님 법(法)은 아무도 얻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얻으셨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다 밖에서 얻으려고 하는데, ‘부처님 법(法)이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고 찾아와서 눈뜨고 쳐다보는 것만 해도 보통이 아니다.

 

지금 법상(法床)에서 무슨 말을 하는가? 쳐다보는 것만 해도 이게 참 대단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게 나의 고향(故鄕)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제일 끝부분에 소이자하(所以者何)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현성(一切賢聖) 개이무위법(皆以無爲法) 이유차별(而有差別)

 

일체 성현(聖賢)이 모두 무위법(無爲法)으로서 차별(差別)이 있기 때문이다. 차별(差別)이라고 하는 것은 생멸법(生滅法)이 있는 현상(現象)이다.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實相), 이것은 생멸법(生滅法)이 없는 현상(現象)이다.

 

그러면 이 말은 ‘다 생멸(生滅)이 없는 실상법(實相法)이 생멸(生滅)로 나타나는 현상(現象)이 되었다.’ 고 하는 소리다. ‘생멸(生滅)이 없는 실상법(實相法)을 떠나서는 생멸(生滅)로 나타나는 현상(現象)이 없다.’ 는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인데, 일체중생(一切衆生) 모두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인 것이다. 일체중생(一切衆生) 모두가 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는 삶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오직 모를 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꿈꾸는 나그네가 꿈꾸는 그대로 자기 집, 자기(自己) 방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꿈을 꾸는 순간(瞬間)에 자기 집, 자기 방에 있는 자신(自身)을 모를 뿐이다.

 

그래서 잃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다 잃어 버렸다. 이것을 내가 깨달으면 얻었는가? 얻은 것이 하나도 없이 다 얻은 것이다. 얻은 것이 없이 다 얻은 이것이 깨달음이지, 무엇을 얻은 것이 있는 상태로 얻는 것은 몸을 얻든, 사람을 얻든, 물질을 얻든 이것뿐이다.

 

이것은 다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얻지만 다 나가 버린다. 그래서 허망(虛妄)하다. 허망(虛妄) 속에서 허망(虛妄)한 짓을 하면서 허망(虛妄)한 줄을 모르는 것이 중생(衆生)이다.

 

세상을 다 얻으려고 잠도 않자고, 밥도 못 먹고, 가족도 다 팽개치고, 아는 사람하고 만나지고 못하고, 그렇게 해보아도 물질을 얻든지, 사람을 얻든지 그것뿐인데, 물질도 사람도 다 나가 버린다. 헛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법(法)을 모르고 살면 억만(億萬) 겁(劫)을 살아도 다 허망(虛妄)하게 사는 것이고, 부처님 법(法)을 알고 살면 한 순간(瞬間)을 살아도 자기(自己)가 자기(自己)를 만나는 삶이 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 법(法)이다. 이렇게 된다. 그래서 중생(衆生)이 말(言)하는 것이나 행동(行動)하는 것이나 그게 그대로 진여법(眞如法)인데, 진여법(眞如法)인줄을 모를 뿐이다.

 

그래서 항상 진여법(眞如法)을 말하고 있으면서 자기(自己)가 지금(只今) 생멸업(生滅業)을 짓고 있다. 이 문제(問題)를 무엇이라고 했는가? 다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이것이 진여법(眞如法)인데, 거기에 집착(執着)이 끼어들어서 진여법(眞如法)인줄을 모를 뿐이다.

 

초심(初心) 학인문(學人文)이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똑같은 물인데, 뱀(蛇)이 마시면 독(毒)이 되고, 소(牛)가 마시면 우유(乳)가 된다.’고 하였다. 똑같은 음식(飮食)인데, 알고 먹는 사람은 그대로 형상(形相)없는 또 시간(時間)도 없는 이것을 겁외춘(劫外春) ‘겁(劫) 밖에 세월(歲月)’이라고 하였다.

 

불교(佛敎)에 겁외(劫外), ‘겁 밖에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세월(歲月) 밖에 있다.’는 소리다. 그러면 이것을 아는 사람이 찻잔을 하나 턱 보면, 이것이 무엇인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안목(眼目)을 갖춘 사람이 보면, 이게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면목(面目)이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 얼굴이다.’ 라고 한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요?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면목(面目)이다.’ 이게 ‘무상법(無相法), 형상(形相)없는 법(法)이다.’ 그리고 이것이 겁외춘(劫外春) ‘겁(劫) 밖에 봄소식이다.’이런 것이다.

 

그런데 형상(形相)에 딱 집착(執着)을 하고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의 시간(時間)에 딱 머물러 있다가 보니까. 않보이는 것이다. 매일 숨 내쉬고, 들이쉬는 그게 다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면목(面目)’이고, 겁외춘(劫外春) ‘겁(劫) 밖에 봄소식이다.’이런 것이다.

 

그래서 매일 숨 내쉬고 들이쉬는 것, 매일 오고, 가는 이게 다 무상(無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눈을 딱 뜨고 보면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 소식이다.’ 라고 한다. 이것을 옛날 사람의 것이냐? 지금 사람의 것이냐? 라고 물었을 때 말을 못 한다. 이게 그런 것이다.

 

그런데 모르고 있다. 그래서 똑같은 자리에 있는데, 깨달은 사람이 볼 때는 그게 그대로 진여법계(眞如法界)고,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생사화택(生死火宅)‘나고, 죽는 불타는 집’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매일 더 얻으려고 한다. 중생(衆生)이 하는 것은 생사에 집착(執着)되어 있으니까.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은 모두 자기(自己) 자신(自身)을 위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된다.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愛)을 한다고 할 때, 사랑(愛) 속에도 모두 자기(自己) 자신(自身)을 위해서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사랑(愛)이라는 말에 속으면 큰일 난다. 사랑(愛)에 울게 된다. 그리고 누가 무엇을 한다고 할 때 그 말 속에는 그게 중생(衆生)의 미혹(迷惑)한 그런 업장(業障)이다.

 

무엇을 해도 친한 것이 자식(子息)인데, 자식(子息)으로 부터도 무엇을 얻으려고 한다. 아주 고약(悒)하다. 그게 중생(衆生)이다. 자식(子息)으로 부터도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데, 누구한테나 않 얻으려고 하겠는가?

 

아주 중요한 분이 부모(父母)인데 부모(父母)한테도 얻어 내려고 한다. 그러니 누구한테나 않 얻으려고 하겠는가? 그게 중생(衆生)이고, 미혹(迷惑)한 것이다. 중생(衆生)은 체면(體面)도 염치(廉恥)도 없다.

 

누구한테나 자기(自己) 이익(利益)을 도모(圖謀)하려고 하는 그런 버르장머리를 가진 것이 중생(衆生)이다. 체면(體面)도 없다. 그러니까. 그런 중생심(衆生心)에서 그 고향심(故鄕心)을 떡 깨닫는 것이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인데, 그것은 어디서 얻은 것이 아니다.

 

자식(子息)한테서 얻은 것도 아니고. 부모(父母)한테서 얻은 것도 아니다. 얻은 바가 없다. 그러니까. ‘얻은 바가 없이 하나 얻어 놓아야 그게 참으로 얻은 것이지’, ‘무슨 자식(子息)한테 얻는다.’ ‘부모(父母)한테 얻는다.’ ‘누구한테 얻는다.’ ‘이것은 다 없어진다.’ 는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내용인데, ‘못 깨달은 중생(衆生)이 볼 때는 전부(全部) 얻으려고 하고,’ ‘깨달은 사람이 볼 때는 전부(全部) 진여법계(眞如法界)다.’라고 한다. 이것을 비유(比喩)할 때, 똑같은 물인데, ‘뱀(蛇)이 마시면 독(毒)이고, 소(牛)가 마시면 우유(乳)가 된다.’고 하였다.

 

야부(冶夫)스님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정인설사법(正人說邪法)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말하면, 사법실귀정(邪法悉歸正)삿된 법이 다 바른 곳으로 돌아오고, 사인설정법(邪人說正法)삿된 사람이 바른 법을 말하면, 정법실기사(正法悉기邪)正法이 다 삿된 곳으로 돌아간다. 강북성지강남귤(江北成枳江南橘)춘래도방일반화(春來都放一般花)강북에선 탱자가 되고, 강남에서 귤이 된다. 봄이 오면 모두 같이 꽃이 필걸세.

 

이 생사(生死)가 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를 떡 얻은 사람이 보면 무슨 말을 해도 전부 진여법(眞如法)이다. 그런데 이 생사(生死)에 집착(執着)한 미혹(迷惑)한 생각으로 말하면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다 생사법(生死法)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을 말해도 그것은 생사법(生死法)이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말해도 그것은 생사법(生死法)이고’,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말해도 그것은 화탕지옥(火湯地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큰 스님들이 법문(法問)을 할 때, 보리(菩提)를 하나 떡 얻은 사람은 가나(去) 오나(來) 앉으나(座) 서나(立) 다 보리장(菩提場)에 있다. 그 보리장(菩提場)이 금강도량(金剛道場)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야부(冶夫) 함허설(涵虛說)이라고 하는 금강경(金剛經) 해석(解釋)이 있는데, 거기에 있는 말씀이다.

 

‘금위천기(金爲千器)금으로 천 가지 그릇을 만들 적에, 기기개금(器器蓋金)그릇그릇마다 전부 금이더라. 금으로 그릇을 만들면 만든 그릇마다 전부 금이 된다. 또 전단만편(栴檀萬片)전단향(栴檀香)을 만 가지 조각(片)으로 짜개 놓으면, 편편개향(片片皆香)조각(片) 조각(片)마다 다 전단향(栴檀香)의 향기(香氣)더라.’이렇게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菩提) 진여법(眞如法)을 떡 깨달으면 진여법(眞如法) 뿐인 것이다. 전단만편(栴檀萬片) 편편개향(片片皆香) 향나무(香木)를 천 가지 조각(片)으로 짜개 놓든 만 가지 조각(片)으로 만들어 놓든 조각조각이 다 향나무이다.

 

그렇듯이 진여법계(眞如法界)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전부가 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바로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면목(面目)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에 면목(面目)인데, 이게 왜 않보이는가?

 

그것은 무상법(無相法)을 본 적이 없어서 형상(形相) 없는 법(法)을 본적이 없다. 그래서 이 상(相)에 집착(執着)을 하니까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움직이는 파도(浪)만 보니까. 바다(海) 물(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파도(浪)만 보지, 물(水)을 못보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이라고 하는 것이 무상(無相), 무주(無住), 이것이 금강경(金剛經)의 골수(骨髓)이다. 상(相)에서 상(相)이 없는 것을 보는 것,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집착(執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무주(無住)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집착(執着)하니까. 자기(自己) 고향(故鄕)을 잃어버리는 것이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집착(執着)하지 않으면 자기(自己) 고향(故鄕)을 잃어버릴 수가 없다.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는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꿈(夢)과 같고, 꼭두각시(幻) 같으며, 물거품(泡) 같고, 그림자(影) 같으며, 이슬(露) 같고, 번개(電)와 같다고 하였다. 유위법(有爲法)은 나고 죽는 생사법(生死法)이다.

 

 

그래서 육조(六祖) 혜능(慧能)스님 같은 경우에는 무슨 말씀이 있는가? 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고향심(故鄕心)을 공적심(空寂心) ‘공적(空寂)한 마음이다.’ 이 공적(空寂)한 마음이 온갖 일을 다 하는데, 그게 신통(神通)이다. 그게 부처님이다. 그래서 부처님 불성(佛性)은 공적(空寂)하면서도 온갖 신통(神通)을 일으키는 그것이 불성(佛性)이다.

 

그래서 불성(佛性)을 법성(法性)이라고 하지 않는다. 청정진여(淸淨眞如)는 불(佛)이나 법(法)이나 똑같다. 그런데 부처님이라고 하면 청정(淸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신통(神通), 지혜(知慧), 공덕(功德)이 있다.

 

그래서 불성(佛性)을 절대(絶對) 법성(法性)이라고 하지 않는다.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지,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법성(法性)이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측면(側面)에서는 같다.

 

공적(空寂)하다. 하지만 찾아보면 없다. 마음이 어디 있는가? 찾아보면 없다. 공적(空寂)하다. 그런데 이게 온갖 일을 다 일으킨다. 미혹(迷惑)할 때는 온갖 죄(罪)를 다 짓고, 깨달았을 때는 온갖 신통 공덕을 다 일으킨다.

 

이것을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大華嚴一乘法界圖註幷序)에서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다.’라고 하였다.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인연(因緣)따라 나타난다.’ 그러면 그 불성(佛性)이 청정성(淸淨性)만을 지키는가? 그렇지 않다. 수연성(性隨緣)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 물(水)이 물의 모양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구름(雲)도 되고, 얼음(氷)도 되고, 사람 몸에 들어가면 피(血)도 되고, 바다(海)에 가면 파도(浪)도 되는 것이 수연성(性隨緣)이다.

 

우리의 불성(佛性)이 그와 같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았을 때는 한없는 여래십력(如來十力)과 십사무외력(十四無畏力)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일체(一切) 사무외지(四無畏智) 이런 것이 막 된다.

 

못 깨달았을 때는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에서부터 울분(鬱憤)과 복수(復讐)와 죄악(罪惡)이 막 일어난다. 이것이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고 한다. 돈황본(敦煌本) 육조단경(六祖壇經) 혜능대사(慧能大師:638-712)의 금강경(金剛經) 해의(解義)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삼보리자(三菩提者)‘삼보리(三菩提)라는 것은’

심상공적(心常空寂)‘공적(空寂)한 마음이 있는데,’or 마음이 언제나 공적(空寂)이니,

범심돈제(凡心頓除)‘범부(凡夫)마음 제거(除去)되면,’ ‘일념(一念)범심(凡心)을 돈제(頓除)하니’

즉견불성(即見佛性)‘곧 불성을 본다.’or 바로 불성(佛性)을 본다.

 

이렇게 범심(凡心)에 가려서 불성(佛性)을 못 본다. 범부(凡夫)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항성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언제나 좋은 것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다. 중생(衆生)은 이런 짓을 한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자기(自己) 좋은 것은 하려고 한다. 거참 이상하다. 이상한 것이 중생(衆生)이다.

 

욕심(慾心)이 끝도 한도 없다. 뉴스에 나온 이야기인데, 얼마나 이상한 일이 많은가? 하면 체면(體面)없는 것이 중생(衆生)이다. 그러니까.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망상(煩惱妄相) 때문에 본래(本來) 체면(體面)이 없다.’ 이렇게 알아야 한다. 않그러면 부처님이다.

 

그래서 중생(衆生)한테 ‘왜, 잘못하느냐?’ 나무라지 마세요. 그게 중생(衆生)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움직이는 것이 파도(浪)인데, 파도(浪) 보고 왜 움직이느냐?’ 이러면 않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70먹은 할아버지가 그냥 신체가 얼마나 건강하던지, 미성년자 여자아이를 데리고 가서 성폭행을 했다고 한다.

 

이게 중생(衆生)이다. 인연 따라서 몸이라고 하는 것은 백 살이 되어도 몸을 잘 단련(鍛鍊)하면 한 60대도 않될 정도로 건강할 수가 있다. 이것이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다. 또 40만 되어도 몸을 단련(鍛鍊)하지 않으면 80, 90된 분보다 더 늙을 수가 있다.

 

이것이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다. 그러니까. 나이를 보지 말고 그 신체의 건강도(建康度)를 보아야 한다. 머리 허옇다고 힘없다고 생각하면 않된다. 주민등록상의 연세 많은 분도 40, 50대의 건강한 분이 얼마든지 건강할 수가 있다.

 

그러나 40, 50대 되신 분도 80, 90대의 몸으로 노쇠할 수가 있다. 이것이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다. 그러니까. 부처님 법문(法問)을 떡 듣고 우리 고향심(故鄕心) 그 고향(故鄕)의 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금강반야(金剛般若)이다.

 

그래서 고향심(故鄕心)을 얻으면 다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현상(現象)에서 우리가 산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의 상태에 있는데, 고향(故鄕)의 마음을 잃어버려서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 동안에 이런 이야기를 잘 못듣다가 부처님이 처음으로 말씀하신 이 말을 들으니, 이게 어렵지 않으면 중생(衆生)이 아니다. 않어려운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믿고, 몰라도 자꾸 들으세요. 그리고 그 쓸데없는 생각, 부끄러운 생각, 많이 일어난다고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중생(衆生)이 익히고 답습(踏襲)한 것이 그것이다. 체면(體面)도 없고, 염치(廉恥)도 없는 것이 중생(衆生)이다. 익힌 것이 그것이니까. 그런 것이 일어나는 것, 다 상관(相關)하지 말고, 오로지 부처님 법(法)에 의지(意志)해서 자꾸 읽고, 예배(禮拜)한다.

 

그리고 기도(祈禱)하고, 축원(祝願)하고 자꾸 하면 또 중생심(衆生心)도 정해진 것이 없어서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니까. 바로 또 불성(佛性)을 찾을 수가 있다.

 

이게 바로 고향심(故鄕心)이고, 즉견불성(即見佛性)‘곧 불성을 본다.’ 또 바로 불성(佛性)을 본다. 이것을 줄이면 견성(見性)이다. 읽고 마치겠습니다.

 

 

종범스님

 

 

 

 

출처 : 수보리
글쓴이 : 원종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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