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수행법(간화선)

[스크랩] [간화선] 화두란 무엇인가?

수선님 2019. 1. 20. 12:33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참선이란 조사의 관문을 뚫는 것이다. 묘한 깨달음은 모든 생각의 길을 끊어야 한다. 조사의 관문이 뚫리지 않고 생각의 길이 끊어지지 않으면 그대는 풀잎이나 덤불에 붙어사는 허깨비나 다름없다.

參禪, 須透祖師關, 妙悟 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 『無門關』


조사가 되려면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이 끊어진 조사의 관문을 뚫고 나가야 한다. 선에서는 이러한 조사관을 화두話頭라고 한다. 화두라는 꽉 닫힌 문 없는 관문을 뚫고 나간 뒤라야 생사를 벗어나 조사가 될 수 있다. 이 조사관을 뚫지 못하면 홀로 우뚝 서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남에게 의지하는 허깨비 인생을 살게 된다.


화두, 공안의 정의

화두라는 말의 ‘화話’란 말 또는 이야기라는 뜻이며 ‘두頭’란 접미사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화두란 그저 ‘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선사들이 쓰는 특별한 말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화두란 모든 사유와 분별의 통로를 막는 선사들의 독특한 언어이다.

이러한 말은 일상적인 생각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 화두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유 분별을 끊어버리는 힘이 있다. 그래서 화두를 일상적인 격을 벗어났다 하여 격외어格外語라 한다. 이성의 사유작용이 따라 붙을 수 없는 절대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있다·없다, 나다·너다, 가다·오다, 좋다·나쁘다 이런 식의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냐?” “무엇이 진리냐?” 라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다” “마른 똥막대기다”라고 대답하는 격외어는 상대적인 말을 초월한 절대적인 말이다. 이것은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도 끊어진 진짜 말이다. 이러한 화두를 바로 깨달으면 된다.

‘화두’할 때의 ‘두’는 단순한 접미사로 쓰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 화두는 ‘말 머리’라는 뜻으로 말이 나오기 이전의 세계를 일컫는다. 화두에 대한 이러한 정의도 일상적인 말 이전의 말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화두는 스승인 선지식이 제자에게 제시한 것으로 제자는 이 화두를 들고 한바탕 생사를 건 씨름을 해야 한다.

화두를 공안公案 또는 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모두 같은 뜻이다. 공안도 공과 사를 초월한 공公, 고칙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고古, 화두도 말을 초월한 말話이다. 다시 말하여 고칙이란 공정한 법칙, 고덕古德들이 인정한 법이다. ‘말씀으로 된 법칙’이요 ‘옛 조사들의 법칙’이다. 그것은 공정하므로 추호도 분별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공公이라 한다. 그 법에 따라 정진하면 반드시 견성할 수 있다. 공안이란 그렇게 양변을 초월한 법에 따라 수행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표준안(案)’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렇듯 공안은 참선 수행에서 절대적인 규범과 판단의 기준이다.

이러한 화두·공안·고칙을 통하여 바로 깨달으면 된다. 그런데 보고 깨치라고 제시하는데도 못 깨치니 어쩔 수 없이 화두를 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도 깨치는 방법이니 그냥 놔두는 것이다. 화두는 그냥 의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냥 놔두면 또 잘못될까봐 고봉 선사는 『선요禪要』에서는 “숙맥菽麥도 모르고 노낭奴郞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짓이다”라고 했다. 숙맥은 콩하고 보리도 못 가르는 사람, 노낭은 누가 주인인지 누가 종인지를 못 가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숙맥도 모르고 노낭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공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운문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한 칙의 화두를 들어 그대들로 하여금 바로 깨닫도록 해도 벌써 오물을 뿌려 그대들의 머리에 붙이는 격이며, 설령 머리털 하나를 집어 들어 세상의 모든 이치를 한순간에 밝히더라도 좋은 살결에 흠집투성이를 만드는 꼴이 된다. 비록 이렇다고 하지만 그래도 바로 이 경지에 실제로 도달해야만 한다.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그나마 남의 말을 훔쳐서 꾸미지 말고, 모든 분별을 끊고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살펴보라. 진실로 이렇게 함에 그대가 분별을 짓거나 의혹을 짓는 것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擧一則語 敎汝直下承當 早是撒屎著?頭上也. 直饒拈一毛頭 盡大地一時明得 也是?肉作瘡. 雖然如此 也須是實到者箇田地. 始得 若末 且不得掠虛 却須退步 向自己根脚下 推尋看 是什?道理. 實無絲髮許 與汝作解會 與汝作疑惑. - 『雲門廣錄』 卷上. 大47



화두의 생명

선은 철저히 상대적 개념의 세계를 떠난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화두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이때부터 의심해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화두에는 이성의 사유작용이 따라 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도 풀려지지 않은 미궁과도 같다. 무문 선사의 말씀대로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길도 끊어져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것이다. 모색할 흔적과 자취조차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운거 도응(雲居道膺 ?~902) 선사는 말한다.

그대들은 영양을 찾는 사냥개가 영양의 발자취만 �아 헤매는 꼴과 같다. 만약 영양이 뿔을 가지에 걸고 숨는다면 사냥개는 영양의 발자취를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양의 숨소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영양이 뿔을 가지에 걸고 숨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6 곱하기 6은 36이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종적이 없다는 뜻을 모르는가?”

汝等譬如獵狗 但尋得有?跡底. 若遇羚羊掛角時 非但不見?跡 氣息也不識.
僧便門. 羚羊掛角時 如何. 答曰 六六三十六. 曰 會?. 僧曰 不會. 曰 不見道無?跡.
- 『禪林寶僧傳』 권6 『道膺傳』 卍137


이렇게 화두를 들 때는 종적조차 없어 생각으로 모색할 길이 완전히 끊어져야 한다. 여기서 사냥개는 각종 관념과 사유의 자취를 더듬으며 분별하는 인식 작용에 비유한 것이다. 간화선 수행의 핵심은 말과 생각의 자취가 끊긴 화두를 참구하여 종적이 사라진 곳에서 자유자재 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는 참선 수행자에게 모든 사유의 길을 끊게 하고 몸과 마음을 의심의 열기로 가득 차게 하여 마침내 그 의심의 둑이 툭 터지는 경지로 이끌어 준다. 이쪽도 허용하지 않고 저쪽도 허용하지 않고 부정해서도 안 되고 긍정해서도 안 되는 것이 화두 수행의 일관된 흐름으로 이것을 배촉背觸이라 한다. 조사관을 배촉관背觸觀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이렇듯 화두를 들면 온 천지가 하나의 의문덩어리로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서장』에서 대혜 선사는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한다.

화두를 들 때는 평소에 영리하고 총명한 마음으로 헤아려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으로 헤아려 분별하면 십만 팔천 리도 아직 먼 곳이 아니다.

看時 不用將平昔 聰明靈利. 思量卜度 擬心思量 十萬八千 未是遠. - 『書狀』 答徐顯模 雉山


화두는 의식과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을 ‘알음알이’라 한다. 알음알이의 한자말은 지해知解이다. 우리나라 절의 일주문에는 보통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라는 글이 붙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문 안으로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는 뜻이다. 우리는 일주문을 들어설 때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새겨야 한다. 비단 일주문에 들어설 때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그 의미를 간직하고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헤아리고 분별하는 마음이 아닌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에 몰입하고 나아가 그 화두와 하나가 되어 마침내 화두를 타파했을 때 활발발한 한 소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사관을 타파해야 온 천하를 홀로 거니는 대장부가 될 수 있다.

무문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대도는 문이 없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가면 온 천하를 당당히 걸으리라.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 『無門關』 自序



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CD굽던노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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