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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 스님
‘화엄경’, 도의적 인재양성에 필수
▲탄허 스님은 ‘화엄경’을 불교의 최고봉으로 꼽았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 하시고 6년 고행을 통해 우주관과 인생관을 타파한 것은 무엇인가. 결국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최초로 3·7일간 설법하신 화엄학의 도리다. ‘화엄경’은 부처님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낸 법문이다. 49년간 법을 설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인 그림자 몸이다. 교리적으로는 같은 부처님이지만 최초에 우주관·인생관을 타파해서 설한 화엄학은 법신의 소설(所說)이요, 무지한 대중을 위해 평생 설하신 화엄학을 부연한 팔만대장경은 화신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현토역해 신화엄경합론’을 번역·출간해 우리 민족문화사에 영원히 빛날 금자탑을 쌓았다는 칭송을 받는 화엄학의 대가 탄허 스님은 ‘화엄경’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탄허의 ‘신화엄경합론’ 번역은 스승 한암 스님의 유촉이 있기도 했으나, 미래 인재양성을 위한 필요성을 인식한 본인의 결단이었다. 한반도 통일시기가 도래하고 우리나라가 태평양시대를 주도할 국가로 부상할 것을 예견한 탄허는 도의적 인재양성이 급선무라는 점을 역설했다. 그가 말한 도의적 인재는 화엄사상으로 무장하고 동체대비 원력과 언행일치를 갖춘 사람이다. 때문에 이러한 인재양성에 필요한 교재로 택한 것이 ‘화엄경’이었다.
탄허는 1956년 가을 ‘화엄경’ 번역에 착수해 1967년 3월 무려 10여년 만에 62500여장에 달하는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75년 총47권으로 간행됐다. 그 공로로 조계종 종정 상은 물론 동아일보사 주최 제3회 인촌문화상까지 수상하기도 했다. 탄허는 ‘화엄경’을 불교의 최고봉으로 꼽았다. 그리고 “‘화엄경’은 바다와 똑 같다. 바다를 안 본 사람은 바다라고 해도 모른다. 그래서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일렁일렁하는 저 물결이 바다다, 바람이 물결치게 하는 저것이 바다다, 그 위를 저어 가는 것 그게 바다다 이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바다의 일단만 보여주는 것이다. 바다에는 바람도 있고 물결도 있고 저어가는 것도 있다. 그처럼 우주만유와 나, 그리고 마음 이 전체가 총진리화 되어버린 그것이 ‘화엄경’의 도리”라고 설명했다.
출가 전 이미 한학에 능통했던 탄허는 출가 후 스승 한암의 총애를 받으며 곧바로 학인들을 가르치는 중강의 자리에 오를 만큼 학문적 깊이가 남달랐다. 그때부터 그의 일과는 자정이 되면 일어나서 정진하고 원고 쓰는 일이었다. 당시 책 자체가 귀했던 시절이라, 책을 빌리면 작은 책은 밤새 외워서 머리에 넣고 큰 책은 밤을 지새워 필사를 했을 만큼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후학들에게는 “경전을 볼 때에는 문자 밖의 소식을 알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문자 밖의 소식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문자 이면의 뜻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금강경’을 비롯한 경전은 물론이고 짧은 한 구절에도 핵심이 무엇인지, 그 대의가 파악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경전을 줄줄 외우고 미사여구로 표현한다고 해도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할 수 없는 문자한(文字漢)에 불과할 뿐이라는 경책인 셈이다.
‘화엄경’ 출판 이후 강원 교재로 사용하던 경전들을 번역하기 시작한 탄허는 그 일을 “덥다고 그만두거나 춥다고 버릴 수 없는 숙제”라고 했다. 그 중에 ‘절요’는 “고려 때 우리의 독자적인 철학을 모색한 불교학개론서로 빼어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칭송했고, 사미과 교재의 부록으로 삼은 ‘현정론’, ‘모자이혹론’, ‘정재유학사’의 ‘삼교평심론’은 “동양인의 사유방법 속에 흐르고 있는 유불선 사상을 비교연구해 상세히 다루고 있어 동양사상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재”라고 높이 평가했다.
‘주역선해’ 오대산 수도원 외전 채택
▲스님은 주역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기도 했다.
“나는 학교 문턱에도 가지 않았다. ‘사서’ ‘삼경’ ‘주역’ 등 한문학을 했다. 수 백 독씩 했고 줄줄 외웠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책을 통째로 외워댈 수 있다. 한문 성경도 읽었는데 ‘성경’은 단편적으로 공부했다.”
1913년 전북 김제 만경에서 독립운동가 율제 김홍규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탄허는 1918년부터 1928년까지 10여 년간 부친과 조부 그리고 향리의 선생으로부터 ‘사서’와 ‘삼경’을 비롯해 유학 전 과정을 배웠다. 그리고 1929년 17세에 충남 보령으로 옮겨 기호학파 면암 최익현의 제자 이극종으로부터 다시 ‘시경’을 비롯한 ‘삼경’과 ‘예기’ ‘춘추좌전’ 등 경서를 수학했다.
그렇게 경서를 배운 탄허는 1932년 20세 즈음에 이르러 ‘도덕경’과 ‘장자’ 등 도가의 경전을 읽으면서 ‘도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훗날 스승이 된 오대산 한암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가르침을 받았고, 22세에 입산하기까지 20여 통의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불문에 귀의할 것을 다짐하게 됐다.
탄허는 출가 이후에도 유교와 도교 경전을 도외시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노자’ ‘장자’ ‘주역’은 후학들에게도 불전과 함께 공부할 것을 권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1955년 조계종 강원도 종무원장 겸 월정사 조실에 추대되고, 다음해 월정사에 설치한 조계종 오대산 수도원 외전으로 이들 서책을 택하기도 했다. 당시 5년 과정의 수도원 입방 자격을 승속을 불문하고 강원의 대교과 졸업자, 사회의 대학 졸업자, 유가의 ‘사서’를 마친자로 한정한 탄허는 내전으로 ‘화엄경’ ‘기신론’ ‘영가집’ ‘능엄경’ 등을 선정하는 한편 외전으로 ‘노자’ ‘장자’ ‘주역선해’를 택했을 정도로 이들 서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탄허는 이때 외부강사를 초빙해 동서 철학 특강을 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수도원 교육은 불교와 사회 전반에 걸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그의 이상론을 담은 최초의 교육결사이기도 했다.
‘주역’을 바탕으로 한 과거 정립과 미래예측에도 스스럼이 없었던 탄허는 스스로 “나는 역사 진화과정을 불교, 유교, 선교의 동양 사상을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반 역사학자들과는 달리 과거의 역사보다는 미래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동양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며 남을 해칠 줄 모르고 살아온 것이 결국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양 사상의 근본 원리인 인과법칙이자 인과응보이며 우주의 법칙”이라고 역설했다.
탄허는 또한 ‘주역’을 근거로 미래 세계가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 “주역을 지리학상으로 전개해 보면 우리나라는 간방에 해당되는데 지금 역의 진행 원리로 보면 이 간방의 위치에 간도수(인간과 자연과 문명의 정신)가 비치고 있다. 이 간도수는 이미 1900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시종을 함께 포함한 간방의 소남인 우리나라에 이미 간도수가 와 있기 때문에 전 세계의 문제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게 될 것이다. ‘주역’에 ‘불이 물속에서 나오니 천하에 상극의 이치가 없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미래세계는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가 온다는 뜻”이라며 한반도가 새로운 문명의 중심이 되고, 평화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을 예측했다.
그리고 기독교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이나 예언자들의 멸망론은 해석의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멸망이 아니고 성숙이며, 심판이 아니라 결실”이라고 강조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도 비판
▲스님은 서양철학서까지도 섭렵했다.
탄허 스님은 불교 외적으로 역학은 물론 서양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칸트나 소크라테스 등 서양철학자들의 사상을 꿰뚫어 비판하기도 했고,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는 등 독서를 통한 사상의 보폭이 동서양을 넘나들었다.
탄허는 이 가운데 영국이 지배 철학으로 삼았던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원리로 힘이 곧 정의임을 의미했으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평등이론이 등장하면서 적자생존의 진화론은 패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론을 극복하고 소멸시킬 대안으로 불교의 화엄사상이 이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요체라고 역설했다.
특히 탄허는 ‘순수이성비판’ 등 칸트 철학서를 보고 칸트의 철학을 생활화가 안 된 대표적 사례로 지적하며 ‘이론에 불과할 뿐’이라고 혹평했다. “이 우주 만유 인식경계의 모체가 순수이성이라면 이 우주 만유의 모체인 순수이성을 타파할 때 우주만유가 그대로 순수이성화 되어야 할 것”이라고 칸트의 이론을 지적하고, “산을 대하면 산, 물을 대하면 물, 이것이 전부 순수이성화가 되는 것이 당연함에도 칸트 사상에는 그러한 순수이성화 된 결론이 없다”며 생활화와 거리가 먼 철학이라고 비판했다.
탄허는 그러면서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나니 세간사 그대로가 법이라”는 ‘법화경’ 구절을 예로 들어 불교가 더 순수이성화 되고 생활화 돼 있음을 강조했다. “산을 보면 산 그대로가 진리이고 물을 보면 물 그대로가 진리가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똥 덩어리 까지도 그대로가 진리다. 이때 그것은 완전히 순수이성화가 된 것이다. 그것은 한번 부정을 거친 긍정이다. 세간법 그대로가 불법이 된 것으로 거기서 다시 한번 긍정하는 것”이라고 불교적 관점을 설명했다.
종교와 관련해서도 “유물론자들인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종교를 아편이라 하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종교는 공포심으로부터 나온다고 정의하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종교심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보편적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새 시대를 맞아 거기에 걸맞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강조했다.
“타인에게 기대서는 안 된다. 우선은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자신을 믿지 못한데서 타인도 믿지 못하고 불신풍조가 생긴다. 신을 믿고 부처를 믿고 자신을 믿는데서 타인을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런 다음에 수행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수행만이 최고의 자기 재산”이라며 수행을 당부했다.
탄허는 서양철학자들의 한계를 기독사상의 학리가 부조리하고 포교가 잘못 된 데서 나타난 현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기독 사상이 주관과 객관이 대립되어 있지 않음에도 포교하는 사람들이 기독사상의 바른 뜻을 잘못 전달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탄허 스님의 어록을 통해 본 이같은 분석들은 그가 얼마나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고 많은 서적을 탐독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예언서나 미래예측 관련 서적에도 관심이 많았다.
일례로 “‘25시’란 소설을 쓴 게오르규라는 사람이 장래의 세계를 구출할 사람은 한국인이며 특히 승단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며 역학적으로 그 말을 증명할 수 있음을 적시하기도 했고, 프랑스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집’이나 토인비의 예측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서양 철학사까지도 두루 관심을 보였던 스님은 30여 년 간 역경을 통해 15종 74책이라는 분량의 경전을 번역해서 간행하는 것으로 후학들의 공부를 독려하고, 1983년 세수 71세 법랍 49세로 입적했다.
심정섭 기자 / 법보신문
탄허 대선사
格物致知 경계 체득한 儒佛仙의 거목
3년 서신 왕래 후 한암 화상 문하로 출가
신화엄경합론 번역으로 '화엄 집대성'
1983년 6월 5일 오대산 월정사의 방산굴, 제자가 막 임종을 앞둔 스승에게 물었다.
“스님, 여여(如如)하십니까?”
“그럼, 여여하지.”
“마지막으로 한 말씀 남겨주십시오.”
“할 말이 하나도 없어.”
이날, 탄허(呑虛)는 이렇게 사바세계와의 인연을 접었다. 화엄학을 집대성하여 수록한 금자탑이라 평가를 받는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을 출간하는 등많은 저술과 번역으로 대위업을 이룬 그가 할말이 하나도 없다고 한 까닭이라니! 이미 할말을 다 마쳤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말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후학들이 말에 떨어져버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배려였을까. 이는 마치 ‘나는 이제까지한 마디도 설하지 않았다’는 부처님의 열반장면을 연상시키는 것이니, 탄허가 남기고 간 70여년의 살림살이가 간단치 않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라 할 것이었다.
1934년 초가을 어느날, 이제 막 갓 스물을 넘긴 듯한 한 잘 생긴 청년이 삿갓을 눌러쓴 채 부지런히 오대산으로 올랐다. 이미 오랫동안 서신을 통해 문답을 나누어 왔지만 한암화상을 찾아가는 청년 김탁(金鐸·탄허의 속명)의 표정엔 약간의 긴장감마저 배어 나왔다. 오대산에 오기 이전에 이미 한암화상에게 부처님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으니 도를 구하는 바른 지침을 알려달라는 서신을 보냈고, 또 자상한 답신을 받은 터였지만 사랑하는 처자식을 버리고 산문을 향하는 마음이 어찌 평정할 수가 있으리. 청년은 잠시 후 있을 화상과의 만남을 위해 답신 내용을 가만히 떠올렸다.
“장년의 호걸스러운 기운이 넘쳐서 업을 지음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모를 때에 능히 장부의 뜻을 세워 위없는 도를 배우고자 하니 숙세(宿世)에 심은선근(善根)이 깊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으리오. 축하하고 축하하노라. 그러나 도가 본래 천진하면 방소(方所)가 없어서 실로 가히 배울게 없다. 만일 도를 배운다는 생각이 있다면 문득 도를 미(迷)함이 되나니, 다만 그 사람의 한 생각진실됨에 있을 뿐이다.”
이미 출가 이전에 부친으로부터 한문학(漢文學)의 전 과정을 배워 마쳤고, 기호학파의 맥을 이은 토정의 후예 이극종 선생으로부터 유학 및 도교학을 수학, 학문에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나 있었지만 불교라고 하는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순간 가슴은 설렘으로 몹시 두근거렸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던 청년은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듯 다시 화상의 답신내용을 떠올렸다.
“반드시 시끄럽다고 고요한 것을 구하거나, 속됨을 버리고 참됨을 향하지 말지니라. 매양 시끄러운 데서 고요함을 구하고 속됨 속에서 참됨을 찾아 구하고 찾는 것이 가히 구하고 찾음 없는 데 도달하면, 시끄러움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요, 고요함이 고요한 것이 아니며, 속됨이 속된 것이 아니요, 참됨도 참된 것이 아니니라. 부르면 꺾어지고 고함 지르면 끊어지느니라. 이러한 시절을 무어라고말해야 하는가. 이른바 한 사람이 허(虛)를 전함에 만 사람이 실(實)을 전하는 도리니라. 간절히 바라노니, 잘못 알지 말지어다.”
당대의 선지식 한암화상과 청년 탄허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서로 얼굴도 모른 채 나눈 3년에 걸친 서신교환,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이상적인 사제관계의 기틀을 다진 것이었으니 이날 한암과 탄허의 해후는 한국불교사에 기록될 하나의 사건이라 할 것이었다.
사실 탄허는 불문(佛門)의 도(道)를 공부하는데 짧으면 3년 길어야 5년이라는 생각으로 오대산에 찾아들었다. 그러나 한암화상의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어 영영탈속의 길을 걸었던 것이니, 탄허라고 하는 한국현대불교사의 거목은 한암이라는 거대한 그늘이 있어 탄생이 가능했던 것이다.
탄허는 전라도 김제군 만경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홍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홍규씨는 독립군에게 수십 만원의 자금을 대주었을 정도로 당대의 부호. 그러나 10만원의 독립자금을 추가로 전달하려다가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21년 10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전북 김제군 만경면에 사는 김홍규가 10만원의 독립자금을 전달하려다가 발각됐다.”고 당시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의 10만원은 천문학적인 거액. 그 당시 건설된 경부선 철도의 총 공사비가 20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탄허는 비용이 없어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던 신화엄경합론 원고를 6000만엔에 팔라는 일본 불교계의 제안을 ‘출판을 못하더라도 일본인에게 원고를 팔지 않는다’고 단호히 거절을 했는데, 이런 배경에는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탄허는 출가를 한 후 3년동안 일체의 말을 하지 않는 묵언정진에 들어갔다. 실로 세속의 모든 악습을 깨끗이 떨쳐버리고 불제자로서 거듭나는 피나는 수행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3년간의 묵언수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그는 15년 동안 한암화상을 모시고 오대산 상원사에 머물며 불교내전(佛敎內典)과 선학(禪學)의 일체를 수학했다. '이미 다 배우고 들어와 더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만큼 한학의 기초가 튼튼했고, 또 천재라고 불릴만큼 워낙 영리했던 터라 공부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 한암화상이 이를 크게 기뻐했을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 ‘한암일발록(漢巖一鉢錄)’에 실린 한암의 서신 내용은 화상의 탄허를 대하는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보내온 글을 두 번 세 번 읽어보니 참으로 좋은 일단의 문장이요, 필법이라. 구 학문이 파괴되는 때를 당해서 그 문장의 기권(機權)과 의미가 어찌나도 부처님 글처럼 매력이 넘치던지 먼저 보내온 글과 함께 산중의 보장(寶藏)으로 여기겠노라. 공(公)의 재주와 덕행은 비록 옛 성현이 나오더라도 반드시 찬미하여 마지않을 것이니 있어도 없는 듯하고, 차 있어도 비어 있는 듯이 어느 누가 그 고풍(高風)을 경앙(景仰)하지 않겠는가.”
한암화상의 탄허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대단했다. 평소에 탄허를 일러 ‘나의아난’이라고 칭찬을 하곤 했다. 강의를 할 때에도 탄허를 내세워 강의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뒤에 앉아 증명을 하거나 논의가 필요한 부분만 언급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문하에 보문(普門), 난암(暖庵)과 같은 지행과 학덕이 뛰어난 제자가 있었지만, 화상은 주저하지 않고 탄허에게 자신의 법을 전했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 ‘한암화상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지만 화상은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문이 파계사에서 요절(夭折)을 하고, 난암은 일본으로 건너가 조총련의 두목이 되자 그때서야 사람들은 한암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세속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탄허는 한암의 유촉을 받아 역경작업에 전념했다. 신화엄경합론을 번역하는 일은 유불도(儒佛道)에 통달해 있지 않으면 누구도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전례가 없던 초유의 대역사. 이 때부터 탄허의 생활은 눈물겨운 고행과 수행의 연속이었다. 초저녁이라고 할 수 있는 9시에 잠을 자고 자정에 일어나 정진을 하고 원고를 작성하는 초인적인 작업을 계속했다. 절 살림도 어려워 옥수수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원고지와 잉크가 떨어지면 탁발을 해야 했다. 방대한 작업이었기에 원고가 완성되더라도 언제 출판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난했지만 잉크는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외제를 사용했다.
번역작업에만 꼬박 8년이 걸리는 등 약 17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신화엄경합론 47권은 세상에 빛을 보았다. 경(經) 120권, 논(論) 150권 등 도합 270권의 원본을 옮겨 한 데 엮은 것인데, 그 원고매수가 무려 60000장에 이르렀다. 말그대로 ‘화엄의 집대성’이라는 감히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을 해낸 것이다. 신화엄경합론의 번역사업의 공로로 탄허는 제3회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197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그 의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오늘 김탄허 스님은 화엄경에 전심전력을 바쳤던 만큼 그 미치는 영향과 여운은 헛되지 않아 많은 대중사회로 하여금 화엄공덕의 우로(雨露)에 젖도록 한다는 것이 앞으로 국가사회를 정화시키고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어 이 이상의 올바른 발원과 유종의 미가 없을 줄 안다.”
1953년 강원도 종무원 원장과 월정사 조실을 맡은 스님은 오대산에 수도원을 세우고 동국대 대학선원 및 대전 자광사 등지를 오가며 수행과 공부에 전념했다. 유불선에 통달을 한데다가 치열한 수행이 바탕이 돼 거침이 없는 경계를 이룬 탄허가 주석하는 오대산 월정사에 많은 학자와 언론인, 수행자들이 수시로 찾아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행자와 학인들이 찾아와 법을 묻는 물론이고, 인간의 개인적인 세계관이나 교단의 미래는 물론이고, 나라의 현실과 장래문제를 묻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동양사상은 물론이고 기독교 등 서양의 사상까지 두루 섭렵한데서 나오는 특유의 예지적 통찰은 피동적이면서 피해 망상적이었던 우리의 역사의식에 새로운 긍정과 용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오대산 깊은 산자락에 주석하였지만 우주의 운행을 꿰뚫는 격물치지의 혜안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의 원동력을 제공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
탄허가 입적하자 정부는 국민문화훈장 은관장을 추서했으니, 고인이 훈장을 받기로는 그가 처음이었다.
한암의 禪旨 계승 '오대산 慧脈' 완성
'莊子강의' 선풍…후학에 "施恩 잊지말라"
박대통령에 '물·인재·식량' 정책 수립 자문도
최고의 불교경전인 화엄을 통달할 정도로 당대의 최고 불교학자이자, 노장(老莊)의 권위자였던 탄허에게 수많은 일화가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그가 무엇이든 남기기를 몹시 꺼려했던 터라 그 재미있고 교훈적인 일화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남아있지 않다.
왜 그 흔한 저서나 기록을 남기지 않느냐는 주위의 물음에 탄허는 늘 '공자도 자신의 말을 남기지 않았고(孔子無言)이요, 부처님도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釋迦無說)'는 점을 들어, 옛 성현과 철인들이 다 남긴 말들을 마치 자기 것인 양속이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물리치곤 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저서 한 권남기지 않았다.
결국 탄허의 지근거리(至近距離)에서 그의 살림살이를 지켜보았던 이들에게서듣는 단편적인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토대로 일상에서 문득문득 보였던 그의 진면목을 미루어 가늠해볼 밖에 다른 수단이 없는 것이다.
출가를 하기 전 결혼을 한 탄허의 아내는 토정 이지함의 16대 종손으로 학문과덕망을 고루 갖춘 뼈대있는 선비집안의 규수였다. 어릴 적 남자 복장을 하고 글방에 다니며 탄허보다 먼저 중국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뗐을 정도로 한학에 깊은조예가 있었다. 탄허도 출가 전의 자신의 내자(內子)를 일러 부부라기 보다는 훌륭한 수학도반으로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남편인 탄허의 출가를, 결혼을 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도 말릴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하루는 주역을 구해 보고 싶어하는 남편(탄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송아지를 팔아 주역 책을 구해 주었다. 주역 책을 본 남편이 어찌나 좋아하는지 책을 받아 가지고 그대로 글방으로 달려가더라는 것.
가만히 뒤따라가 문틈으로 남편의 모습을 살펴보니, 한 손에 책을 들고 읽으며 기쁨을 참지 못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게 아닌가. 그때 이미 남편은 부부의 연(緣)보다는 공부에 연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탄허는 말년에 운모를 갈아 장복(長服)한 것이 탈이 나 적잖이 고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모를 먹게 된 연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바로 거기에 그의 시주은혜를 두려워하는 정신이 온전히 담겨 있다. 탄허는 시주은혜를 무섭게 여기지 않으면 수행자로서 자격이 없음을 항상 강조했다. 농부가 뙤약볕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짓는 농산물을, 중이랍시고 공부를 한다며 그늘에 앉아 편안히 얻어먹는 것을 몹시 부담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농부인데도 굶는 이가 많고, 손이 부르터라 길쌈질을 하는 아낙네도 헤진 옷을 입고 사는데 어찌 중이 되어서 촌각을 헛트게 쓸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탄허의 지론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토록 무섭게 정진과 공부를 했던 것도 시주은혜에 대한 이같은 각별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리라.
어느 날, 탄허는 시은(施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월 초하루와 자신의 생일, 그리고 매월 보름에는 밥을 먹지 않고, 운모를 갈아 그 가루를 먹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를 실천했다. 시은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탄허는 절 살림을 하는데도 독특한 면을 보였다. 가람불사를 하는데도 대웅전이라는 말 보다는 도봉산 적조암에서 보이듯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로 나가실(那迦室) 또는 나가원(那迦院)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 주석하고 계신 적정한 성소라는 의미로 대적광전(大寂廣殿)이라는 말을 더 좋아했다. 지금의 월정사 법당이 비로자나불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도 현판은 대적광전으로 되어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그리 된 것이다. 또 종각의 이름도 범종각 보다는 칠 때는 움직이고 치지 않을 때는 고요하다는 의미로 동정각(動靜閣)이라고 불렀고, 불기도 3000년대를 고집해 사용했다.
탄허는 곧잘 "우주가 내 뱃속에 있으니 내 아들 아닌 사람이 없다."는 농(弄)을 즐겼다. 농이긴 하지만 스케일만큼은 범 우주적인 수준이었다. 실제 그의 배포는 온 우주와 허공을 삼키고도 남을 만큼 대단했다. 불교는 물론이요, 유교와 도교 등 동양사상 전반에 정통했고, 특히 화엄경과 주역에 대해서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으니 그의 스케일이 범 우주적 차원에 이르렀을 것은 짐작이 가는일. 게다가 한암이라는 걸출한 스승의 지도아래 철저한 수학과 수행까지 거듭했으니 그의 예지력이 남달랐을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탄허의 예지력은 보통 예언가들의 막연한 추론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의 예지력은 언제나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했다. 1999년에 지구가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대해 그는 종말 이후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없는 등 체계적이 못하고 이론적 뒷받침이 허술하다는 이유로 '근거 없는 추측'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실제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7월 지구 종말설은 근거없는 예언으로 판명이 난 상태다.
탄허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막 대통령이 된 박정희의 자문에 응해 세 가지의 중요한 정책방안을 제시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그를 가까이서 시봉했던 서우담(도서출판 교림 대표)에 따르면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박 대통령과 마주한 그는 거침없이 나라의 기간(基幹)이 될 정책방향을 이야기했다.
"앞으로 산업사회가 되면서 점점 물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지하수를 뽑아쓰게 될 것이고, 결국 식수난이 닥쳐옵니다. 물 쓰듯 한다는 말이 있지만 언제나 남아돌 때 부족함을 알아야 하고, 부족한 것은 남는 것이라는 이치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물에 대한 국가차원의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탄허가 우선 제기한 문제는 '물의 고갈문제'였다. 그리고 나서 나라의 동량이 될 만한 인재가 줄어들고 있으므로 인재난에 대비할 것, 머지않아 세계적으로 식량난이 닥쳐오게 될 것이니 철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 등 세 가지를 역설했다. 박 대통령은 이같은 탄허의 자문을 모두 받아들여 댐 건설과, 정신문화원의 설립, 절대농지법 제정이라는 국가정책을 수립했다. 탄허의 자문 내용들이 모두 미래를 꿰뚫어 보는 혜안에서 비롯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박 대통령으로서도 전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 이후에도 박 대통령은 탄허의 말을 경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같은 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경영의 난맥상이 드러나 관선이사가 파견되는 등 다른 재단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한 동국학원을 종립학교로 지키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믿기지 않을만큼 그의 예지력은 정확했다. 월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퇴할 것이라는 것, 동서 양극간의 냉전체제가 소련의 붕괴와 함께 소멸될 것이며, 북극 빙하가 녹아내려 세상의 대변혁이 다가올 것이고, 분단독일은 극과 극의 대립이 아닌 동서간의 반목이므로 얼마가지 않아 통일을 이룰 것이며, 남북으로 분단이 된 우리나라는 극과 극의 대립이라 통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어느 순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일을 이루게 될 것 등 그가 언급한 것들은 대개가 적중했거나 그 방향대로 진행되는 중이니 참으로 신이(神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장철학에 있어서 당대의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탄허는 1955년 경 서울 남산에 있던 한국대학(지금은 폐쇄)의 요청으로 '장자(莊子) 강의'를 했다. 처음에는 1주일 예정으로 강의를 시작했지만 '천하의 명강'이라는 소문이 나돌며 수강생들의 열띤 요청으로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면서 무려 두 달간을 지속했다. 수강생 명단에는 당시의 대표적인 철학자와 교수 등 쟁쟁한 인물들이 두루 포함돼 있었다. 씨
탄허는 강의를 할 때 교재나 메모를 펴놓는 법이 없었다. 노장(老莊)이나 영가집(永嘉集)은 물론 방대한 화엄경도 마치 머리 속에서 실타래를 풀어내듯 거침없이 펼쳐나갔다. 한번은 전강화상이 탄허의 영가집 강의를 몰래 청강하는 일이 있었다. 강의를 다 들은 후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전강은 탄허의 절을 굳이 물리치며 맞절을 고집했다. 그 만큼 탄허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경봉화상도 1969년경 부산에서 있었던 한 법회에서 탄허를 가리켜 "한 300년은 살아야 할 사람"이라며 "오대산의 탄허가 가는 날 한국불교도 빛을 잃을 것"이라는 극찬을 한적이 있다. 이렇듯 탄허는 당대의 선지식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설법을 잘하기로 유명한 청담화상도 탄허를 만나면 주로 듣기만 했고 금오와 효봉, 고암, 월산등 당대의 선사들도 탄허와 교유하는 것을 매우 즐겨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탄허는 학문 뿐만이 아니라 서예에도 일가를 이룬 명필이었다. 그가 남긴 개성있고, 힘찬 서체들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한동안 잡아매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선우 휘씨가, 화약폭발 사고가 났던 전북 이리지역의 이재민을 돕기 위한 서화전을 위해 20폭 병풍을 비롯해 무려 70점의 글을 2시간 만에 일필휘지로 거침없이 써대는 것을 지켜보고 감탄을 한 나머지, 훗날 조선일보 문화면에 탄허와의 대담을 3일 연속 게재한 것은 한국 언론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글을 짓고 직접 글씨를 쓴 명문명필의 비문이 23점에 이르고 있는 것도 근래에는 없는 일. 특히 주역 역서인 '주역선해'의 붓으로 쓴 서문은 천하의 명필로 일본사람들이 이를 알아보고, 10여 년 전 당시 일본돈 3000만엔에 구입하려고 시도했던 일도 있었다.
탄허는 후학들에게 자주 '천하에 두 가지 도가 없고 성인은 두 마음을 갖지 않는다(天下無二道 聖人無兩心)'이라는 말을 들려 줬다. 또 묻지 않는데 말하는 것은 싱거운 짓이며, 생전의 명예보다는 백년천년 후에 살아 있어야 하고, 시주의 은혜가 무서우니 공연히 신세를 지지 말 것을 철저히 하라고 늘 강조했다.
그가 비교적 일찍 입적에 든 것을 두고 그와 교분을 가졌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탄허의 입적은 한국불교의 불행'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하는 것은 그가 남긴 족적이 그만큼 뚜렷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연보
1913년 1월 15일 전북 김제에서 출생
1931∼1934년 오대산 월정사 한암 대종사와 우주 및 인생의 근본이치에 대해 빈번한 서신문답
1934년 9월 5일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37∼1952년 15년간 한암 스님을 모시고 수학 정진
1953년 강원도 종무원장 및 월정사 조실
1953∼1963년 한암 스님의 유촉을 받아 역경사업에 전념
1972년 화엄학연구소장
1974년 신화엄경합론 전47권 간행
1983년 4월 24일 입적(세수 71, 법납 49세)
/ 이학종. 법보
탄허가 현대에 남긴 화엄의 가르침은?
▲ 탄허 스님이 남긴 원고 일부.
탄허(呑虛·1913~1983) 스님은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고승 가운데 한 분이다. 22세에 입산하여 70세로 열반할 때까지 40여년 동안 대승불교의 심오한 경전인 ‘화엄경’과 ‘화엄론’, 그리고 ‘화엄경소초’ 등 이른바 ‘화엄학의 3대서’를 우리말로 완역한 업적을 이뤘다. 그 밖에 선(禪) 사상의 중요 경전이자 강원(승려들의 전통교육기관)의 교재인 ‘능엄경’과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사집’ ‘치문’은 물론이요, 중요한 선어록인 ‘육조단경’과 ‘보조법어’ ‘영가집’, 유가와 도가의 경서인 ‘주역’ ‘노자도덕경’ ‘장자’에 이르기까지 약 70여권의 방대한 역서를 남겼다.
그는 불승이었지만 불교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유학과 노장(老莊) 등 동양사상을 통섭(通攝)했다. 불교는 물론 유가의 7서(書), 노자, 장자 등 제자백가에 대해서도 즉석에서 거침없이 설파하는 위엄을 떨쳤다. 그래서 그를 ‘유불도 삼교의 통섭자’ 또는 ‘동양학의 대가’라고 한다.
입산 이전에는 기호학파인 면암 최익현(1733~1906)-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 학통의 이극종(李克宗) 선생으로부터 13경(經)을 수학했고, 입산 이후에는 당대의 선승인 방한암(1876~1951) 선사로부터 선(禪)과 교(敎)를 모두 섭렵하여 불교와 동양학까지 겸했다. 평소 “유·불·선 삼교(三敎)가 모두 하나”라고 한 주장은 이러한 사상적 바탕에서 우러난 말이다.
1975년 8월 1일에 간행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은 탄허 스님의 대표적 번역물이다. 대승경전의 꽃이자 선불교의 교학적·사상적 바탕이 되는 경전으로 한국 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하다. 탄허 스님이 우리말로 완역한 ‘신화엄경합론’은 원전인 ‘화엄경’ 80권과, 중국의 화엄학자 이통현(李通玄·635~730)이 해설한 ‘화엄론’ 40권, 그리고 만당(晩唐) 때의 유명한 화엄 학승 청량징관(淸凉澄觀·738~839)이 주석한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 150권을 합한 책이다. ‘화엄경’ ‘화엄론’ ‘화엄경소초’는 화엄학의 3대서(三大書)로 불린다. 고본(古本)으로 총 270권, 원고 매수 6만2500여장, 번역 기간 10년, 출판 기간 7년 등 총 17년의 결과물로 ‘신화엄경합론’ 완역은 탄허 스님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탄허 스님은 이 화엄학 3대서를 직접 현토(懸吐·토를 다는 것), 완역·간행했으며, 그 밖에 화엄학의 개설서인 계환(戒環)의 ‘화엄요해(華嚴要解)’와 ‘화엄현담(華嚴玄談·8권)’, 그리고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 저술한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까지 번역, 수록하여 화엄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를 모두 집대성했다. 방대한 양(量)을 종단이나 기관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개인적 차원에서 번역 간행했다는 측면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탄허 스님이 화엄경을 좋아한 이유
▲ 20세 때 입산 전 글방 앞에서.
탄허 스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여 추진한 것이 1956년에 시작한 ‘대한불교 조계종 오대산 수도원’과 ‘영은사 수도원’이다. 이 두 수도원은 장래 한국 사회와 불교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탄허 스님은 이곳에서 불교와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지성과 인격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려고, 단신(單身)으로 불교와 동양사상 전반에 걸쳐 하루 6시간 이상 강의했다. 이 과정에서 수도원생들을 위한 항구적인 교재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 ‘화엄학 3대서’ 등이다.
탄허 스님이 화엄경, 화엄론, 화엄사상을 좋아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화엄의 가르침은 방대하고 심오하여 모든 불교의 진리를 포괄하고 있고, 간명하면서도 ‘누구나 다 성불(깨달을 수 있음)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통현의 ‘화엄론’은 유교와 도교를 끌어다가 포용하고 있기도 하다.
두 번째, 화엄경은 대승불교 최고의 경전으로 선(禪)의 사상적 기반이며, 특히 돈오(頓悟·일거에 깨닫는 것, 또는 그 깨달음)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화엄의 사사무애관(事事無礙觀), 즉 법계연기사상(法界緣起思想)은 각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원융무애하게 공존한다고 하는 탈(脫) 영역, 탈 관념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데, 이것이 그의 기호 혹은 이상과 맞았다.
그가 자유롭게 불교와 유학, 노장학을 넘나들면서 세계관을 확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탄허 스님은 화엄사상이야말로 갈수록 복잡성을 띠며 심화되어 가고 있는 인간관계, 사회관계, 국제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미래사회의 대안이라고 보았다.
화엄경에는 뭐가 담겼나
화엄경은 대승불교의 정수로, 다양한 사상을 담고 있다. 예컨대 ‘금강경’의 경우 ‘공(空)’이라는 하나의 주제만 가지고 설명하는 데 비하여, 화엄경은 법신불(法身佛)사상·보살(菩薩)사상·유심(唯心)사상·법계연기(法界緣起)사상·정토사상 등 큰 주제만도 다섯 가지다.
법신불사상은 진리불(眞理佛)을 뜻하는데, 여기서 법신이란 진리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부처(佛)의 근원에 대한 규명,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역사상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은 ‘진리의 성취자’ ‘법신불의 화현자’로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으로 설명한다. 부처의 본신인 법신, 즉 진리는 법계(法界·온 우주 공간 및 심식세계를 총칭함)에 가득한 영원불변의 존재라고 설명한다. 화엄경은 부처의 근원인 법신불을 비로자나불로 형상화하고 있으며, 비로자나란 지혜의 광명이 온 세상, 즉 법계를 두루 비추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보살사상은 자비의 실천자인 보살의 무한한 중생 사랑을 뜻한다.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 아낌없는 자비로 중생이 원하면 목숨까지도 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자비정신으로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 또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마음으로 타인을 사랑하고 보살핀다면 이 세상은 낙원, 즉 불국토가 될 것이며, 동시에 보살로서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으로도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주문하고 있다. 보살을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위로는 진리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자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심사상은 만물의 주체에 대한 규명으로, 그것은 바로 내 자신 내 마음이라는 것을 뜻한다. 불교는 유물론이 아닌 유심론이다. 물질주의가 아니고 심본(心本)주의이다. 즉 모든 것, 모든 현상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으로,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말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행복과 불행도 마찬가지이지만, 괴로움과 즐거움도 모두 마음에 달린 것이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돈이 없다고 해서 불행하지도 않다. 한 예로 국민소득이 2만3000달러인 우리나라와 국민소득이 2000달러밖에 되지 않는 부탄의 행복지수를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행복지수에서 부탄은 세계 1위, 우리나라는 OECD 30위로 비교가 안 된다. 문제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의 대표학설, 사사무애관
정토사상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정토인 연화장 장엄세계(蓮華藏 莊嚴世界)에 대한 것이다. 줄여서 연화장세계 혹은 ‘화장세계’라고도 한다. 화장세계가 바로 극락세계이다.
법계연기사상의 법계(法界)란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이 우주공간, 그리고 심의식의 세계 전체에 대한 총칭이다. 모든 사물과 존재, 현상세계를 가리키며, 법계 속의 모든 사물은 각각 자기의 정체성과 본성, 영역을 갖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아무런 장애 없이 조화롭게 상호 공생,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네 가지 법계가 있는데, 청량징관(淸凉澄觀·738~839)은 사법계·이법계·이사무애법계·사사무애법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사법계(事法界)는 현상, 즉 사상(事象)의 세계를 가리킨다.
이법계(理法界)는 진리의 세계이다.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는 진리와 사상(事象)이 교류하고 융합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본체와 사상, 즉 이법계와 사법계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이다.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현상, 즉 사상(事象)과 사상이 교류, 융합하는 세계이다. 현상 그대로가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이다. 청량징관은 이 가운데 사사무애법계가 곧 ‘법계연기’라고 한다. 여기서 ‘무애’란 ‘둘이 아님’ 곧 ‘하나(一)’를 뜻한다.
사사무애관 곧 법계연기사상은 화엄철학의 여러 사상 가운데서도 가장 화엄을 대표하는 학설이다. 현상적으로 보면 천차만별로 각각 다르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화엄에서는 ‘인드라망(網·인드라, 즉 제석천의 그물)’이라고 한다.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아무런 장애나 불편 없이 상의관계 속에서 상생 공존하고 있다(圓融無碍, 相依相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첩되고 또 중첩되어 있다(重重無盡)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화엄의 세계관, 즉 개별성과 전체성을 화엄에서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는 함축적인 말로 표현한다.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라는 뜻이다.
예컨대 봄이 되면 정원에 갖가지 꽃들이 서로 뒤엉켜 있지만, 그들 사이에 다툼이라는 것은 없다. 분명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지만(相卽相入), 아무런 문제 없이 자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쩌다 거리에서 슬쩍 팔만 부딪쳐도 불쾌해 한다. 인상을 찌푸리고 심하면 살인까지 하지만 화단의 꽃들은 전혀 장애 없이(無碍) 각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상호 개개인의 세계(가치·능력·프라이버시)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공존해야 한다. 개별성(一)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전체성(多)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내가 본 탄허 스님
학문·참선 몰두… 명예·정치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
탄허 스님은 선(禪)과 교학을 겸비한 선승이었다. 항상 학문과 참선에 몰두했고, 명예 같은 것은 무가치한 것, 권력은 와각쟁투(蝸角爭鬪·달팽이 뿔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다)로 여겼다. 탄허 스님은 늦어도 새벽 2시 반쯤이면 일어나 좌선을 했다. 생활은 소탈·검소·겸손했고 절대 3배를 하지 못하게 했다. 권위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누구든 찾아오면 예의를 갖추어 맞이했고 손님이 가면 항상 문까지 배웅하셨다.
탄허 스님이 자신의 생애에 있어 설정한 목표는 도(道)였다. 도(道)와 하나가 되는 것 외에는 인재 양성과 불유도(佛儒道) 3교의 대표서인 ‘화엄경’ ‘역경(易經, 즉 주역)’ ‘노자도덕경’ ‘장자’를 완역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것만은 후학을 위하여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모든 것이 다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항상 미래를 이끌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것이 현실 속의 이상이었다.
또한 탄허 스님은 성인의 말씀이나 도(道)에 관한 글이 아니면 직접적으로는 쓰시지 않았다. 현재 일반서에 수록된 글이나 책들은 모두 당시 기자들이 취재한 것, 명사(名士)들과 대담한 것이다.
탄허 스님은 언론과의 대담을 통하여 향후 우리 사회, 또는 세계 정세나 지리적 변화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예언들을 많이 하셨지만 사실 그런 것은 탄허 스님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관심의 대상일 뿐, 탐구의 주제는 아니었다. 간혹은 사실 이상으로 부풀려지고 과장된 것도 적지 않다. 이런 것들 중 대부분은 한 훌륭한 종교자가 세상을 뜨고 나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윤색설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탄허 스님은 항상 인의(仁義)에 의한 왕도정치를 강조하셨다. 또 인위(人爲)보다는 자연을 중시했다. ‘장자’에 나오는 숙과 홀의 이야기(혼돈칠규·混沌七竅)와 7년 동안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던 양혜왕과 포정 이야기(庖丁解牛), 요임금과 허유, 원추와 올빼미, 와각쟁투, 뱁새와 비둘기, 지인(至人), 진인(眞人) 등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필자의 삶에 바탕이 되고 있다.
윤창화
1953년 강원도 출생. 오대산 월정사로 입산. 해인사 강원 졸업(13회). 18세부터 26세까지 7~8년간 탄허 스님을 시봉(侍奉·곁에서 침식과 수발을 받드는 제자)하면서 ‘신화엄경합론’ 출판 실무를 담당했다. 이후 환속하여 현재는 불교학술서 전문 출판사인 민족사 대표로 있다. 논문으로는 ‘해방 이후 역경의 성격과 그 의의’ ‘탄허 스님의 불전 역경과 그 의의’ 등이 있고, 저서로는 ‘근현대 한국불교 명저 58선’ 등이 있다. 관심 분야는 당송시대 선종의 생활문화다.
/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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