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음알이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헤아리는 마음이다. 머리와 지식으로 이해하고 분별하며 판단을 내리는 작용이다. 우리의 의식이란 상대적인 분별의식에 싸여 있기에 비교하고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남에게 상처를 줄뿐 아니라 스스로도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상대적인 분별심을 걷어내고 바로 스스로의 본래면목을 직시하려면 생각의 길이 끊긴 화두를 들어야 한다. 알음알이는 앎의 철저한 왜곡을 불러오는 그릇된 앎의 방식이다. 우리는 알음알이에 갇힌 삶의 상황과 한계에 대하여 참회하고 하심하면서 그것을 반드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큰 원력을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화두에 큰 의심을 일으켜 멈추거나 만족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화두 공부를 하면서 화두에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화두를 마음으로 헤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화두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알음알이가 병통으로 작용하여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이다.
『서장』에서 대혜 선사는 무자 화두를 예로 들어 알음알이에 대한 열 가지 병통을 말하고 있다.
우선 무자 화두의 내용을 보자.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선사가 답했다.
“무(없다).”
참선 수행자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 선사는 ‘어째서 무(없다)라고 했는가?’를 의심해 들어가 깨닫는 것이 무자 화두의 본령이다. 이런 무자화두를 공부하는데 나타날 수 있는 병에 대하여 예로부터 우리나라 선지식들도 많이 경계해 왔다. 특히 진각 혜심 선사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대혜 선사의 열 가지 병통에 대한 이해를 깊이 인식시켰다.
이제 이 열 가지 병통 하나하나에 대하여 여러 선사들의 말씀을 소개하겠다. 이는 화두 참선할 때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고 정진할 수 있는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그 열 가지 병통은 이렇다.
① 있다ㆍ없다로 이해하지 말라. (不得作有無會)
이는 무자 화두를 들면서 개에게 ‘불성이 있다’ 혹은 ‘없다’라고
헤아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헤아리는 순간 더 이상 진전은 불가능하다.
② 이치로 이해하지 말라. (不得作道理會)
이것은 화두에 무슨 현묘한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화두를 들 때 특별한 이론적 토대에 근거해서 화두를 이러니저러니
해석하고 분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화두를 들 때는 이치로 모색하는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어떤 도리나 개념의 맛도 사라진 상태가 화두의 본래 자리이기 때문이다.
③ 분별의식으로 헤아리거나 알아맞히려 하지 말라. (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참선을 하면서 생각으로 헤아려 해답을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두를 들면서 여섯 가지 분별의식인 육식六識으로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은
화두 공부의 큰 병통이다. 어떤 분별도 없어야 진정한 화두 공부이다.
④ 눈썹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박거리는 것에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不得向揚眉瞬目處?根)
이것은 조사가 보인 격외의 행동 곧 눈썹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박거리는 등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알음알이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마조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눈썹을 움직이고 눈을 깜박거리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러한 것이 옳고 때로는 옳지 않다. 그대는 어떠한가?
“我有時敎伊揚眉瞬目 有時不敎伊揚眉瞬目. 有時揚眉瞬目者是 有時揚眉瞬目者不是 子作麻生” 『馬祖語錄』
이렇듯 어떤 동작이나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도 이쪽저쪽 어느 한 쪽으로 확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이것인가 하면 저것이고 저것인 가 하면 이것이다. 이렇게 화두를 포착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빠져나가고 없다. 이것이 화두의 살아 있는 모습이다.
⑤ 말과 글의 틀로 살림살이를 짓지 말라. (不得向文字上作活計)
화두를 의심해야 한다는 말에 집착하여 화두에 담긴
문자상의 관념을 요모조모 분별하면서 생긴 병통을 말한다.
선지식이 준 화두를 의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화두의 언구에 사로잡혀 말과 문자상에서 이리저리
분별하거나 헤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⑥ 아무 일 없는 속에 빠져 있지 말라. (不得?在無事甲裏)
앞서 특정한 의미나 도리로 알려고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데서 마음을 쓰는 것보다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라고 해서 쉬고 쉬어 일 없는 적적하고 고요한 곳에서
화두를 들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면 이것도 병통이다.
화두도 들지 않고 일상적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고요한 경계에 빠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
⑦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알려고 말라. (不得向擧起處承當) 화두에 대한 의정을 간절히 일으키지 않고 참구하는 화두를
단지 의식으로 알려 하는 병통에 대한 지적이다.
곧 의정은 일으키지 않고 화두를 들어 알려고 하는 알음알이를 말한다.
⑧ 문자를 끌어와 증거 삼지 말라. (不得向文字中引證)
경전이나 어록 등의 문자를 끌어들여 입증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어느 학승의 물음에 운문雲門 선사는 ‘마른 똥막대기’라 했다. 단지 이 화두를 들고 의심해 가다가 홀연히 기량이 다 할 때 바로 깨닫게 된다. 결코 문자를 끌어들여 입증하고 넓게 헤아리고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비록 해석이 분명하고 말이 귀착되는 점이 있더라도 모두가 귀신의 집 안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과 같다.
“僧問雲門 如何是佛. 門云 乾屎?. 但擧此話 忽然伎倆盡時 便悟也. 切忌尋文字引證 胡亂博量注解 縱然註解得分明 說得有下落 盡是鬼家活計.” 『書狀』 『答呂郞中狀』
이렇게 경전이나 어록을 끌어들여 화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고 해석하거나 자기주장을 펴는 것도 병통이다.
⑨ 유무를 초월한 참된 무가 있다는 생각을 짓지 말라. (不得作眞無會)
있다(有)·없다(無)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참으로 없는 무無인 진무眞無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가 실체로서 존재한다거나 상대적인 유무를 초월한
무가 있다는 관념을 비판하는 말이다.
혜심 선사는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잘못 분별하여 유나 무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무로서의 무라고 한다. 『금강삼매경』에서는 “만약 무를 떠나 유에 집착하거나 유를 버리고 공에 끄달리면 참된 무가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비록 유를 여의더라도 공을 세우지 않는다. 모든 법의 진무眞無를 얻는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잘못 안배할까 염려하여 “참된 무로서의 무가 있다고 헤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又錯計云 不落有無 是眞無之無. 如金剛三昧經云 若離無取有 捨有從空 而非眞無. 今雖離有 而不存空 如是乃得諸法眞無. 恐如此差排 故云 不得作眞無之無卜度” 『狗子無佛性話揀病論』
⑩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 (不得將心待悟)
이것은 알음알이를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는 뜻이다.
의식적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깨달음을 기다리는 수행을 대오선待悟禪이라 한다.
의식적으로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린다면
이것은 스스로가 본래 부처임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의식적으로 깨달음을 기다리기 때문에
그런 알음알이를 갖고 있는 마음이 도에 나아가는 데 장애를 준다.
이렇게 스스로를 미혹한 존재로 보고 깨달음을 헤아리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것은 미혹을 가져다가 깨달음을 구하는 것과 같으므로
설령 무수 겁 동안 수행하더라고 결코 깨달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도 “깨닫고자 하는 그 마음이 고통을 주고 있다”고 하셨다. 대혜 선사도 “단지 깨달아 들어가고자 하는 그것이 도를 장애하는 알음알이인 줄로 알라(只遮求悟入底 便是障道知解了也)”고 했다. 그러면서 대혜 선사는 전도된 생각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알음알이의 장애를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과 스스로 깨치지 못했다고 말하여 달게 미혹한 사람이 되는 것과 미혹한 가운데서 의도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대혜 선사는 거듭거듭 의도된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미륵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까지 화두를 참구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며 미혹함만 더해 갈 것이라고 했다.
혜심 선사는 대오선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성인과 범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동일한 본분 자리에 서 있음을 믿는 것이다. 반신반의하는 믿음이 아니라 결정적인 믿음을 통하여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동하는 여기 이 자리에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상 열 가지 병통은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이 끊긴 곳에서 공부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 순일하게 화두를 지어 은산철벽을 투과하여 본분 자리와 계합하게 되면 활달자재한 대장부가 될 것이다.
상대적인 분별심을 걷어내고 바로 스스로의 본래면목을 직시하려면 생각의 길이 끊긴 화두를 들어야 한다. 알음알이는 앎의 철저한 왜곡을 불러오는 그릇된 앎의 방식이다. 우리는 알음알이에 갇힌 삶의 상황과 한계에 대하여 참회하고 하심하면서 그것을 반드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큰 원력을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화두에 큰 의심을 일으켜 멈추거나 만족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화두 공부를 하면서 화두에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화두를 마음으로 헤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화두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알음알이가 병통으로 작용하여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이다.
『서장』에서 대혜 선사는 무자 화두를 예로 들어 알음알이에 대한 열 가지 병통을 말하고 있다.
우선 무자 화두의 내용을 보자.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선사가 답했다.
“무(없다).”
참선 수행자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 선사는 ‘어째서 무(없다)라고 했는가?’를 의심해 들어가 깨닫는 것이 무자 화두의 본령이다. 이런 무자화두를 공부하는데 나타날 수 있는 병에 대하여 예로부터 우리나라 선지식들도 많이 경계해 왔다. 특히 진각 혜심 선사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대혜 선사의 열 가지 병통에 대한 이해를 깊이 인식시켰다.
이제 이 열 가지 병통 하나하나에 대하여 여러 선사들의 말씀을 소개하겠다. 이는 화두 참선할 때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고 정진할 수 있는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그 열 가지 병통은 이렇다.
① 있다ㆍ없다로 이해하지 말라. (不得作有無會)
이는 무자 화두를 들면서 개에게 ‘불성이 있다’ 혹은 ‘없다’라고
헤아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헤아리는 순간 더 이상 진전은 불가능하다.
② 이치로 이해하지 말라. (不得作道理會)
이것은 화두에 무슨 현묘한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화두를 들 때 특별한 이론적 토대에 근거해서 화두를 이러니저러니
해석하고 분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화두를 들 때는 이치로 모색하는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어떤 도리나 개념의 맛도 사라진 상태가 화두의 본래 자리이기 때문이다.
③ 분별의식으로 헤아리거나 알아맞히려 하지 말라. (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참선을 하면서 생각으로 헤아려 해답을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두를 들면서 여섯 가지 분별의식인 육식六識으로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은
화두 공부의 큰 병통이다. 어떤 분별도 없어야 진정한 화두 공부이다.
④ 눈썹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박거리는 것에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不得向揚眉瞬目處?根)
이것은 조사가 보인 격외의 행동 곧 눈썹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박거리는 등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알음알이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마조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눈썹을 움직이고 눈을 깜박거리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러한 것이 옳고 때로는 옳지 않다. 그대는 어떠한가?
“我有時敎伊揚眉瞬目 有時不敎伊揚眉瞬目. 有時揚眉瞬目者是 有時揚眉瞬目者不是 子作麻生” 『馬祖語錄』
이렇듯 어떤 동작이나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도 이쪽저쪽 어느 한 쪽으로 확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이것인가 하면 저것이고 저것인 가 하면 이것이다. 이렇게 화두를 포착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빠져나가고 없다. 이것이 화두의 살아 있는 모습이다.
⑤ 말과 글의 틀로 살림살이를 짓지 말라. (不得向文字上作活計)
화두를 의심해야 한다는 말에 집착하여 화두에 담긴
문자상의 관념을 요모조모 분별하면서 생긴 병통을 말한다.
선지식이 준 화두를 의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화두의 언구에 사로잡혀 말과 문자상에서 이리저리
분별하거나 헤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⑥ 아무 일 없는 속에 빠져 있지 말라. (不得?在無事甲裏)
앞서 특정한 의미나 도리로 알려고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데서 마음을 쓰는 것보다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라고 해서 쉬고 쉬어 일 없는 적적하고 고요한 곳에서
화두를 들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면 이것도 병통이다.
화두도 들지 않고 일상적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고요한 경계에 빠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
⑦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알려고 말라. (不得向擧起處承當) 화두에 대한 의정을 간절히 일으키지 않고 참구하는 화두를
단지 의식으로 알려 하는 병통에 대한 지적이다.
곧 의정은 일으키지 않고 화두를 들어 알려고 하는 알음알이를 말한다.
⑧ 문자를 끌어와 증거 삼지 말라. (不得向文字中引證)
경전이나 어록 등의 문자를 끌어들여 입증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어느 학승의 물음에 운문雲門 선사는 ‘마른 똥막대기’라 했다. 단지 이 화두를 들고 의심해 가다가 홀연히 기량이 다 할 때 바로 깨닫게 된다. 결코 문자를 끌어들여 입증하고 넓게 헤아리고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비록 해석이 분명하고 말이 귀착되는 점이 있더라도 모두가 귀신의 집 안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과 같다.
“僧問雲門 如何是佛. 門云 乾屎?. 但擧此話 忽然伎倆盡時 便悟也. 切忌尋文字引證 胡亂博量注解 縱然註解得分明 說得有下落 盡是鬼家活計.” 『書狀』 『答呂郞中狀』
이렇게 경전이나 어록을 끌어들여 화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고 해석하거나 자기주장을 펴는 것도 병통이다.
⑨ 유무를 초월한 참된 무가 있다는 생각을 짓지 말라. (不得作眞無會)
있다(有)·없다(無)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참으로 없는 무無인 진무眞無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가 실체로서 존재한다거나 상대적인 유무를 초월한
무가 있다는 관념을 비판하는 말이다.
혜심 선사는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잘못 분별하여 유나 무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무로서의 무라고 한다. 『금강삼매경』에서는 “만약 무를 떠나 유에 집착하거나 유를 버리고 공에 끄달리면 참된 무가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비록 유를 여의더라도 공을 세우지 않는다. 모든 법의 진무眞無를 얻는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잘못 안배할까 염려하여 “참된 무로서의 무가 있다고 헤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又錯計云 不落有無 是眞無之無. 如金剛三昧經云 若離無取有 捨有從空 而非眞無. 今雖離有 而不存空 如是乃得諸法眞無. 恐如此差排 故云 不得作眞無之無卜度” 『狗子無佛性話揀病論』
⑩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 (不得將心待悟)
이것은 알음알이를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는 뜻이다.
의식적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깨달음을 기다리는 수행을 대오선待悟禪이라 한다.
의식적으로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린다면
이것은 스스로가 본래 부처임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의식적으로 깨달음을 기다리기 때문에
그런 알음알이를 갖고 있는 마음이 도에 나아가는 데 장애를 준다.
이렇게 스스로를 미혹한 존재로 보고 깨달음을 헤아리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것은 미혹을 가져다가 깨달음을 구하는 것과 같으므로
설령 무수 겁 동안 수행하더라고 결코 깨달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도 “깨닫고자 하는 그 마음이 고통을 주고 있다”고 하셨다. 대혜 선사도 “단지 깨달아 들어가고자 하는 그것이 도를 장애하는 알음알이인 줄로 알라(只遮求悟入底 便是障道知解了也)”고 했다. 그러면서 대혜 선사는 전도된 생각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알음알이의 장애를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과 스스로 깨치지 못했다고 말하여 달게 미혹한 사람이 되는 것과 미혹한 가운데서 의도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대혜 선사는 거듭거듭 의도된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미륵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까지 화두를 참구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며 미혹함만 더해 갈 것이라고 했다.
혜심 선사는 대오선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성인과 범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동일한 본분 자리에 서 있음을 믿는 것이다. 반신반의하는 믿음이 아니라 결정적인 믿음을 통하여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동하는 여기 이 자리에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상 열 가지 병통은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이 끊긴 곳에서 공부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 순일하게 화두를 지어 은산철벽을 투과하여 본분 자리와 계합하게 되면 활달자재한 대장부가 될 것이다.
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CD굽던노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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