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알기

[스크랩] 자아의식의 정화

수선님 2019. 1. 27. 12:05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법화삼부경중의 본경(本經)입니다.  

묘법연화경(Saddharmapundarika-Sutra 삿다르마 푼다리카 - 수트라, 흰 연꽃처럼 훌륭한 가르침)이란, 석가모니 세존께서 중인도의 마가다국 라자그리하(왕사성) 교외의 영축산에서 <무량의경>을 설하신 후 긴 삼매에 드셨다가 그 삼매로부터 깨어나 설하신 경입니다.

이 법화경은 중국으로 전해져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가 서기 286년에 <정법화경(正法華經)>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했고, 요진(姚秦)의 구마라집이 서기 406년에 <묘법연화경>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으며, 수(隋)나라의 사나굴다가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구마라집이 전역한 <묘법연화경>은 문장이 명쾌하고 뜻이 투철하다 하여, 그 교리를 이해하는 데에 이를 널리 쓰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이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을 풀이한 계환(戒環)의 주해본(註解本)을 서기 1463년 조선왕조 제7대 왕인 세조(世祖)가 간경도감에서 <금강경>, <능엄경>, <아미타경>, <원각경>과 더불어 우리말로 번역한 언해본(諺解本)이 현존하여 <법화경>의 이해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묘법연화경>의 묘법(Saddharma)이란, ‘위대한 사람의 가르침’ 또는 ‘가장 높은 뜻을 가진 가르침’ '진리당체'라는 형용사이며, 연화(pundarika)란, 백련(白蓮) 즉 ‘흰 연꽃’을 말합니다.

백련은 더러운 흙탕물(번뇌를 비유) 속에서 꽃을 피우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뿐 아니라, 꽃의 수명은 짧습니다. 다시 말해 꽃은 머지않아서 지고 말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움과 동시에 그 속에 열매도 함께 갖추고 있는 꽃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현실(現實)로 비유되고 열매는 이상(理想)으로 비유되는데, <법화경>의 내용은 다름 아닌 ‘제법실상(諸法實相)’ - ‘현상과 걸맞게 중첩되어 있는 그 배후의 실재’라고 하는 ‘실상’을 파악하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법(諸法)이란, 일체사물 즉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실상(實相)이란 무량의경에서 말한 실상을 뜻하는데,

“무량의(無量義)는 하나의 법에서 나며 그 하나의 법은 곧 무상(無相)이라.

이와 같은 무상은 상(相)이 없고 상(相)이 아니다.

상(相)이 아니며 상(相)이 없음을 실상(實相)이라 하느니라.

그 수많은 무량한 가르침(천차만별의 가르침)도 근원적으로는 하나의 진실에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단, 하나의 진실이란 일체의 차별이 없고(無相), 차별을 짓지 않는 것(不相)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차별을 떠난 근본적인 실재야말로 모든 것을 존재케 하며 활동케 하는 하나의 진리, 즉 법이며, 이것을 실상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을 말합니다.

번뇌라든가 더러운 흙탕물이라는 현실적인 모습 속에 더러워지지 않는 깨끗한(淸靜) 진실이 깃들어 있음이 이 백련화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하여튼 ‘제법과 실재’,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갖춘 백련화처럼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것에 가르침의 참뜻이 있으므로 이름하여 <묘법연화경> 즉, ‘위대한 흰연꽃의 가르침’ 또는 ‘백련처럼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석가모니세존께서 깨달으신 실상 즉, 공성(空性)을 지성적이며 이론적인 현실 부정의 견지에서 설명한 것이 <반야경>이라면, 그 위에 감성적이며 실천적인 방법을 첨가하여 정적인 이성을 활성화 시킨 것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석존께서 통찰하신 우주의 실상은 오직 부처님만이 깨달으신 유일한 진실이므로, 그것은 마치 귀 울림처럼 그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것으로 말로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 상태의 설명이 바로 그 존재 자체는 아니며, 그 상태가 지닌 특징과 행위를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존재 상태는 하나의 경험이며, 존재 상태를 설명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상징과 존재는 동일한 법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실재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언어가 그 실재를 설명하는데 부적합하기 때문에, 때로는 상상에 호소하는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혹은 ‘드라마(劇)’화 하기도 합니다. 즉 체험은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실재를 파악 하는가’를 말함으로써 각자로 하여금 그 체험을 소유케 하기 위해, 석존께서는 무한한 자비심으로 자세히 여러 비유와 상징으로 자신이 깨달으신 그 진실을 이 <법화경>을 통해 설법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님께서 공양하시는 것을 보고 “스님 그 죽이 맛있습니까?” 하고 묻자, 스님께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숟갈로 죽을 떠서 그 사람에게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설명만으로는 알 수 없고 직접 먹어봐야만 맛이 어떤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이 지성적이고 이론적이며 현실 부정적인 것만으로는 진실에 접근(무상의 깨달음에 도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께서는 자신이 체험한 더없이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꼭 같이 체험하도록 하기위해 평등대해(平等大慧)의 자비 - 즉, 자타가 일체라는 무아의 경지에서 베푸는 자비행의 실천적인 인간의 정념(正念)에 호소하여 말나식(末那識, 제7식,나 라고하는 자아의식을 말함)의 정화 방법을 설하시게 된 것입니다.

법화경은 현상과 실재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즉 현상과 중첩되어 있는 실재, 현상과 실재를 부정하되 그 양자를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려서 파악하는 조화 또는 원융(圓融)의 방법을 가르치신 것이 이 법화경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실천의 경전이고, 행(行)을 하는 보살을 가르치는 경전이며, 부처님께서 가장 소중히 하시는 경전임을 거듭거듭 천명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즉 실천을 통해서 무명무지(無明住地)의 번뇌를 본래의 청정심(淸淨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해탈법문이므로 말나식(意)의 정화에 있습니다. 이것을 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면 자정기의(自淨其意)하게 된다는 시제불교(是諸佛敎)로서 불교의 대의(大意)이며 정의(定義)입니다. 즉 악한 행은 짓지 말고 선한 행을 많이 하게 되면 자연히 말나식(業)이 정화된다고 모든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법화경>도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므로 오로지 보살도라는 행을 통해서 선업을 쌓으므로 원초무명(原初無明)인 말나식을 정화하여 성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여기서 간단히 말나식 등 유식학에 대하여 다시한번 짚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8개의 식(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1식-안식(眼識)-색깔을 봄

제2식-이식(耳識)-소리를 들음

제3식-비식(鼻識)-냄새를 맡음

제4식-설식(舌識)-맛을 봄

제5식-신식(身識/觸識)-감촉을 느낌

제6식-의식(意識)-分別識, 분별을 함

제7식-말나식(末那識)-思量識, 판단을 내림

제8식-아뢰야식(阿賴耶識)-異熟識/藏識/種子識 업(業)의 저장, 차생의 결정

제5식까지는 단순한 감각 기관에 불과합니다. 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스스로 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색깔을 보고 향기를 맡고 맛을 아는 것은 이 5개의 식이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5개의 식을 모두 합쳐 전5식(前五識)이라고 합니다.

제6식인 의식은 전5식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를 분별합니다. 즉 '색깔이 노랗다', '냄새가 독하다', '맛이 좋다' 등을 분간합니다. 또 제6식은 전5식과는 관계없이 스스로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상상 등이 그것입니다. 이 6개의 식은 근본이 되는 식이므로 6근(根)이라도 부릅니다. 또 앞의 전5식과 합쳐 전6식(前六識)이라고 합니다.

전6식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즉 가치중립의 상태인 것입니다.

문제는 제7식인 말나식입니다. 이 식은 사량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6식이 분별해 놓은 정보를 사량하고 판단하여 구체적인 행위를 결정합니다.

누가 나를 때렸을 때 제5식인 신식(身識)이 촉감의 정보를 제6식으로 전달하면 제6식은 '아프다'라는 분별을 합니다. 그러면 바로 제7식이 헤아려 활동을 합니다.

'윽, 누가 나를 때렸지? 아니 저 자식이! 좋아 한판 붙어주지, 까짓 거.' 그리고는 코피가 터져라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을 하게 되던가, '아이고, 무서운 놈이구나, 도망가자.' 하고는 36계 줄행랑을 치던가를 결정하는 겁니다.

제7식이 사량하여 결정하는 것은 매순간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의 24시간 모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6식과 제7식의 활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7식의 행위는 업(業)이 되어 제8식인 아뢰야식에 고스란히 저장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비행기의 블랙박스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들의 '운항기록'이 기억되어 저장됩니다. 그래서 8식을 장식(藏識)이라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우리는 죽게 됩니다. 비행기처럼 추락하기도 하겠지요. 일단 몸이 소멸하면 몸에 붙어 있던 5개의 감각기관이 사라지고 제6식도 사라집니다. 전6식이 사라지면 당연히 전6식을 근거로 활동하던 제7식인 말나식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제7식까지 사라지면 지금까지 숨어 있던 제8식인 아뢰야식이 나타납니다. 아뢰야식은 육신이 소멸되어도 우리가 생전에 지은 행위의 결과인 업(業)을 씨앗처럼 품고 있기 때문에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합니다.

이 식은 49일 동안 중음(中陰)을 헤매다가 자신의 업에 따라 다시 새로운 모태(母胎)를 찾아가게 됩니다. 수정란에 아뢰야식이 들어가면 태아는 성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뢰야식의 영향을 받아 이제는 역으로 제7식이 생기고 차츰 몸이 갖추어지면서 나머지 6개의 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아뢰야식은 깊이 숨어버립니다. 이상이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 불교 유식론(唯識論)입니다.

* 제7식 말나식(末那識)

앞에서 우리는 8개의 식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그 중 우리가 제일 관심을 가져야 할 식이 제7식인 말나식입니다. 우리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바로 이 식을 통하여 나오고 그 결과가 업이 되어 저장되기 때문입니다.

업에는 선업(善業)과 악업(惡業) 그리고 무기(無記)의 3종류가 있습니다. 선업과 악업은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무기는 선도 악도 아닌 업을 말합니다. 밥을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또 하늘이 파랗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무기 역시 업이기 때문에 제8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선업이나 무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업은 악업입니다. 악업이야말로 무명(無明)의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악업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몸으로 짓는 악업[身業], 말로 짓는 악업[口業], 마음으로 짓는 악업[意業]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3업이라고 합니다. 3업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몸으로 짓는 것(3가지) - 살생, 도둑질, 사음.

말로 짓는 것(4가지) - 거짓말, 사기 치는 말, 이간질 하는 말, 악한 말.

마음으로 짓는 것(3가지) -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 모든 악업을 합하면 10가지가 되므로 10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3업은 악업을 짓는 기관을 분류한 것일 뿐, 근본을 들여다보면 모두 제7 말나식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몸 자체가 도둑질하는 것이 아니고 입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나 입은 제7 말나식의 도구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이 깨졌을 때, 그 책임은 던진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돌멩이에게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말나식이 항상 판단을 잘 하여 선업을 짓는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명에 가려진 아뢰야식에 의지해 활동하는 말나식은 우리의 판단을 항상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무명으로 가득 차 있는 아뢰야식에 의지해 판단하는 것이 말나식입니다. 이것은 마치 볼록거울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볼록거울은 어느 쪽으로 보아도 사물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말나식의 생각을 바로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볼록거울에 비친 사물의 모습을 원래의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이 말나식은 참 나가 아닙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참 나의 탈을 쓴 거짓 나일뿐입니다. 만일 이 말나식이 참 나라면 이 세상에 범죄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참 나는 악업은 물론이고 선업조차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7 말나식은 항상 제8 아뢰야식을 참 나, 즉 나의 본체라고 고집[我執]하고 사량합니다. 그래서 항상 '더럽고 끈질긴 4가지 버릇'인 〈4번뇌〉를 일으킵니다.

1. 아치(我癡) ― 나의 참된 실상을 알지 못하는 미혹한 어리석음.

2. 아견(我見) ― 실제로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소견.

3. 아만(我慢) ― 나를 믿는 마음이 너무 높아 거만한 것.

4. 아애(我愛) ― 나라고 애착하는 것. 자애심(自愛心)

또한 5변행(五遍行)>은 이 4번뇌와 함께 하는데 오변행이란, 온갖 마음의 현상에 반드시 따라 일어나는 5종류의 심리 작용을 말합니다.

1. 촉(觸) ― 마음과 대상과의 인식론적인 접촉.

2. 작의(作意) ―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생각.

3. 사수(捨受) ― 그 대상이 자기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면서도 좋지도 싫지도 않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는 것.

4. 상(想) ― 그 대상을 추상화하는 관념적인 생각.

5. 사(思) ― 그 대상을 마음대로 구성하려는 생각.

말나식을 설명하다 보니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나 4번뇌니 5변행이니 하는 것들은 다 잊어버려도 상관이 없습니다. 단 하나, 제7식 말나식이 곧 자아를 일으키는 왜곡된 생각이라는 것만 기억하기 바랍니다.

초기설명때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이 말나식을 가지고 아상을 없애나가는것입니다.

이 7식이 아상을 일으키기도하지만 아상을 없애주는 도구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7식으로 "나무묘법연화경"을 봉창함으로서 묘법과 계합합니다.

바로 이 말나식을 정화하여 성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가르친 위대한 경전이 <묘법연화경>입니다.

출처 : 진리
글쓴이 : 청아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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