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

[스크랩] 대지도론 205. ★ 2선/3선/4선/무색계 4선에 들어가는 요령

수선님 2019. 2. 10. 11:48

[문] 각과 관은 한 법인가? 두 법인가?

 

[답] 두 법이다. 거친 마음으로 처음 생각하는 것을 각이라 하고,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종을 쳤을 때 처음의 소리가 큰 것은 각이요,

나중에 소리가 가늘어지는 것은 관이라 할 수 있다.

 

[문] 아비담에서는 말하기를 “욕계로부터 초선에 이르기까지 한마음에 각과 관이 있어 상응한다” 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말하기를 “거친 마음으로 처음 생각하는 것은 각이요,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은 관이다” 하는가?

 

[답] 두 법이 한마음에 있기는 하지만 두 모습이 함께하지는 않는다.

각이 있을 때는 관이 분명치 않고, 관이 있을 때는 각이 분명치 않다.

 

마치 해가 떴을 때 뭇별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일체의 심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게 되는 것도 그러하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만일 한 법을 끓는다면, 나는 그대가 아나함(阿那含)36)을 얻게 됨을 보증하노라” 하셨다.

 

한 법이라 함은 곧 간탐(慳 貪)이거니와 실제에는 5하분결(下分結)을 다 끊어야 아나함을 얻는다 해야 할 것이어늘 어찌하여 “한 법만 끊으면 된다”고 말씀하셨겠는가?

 

곧 이 사람은 간탐에 치우침이 많아서 다른 번뇌가 모두 따라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탐이 끊어지면 다른 번뇌도 끊어진다 하신 것이다.

  
  
  
36) 범어로는 anāgāmin.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한다. 두 번 다시 욕계에 태어나지 않는 경지이다.
[672 / 2071] 쪽
 
각과 관이 때에 따라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이와 같다.

 

수행자는 이 각과 관이 비록 좋은 법인 줄은 아나,

집중된 마음[定心]을 어지럽히기에 마음에서 그것을 여의기를 원한다.

 

때문에 이 각과 관을 꾸짖어 생각하기를 ‘각과 관이 선심(禪心)을 요동시킨다’ 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맑은 물에 파도가 치면 비치지 못하는 것 같으며,

또한 몹시 피로한 사람이 쉴 틈을 얻어 자려 하는데 곁의 사람이 부르면 갖가지로 어지러워지는 것 같으니,

마음을 거두어 속으로 안정시키는데 각과 관이 흔들어 어지럽히는 것도 이와 같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으로 각과 관을 꾸짖어 각과 관이 멸하면

내적으로 청정해지고 마음을 한 곳에 매어두어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집중[定]에서 생겨나는 기쁨이 있는 경지인 제2선에 들어간다.

 

2선을 얻은 뒤엔 2선에서 일찍이 얻어보지 못했던 비할 바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각과 관이 멸한다고 함은 각과 관의 허물을 아는 까닭에 멸한다는 것이다.

 

내적으로 청정해진다고 했는데,

곧 깊은 선정에 들어가서 초선의 각과 관을 버림으로써 얻는 이익이 매우 중하며,

잃는 바가 매우 적고 얻는 바가 많고 큼을 믿어서

마음을 한 대상에 매어 두기 때문에 안으로 청정해지는 것이다.

 

수행자가 기쁨의 허물을 관찰함도 각과 관의 경우와 같다.

기쁨이 있는 곳을 따라 기쁨도 많고 근심도 많다.

 

왜냐하면 마치 가난한 사람이 보물을 얻어 기쁨이 한량이 없다가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면

그 근심 또한 깊은 것 같으니, 기쁨은 곧 근심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기쁨을 버려야 하니,

따라서 ‘생각을 버리는 지혜[捨念智]’를 행하여 이번에는 몸의 즐거움[身樂]을 받는 것이다.

 

이 즐거움은 성인만이 얻을 수 있고 버릴 수도 있나니, 전일한 마음을 즐거운 곳에 두어 제3선에 들어간다.

  
[673 / 2071] 쪽

버린다 함은 기뻐하는 마음을 버리고는 다시 후회하지 않는 것이요,

지혜라 함은 이미 3선의 즐거움을 얻고는 그 즐거움에 대하여 근심을 내지 않는 것이요,

몸의 즐거움을 받는다 함은 이 3선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모두 받는 것이요,

성인이라야 능히 얻고 능히 버린다 함은 이 즐거움이 세간에서 으뜸가는 것이어서

능히 집착하는 마음을 내게 하므로 범부로서는 버리는 이가 적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비를 행하는 과보는 변정지(遍淨地) 가운데 제일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수행자는 즐거움의 허물을 관찰하기를 기쁨의 허물을 관찰하듯이 한다.

마음이 요동치 않는 곳이 제일인 줄 아나니, 만일 움직이는 곳이 있다면 이는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수행자는 제3선천의 즐거움이 요동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곳을 구한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끊고 먼저 근심과 기쁨을 멸하니,

때문에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생각을 버리고 청정한 경지인 제4선에 들어간다.

 

이 4선에는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오직 요동치 않는 지혜만이 있다.

이런 까닭에 제4선을 ‘생각을 버린 청정한 경지’(捨念淸淨)라고 하는 것이다.

 

 

제3선의 즐거움은 움직이기 때문에 괴롭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제4선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끊어진 곳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색상을 초월하여 다른 상을 생각하지 않고 대할 수 있는 상[有對相]을 멸해 무변허공처(無邊虛空處)37)에 들어간다” 하셨다.

 

이때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색이 없다면 주림ㆍ목마름․추위․더위의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 몸의 색은 거칠고, 무겁고, 가리어지고, 악하고, 거짓되고, 속이고, 진실 되지 않다. 전생부터의 인연이 화합해서 과보로 이 몸을 받았으나 갖가지 괴로움이 머무는 곳이다. 어찌하여야 이 몸의 근심을 면할 수 있을까. 이 몸에 대해 허공을 관해야 하리라.’
  
  
  
37) 범어로는 ākāṡānantyāyatana-samapatti)를 가리킨다. 공무변처(空無邊處)라고도 한다.
[674 / 2071] 쪽
  

항상 관하기를 ‘몸은 새장[籠] 같고, 시루[甑] 같다’ 하며,

항상 생각하기를 ‘버리지 않으면 색계를 건너서 다시는 몸을 보지 않게 된다’ 한다.

 

몸 안이 공하듯이 밖의 색도 그러하나니, 이때에 능히 한량없고 가없는 허공을 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관(觀)을 얻으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어서 그 마음이 더욱 늘어나나니,

마치 새가 병 속에 갇혔다가 병이 깨지면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이것을 공처정(空處定)이라 한다.

이 공은 한량이 없고 끝이 없어서 식(識)을 그 대상으로 삼나니, 대상이 많으면 곧 흩어져서 선정을 깨고 만다.

 

수행자는 허공의 반연[虛空緣]인 느낌[受]․생각[想]ㆍ지어감[行]․분별[識]을 병 같고, 종기 같고, 상처 같고, 가시 같아서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고, 속이는 것이어서 화합하면 있을지언정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서는 허공의 대상을 버리고 다만 식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연하는가?

 

곧 현전의 식을 반연하고, 과거ㆍ미래의 한량없고 끝없는 식을 반연하나니, 이 식은 한량없고 끝이 없다.

마치 허공이 한량없고 끝없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일컬어 식처정(識處定)38)이라 한다.

 

이 식은 한없고 끝이 없어 식으로써 반연하나니, 식이 많으면 흩어져서 선정이 깨어진다.

 

수행자는 이 식의 대상인 느낌․생각․지어감․분별이 병 같고, 종기 같고, 상처 같고, 가시 같아서 무상하고, 괴롭고, 나 없고, 속이는 것이어서 화합하면 있을지언정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이렇게 관찰하고는 식의 모습을 깨뜨리나니, 이는 식처를 질책하고 무소유처(無所有處)39)를 찬탄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모든 식의 모습을 깨뜨리고 무소유에 마음을 매어 두니, 이것을 무소유처정이라 한다.

 

무소유처의 대상인 느낌․생각․지어감․분별은 병ㆍ종기ㆍ상처ㆍ가시 같아서

괴롭고, 공하고, 나 없고 속이는 것이어서 화합하면 있을지언정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님을 관찰한다.

  
  
  
38) 범어로는 vijñānantyāyatana.
39) 범어로는 ākiñcanyāyatanaṃ.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관찰해 얻는 경지’를 말한다.
[675 / 2071] 쪽

이와 같이 사유해 보건대, 생각 없는 곳은 종기 같고, 생각 있는 곳도 병․종기․상처․가시와 같으니,

제일 묘한 곳은 바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40)가 된다.

 

 

 

대지도론 205. ★ 2선/3선/4선/무색계 4선에 들어가는 요령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해탈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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