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스크랩] 8식..일체의 사물과 정신계가 성립되는 업력을 제공하고 전달하는 심식

수선님 2019. 2. 24. 12:50

자업자득 (自業自得)

자업자득이란 자기가 저지른 일의 과보(果報)를 자기 자신이 받음이란 뜻이다.

업의 발현(發現) 방법은 <자업자득(自業自得)>과 <업과(業果)의 필연성>을 철칙으로 한다. 자기 스스로의 행위의 과보(果報)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며, 현세에서가 아니면 내세 혹은 그 뒤의 생(生)에 나타난다고 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고방식은 현실사회의 불평등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 불평등을 내세에서 회복하여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심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으며, 왜 선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근거도 제시하고 있다.

 

 

아라야식,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업력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 각자가 찰나찰나 행동을 통하여 조성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업력은 즉각 과보를 받도록 하기도 하고 또 미래에 과보를 받도록 하기도 하는데

이들 업력이 어디에 보존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들이

 

   눈(眼識).    귀(耳識).       코(鼻識).    혀(舌識).   

   몸(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으로 여러 가지 행동을 하며 생활하는데 그 행위로 말마암아 조성되는 업력은 어디에 보존되었다가

다음에 과보를 받도록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을 내세운다.

 

아라야식은 인간의 몸(五根)과 인간의 행동으로 조성되는 선업과 악업 등 모든 업력과

그밖에 인간이 사는 사회까지도 잘 포섭하고 섭지(攝持)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전생의 업종자(業種子)와 자신의 몸(五根)과 그리고 자신이 살게되는 세계(器世間)을 능히 유지시키고 변화시키며, 또 이 세상에 출생한 후에도 자신의 업력을 보존하고 몸과 마음을 유지시켜 주며 동시에 이 세상이 건전하게 유지해 가도록 하는 것은 모두 아라야식이 한다.

 

출생할 때 몸과 종자와 세간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과능변(果能變)이라고 하며 이를 아라야식의 과상(果相)이라고 한다. 그리고 출생 전이나 출생 후에도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몸과 업력과 세간을 유지시키는 모든 원인을 제공하는 것을 아라야식의 인상(因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부른다.

 

일체종자식이라는 말은

일체의 사물과 정신계가 성립되는 업력을 제공하고 전달하는 심식(心識)이라는 뜻이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이 종자식은 일체의 선업과 악업인 유루업(有漏業)과 동시에 수행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청정한 업력인 무루업(無漏業)을 모두 간직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종자식은 칠전식(七轉識)이 훈습한 종자를 잘 보존하고 섭지하였다가 인연을 만나게 되면 곧 그 종자로 하여금 그 중생이 사는 현재 생활에 나타나게 하고, 그 중생이 사는 현상계(現象界)도 변현(變現)하게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변현이라는 말은 업력의 주인공이 사는 세계를 스스로의 업력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는 자신이 창조하면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전생의 업력으로 자신과 사회를 창조하여 나타났고, 또 현재 사는 자신과 사회도 자신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에 의하여 창조되어 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모든 주체는 여러 심식 가운데서 오직 아라야식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에 이상과 같은 기능이 있기 때문에 이를 라야연기(賴耶緣起)라고 한다.

즉 모든 정신계와 물질계는 오직 아라야식으로 말미암아 연기(緣起)되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연기라는 말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과 종자는 이에 부합하는 연을 만나서 결과 즉 과보를 생기(生起)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연을 만나야 결과를 발생하게 된다.

 

만약 업력이 연을 만나지 못하면 항상 그대로 아라야식에 보존되게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연은 결과에 대한 역할이 업력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 인(因)과 연(緣)은 과(果)를 가져오게 하는데 평등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과 연은 결과에 대하여 반반씩 힘을 가하여 과보가 초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종자가 있다면 그 종자는 흙과 물 등 자연적인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발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때의 종자는 말할 것도 없이 업력이고 또 흙과 물 등 자연적인 조건은 연이 된다.


이상과 같이 항상 인과 연이 부합되어야 하는데 이 인과 연은 결과에 대하여 동등하게 역할을 한다. 인만 있어도 안 되고 연만 있어도 안 되며 인과 연과 과가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 못지않게 연도 중요한 것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 한 사람의 마음과 육체를 청정하게 하는데 그 사회의 환경이 많은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 환경은 그 사람에게 모두 연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은 인식의 대상인 객관계와 자연계를 연으로 하여 성장할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가 모두 연이 되어 준다.

 

그리하여 환경은 그 사람이 성장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자신 속에 있는 아라야식의 종자가 좋게 싹이 트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정교육과 사화교육 등 모든 교육도 연이 되는데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연을 만나 자신의 아라야식에 있는 종자가 잘 자라는 것은 자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도리는 무궁무진한 진리이며 심오한 경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를 창조라고 한다.

 

악인(惡因)이 선연(善緣)을 만나면 중성적인 선과(善果)를 맺을 수도 있고 반대로 선인(善因)이 악연(惡緣)을 만나면 중성적인 악과(惡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는 모두 연기의 도리이며, 동시에 창조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는 아라야식 내에 있는 종자를 여의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모든 것의 총인(總因)이라 하며 동시에 아라야식에 모든 원인이 있다는 뜻으로 인상(因相)이란 별명을 붙이는 것이다.

 

 

 아라야식(阿賴耶識)과 업력(業力)보존

 

아라야식은 모든 법을 발생시킬 수 있는 원인을 보존하고 또 원인이 되어 주기 때문에 인상(因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모든 종자를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도 유실하지 않기 때문에 종자식(種子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종자식이라는 별명은 앞으로 과보를 가져올 종자를 보존할 수 있는 심식은 오직 아라야식뿐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종자와 아라야식과 불가분한 관계를 갖고 있다.

 

 

  

(1) 인과(因果)의 동일성(出體門)

 

인과의 동일성은 업인의 체성이 뚜렷하여 동일성의 업과를 분명하게 가져오도록 하는 인과사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정의는 ‘모든 종자는 제8아라야식 가운데에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친히 자과(自果)를 출생시키는 공능(功能)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뜻을 보면 종자는 오직 아라야식에만 보존되는 것이며, 소승부파(小乘剖破)인 경량부(經量部)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 등에 함께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업력은 몸에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야식에만 보존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자는 변화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하는 출체문은 업인과 결과가 동일한 인과응보를 초래하는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즉 인이 선이면 과보도 선이고, 인이 악이면 과보도 악과이다 라는 인과법칙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인과 악인은 동일한 과보를 받게 하였으면 그 과보는 비록 선과와 악과의 상태로 나타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과보 자체는 무기성(無記性)임을 강조하고 있다.

 

무기성은 선성(善性)도 아니고, 악성(惡性)도 아닌 성질을 뜻한다. 이들 내용을 전문적으로 표현한 것을 요약하여 보면 업인은 선악이지만, 과보는 무기성(因果善惡, 果是無記)이다 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과보는 표면상으로는 선과 악의 차별이 있지만 그 과보의 내용인 정신의 바탕은 평등하다는 말이다. 정신의 바탕이 평등하다는 것은 누구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자각(自覺)의 본성이 있다는 말이며, 자각의 본성이 있는 까닭에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면 새로운 경지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사상은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고 근면하게 생활하면 무엇이든지 새로운 환경을 창조할 수 있음을 뜻한다.


 

(2) 아라야식과 종자와의 밀접한 관계[一異分別門]

 

종자는 아라야식(Alayavijnana)을 비롯하여 모든 심식과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종자는 인이 되고 식의 현행(現行)은 과가 된다.

여기서 현행이란 말은 현재의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식의 현행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로부터 발생한 결과로서 이를 과라고 한다.

동시에 식의 현행은 또 결과이면서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에 업이 되며, 이 업은 미래의 결과를 가져올 세력을 구비한 채 하나의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에 보존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가리켜

 

종자는 식의 현행을 발생하고 (種子生現行), 식의 현행(活動)은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 내에 훈습하고 보존하게 된다(現行熏種子)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이 종자와 심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서 이를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리는 아라야식과 종자와의 사이에 더욱 두텁게 나타난다.

 

아라야식은 본체가 되고 종자는 작용이 되며, 종자는 원인이 되고 아라야식 내에서 의식을 통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는 현행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자와 아라야식 그리고 종자와 모든 심식의 현행 등의 관계가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불가분리하다.

 

그런데 이들 종자는 아라야식 안에 있으면서 아라야식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인이 되고, 아라야식의 활동은 결과가 되는 진리가 있다. 아무리 만물의 근본이 되고 또 만물을 창조하는 아라야식이라고 할지라도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라야식도 그 체성은 영원한 진리의 성(性)에 해당하지만 그 위에서 활동하는 범부의 마음은 인과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유루심에 속하기 때문에 무루심이 나타날 때까지는 인과법에 얽매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3) 종자의 가실을 밝힘[假實分別門]

 

유식학에서 업력에 해당하는 종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임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쟁이 많았다.

 

종자가 임시인 것이며 동시에 가(假)라고 주장한 학파는 공종(空宗)이다.

 

이들 공종을 대표하는 청변(淸辯)이라는 학자는 업력인 종자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모든 사물은 생겨났다가(生), 잠시 동안 머물러 있게 되고(住), 그리고 변천하여(異), 없어지는 것(滅)과 같기 때문이다.

 

즉 종자도 생, 주, 이, 멸의 과정을 밟는 것이기 때문에 임시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의 병(甁)은 본질이 있다.

그 본질은 불교에서 말하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등 사대(四大)의 원소(色素)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와 같이 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대(四大)의 인(因)에 의하여 만들어진 병은 결과(果)가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본질인 색소와 만들어진 병은 서로 불가분리(不可不二)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병은 무정(無情)이며 동시에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임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법(萬法)의 원인인 종자(種子)도 가법(假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주장한 공종의 논리에 대하여 유식종(唯識宗)에서는

그 논리를 달리하여 일체의 만법은 종자에 의하여 창조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만법에는 진여성(眞如性)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종자와 진여는 불가분리(不一不二)한 관계 속에 만법이 존재하므로 그 종자는 가법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식종의 주장을 더 말해 보면, 만약 종자가 가법이라면 진여도 가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진여가 가법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진리라고 내세우는 불성(佛性)과 진승의제(眞勝義諦)와 열반과 성불 등도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을 창조하는 종자는 실유성(實有性)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유식종과 공종의 견해 차이가 있어 왔는데, 유식종에서는 종자의 실재(實在)를

주장하며 진여와도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유식종은 종자가 실재하는 것이며, 그 종자에 대하여 정신계와 물질계가 연기(緣起)되어지며 또 창조되어진다고 하였다.


 

(4) 종자(種子)의 진속(眞俗)관계[二諦分別門]

 

종자는 만물의 원인이 되며 창조의 근원이 됨을 밝히는 것이다.

즉 세상을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진제는 진리적 성(性)을 의미하고 속제는 현상계의 속성(俗性)을 뜻한다.

 

그러나 이들 두 진제와 속제는 이론상 둘로 표현할 뿐이지 실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물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眞)은 단독적으로 진일 수 없고, 속(俗)은 단독으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즉 진은 속에 의한 진이고, 속은 진에 의한 속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진제가 성립하면 속제도 성립하고, 속제가 성립하면 진제도 성립한다.

이는 곧 진과 속이 둘이 아님을 말한 것이며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 속에 진리가 운영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들 내용을 예로 표현하면, 마치 손수건으로 토끼를 엮어 만든 것을 토끼라고 하는, 실물의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손수건을 토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손수건은 본질인 진제에 비유하고 토끼의 모습은 속제에 해당하는 현상계에 비유한 것이다. 토끼와 손수건이 둘이 아니듯이 진제와 속제도 둘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는 만법과 진여가 불가불리(不卽不離)한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비유인 것이다.

 

동시에 종자도 만법과 진여와도 불가불리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5) 마음의 인식작용과 업력(業力)의 보존[四分分別門]

 

아라야식에는 사분의 작용이 있다.

물론 그밖에 모든 심식에도 사분작용이 있다.

 

사분이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등을 말한다.

 

이들 사분은 식(識)의 내용과 활동을 분류한 것으로서

 

   상       분은 외부의 현상을 식의 안에서 꼭 같은 모습으로 현상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견       분은 그 상분에 영상으로 나타난 모습을 상대하여 인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자  증 분은 견분의 역할이 틀림없는지에 대하여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뒤에서 증명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 등 심식에는 네 가지 작용이 있는데 이러한 작용 가운데 종자는 어떤 작용에 의지하고 또 보존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는 법상종(法相宗)에서는 호법논사(護法論師)의 이론에 따르고 있다. 호법의 이론에 따르면 종자는 사분(四分) 가운데 자증분에 포섭(包攝)된다고 하였다.

 

선업종자와 악업종자 등 온갖 종자는 식의 중심인 자증분에 보존되었다가 다시 의식(意識) 등 여러 심식을 통하여 온갖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만물이 생각 속에 떠오르게 되며 또한 육체적인 행동까지도 야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종자는 아라야식의 자체(自體)에 해당하는 자증분에 의존하였다가 연(緣)을 만나면 즉시 상분에 나타나게 되며 의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마음의 현상은 상분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나타나는 모든 삼라만상은 상분에 포섭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분은 객관계의 현상을 나타내주는 의식 속의 객관계이며 인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외부의 삼라만상도 상분을 통하여 의식 속에 나타나며 의식 속에 나타난 모든 영상을 견분이 견조(見照)하여 선악을 구별하고 고락을 감지하게 도니다.

 

그러므로 아라야식 가운데의 모든 종자는 현상계의 사실로 나타난다고 볼 때 그 소재처(所在處)는 상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상분은 식체(識體) 안에서 견분의 반연처이면서 또한 인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루종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루종자는 어디에 보존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 말하면 위에서 말한 종자는 선악의 행위에 의하여 조성된 유루종자를 말한다.

 

이와 같이 청정하지 못한 유루종자가 유루식(有漏識)의 주체인 아라야식에 보존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청정무구한 행위에 의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어디에 보존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유루식과 무루종자의 성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무루종자는 염오(染汚)된 아라야식에 의존하지 않고 아라야식의 체성(體性)에 의존하여 보존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의 현상(現相)은 유루식이지만 본래 지니고 있는 체성은 곧 진여성이며 또한 불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를 유식종에서는 유식성이라고 부르는데 이 유식성은 곧 진여성으로서 식의 실성(實性)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부정한 마음에 해당하는 유루식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히 본성(本性)이 되는 실성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유식의 실성과 무루종자는 그 성질이 같고 또 잘 융화가 되기 때문에 모든 무루종자는 유식성에 의존하며 보존하게 된다.

 

무루종자가 유식성에 보존되었다가 만약 청정한 수행으로 무루(無漏)의 마음이 나타나면 청정한 견분인 정견(淨見)을 나타나게 하고 또 청정한 상분을 나타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만약 무루위(無漏位)에 오르면 염오성(染汚性)이 퇴치되고 식의성(識性)인 무루성이 청정한 사분에 해당하는 정분을 야기하게 된다.

 

이때의 무루종자는 무루견분(無漏見分)과 무루상분(無漏相分)을 야기시키는 힘이 되며 무루의 견분은 또 무루의 상분을 상대로 관조(觀照)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유루종자는 유루(有漏)의 아라야식의 자증분에 보존되어 있다가 상분을 통하여 정신계의 현상을 나타내며 식의 성에 보존되어 있다가 수행자의 무루심을 통하여 무루의 견분과 무루의 상분으로 나타나게 된다.


 

(6) 선악종자와 무루종자의 보존[三性分別門]

 

아라야식 안에는 선(善)의 업력과 악(惡)의 업력 그리고 무기(無記)의 업력이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업력(業力)인 종자가 아라야식 안에 보존되어 있는데, 무루의 종자와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매우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선의 종자와 악의 종자 그리고 무기의 종자 등 이른바 삼성종자(三性種子)는 그 성질이 변하여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이숙종자(異熟種子)이다.

 

그러므로 이들 세 가지 성질을 가진 종자들은 아라야식의 별명인 이숙식에 능히 보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숙식은 무기성(無記性)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숙무기성(異熟無記性)인 이숙식에는 선, 악, 무기 등 삼성종자가 보존되어 있다가 앞으로 연을 만나게 되면 그 결과로 나타나며 또한 과보를 받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을

 

   섭용귀체문(攝用歸體門)과

   성용별론문(性用別論門) 등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로 한다.


첫째,

섭용귀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라야식은 체(體)이고 종자는 용(用)이다.

 

유루종자는 유루식인 제8아라야식과 더불어 그 체성이 서로 다르지 않으므로 피차의 성질과 종류(性類)가 함께 유루에 속한다. 유루라는 말은 번뇌가 있고 선과 악의 종자에 의하여 선악의 과보를 받는 등 변화무쌍한 염오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뜻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청정치 못한 부정의 성질을 유루라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과 종자는 꼭같이 유루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 있으며 동시에 종자는 용(用)으로 포섭되어 삼체(體)인 아라야식에 귀의(歸依)하여 무기성에 섭장(攝藏)하게 된다.


둘째,

성용별론문은 종자인 작용(用)과 제8아라야식인 체(體)를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 내용을 말하면 능히 활동하면서 종자를 훈습하는 칠전식(七轉識)과 종자로부터 출생하는 현재의 행위(現行)가 선악 등 삼성(三性)에 서로 통하므로 종자도 동일하게 선과 악과 무기성에 통한다.

 

그러나 무루종자의 체성은 오직 선(唯善)뿐이다.

이 선은 곧 절대선(絶對善)을 뜻하며 절대선을 수행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선과 악이 상대되는 상대선(相對善)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그러므로 같은 선이라 할지라도

 

   상대선은 유루선이라 하고

   절대선은 무루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절대선에 의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그 성질이 독특하여 유루성이 있는 아라야식의 상분에 보존되지 않고 무루성인 아라야식의 성(性)에 보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무루종자는 무엇이든지 정화할 수 있는 능대치(能對治)의 성질을 갖고 있으나 아라야식의 인과성(因果性)은 오직 무기성이며 동시에 정화되어야 할 소대치(所對治)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루종자는 일반적인 선악업종자와는 달리 아라야식의 이숙무기성에 보존되지 않고 아라야식의 청정무구한 진여성에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서 모든 업종자가 비록 아라야식에 보존된다고 하도라도 무루종자와 유루종자와의 보존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일리있는 학설이며 동시에 진리에 맞는 논리인 것이다.

 

 

(7) 선천적인 업력과 후천적인 업력[新熏本有分別]

 

위에서 업력의 보존관계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들 업력과 종자는 선천적으로 존재하여 그 업력의 지배하에 중생이 윤회하고 또 과보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중생 각자가 이승에 출생하면서 후천적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업력이 조성되어 있는 것에 의하여 중생들이 업보를 받고있다고 한다면 이는 숙명론 또는 운명론에 떨어지는 인과사상이 될 것이다. 반대로 이승에 출생하여 비로소 업력을 조성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 업력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면 전생에서 금생에 출생하기 전까지의 업력을 어디서 구하느냐가 문제된다.

 

 

 

 

 종자(種子)의 성질과 육의(六義)

  

종자는 곧 업력의 뜻이며 업력은 인간의 행위를 비롯하여 중생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다는 것을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조성된 종자는 미래의 과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데

 

그 종자의 내용에는 여섯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여섯 가지 의미는

 

   첫   째, 종자는 찰나찰나 생멸을 반복할 수 있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둘   째, 종자는 미래의 결과를 발생하면서 그 결과와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셋   째, 종자는 항상 지속적이면서 발전적이어야 한다.

   넷   째, 종자는 선악의 성질이 분명하여야 한다.

   다섯째, 종자는 여러 인연을 기다렸다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

   여섯째, 종자는 자신의 성질과 꼭 같은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종자는 여섯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종자육의(種子六義)라고 한다.

이들 종자육의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찰나 생명의 성질[刹那生滅義]

 

종자는 찰나에 생멸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윤회의 법과 그리고 유위(有爲)의 법은 찰나에 생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유식학에서는 찰나생멸(刹那生滅)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종자는 무상하게 변화하는 사바세계와 중생의 선과 악 또는 고통과 안락 그리고 생과 사 등의 현상계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찰나찰나 생과 멸을 되풀이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생멸의 법을 창조하는 만법의 종자는 그 자체도 생멸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식학의 주장이다. 만약 생멸이 불가능한 종자라면 찰나에 생멸하는 만법을 발생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찰나에 생멸하는 종자만이 만법을 연기(緣起)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진여법(眞如法)과 무위법(無爲法) 등 상주하는 불생불멸의 진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주불변의 무위법은 무루종자만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동시의 인과[果俱有義]

 

인과가 동시에 존재하여야 한다.

이것을 유식학에서는 과구유(果俱有)라고 한다.

 

아라야식 내의 종자는 인간의 정신계와 육체의 행동을 능동적으로 발생하는 능생(能生)의 원인이다.

능생의 원인에 의하여 발생되는 결과도 동시에 발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자는 현재의 행동과 현상을 발생하는 종자임과 동시에 그로부터 나타나는 행동과 현상은 바로 결과가 되며, 이 결과는 또 다시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 안에 보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종자에 대해서 결과가 되며, 동시에 업력이며 종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과 동시의 연기법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과구유라 한다.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만약 앞에 훈습된 종자가 시간의 간격이 있게 되면, 그 종자와는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비진리적인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과는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리고 전후가 없는 현재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3) 동일한 성질의 유지[恒隨轉義]

 

종자는 반드시 그 성질이 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 보존되어야 한다.

 

이를 항수전(恒隨轉)이라고 한다.

항수전은 앞과 뒤의 변화가 없이 항상 그 성질을 유지시켜 가면서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지속성이 없다면 인과의 도리에서 벗어나 원인없는 결과(無因有果)를 초래하는 인과의 무질서를 가져올 우려가 있게 된다.

그리고 원인은 있어도 결과가 없는 유인무과(有因無果)의 잘못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종자는 제8아라야식 안에서 영원히 그 성질이 변하지 않고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지속성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그 종자를 잘 보존하는 지종(持種)의 뜻을 살려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여러 식 가운데 오직 아라야식만이 가능하다고 하며 다른 식들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가령 제7말나식은 최고의 수행위인 금강심위(金剛心位)에 오르면 염오식(染汚識)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전5식(前五識)은 항속(恒續)의 의미가 없어지며, 제6의식은 오위무심(五位無心)의 경우에 단절되는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말식(枝末識)은 종자를 지속시키지 못하는 흠이 있게 된다.

 

오직 아라야식만이 종자를 보존할 수 있고, 또 그 종자는 선의 내용과 악의 내용 등 자체의 성질을 변함없이 지속시키는 이른바 일류상속(一流相續)의 성질을 갖도록 하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4) 성질의 분명성[性決定義]

 

종자는 아라야식 가운데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그 성질이 잡란(雜亂)치 않고 일정해야 한다.

이를 성결정(性決定)이라고 하며 종자는 성질이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전7식이 활동하고 현행(現行)하는 내용이 선행(善行)이라면, 이 선행의 업력이 아라야식 안에 보존될 때도 선성(善性)의 종자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동의 성질과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훈습되어지는 종자도 선성과 악성, 그리고 무기성 등 삼성(三性)의 성질 가운데 어떤 성질을 갖고 있던 간에 그 성질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어야 함을 뜻한다.


 

(5) 조연의 기대[待衆緣義]

 

종자는 위에서 말한

 

   찰나멸(刹那滅),    과구유(果俱有),    항수전(恒隨轉),    성결정(性決定)

 

가지 뜻을 구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종자에 대한 조연(助緣)이 없으면 결과를 발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종자든지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으면서 연(緣)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유식학에서는 대중연(待衆緣)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因)은 연(緣)을 만나야 과보를 발생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 연은 바로 만날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서 만나기도 하여 그 연이 도래할 때까지의 그 인의 연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과 연이 화합하여야 과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를 발생하는 데는 인만이 단독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도 과에 대해서 인 못지 않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관찰할 때 인(因)과 연(緣)은 과(果)에 대해서 평등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연의 내용을 보면 안으로는 여러 심식을 비롯하여 경각심(警覺心) 등 작의(作意)의 정신작용(心所)과 심식의 의지처인 근(所依根)과 그리고 인식의 대상이며 객관세계에 해당하는 육경(六境) 등이 모두 연에 해당한다.

 

이들 연은 아라야식 내에서 종자들끼리 서로 연이 되어 생동하고 있는데, 이들 인을 상대로 하여 결과를 발생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연은 인에게 조력하여 과보를 받도록 하는 역할을 하며, 그리고 연은 인과 과와의 관계를 매우 밀접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타종교에서 오직 하나만의 원인(原因)이 다른 연의 도움없이 즉흥적으로 결과를 발생한다는 이론을 배격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발생적인 창조설을 부인하고 유일신(唯一神)적인 창조설에 해당하는 일원론(一元論 )을 배격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6) 종자와 과보의 동질성[引自果義]

 

종자에는 각각 선성과 악성 그리고 무기성 등 여러 성질의 종자가 있다.

이러한 종자의 성질에 따라 결과의 성질도 동일하게 정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말하여 인자과(因自果)라고 한다.

인자과라는 말은 선의 종자는 선의 과보를 받도록 하고 악의 종자는 악의 과보를 받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성격의 결과를 초인(招引)함을 인자과라 한다.

 

이러한 인과의 법칙은 여러 가지 성질의 종자에 의하여 여러 가지 현상계의 모습과 개체를 조성하고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종자는 만유(萬有)의 제법을 창조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유일한 원인이 만물을 창조한다는 외도(外道)들의 삿된 사상을 배격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불교 이외의 종교와 사상을 외도라고 하는데, 이 외도들은 우주 안에는 유일신이 삼라만상을 창조하였다는 학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 편 하나의 원리(一因)가 다양한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배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안에 있는 삼라만상이 유일신에 의하여 창조되었거나, 또는 유일한 원리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일인(一因)이 많은 결과(一因多果)를 창조하게 되는 비진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인다과설을 배격하고 다인다과설(多因多果說)을 주장하는 것이 곧 불교의 인과설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종자의 성질은 다양한 것이며 동시에 다양한 결과를 발생시키고 또 창조하는 원동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종자는 반드시 위에서 설명한 여섯 가지 의미(種子六義)를 구비하고 있다고 한다.


 

4) 만법(萬法)은 유식(唯識)

 

위에서 종자에 대한 여섯 가지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종자에는 내종(內種)이 있고 또 외종(外種)이 있다고 한다.

 

내종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종자로서 위에서 설명한 육의(六義)를 구비하고 있는 종자를 말하고 외종은 자연계에 생성하고 있는 곡식(穀麥) 등을 말한다.

 

이들 외종은 아라야식에서 발생한 공종자(共種子)를 의미하기 때문에 종자의 육의(種子六義)를 구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계(八識界)를 떠나 밖에 있는 종자라고 하더라도 아라야식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계의 외종을 비롯한 모든 사물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공종자에 의하여 변현(變現)되고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인간의 정신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공종자란 말은 자기 혼자만의 이용물이 아니고 여러 중생과 더불어 공동으로 이용하는 사물과 환경을 발생하는 종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진실한 종자(實種子)가 아니다.

 

그러므로 공종자는 우선 가명으로 종자라고 할 뿐이며 실제의 종자가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종자는 결과에 대하여 북돋아 주는 증상연은 되어도 직접 결과를 발생시키는 친인연의 역할은 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종자의 육의가 구비한 종자만큼 직접적인 역할을 못하고 간접적인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단변(單變)중변(重變)이라는 말이 있게 된다.

 

단변은 친히 변현시키는 친소변(親所變)의 상분(相分)에 해당하며 이 상분은 또 제8아라야식의 상분으로서 이를 내종(內種)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상분은 내종에 해당한다.

이러한 아라야식의 내종은 직접적인 아라야식의 상분을 변현하기 때문에 이를 단변(單變)이라고 한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이 단변에서 다시 변현하여 외부의 현상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이를 중변(重變)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는 외부의 현상계를 변현시키는 종자라는 뜻에서 외종(外種)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종자에는 여러 가지 성질의 것이 있고 또 밖으로 결과를 발생할 때도 이중적인 변화를 얘기하기 때문에 이를 분류하여 단변 또는 중변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그리고 그 종자도 자신의 수용물을 발생하는 것을 불공종자(不共種子)라 하고 동시에 여러 중생들이 함께 수용하는 사물과 자연계를 발생하는 종자를 공종자(共種子)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내용을 달리 분류하여 내종과 외종으로 분류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종자에 대한 논리들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는 진리를 설명하고 또 확인시키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5) 생명체와 물체를 이끄는 업인(業因)


내종(內種)과 외종(外種) 그리고 단변(單變)과 중변(重變)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생인(生因)과 인인(引因)도 단변과 중변의 내용과 흡사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생인과 인인은 또 다른 독특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생인에 대해서 말해 보면 글자 그대로 결과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이 생인으로부터 발생하는 결과(果)는 여러 가지 과보 가운데 가장 근본을 이루는 과보로서 이를 근과(近果)와 정과(正果)로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무성논사(無性論師)는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비유하여 생인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생인은 십이연기 가운데 식(識)을 발생하는 업인이 되는 것이며 이 식을 근과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금생에 출생하는 식이 전생의 생인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이고 또 가장 가까운 인연관계를 맺고 있는 결과라는 뜻에서 말한 것 같다.

 

세친논사(世親論師)는 이를 정보(正報)라고 하였으며 식물에 비유하면 곡맥(穀麥) 등이 종자에서 직접 발생하기 시작한 그 자체를 생인이라고 하였고 동시에 이는 내종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아무튼 이 생인이라는 것은 종자 자체가 발생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을 비유하여 내종이라 하고 같은 결과이지만 종자와 근접한 것을 근과 또는 정보라고 한다.


다음 인인은 앞에서 말한 근과와 정보라는 것과는 달리 원과(遠果) 또는 잔과(殘果)를 발생하는 업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인을 외종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인간이 출생할 때 최초로 태어나는 생명체를 정보라 하고 그 위에 이목구비 등 여러 형상이 구비되는 것을 별보(別報)라고 한다.

 

이와 같이 과보를 발생시키는 종자의 이름도 별명이 있게 되는데, 정보를 발생한 종자를 생인이라 한다면 별보를 발생시키는 종자의 힘을 인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인에 의하여 발생되는 별보를 원과 또는 잔과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곡맥(穀麥) 등이 발아하여 그로부터 성장하는 줄기, 가지, 잎, 꽃 등은 모두 인인에서 발생하여 성장하며 이들을 말하여 원과, 잔과 또는 별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인을 외종이라고도 부른다. 그 뜻은 내부의 과보보다 외부의 과보를 발생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인인은 더욱 확대 해석되어 외부의 세계에 나타나 있는 모든 사물까지도 유지시켜 주는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것은 세친의 주장으로서 가령 외부에 있는 수목이 수명이 다하여 고목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고목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있으면서 점점 썩어질 때까지 남아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식목이 다 없어질 때까지 무엇이 유지시켜 주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체는 유루의 업력에 의하여 존재하고 유지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친논사는 수명이 다한 고목도 인인에 의하여 없어질 때까지 유지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초목들은 생인과 인인에 의하여 생존하며 고목과 같은 것은 인인에 의하여 없어질 때까지 유지된다.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시체와 다른 잔재가 일시에 없어지지 않고 점차 부패되어 조금씩 없어지는 것은 인인의 힘에 의하여 그 몸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종자론(種子論)에서 일체의 삼라만상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에 의하여 창조되어지고 또 유지된다는 말을 더욱 보충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만을 중심하여 설명하면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물과 식물은 물론 수명이 다한 시체와 고목 등 목석도 종자의 인력(引力)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1) 불공종자(不共種子)와 공종자(共種子)

 

종자는 내종(內種)과 외종(外種)이 있다고 하였다.

리고 생인(生因)과 인인(引因)으로도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또 종자를 불공종자와 공종자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내종과 외종 등의 역할과 흠사한 점이 없지 않으나 좀더 자세하고 광범위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과보와 공동의 과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불공종자(不共種子)의 내용을 보면 불공종자는 글자 그대로 공동의 업력이 아닌 개인적인 업력으로서 자신만이 과보를 받고 또 자신만이 수용하고 이용하는 과보를 받게 하는 종자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정신계는 말 할 것도 없고 적어도 몸의 과보를 받게 하는 종자를 불공종자라고 한다.

 

다음 공종자(共種子)는 공동사회와 공유물을 창조하는 종자를 뜻한다.

 

중생이 어디에 출생하든지 그곳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게 된다. 다른 생명체와 같이 살 때는 공동으로 생활하는 사회가 있고 또 공동으로 활용하는 사물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공동의 사회와 공동의 물체 그리고 공동의 자연계는 무엇이 창조하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는 각자의 공종자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것이다. 중생 각자의 몸은 업력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여지는데 공동의 사회와 자연계 등 공유물의 연기(緣起)설은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공동의 사회와 공동의 사물은 공동의 업종자(業種子)에 의하여 유지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진리에 입각하여 종자설도 확대 해석하게 된다. 왜냐하면 종자란 마음을 중심한 행동에 의하여 창조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하여 유지되는 업력과 종자는 스스로 몸을 포함한 공동의 사회까지도 유지시킬 수 있어야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종자를 논할 때 종자는 모습이 있는 과보와 결과를 창조한다고 해서 모습과 직결시켜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공상종자(共相種子)와 불공상종자(不共相種子) 등이 그것이다.

 

즉 상(相)은 모습을 뜻하며 그 모습은 만유의 모습을 유지시키는데 바탕이 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종자에게 모습의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공업(共業)과 사회(社會)

 

위에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내용을 알아보았다.

 

아라야식이 인간의 모든 내용을 형성할 수 있는 진체의 업력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총보(總報)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아라야식으로부터 모든 정신에 해당하는 일곱 가지 마음(七轉識)과 여러 정신작용(五一沈)이 형성되고, 또 육체의 부분이 하나하나 형성되는데 이들을 모두 별보(別報)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뿌리에서 가지와 줄기가 자라나듯이 아라야식이라는 근본식(根本識)에서 지말식(枝末識)과 육체가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원만히 형성되면 인간으로서 정신적인 행위와 육체적인 행위가 시작된다. 삼계와 육도 가운데 인간계(人道)의 과보를 받고 인간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여러 중생의 종류 가운데 인간계에 태어나서 살도록 하는 업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습을 구비하고 인간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둘 것은 업력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 자신의 몸과 마음만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세계도 창조하게 한다.

자신이 사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신이 사는 세상을 유지시키는 업력을 발생하면서 태어남을 말한다. 이를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공업은 그 사회를 공동으로 유지시키는 업력을 말하는데 가령 한국에 사는 사람은 한국을 유지시키는 업력을 발휘하여 한국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뿐 아니라 한국 내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공업을 발생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 등 자연계까지도 원만하게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세계에 사는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이 악화된다면 그 사회는 물론 자연계도 악화되어 고통스러운 세계로 변하며 심지어는 자연계가 파괴되는 결과까지도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업은 공동질서를 유지하는 힘을 뜻하는데 그 공동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무질서해지면 공동사회도 필연적으로 무질서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생태계는 뭇 생명체가 발생하는 공업력으로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의 행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행위는 자신에게만 한하는 업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개인에 한하는 업력은 불공업(不共業)으로서 불공업은 자신의 생명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나타나는 공업은 이와 다르다.

 

공업은 공동사회를 형성해가는 사회적인 힘이다.

그 힘을 표현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업력은 다음의 결과를 반드시 가져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업력은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오는 불공업이 있는가 하면 공동사회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공업이 있다.

 

이러한 업력은 이 세상에 출생할 때부터 발휘하게 되는데 업력의 사상을 알고보면 그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조심성이 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혼자만의 행동이 아니라 남과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공업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개인질서와 더불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인과법은 중생의 질서를 잡아주는데 있다.

 

이 질서를 유지하는 인과법을 믿지 아니하면 불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유식학에서는 인과법을 믿지 아니하면 신자가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믿음(信)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의 덕성(佛德)을 신앙하고,

 

둘째는

인간의 청정자성(佛性)과 자연에 포함된 진여성(眞如性)에 해당하는 실성(實性)을 신앙하며,

 

셋째는

모든 인과는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공능함을 발휘하는 공능(功能)을 신앙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의 신앙은 인과법칙을 신앙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은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는 인과법을 확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신앙하지 않게 되면 행동이 거칠어지고 행동이 거칠면 자신의 불행은 물론 사회에도 불행을 가져다주는 인과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행동은 원인이 되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행해지는 개인과 사회는 결과가 된다.

 

동시에 모든 삼라만상도 자체의 공능과 진여의 세력이 있음을 신앙하는 것이다.



마음의 행위

이상과 같이 인과는 곧 개인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칙이 되는 것이며 그 인과를 조성하고 창조하는 원동력은 마음이다.

 

마음은 모든 선과 악을 결정하여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의 내용은 각양각색이어서 한편으로는 보살심(菩薩心)을 발휘하여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마음인 아집(我執)과 모든 것을 혼자만 가지려는 욕심(我所)이 앞서는 마음이 있다.

 

아집과 소유욕이 강하게 나타나는 마음은 제6의식에서 보통 나타나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심층심리에서 충동질하는 제7말나식에 원인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말나식으로부터 보살심을 방해하고 여러 진리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장애하는 무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명은 모든 것이 평등한 진리이며 주관과 객관계가 통일된 본성을 망각하고 나타나는 무지를 뜻한다. 본래 본성은 자기와 다른 사람과 통할 수 있고 모든 진리와 연결되는 바탕으로서 이기심이 아니라 자비심의 바탕이기도 하다.

 

이를 무아성(無我性)이라 하며 무아성은 곧 자타(自他)가 없으며 모든 생명체를 내 몸과 같이 생각하는 불심이다.


이러한 무아를 진아(眞我)라 하며 진아는 나 가운데 가장 참된 나를 가리킨다.

 

우리는 나라고 할 때 육체만을 나라고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7말나식에서 나타나는 아집을 앞세우는 나를 말할 때가 많다.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내가 제일이라는 아만(我慢)과 나만을 사랑하는 아애(我愛)를 앞세운 나를 가리키는 때가 많다.

 

이는 완전히 본래 지니고 있는 참된 자아를 망각한 아치(我痴)의 소산으로서 이를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은 또 불성 및 진여성에 해당하는 참된 자아를 망각한 심리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아치라고 한다. 동시에 본심에서 반대의 마음으로 돌아서 무지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해서 이를 전도심(顚倒心)이라고 한다.

 

전도심은 모든 것을 반대로 생각하며 행동하도록 충동질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행위에 따라 육체의 행위도 결정되기 때문에 마음의 수행이 선행하지 않는 한 육체의 행위도 정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마음을 고치도록 하고 그 마음을 고치는데는 염불과 참선을 닦아야 한다는 등 부단한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염불과 참선만이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의 무명과 아집과 아애와 아만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문제는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그 마음의 병은 자신만이 고칠 수 있을 뿐이며 어떤 성자도 고쳐줄 수 없다고 한다.

 

스스로 무명을 야기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수행하여 그 마음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eastandsouth
글쓴이 : 동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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