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스크랩] 8식의 自相...alaya..

수선님 2019. 2. 24. 12:50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자상(自相)

아라야식의 자상은 이 식의 총체(總體)를 의미한다.

 

유식론에 의하면 자상은 총체이고 과상과 인상은 별체(別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자상은 중생들의 선업과 악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의 뜻도 가지고 있고, 또 중생들이 지은 선업과 악업의 업인(業因)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의 뜻도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아라야식 자상은 과상과 인상의 내용을 가지고 자체(自體)를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상과 인상을 떠나서 따로 자상을 이야기 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제 아라야식의 자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야(alaya)는 본래 인도말인 범어(梵語)로서 장(藏)이라고 한역(漢譯)하였다.

 

장(藏)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업력들을 감싼다는 뜻에서 포장(包藏)이라는 뜻도 있고,

   또 업력들을 포함시키거나 보존한다는 뜻에서 함장(含藏)이라는 뜻도 있으며,

   그리고 정신과 육체 등 모든 것을 포섭하여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섭지(攝持)라

 

하며 동시에 무엇이나 잘 포섭한다는 뜻에서 포섭(包攝)이라는 뜻도 있다.

 

이와 같이 아라야에는 다양한 뜻이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정신의 체성이라는 뜻을 부가하여 아라야식(alaya-vijnana)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아라야식의 자체를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렇게 분류한 것은 앞에서 설명해 온 7식(七識)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과의 관계를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다.

 

이들 삼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① 능장(能藏)

능장이라 함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능히 포섭하여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업력이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등 7식이 선행과 악행 그리고 선행도 아니고 악행도 아닌 그 중간의 무기행(無記行) 등 온갖 행동을 곧 업(業)이라 한다.

 

그리고 이 업에는 반드시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세력과 힘이 있다는 뜻에서 힘력(力)자를 부가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이 업력은 또 종자(種子)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종자(씨앗)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는 뜻을 따서 호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업력을 종자라고 별명을 붙여 부를 때가 많은데 특히 아라야식과 관계되는 업력들을 종자라고 보통 부른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전7식이 행동하여 조성한 업력,

즉 종자를 능히 포장하여 보존한다는 뜻에서 능장(能藏)이라 한다.

 

이러한 능장의 뜻은 중생들이 행동으로 조성하는 모든 업력을 하나도 밖으로 유실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이는 자업자득의 법칙에 의하여 자기가 지은 업력에 대하여 자신이 받도록 해 주는 정신적인 주체가 곧 아라야식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전7식이 조성한 종자와의 관계에서 능장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모든 종자는 소장(所藏)의 입장이 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능동적으로 종자를 포섭하여 유지시키는 입장이 되고 또 이때의 종자는 수동적인 입장으로 아라야식에 의하여 포섭되어지고 포장되어지는 입장이 되므로 이를 소장(所藏)이라 한다.

 

여기에 능장과 소장의 상대적인 뜻이 있다.


② 소장(所藏)

소장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는 달리 아라야식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종자를 포섭함을 뜻한다.

 

그리고 반대로 전7식이 조성한 선악업(善惡業)의 종자는 오히려 능동적인 입장에서 아라야식에 보존되고자 해서 포섭되므로 이들 종자를 능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칠식의 모든 정신과 육체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라야식에 들어가서 스스로 보존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큰 창고가 화물이 들어와 쌓아도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듯이 종자를 맞이하므로 이때의 아라야식을 소장(所藏)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능장과 소장은 서로 불가분리한 이치에 의하여 이름한 것이다.


③ 집장(執藏)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것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위에서 말나식을 설명할 때, 말나식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망각하고 아라야식의 견분(見分) 등 아라야식을 집착하는 번뇌를 항상 야기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아라야식은 항상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며, 또 집착을 당하는 입장의 뜻을 집장(執藏)이라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집장은 그 행위에 입각해서 능집(能執) 또는 소집(所執)이라고 하는데 능집은 말나식이 능히 아라야식을 집착함을 말하고 소집은 반대로 아라야식이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진 뜻을 따서 명칭을 정했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수동적으로 소집의 입장에 있는 집장(執藏)의 뜻이 있다.

 

이 집장의 뜻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 소장의 뜻도 중요하지만 아라야식이 윤회의 주체로서 범부심(凡夫心)이라는 대명사를 붙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뜻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집장의 뜻이 아라야식에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의 뜻도 범부의 성질과 인과의 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집장의 뜻을 제거하는데 많은 수행과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인 능장, 소장, 집장의 뜻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을 망식(妄識)으로써 윤회하도록 만드는데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말나식과의 관계로서 말나식이 집착함을 내지 않았다면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의 고해(苦海)에 윤회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과 말나식과의 집장의(執藏義)는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왜 집착심을 야기하게 되었는가?

 

이는 매우 부사의한 경지이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어떤 물건을 내놓듯이 보여 줄 수는 없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대 학자들은 이를 비유로써 설명하고 또 그 실상을 알려 주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한 비유를 여기에 소개하여 집장의 뜻을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다.


본래 아라야식의 실성(實性)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지니고 있었다.

아공이란 본래의 자아는 아집의 번뇌가 없는 공한 진리의 위에 정립되어 있음을 뜻한다.

 

공한 진리는 곧 진리의 실성(實性)을 뜻하며 그 진리의 실성은 아무런 집착될 여지가 없는 중도적 존재이다. 있는 듯 하면서도 없고 없는 듯 하면서도 항상 있는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원리 위에 존재하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실성은 항상 무아(無我)의 진리이며 나라고 집착(我執)할 수 없는 공(空)한 이치가 곧 아공의 진리이다.


안에서도 공(內空)하고 밖에서도 공(外空)하며 안과 밖이 동시에 공(內外空)란 진리를 항상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라야식의 실성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공한 진리에 의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부사의한 신통력을 항상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원경지의 진리를 착각하여 고정된 자아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말나식의 아집이다.     

 

다음 아공과 더불어 아라야식의 자체의 법체도 공한 것이다. 아라야식의 자체는 여러 가지 인연의 화합으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한 이치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삼라만상도 공한 진리 위에 개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법공(法空)의 논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등의 집착할 까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아집과 더불어 인연의 취집(因緣聚集)의 법을 망각하여 집착(法執)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만법(萬法)이 공한 이치를 설명하고 증명해 주기 위하여 사물의 바탕은 일미진(一微塵)이라는 비유를 많이 든다.

즉 미진은 무형(無形)의 존재이면서 유형(有形)의 사물을 형성하는 본질이다.

 

왜냐하면 미진은 극소의 존재이므로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개체로 형성되기 이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진이 하나하나가 인연이 되어 모이면 크고 작은 유형의 사물로 나타나게 된다.

 

또 그 사물이 인연이 다 되어 없어지면 다시 미진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미진과 사물은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으며 미진을 떠난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며 무와 유가 공존한 것이 현재의 사물인 것이다.

그러나 보통 중생들은 그 본질을 망각하고 형상이 있는 겉 모습만을 보고 마치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사량하고 분별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물은 모든 분별과 이원(二元)적인 것을 떠나 초월적인 존재지만 내심(內心)의 망념(妄念)이 싹터 그 실성의 진리를 망각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겉모습만을 보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큰 거울 속의 광명에 황홀하고 또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착각하여 자기 모습의 그림자가 진실한 자기인 줄로 알고 그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본래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 광명을 갖고 우주의 진리가 그 경지(鏡智)에 비치도록 하는 실성(實性)을 지니고 있었는데,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본성인 말나식이 대원경지에 비친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그 황홀경에 착각하여 차별심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야기하여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망각함은 물론 아집과 법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집을 없애려면 자아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찰하여 대원경지를 나타내는 실성, 즉 불성(佛性)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또 법집을 없애려면 모든 내외의 법체에 대한 실성을 관찰하여야 하며 사물을 관찰할 때도 일미진(一微塵)의 본성까지 관찰하여야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있고 또한 진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본성은 어떠한 그림자나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까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보는 습성이 있으며 그러한 관찰은 말나식이 아라야식의 본성을 망각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집착하고 분별하는 것과 분별되어지고 집착되어지는 것 등의 집장의(執藏義)가 생기게 되었다.

 

즉 능히 집착하는 능집자(能執者)와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는 소집자(所執者) 등 상대적인 세계가 전개된 것이다. 이와 같이 능분별자(能分別者)와 소분별자(所分別者) 그리고 능집자와 소집자의 관계는 말나식과 아라야식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심성의 근본이 되는 내면세계에서 극히 미량이나마 능소의 분별심이 시작되니까 지말식(枝末識)인 제6의식을 비롯한 육식(六識)에는 추동(麤動)의 파도처럼 분별심이 야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있게 되며 결국 끝없는 무명(無明)과 전도심(顚倒心) 위에 꿈속의 생활이 전개된다.


이와 같이 무명이 근본이 되어 온갖 번뇌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번뇌들은 진리를 잘못 인식하고 판단하는 거짓 마음의 현상들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로운 마음의 인식을 실체없는 몽식(夢識)의 작용에 많이 비유한다.

 

예를 들면 꿈속에서 활동하는 의식은 꿈속의 사물과 현상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고 또 소유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꿈속들의 사물들은 꿈을 깨고 나면 꿈속의 환상이 없어지게 되어 꿈속의 환상에 지나지 않고 또 그것은 실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객관계의 사물을 보는 것과 마음 속의 정신계를 관찰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는 것도 다 몽중의식(夢中意識)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그 실성을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유식사상은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고 올바른 진리관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을 내세운다. 즉 오직 일심(一心)뿐이며 일심 외에는 어떠한 경계(境界)나 상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모든 것은 마음속의 존재라는 인식과 하나의 경지에서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 곧 유식관(唯識觀)이며 여기에 일진법계(一眞法界)가 전개된다.

 

또한 여기에 유가사상(瑜伽思想)이 도입된다.

유가(yoga)는 인도의 선정을 뜻하는데 이러한 유가의 선정으로 망심을 정화하고 집착을 제거하며 여러 갈래로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으로 통일될 때 말나식과 같은 집착심이 없어지고 또 집착된 아라야식의 집장의 뜻도 없어지는 경지가 나타나게 된다. 아무튼 꿈속에 나타난 것은 실체가 없는 헛것이며 고정된 경계가 없는 바와 같이 번뇌심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임시이며 영원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말나식의 망심은 견고하여 쉽게 정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으로 인하여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게 되었는데, 그 집장의 탈을 해탈하려면 어느 시기에 가능한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에 집장의 뜻이 있는 기간과 없는 경지 등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이고,

   둘째는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이며,

   셋째는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분류는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에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집착(執藏)하여 실체의 나라고 애착하는(我愛), 번뇌가 지속되는 기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는 동안을 뜻한다.

 

술기(述記)에 의하면 집장의 뜻은 곧 번뇌장(煩惱障)의 뜻으로서 항상 아집을 나타내는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하였다. 아라야식에 이러한 아애(我愛)와 집장(執藏)의 번뇌가 활동하는 현행(現行)의 뜻이 있는 기간은 항상 이기주의적 중생심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마음과 육체적 행위는 선과 악으로 분명히 나타날 수 있는 확률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에 의한 선업과 악업이 분명히 조성되며 선업과 악업은 또 분명히 산과와 악과를 초래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리하여 선악의 세계에 윤회하게 되고 또 때로는 선과를 받고 악과를 받으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이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아애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보통 범부와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등은 물론 초지보살인 극희지보살(極喜地菩薩)로부터 제7지 원행지보살(第七地遠行地菩薩)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말나식에 의한 아애와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아주 추악한 범부로부터 이미 성위(聖位)에 오른 제7지보살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기간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상(我執相)의 내용도 대소의 차이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초지보살 이전의 범부중생들에게는 말나식의 아집이 강하여 아라야식의 집장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초지보살 이상 제7지 보살까지는 말나식의 아집상이 미세하며 극소의 작용만을 야기하다가 결국 보살의 수행력으로 말미암아 제7지 보살 이상은 결국 말나식의 아집이 단절되게 되며 동시에 제8아라야식에게도 집장의(執藏)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동시에 이 경지에 오른 성인들의 제8식을 아라야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이라는 명사는 아애집장현행위의 기간인 제7원행지보살수행위까지만을 사용하고 그 이상의 성위(聖位)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②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위에서 제8식(第八識)에게 아라야(阿賴耶)라는 명칭이 사용하게 되는 기간을 제7지 보살까지만 이라고 하였다.

 

런데 제8지인 부동지보살(不動地菩薩)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法雲地菩薩)에 이르기까지의 제8식에는 순수한 무루심(無漏心)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에 말나식의 아집 현상은 없어도 선업에 의한 과보를 받는 생멸심은 아직도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범부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까지의 제8식을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제8지 보살 이상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의 보살들은 추악한 업력으로 악도에 윤회하고 있는 범부중생들에 비하면 벌써 윤회는 해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악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선업에 의하여 선과를 받는 인과응보의 업과(業果)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업에 의한 과보를 박게 되느냐’라고 할 때 다름아닌 제8식이 주체가 되어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은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제8식이 선과 악의 업력에 의해서 다른 과보를 받는다는 이숙(異熟)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숙이라는 말은 항상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뜻으로서 제8식이 업력에 의하여 또 다른 과보를 받으므로 거기에는 이숙이라는 뜻이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제8식이 중심이 되어 범부들은 물론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 비록 무루업(無漏業)이라 할지라도 그 업력에 의하여 업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과보를 받으므로 선악업과위하고 한다.


③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

이는 제8식이 유루세계(有漏世界)인 범부로부터 완전한 무루세계(無漏世界)인 불타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집지(執持)하며 불멸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범부들이 조성한 선업과 악업도 능히 포장하여 유지시켜주고 또 보살들의 선업과 청정무구한 무루업(無漏業)도 추호도 유실하지 않고 보존해 주며 동시에 모든 번뇌를 해탈한 부처님의 무루업까지도, 계속 단절되지 않게 보존하여 주는 심식이 제8식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을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부른다.

아다나(Adana)라는 말은 모든 정신계와 또 육체까지도 잘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집지(執持)라고 번역한다. 그러므로 아다나식은 위에서 말한 아애집장현행위와 선악업과위 등의 뜻보다 넓은 뜻을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제8식에는 그 내용에 따라 아라야식(阿賴耶識)과 이숙식(異熟識) 그리고 아다나식(阿陀那識) 등 여러 별명들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 광범위한 작용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출처 : eastandsouth
글쓴이 : 동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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