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뢰야식설(阿賴耶識說)
한 편으로는 공이나 연기, 중도 등을 말하며 또 한편으로는 유식의 심의식 (心意識) 문제를 늘 제기하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중도, 연기, 진여법계 등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심의식의 근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눈을 가려서 못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도와 진여 이것을 바로 깨치려면 심의식의 근본무명인 아뢰야식을 해결해야지 그 이전에는 참으로 중도나 연기․불성을 깨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식학파에서는 생사 윤회하는 주체로서 아뢰야식을 이숙식(異熟識)이라고 합니다. 즉 개개인의 선․악 업으로 인하여 그 과보를 받는 주체를 이숙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이 근본무명의 주체이자 심의식의 가장 깊은 근원인 아뢰야식에 대하여 해설하고자 합니다. 이 부문의 맨 나중에 인용한 것은 유식부의 경론이 아닌 선어록(禪語錄)에서 발췌한 것인데 즉 유식종에서 수립된 심식설은 선수행(禪修行)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를 옛적부터 중시한 큰스님들의 어록에서 얼마간 인용한 것입니다.
1)「해심밀경(解深密經)」
내 가 마땅히 너를 위하여 심의식의 비밀한 뜻을 설하리라. 광혜야, 너는 마땅히 알아라. 육 도의 생사에 있는 저 유정(有情)들이 저 유정들의 무리 가운데 떨어질 때, 혹은 알로 나고 혹은 태로 나고 혹은 습기로 나고 혹은 화해서 나고 혹은 분신해서 난다. 그 가운데 최초 일체 종 자의 심식이 성숙하고 반복하여 화합하고 더욱 자라나 커지니 두 가지 집수(執受)에 의지하느니라.
첫째는 유색(有色)의 모든 근과(그것이) 의지하는 것에 대한 집수요,
둘째는 상명(相名)분별의 언설과 희론의 습기에 대한 집수이다. 유색계 중에서는 두가지 집수 를 구비하며, 무색계 중에서는 두 가지 집수를 구비하지 않느니라.
광 혜야, 이 식을 또한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하니 왜냐하면 이 식이 몸에 따라다니며 집지 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니 왜냐하면 이식이 몸 가운데서 섭수하고 간직하여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같이 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심(心)이라고 하니 왜냐하면 이식이 물질․소리․향기․맛․감촉 등을 쌓이고 늘어나게 하기 때문이니라. 이때 세존께서 거듭하여 이 뜻을 밝히고자 게송을 설하셨다.
아다니식은 지극히 깊고 미세하여 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설명하지 않노라. 일체 종자가 폭포수 흐르듯 하니 저들이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로 삼을까 두려워하노라.
吾當爲汝說心意識秘密之義하리니 廣慧當知하라. 於六趣生死에 彼彼有情이
墮彼彼有情衆中할새 或在卵生或在胎生하며 或在濕生或在化生하며 或在身分生起하니
於中最初一切種子心識이 成熟하고 展轉和合하여 增長廣大하니 依二執受니라.
一者는 有色諸根及所依執受요 二者는 相名分別言說戱論習氣執受라. 有色界中에는
具二執受하고 無色界中에는 不具二種이니라. 廣慧此識 亦名阿陀那識이니 何以故오.
有此識이 於身에 攝受藏隱하여 同安危義故니라 亦名爲心이니 何以故오 有此識이
色聲香味觸等의 積集滋長故니라. .....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頌曰 阿陀那識이 甚深細하여 我於凡愚에 不開演하노라. 一切種子如瀑流하여 恐彼分別執爲我하노라. [解深密經 ; 大正藏 16, p. 692 중.하]
' 심의식'에서 심(心)이란 제8아뢰야식이고, 의(意)란 제7말나식이고, 식(識)이란 제6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의식이란 8식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곡식 같은 것이 다 자라서 시들면 종자만 남아 그로부터 다시 싹이 돋아나듯이, 유정(有情)이 생멸할 때에 사람의 심식도 그러해서 사람이 죽은 뒤에 일체의 종자식이 남아 윤회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기를, '곡식의 종자가 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정의 근본식이 종자식이 되어서 그로부터 모든 생사가 벌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즉 종자식이 주위의 환경과 여러 가지로 화합하여 증가하고 자라므로 생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일체 종자식은 두가지 집수에 의지하여 자라납니다. 하나는 유색(有色)으로 된 육근(六根)과 그 의지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고, 다른 하나는 모습과 이름으로 인한 언설과 희론의 습기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근본이 되어 우리의 종자식을 훈습하게 되며 육도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3단계(三界) 가운데 유색계 중에는 생사가 있으므로 두가지 집수를 다 구비하고, 무색계 중에는 본래 주관과 객관이 떨어진 곳이므로 두 가지 집수를 모두 구비하지 않습니다.
'아다나(阿陀那 : adana)'란 번역하면 '집지(執持)'인데, 아뢰야의 다른 이름입니다. 집지란 가진다는 말인데 선업이나 악업의 세력 등 모든 종자를 온전히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아다나식은 유정의 몸에 언제든지 따라다니는데, 이것이 없어지면 종자의 근본이 없어지므로 모든 식의 뿌리가 다 빠져버립니다.
' 아뢰야(阿賴耶 : alaya)'는 '무몰(蕪沒)'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뢰야식이 유정의 몸 가운데서 모든 것을 섭수하고 창고처럼 저장하여 편하든지 고생하든지 간에 늘 이것이 근본이 되어 활동이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치려면 아뢰야식을 두드려 부수지 않고는 절대로 대자유한 대열반을 증득할 수 없습니다.
일 체의 종자를 또한 심(心: citta)이라고 하는데 이 식으로 말미암아 색성향미촉 등이 쌓이고 생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아다나식이 곧 아뢰야식이고, 아뢰야식이 곧 종자식이며, 종자식이 곧 심입니다. 이처럼 제8식은 여러 가지 성질에 입각하여 각각 다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야뢰야식이 지극히 깊고 미세하여 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설명하지 않노라'고 한 까닭은 말해도 못 알아듣고 도리어 반대를 하고 비방만 하기 때문입니다. 근대 학자들도 아뢰야식이 있다는 증거를 댈 수 없으니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이르러서 윤회가 어느 정도 확증이 된만큼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윤회하는 근본종자가 없어지게 되므로 여기에서 아뢰야식이 결국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것이 객관적인 증명의 일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일체 종자가 폭포수 흐르듯 하여 중생이 그것을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로 삼을까 두려워하노라'고 한 까닭은 중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영원불멸하는 자신의 실체로 삼기 때문입니다.
의 식을 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일체 중생은 이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생사를 윤회하게 됩니다. 여기에 전쟁을 포함시켜도 상관없고, 설사 포함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생사계를 윤회하고 있으므로 시간적으로만 다를 뿐 윤회라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여 기서 주의할 것은 유식에서 논의하는 아뢰야식 사상은 후세에 발달된 사상으로서 근본불교인 원시불교에서는 이런 사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불교의 원시경전 중에는 심의식설도 있고 종자식설도 있었으며 아뢰야식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 다나라는 용어는 없지만 아뢰야라고 하면 아뢰야 속에 집장(執藏)․능장(能藏)․소장(所藏)의 뜻이 내재되어 있는만큼 그 뜻이 서로 통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나라는 이름이 없다고 해서 아뢰야연기설이라는 것이 후세에 새로이 나온 사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원시 경전에 거의 다 원초적으로 설해져 있는 것을 그 뒤에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불타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능가경(楞伽經)」
선지식과 불자 등의 권속에 의지하여 능히 심(心)․의(意)․의식(意識)의 자기 마음의 자체경 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니라.
依善知識佛子眷屬하여 而能得見心意意識 自心自體境界故니라. [入楞伽經 ; 大正藏 16 p. 523중]
' 심의 의식(意識)의 자체경계'는 자기 마음의 진여본성으로 심의식의 피상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의 지도에 의지하여 불성, 진여 본성을 깨치면 심의식의 근본 자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환상같이 공허한 육신이 곧 법신이며, 번뇌에 덮인 심의식의 본성이 바로 진여자성이라는 말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비유하면 바닷물이 움직이면 여러 가지 물결이 일어나듯 아뢰야식도 그와 마찬가지로 갖가지 여러 식을 생하니 심․의․의식의 여러 가지 모습 때문에 설하느니라.
譬如海水動하면 種種波浪轉하듯 梨耶識亦爾하여 種種諸識生하니 心意及意識을 爲諸相故說하니라. [入楞伽經 ; 大正藏 16 p. 523 중]
아뢰야식은 바닷물과 같고 기타의 여러 식은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물결과 같이 아뢰야식의 바다 위에서 7식, 6식의 모든 식이 그로부터 생하므로 심․의․식을 여러 가지 모습에 따라서 설한다는 것입니다.
심(心)은 교묘한 기술자와 같고 의(意)는 교활한 자와 같으며 의식(意識)과 전5식은 헛되고 망령되어 경계를 취하느니라.
心如巧伎兒하고 意如狡猾者하며 意識及五識은 虛妄取境界하니라. [入楞伽經 ; 大正藏 16 p. 557상]
이 것은 심의식의 작용〔行相〕에 대하여 말한 것으로, 그 중에서 교묘한 기술자와 같다는 것에는 악의가 별로 없으나 교활한 사람과 같다는 것에는 무지와 번뇌에 가득 찬 악의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의식 중에서 아뢰야는 그 행상이 미세하고 제7식은 아상(我相)이 깊다는 것을 비유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의식과 전5식은 허망하게 모든 경계를 취해서 망령되어 분별만 하여, 그 행상이 거칠게 겉으로 드러난 상태입니다.
3)「구사론(俱舍論)」
미혹하여 지은 업이 과(果)를 받을 때에는 변해서 능히 익으므로 이숙이라 하니라. 과가 그를 따라 생기므로 이숙생이라 하며, 그 얻는 과가 원인과는 다른 종류로 익게 되므로 이숙이라 하니라.
惑所造業이 至得果時에 變而能熟故로 名異熟이니라 果從彼生일새 名異熟生이요 彼所得果가 與因別類而是所熟故로 名異熟이니라. [俱舍論 ; 大正藏 29 p. 9상]
이 숙(異熟)이라는 것은 '변해서 익는다〔變而熟〕'라는 뜻입니다. 즉 원인은 선이나 악인데 과보는 선이나 악이 아닌 무기(無記)를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이나 악을 지었는데 그 과보는 부귀나 빈천으로 나타나 인과가 서로 달리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사론은 소승불교의 논서로서 대승불교 유식계통의 논서는 아니지만, 이숙에 대한 설명을 유식학보다 먼저 하였으므로 그 사상의 근원을 보이기 위해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4)「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이 중에서 여러 식을 모두 심(心)과 의(意)와 식(識)이라고 한다. 만약 가장 수승한 아뢰야식 에 의하면 심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식이 능히 일체법의 종자를 모으기 때문이며 언제나 집 수의 경계를 반연하고 알 수 없는 한 무리 기세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니라. 말나식을 의(意)라 하니 언제나 아(我), 아소(我所), 아만(我慢) 등을 집착하고, 사랑을 성품으로 삼는다. 나머지 식을 식(識)이라고 하는데 경계에서 요별함을 특징으로 삼는다.
이와 같이 세 가지가 있는데, 유심위(有心位) 중에서는 심․의․의식이 언제나 함께 있으며 유전하느니라.
此中諸識을 皆名心意識이요 若就最勝阿賴耶識하면 名心이니 何以故오. 由此識이 能集聚一切法種子故며 於一切時에 緣執受境하고 緣不可知一類器境하니라. 末那를 名意이니 於一切時에 集我我所及我慢等하여 思量爲性이요 餘識을 名識이니 謂於境界에 了別爲相이니 如是三種이라. 有心爲中엔 心意意識이 於一切時에 俱有而轉하니라. [瑜伽論 ; 大正藏 30, p. 651 중]
아뢰야식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대단히 미세하고 난해하여 보통의 심식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고 분별할 수 없으며 지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다〔不可知〕'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나식이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고 사랑함은 잠재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하며, 만약 드러나게 사랑한다면 제6식의 작용에 의한 것이지 말나식의 성질이 아닙니다.
이 와 같이 말나식은 뿌리깊은 번뇌인 아(我), 아소(我所)와 아만(我慢)등을 집착하며 끊임없는 생각과 헤아림을 그 성품으로 삼는 것입니다. '유심의 가운데는 심․의․의식이 언제나 함께 있으며 유전하느니라'는 말은, 마음의 경계를 열지 못한 우리가 쉽사리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아뢰야식이 근본이 되고 말나와 의식이 함께 뭉쳐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의식뿐이지만 그것을 내면적으로 운전하는 말나와 아뢰야도 언제든지 의식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이와 같지만 발심수행하여 제8지 보살의 오매일여(寤寐一如) 가 되면 의식이 완전히 떨어지고 말나도 거의 떨어져서 제8 아뢰야만 혼자 남게 됩니다.
5)「섭대승론(攝大乘論)」
이 화합식이 일체 종자식이며 곧 아뢰야식이니라. 그러므로 이 화합식의 성취는 의식이 아니고 다만 이숙식이니 이것이 일체종자식이니라.
若此和合識이 是一切種子識이며 卽是阿賴耶識이니라 ......是故로 成就此和合識은 非是意識이요 但是異熟識이니 是一切種子識이니라. [攝大乘論 ; 大正藏 31 p. 126상]
여기에서 말하는 '화합'이란 일체종자의 화합을 의미합니다.
6)「성유식론(成唯識論)」
과(果)가 원인과 다른 까닭으로 이 가운데 또 설하되 아애집장(我愛執藏)이 잡염 종자를 가져 능히 과보식〔果識〕으로 변하는 것을 이숙이라 한다. 처음은 아뢰야식이니 이숙이며 일체종 자이니라.
果는 異因故로 此中에 且說호대 我愛執藏이 持雜染種하여 能變果識을 名爲異熟이라..... 初는 阿賴耶識이니 異熟이며 一切種이니라. [成唯識論 ; 大正藏 31 p. 7 하]
' 아애집장(我愛執藏)'이란 무시 이래로 중생들이 어떤 불멸하는 살아(實我)가 있다고 애착하는 것이 마치 귀한 것을 얻어둔 창고를 견고히 지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잡염의 종자'란 여러 가지 선이나 악의 원인을 말하며, 이것이 선이나 악과는 다른 부귀 빈천 등의 과보로 나타나므로 이숙이라고 합니다.
혹은 이숙식이라 이름하니 능히 생사의 선한 업과 선하지 않은 업을 이끌어서 과보를 다르게 익히기 때문이니라.
或名異熟識이니 能引生死善不善業하여 異熟果故니라. [成唯識論 ; 大正藏 31 p. 13 하]
이 것은 이숙식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숙식은 어째서 행위의 원인〔因〕은 선이나 악인데 그 과보는 선이나 악이지 않고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인가, 즉 다르게 익는 것〔異熟〕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까닭은 과거․현재․미래에 삼계에서 항상 생사유전하는 과보의 주체가 만약 선하다면 항상 즐거움만을 초래하고 만약 약하다면 항상 괴로움만을 수반하여 영원토록 반복되어 마침내 수도하여 향상하고 증오(證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숙식은 그 업의 원인은 선이나 악이지만 과보는 무기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숙식의 성질이 무기라는 것은 총체적인 면에서 하는 말이며, 선업이나 악업에 따른 과보는 개별적으로 나타나므로 선인(善因)―선과(善果), 악인(惡因)―악과(惡果)라는 불법의 진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박가범이 곳곳의 경 가운데서 심(心)․의(意)․식(識) 세 가지 다른 뜻을 설명하셨다. 모아 일으키는 것을 심이라 하고 사랑을 의라 하며 요별을 식이라 이름한다.
이 세 가지 다른 식의 이러한 세 가지 뜻은 비록 8식 전체에 통하나 수승함을 따라서 밝히면, 제8식을 심이라 하니 모든 법의 종자를 모아서 모든 법을 일으키는 까닭이요,
제7식을 의라 이름하니 장식(藏識)등을 반연하여 항상 살피고 사랑하여 자아〔我〕등으로 삼는 까닭이요,
남은 여섯은 식이라 이름하니 여섯 가지 다른 경계에 거칠게 움직여 간격이 끊어져 분별하며 유전하기 때문이다.
능가경 게송중에 말하였다. '장식은 심이라 이름하고, 사량성은 의라 이름하며 능히 모든 경 계 상을 요별함은 식이라고 이름하느니라.'
薄伽梵이 處處經中에 說心意識의 三種別義하시니 集起를 名心이요 思量을 名意이요 了別을 名識이니라. 是三別識의 如是三義가 雖通八識이나 而隨勝顯하면 第八을 名心이니 集諸法種하여 起諸法故요 第七은 名意니 緣藏識等하여 恒審思量하여 爲我等故요. 餘六은 名識이니 於六別境에 ?動間斷하여 了別轉故니라. 如瑜伽中에 說호대 藏識은 說名心이요 思量性은 名意요 能了別諸境相은 是說名爲識이라하니라. [成唯識論 ; 大正藏 31, p. 24 하]
박가범(薄伽梵)이란 범어 bhagavat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세존(世尊)을 의미합니다. 그 중에서 특기할 것은 제7식이 제8식인 '장식(藏識)을 반연하여 나〔我〕라고 삼는다' 하고 있는데 이것은 호법(護法)논사의 주장입니다
7)「유식술기(唯識述記)」
이숙식은 즉 제8식을 말함이니 이름에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다르게 변해서 익는 것〔變異而熟〕이니 원인이 변할 때에 과보가 바야흐로 성숙되기 때문이다. 이 뜻은 다른 것에도 다 통하니 과보가 생길 때는 변하여 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때를 달리해서 익는 것〔異時而熟〕이니 원인과 시기를 달리하여 과보가 바야흐로 성 숙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종류를 달리해서 익는 것〔異類而熟〕이니 원인과 성질을 달리하여 과보가 원인에 보 답하기 때문이다.
謂異熟識은 卽第八識이니 名有多義라 一은 變異而熟이니 要因變異之時에 果方熟故니라 此意通餘하니 種生果時에 皆變異故니라 二는 異時而熟이니 與因異時하여 果方熟故니라 三은 異類而熟이니 與因異性하여 果酬因故니라. [唯識述記 ; 大正藏 43, p. 238 항]
이숙식에는 세 종류가 있지만, 이 중에서 선악 업보의 과체로서의 제8식은 이류이숙뿐이고, 나머지는 생성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자의 경우는 생사 윤회의 주체로서의 이숙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8)「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또 생멸인연이라는 것은 이른바 중생이 심과 의와 의식에 의지하여 유전하는 것이니라.
復次生滅因緣者는 所謂衆生이 依心意意識轉故니라. [起信論 ; 大正藏 32 p. 577중]
기신론은 원래 순수한 유식 논서는 아니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유식학설을 받아들여서 제8식〔心〕, 제7식〔意〕, 제6식〔意識〕의 세 가지가 합하여 생멸인연(生滅因緣)이 된다고 하면서 그 근본은 역시 제8식에 있다고 합니다.
9) 선가(禪家)의 설
항 상함〔恒〕사량〔審〕은 식 가운데 네 가지의 분별이 있느니라. 제8식은 항상하면서 사량 이 없으니 나〔我〕에 집착하지 않아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요, 제6식은 사량하면서 항상하지 않으니 나에 집착하여 끊어짐이 있기 때문이요, 전5식은 항상하지도 않고 사량하지도 않으니 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요, 제7식은 항상하면서 또 사랑하니 나를 집착하여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니라.
恒之與審이 識中에 有四句分別하니라. 第八識은 恒而非審이니 不執我하여 無間斷故요 第六識은 審而非恒이니 以集我有間斷故요. 前五는 非恒非審이니 不執我故요. 第七識은 亦恒亦審이니 以集我無間斷故니라. [ (감)山性相通說 p. 26중]
항(恒)이란 식이 항상 상속하는 것을 말하고 심(審)은 사량 분별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잠재적으로 사량분별하는 것과 드러나게 사량분별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8식 가운데 네 가지의 구별이 있습니다.
제8 식은 항상하면서 사량이 없습니다〔恒而非審〕. 나를 집착하지 않으나 그 작용하는 활동이 상속하여 끊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몸을 바꾸어서 다른 생사를 받게 될 때까지도 간단이 없습니다. 동시에 사량분별을 하지 않는데 그것은 순전히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6식은 제8식과 반대로 언제나 사량분별을 하지만 항상 계속되지는 않습니다〔審而非恒〕. 붉은 것을 보면 붉은 데에 머물고, 검은 것을 보면 검은 데 머무르며, 어떤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일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연속되는 정신활동은 제8식이며, 6식은 시시각각으로 경계를 따라 간단이 있어 사량분별을 근본으로 삼으며 상속을 하지 않습니다.
전5식은 곧 눈․귀․코․혀․몸의 다섯 가지 식을 말하는데, 이 전5식은 항상하지도 않고 사량하지도 않습니다〔非恒非審〕. 예를 들면 거울에 물건이 비치듯이 눈의 수정체에 어떤 사물이 비치는 그 순간을 전5식의 작용이라 하고, 거기서 푸른 것이라든지 붉은 것이라든지 그 무엇을 인식하게 될 때는 전5식의 영역이 아니며 의식의 영역에 속합니다.
즉 전5식의 활동은 순전히 무의식적인 것으로 사량분별이 없습니다. 또 7식이나 6식같이 연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물이 눈에 비칠 때는 있고, 비치지 않을 때는 없어서 완전히 끊어져버립니다. 제7식은 항상 상속하면서 또한 항상 사량하는데〔亦恒亦審〕이것은 잠재적으로 제8식을 의지해서 항상 연속하며, 항상 연속한 가운데 잠재적으로 나〔我〕와 나의 것〔我所〕등을 사량하고 있습니다.
현수스님같은 분은 '항상한다〔亦恒〕'하는 것은 제8식에다 붙여버리고 '사량한다〔亦審〕' 하는 것은 제6식에 갖다 붙이면 제7은 따로 세울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우리의 정신상태를 분석해 보면 제7식을 따로 두는 것이 논리상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이 심․의․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선 문에서는 마음을 물리치고 단박에 생김이 없는 지견의 힘에 들어 가도다.
損法財滅功德은 莫不由斯心識이라 是以로 禪門은 了却心하고 頓入無生知見力이니라. [證道歌]
불 법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방해물은 심․의․의식입니다. 선문에서는 공부하여 자성을 깨치는데 제일 방해되는 것이 제8아뢰야이니 이 아뢰야부터 제거해야 된다고 합니다. 선종에서는 지극히 미세한 제8아뢰야를 제8마계(第八魔界)라 규정합니다.
누구든지 공부를 아무리 잘하여 완전히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었다 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8마계에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전의 조사가 입을 모아 똑같이 말하는 소리입니다.
오매일여가 되고 완전한 무심경계에 들어갔다고 해도 선문에서는 이것을 제8마계라 부르며 견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여 기서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不疑言句 是爲大病〕'이라 하여 근본적으로 배격했습니다. 그러한데, 제8식은 그만두고 제6의식의 사량분별 속에서 경계가 조금 바뀌고 어떠한 지견이 생겼다고 이것을 견성이라 알면 자기만 망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남에게 가르치게 되어 자타가 모두 망하게 됩니다.
옛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은 언제나 구경각을 견성이라 하고 육신은 물론 제8아뢰야의 경계까지도 견성이 아니라 했는데, 의식분별이나 객진번뇌를 가지고 견성이라 주장하면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님 말씀과는 근본적으로 틀리는 비법(非法)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채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eastandsouth/8444766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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