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그렇다면 어찌하여 두 마음을 합쳐서 하나의 무량으로 하지 않고, 나누어서 두 법으로 만들었는가? | |||||||
[답] 수행자가 처음에는 아직 마음을 잘 거두지 못하고 중생들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까닭에 단지 즐거움만을 주고, 마음을 거두어 중생을 깊이 사랑하는 까닭에 기쁨을 준다.
이런 까닭에 먼저 즐거움을 들고 나중에 기쁨을 드는 것이다. | |||||||
8) 5근의 대상인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을 말한다. | |||||||
[790 / 2071] 쪽 | |||||||
[문] 그렇다면 어찌하여 자 다음에 희를 들지 않는가? | |||||||
[답] 자심을 행할 때는 중생을 사랑하기를 마치 어린 애기같이 여겨 즐거움을 주기를 원하며, 자삼매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중생들이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내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 깊은 즐거움을 얻게 한다. | |||||||
비유하건대 부모가 비록 자식을 항상 사랑하나 자식이 병에 걸려 위급해지면 이때는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과 같다.
보살들도 그와 같아서 비심에 들어가서 중생의 괴로움을 보고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문득 깊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비심이 중간에 있는 것이다. | |||||||
[문] 만일 이처럼 중생들을 깊이 사랑한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사심을 행하는가? | |||||||
[답] 수행자는 이처럼 관찰하되 항상 중생들을 버리지 않고, 오직 이 세 가지 마음을 버린다. 왜냐하면 다른 법에 방해하고 가로막기 때문이다. | |||||||
또한 이 자심으로써 중생들을 즐겁게 만들고자 하나 즐거움을 얻게 하지 못하고, 비심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게 하려 하나 괴로움을 여의게 하지 못하며, 희심을 행할 때에도 역시 중생들로 하여금 큰 기쁨을 얻게 하지 못한다.
곧 이것은 다만 생각일 뿐이요 실제로 법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 |||||||
중생으로 하여금 실제의 일을 얻게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발심하여 부처가 되어야만 하리라. 6바라밀을 행하고 불법을 갖춘다면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실제의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다. | |||||||
이런 까닭에 이러한 세 가지 마음을 버리어 이 사심에 드는 것이다. | |||||||
또한 자․비․희의 마음은 사랑이 깊기 때문에 중생을 버리기 어렵지만, 이 사심에 드는 까닭에 쉽게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 |||||||
[문]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며, 나아가 부처를 이루더라도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단지 이 세 마음은 생각하여 마음 가운데 일어날 뿐 실제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9) | |||||||
[791 / 2071] 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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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270. 성문의 자비희사, 보살의 자비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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