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두(話頭)와 의정(疑情)
옛날 조사스님들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했다[直指人心見性成佛]. 달마스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나, 육조스님의 오직 성품을 보는 것만을 논한다(唯論見性)는 법문처럼 다만 곧장 받아들였을 뿐 화두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뒷날 조사스님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옛과 같지 않고 법을 위해 죽으려는 마음도 없이 매양 거짓 기틀에 속아 남의 보물을 헤아려 자기의 보배로 삼는 것을 보고는 각각 저마다 기치[門庭]를 세우고 방편[手眼]을 내어 학인들에게 화두를 들게 하였다. 화두는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부모에게서 태어나기전 나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등등 많이 있지만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제일 많이 든다.
무엇을 일러 화두라 하는가. 화(話)는 말이며 두(頭)는 말하기 이전이다.「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은 화(話)고 염하기 이전은 화두(話頭)이다. 이른바 화두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때이니,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미 화미(話尾)가 되어버린다.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을 일러 나지 않음[不生]이라고 부르는 것이니, 흔들리지 않고[不掉擧], 잠들지 않고[不昏沈],고요함에 빠지지 않고[不著靜], 허무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空]. 또 불멸(不滅)이라고도 부르니, 시시각각 오직 한 생각으로 회광반조(回光返照-자기를 반성하여 심성을 돌이켜 봄) 한다. 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말을 일러 화두를 든다고 하며 혹은 화두를 비춘다고 한다.
화두를 들려면 먼저 의심하는 마음인 의정(疑情)을 일으켜야 한다. 의정은 화두참구의 길잡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정이라 하는가?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할 때,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입으로써 염하는가 아니면 마음으로써 염하는가? 만약에 입으로써 염한다고 한다면, 잠들었을지라도 입은 그대로 있는데도 어째서 염할 줄을 모르는가? 만약에 마음으로써 염한다고 한다면, 또 그 마음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가. 붙잡을 수도 없고 더듬을 수도 없으니 답답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처럼 명확하지 않은 까닭에 문득「누구」라는 말에 가벼운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다만 거칠게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되며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좋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오직 이 의심을 멈추지 않고 비추어 돌아보되 마치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볼 것이요, 두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만약에 의심이 있으며 움직이지 말아야 하고, 의심이 없다면 다시 가볍게 일으켜야 한다.
처음 참구할 때는 고요한 곳에서의 공부가 시끄러운 곳에서의 공부 보다 힘을 얻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절대로 분별하는 마을을 내서는 안되며 힘을 얻거나 못 얻거나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시끄러운 곳이든 고요한 곳이든 상관하지 말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지어나가면 공부는 좋아질 것이다.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하는 말 가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누구인가?」라는 말이니, 나머지 말은 그것을 늘려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자는 누구인가? 똥 누고 오줌 누는 자는 누구인가? 성내는 자는 누구인가? 능히 느끼는 자는 누구인가? 등과 같다. 어쨌든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누구인가?」라는 글자를 한번 들면 문득 쉽게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반복하여 헤아리거나 일부러 생각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인가?」라는 화두야 말로 참으로 참선의 묘법(妙法)이다. 「누구인가?」 혹은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것은 단지 부처님의 명호만 부르거나 사량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말을 참구하는 것을 의정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지만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하는 공덕이 더 크다. 또 어떤 이는 어지러운 망상으로써 동으로 찾고 서로 뒤지는 것을 의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들이 어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망상도 더욱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는가. 이는 마치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서 도리어 아래로 떨어지는 격이니,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초심인이 일으키는 의심은 아주 거칠어서 홀연히 끊어진 듯 하다가 이어지고, 익은 듯 하다가 미숙하여, 의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되며 그저 생각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점차 날뛰던 마음을 가두어 염두(念頭)에 무엇인가 잡히는 듯한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참구(參究)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점차로 공부가 익어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고, 자기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며, 몸과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고, 한 줄기 의심이 드러나 끊어지지 아니할 때에야 비로소 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처음에야 어찌 공부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겨우 망상을 부수는 정도이다. 진정한 의심이 드러나게 되는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공부를 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하나의 커다란 관문(關門)이 있으니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갈림길로 들어가기 쉽다.
(1) 아주 깨끗하고 한없이 가벼우며 편안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선정[覺照]을 놓치면 곧 가벼운 혼침 상태에 빠지게 된다.만약에 눈 밝은 이가 곁에 있다면 바로 알 수 있다. 이 경지는 「향나무 판자로 내려치자마자 온 하늘의 구름과 안개가 걷힌다」라는 것으로 흔히 이 경지를 도를 깨친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2) 아주 깨끗하며 텅 비고 툭 트인 상태여서 의정이 없으면 곧 무기(無記)에 떨어져, 마치 나무 등걸이나 바위덩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이것을 일러 「돌에 부딪치는 물거품」이라고 한다. 이 때에는 다시 화두를 들어야 하며 화두를 들면 곧 각조(覺照)에 들게 될 것이다 (覺은 미혹하지 아니함이니 곧 지혜이고, 照는 어지럽지 아니함이니 곧 선정이다).
오직 오롯한 이 한 생각은 고요하게 비추며, 여여(如如)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신령하여 어둡지 아니하며 분명하며 항상 안다. 마치 식은 재에서 연기가 나는 것처럼 한결같이 이어져 끊이지 않는다.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면 금강(金剛)과도 같은 눈동자를 갖추어야 하며, 다시는 화두를 들 필요가 없다. 이 때 화두를 든다면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올려 놓는 격이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스님에게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조주스님이 「놓아 버리라(放下來)」고 대답하자 그 스님은 다시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놓아 버립니까?」하고 물었다. 조주스님은 「놓아 버리지 않으려면 짊어지고 가거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 때의 소식을 말한 것이다. 이 소식은 물을 마셔본 자만이 그 물의 차고 따뜻함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말로서 표현할 수는 없다. 이 경지에 이른 이는 저절로 분명하게 알 것이요,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는 말해 주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이른바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검을 드러내 보일지언정, 시인이 아니라면 시를 지어 바치지 말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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