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수행법(간화선)

「모든 반연을 놓으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 이 말씀이 ...

수선님 2019. 6. 16. 12:17

1. 참선할 때 먼저 해야할 일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데 있다. 마음의 오염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성(自性-자기의 본래 성품)의 참 모습을 보게된다. 오염이란 바로 망상과 집착이고 자성(自性)이란 곧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이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같이 갖추고 있으며 둘이 아니고 차별도 없다. 만약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증득하는 것이니 곧 부처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바로 중생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무량겁을 지나면서 생사를 윤회하며 오래 동안 오염되었기 때문에, 바로 망상에서 벗어나 참된 본래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참선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참선할 때 먼저 해야할 일은 망상을 버리는 것이다. 망상은 어떻게 버리는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이 많지만 그 중 「쉼이 곧 깨달음(歇卽菩提)」에서 「쉼(歇)」한자 만큼 간단명료한 것이 없다.

선종(禪宗)은 달마조사께서 중국에 전래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육조(六祖) 혜능스님 이후 선풍(禪風)이 널리 퍼져 고금에 떨쳤다. 달마조사와 육조대사께서는 가장 긴요한 말씀으로 「모든 반연(攀緣-얽혀있는 인연)을 가리고 쉬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학인(學人)들을 가르쳤다. 모든 반연을 가리고 쉰다는 것은 모든 반연을 놓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반연을 놓으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 말은 실로 참선할 때 먼저 해야할 일이며, 이 말과 같이 참선을 하지 않는다면 참선은 오직 말뿐이어서 성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입문(入門) 조차 불가능하다. 온갖 반연에 얽혀 생각 생각이 생멸한다면, 그대는 어디 참선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반연을 놓으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 이 말씀이 참선할 때 먼저 해야할 일이라고 이미 알았는데 우리들은 어찌하여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가? 상근기의 사람은 한 생각을 영원히 쉬어 바로 무생(無生-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마음자리)에 이르고, 깨달음을 단번에 증득하여 털끝만치도 꼬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음 근깅의 사람은 이치로써 현상을 제거함으로써 자성은 본래 청정하며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모두 거짓 이름이고 원래부터 나와 자성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명료하게 알 것이다. 모든 일과 사물은 다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나의 이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과 산하대지는 자성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바다 가운데 떠 있는 거품처럼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만 본바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꿈과 같은 일인 일체의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것을 따르지 말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통째로 놓아버리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모양이 되어 자연히 번뇌와 분별심이 없어져,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과 애착하는 마음도 없어질 것이다. 이 몸을 통한 일체의 것들-고통, 가려움, 괴로움, 즐거움, 배고픔, 추움, 배부름, 따뜻함, 영예로움, 욕됨, 삶, 죽음, 앙화, 복, 길함, 흉함, 헐뜯음, 칭찬함, 얻음, 잃음, 안전함, 위태로움, 험함, 평탄함- 이 모든 것을 사량분별의 바깥에 두어야 비로소 놓고 또 놓았다고 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놓고 영원히 놓으면, 모든 반연을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반연을 다 놓아버렸으므로 망상은 스스로 없어지고 분별심은 일어나지 않아 집착은 멀어진다. 여기에 이르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며, 자성이 빛을 발해 온바탕이 드러난다. 이렇게 되면 참선의 조건이 구비 된 것이며, 다시 노력하여 진실로 참구(參究)하면, 비로소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 것이 분명해진다.

근래에 참선하는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대저 법은 본래 법이 아니며, 한번 언어의 표현에 떨어지면, 곧 진실한 뜻이 아니다. 이 마음을 밝히면 본래가 부처이며 당장에 아무런 일도 없고 모든 것이 눈앞에서 각각 완성되는데, 수행을 말하고 증득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마(魔)의 이야기다」

달마스님이 중국에 오셔서「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고 하심은 대지의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는 명백한 가르침이다. 당장에 이 청정한 자성을 알면, 모든 것을 따르더라도 물들지 않으며 하루 24시간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워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눈앞에 완성된 부처이며, 마음을 쓸 필요도 힘을 들일 필요도 없어 다시는 지을 것도 해야할 것도 없고, 말과 생각에 수고할 필요가 털끝만큼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때문에 부처가 되는 일은 가장 쉬운 일이요, 가장 자유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서 얻는 것이며 밖에서 구할 수 없다.

일체 중생이 만일 오랜 세월 동안 사생(四生)과 육도(六道)에 윤회하며 길이 괴로움의 바다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열반의 경지인 부처가 되기를 원한다면 진실로 부처님과 조사의 정성스런 말씀을 믿어야 한다. 일체를 놓고 선도 악도 모두 사량(思量)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룰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역대의 조사께서 일체 중생의 제도를 발원하였으니, 이것은 근거가 없는 헛된 발원이 아니며 헛된 말씀이 아니다.

위에서 설한 바처럼 법은 이와 같고 또한 부처님과 조사께서 거듭거듭 밝혀 간곡히 부촉하신 진실한 말씀에도 터럭만큼의 헛됨과 거짓이 없다. 일체 중생은 어쩔 수 없이 한없는 세월을 나고 죽는 고통의 바다에 빠져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면서, 윤회를 그치지 않고 미혹하여 뒤집히고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과 합했다. 이것은 마치 순금이 똥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아서 사용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더러움은 감당하기 어렵다. 부처님은 부득이 큰 자비심으로써 각양각색의 근기가 같지 않은 중생들의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애착하는 마음 등 8만4천 번뇌의 병을 대치하는 8만 4천의 법문을 설하셨으니, 그대로 하여금 순금에 묻은 각종 오염과 더러움을 대패, 솔, 물, 헝겁 등을 사용하여 씻고 다듬고 문지르게 하도록 가르치신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은 모두가 미묘한 법이며, 모두가 생사를 해결하여 부처를 이루는 길이다. 다만 그 사람의 근기에 적당한가 적당하지 아니한가가 문제일 뿐 구태여 법문의 높고 낮음을 나눌 필요가 없다.

중국에 전래한 일반적 법의 문은 종문(宗門)과 교문(敎門)과 율문(律門)과 정토문(淨土門)과 밀교문(密敎門)이다. 이 다섯 가지 법의 문은 각자의 근기와 흥취(興趣)에 따라서 어느 문이든 수행해도 된다. 모두가 한 문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니, 오래오래 변함없이 나아가면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

종문(宗門)은 참선을 한다. 참선이란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참구하여 뚫는 것이니, 이른바「밝게 자기의 마음을 깨닫고 환하게 본래의 성품을 본다」는 이 법의 문은 부처님께서 연꽃을 드신 것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달마대사께서 중국에 온 이후에 이르러 공부하는 방법은 여러 번 바뀌었다

당, 송 이전의 선덕(禪德)들은 흔히 한마디의 말이나, 반 구절의 말로 도를 깨달았다. 스승과 제자간 사이에 전수하는 것도 마음으로써 마음에 인가하는데 지나지 않았을 뿐 어떠한 실제의 법은 없었다. 일상생활 가운데 묻고 대답하였고 또 방편에 따라 풀어 주고 속박하였으니 병을 보아서 약을 줄뿐이었다. 송대 이후 사람들은 근기가 약한 탓에 비유하여 「모든 것을 놓아라」,「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일러주어도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모든 것을 놓지 못하고, 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조사스님들이 부득이 독으로써 독을 다스리는 방법을 채택하여 학인에게 공안(公案)을 참구하거나 화두(話頭)를 간(看)하라고 가르쳤다. 심지어 죽은 화두 하나를 정하여 깨물되 질겅질겅 깨물어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말라고 하였다. 마치 늙은 쥐가 나무 궤짝을 뚫는 것과 같이 정해진 한 곳을 뚫어질 때까지 파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한 생각으로써 만 생각을 물리치는 것이니 실로 부득이한 방법이다. 마치 몸에 있는 나쁜 독을 칼로 째서 치료하지 않으면 살아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옛 사람들의 공안은 아주 많으나 후에 와서는 오로지 화두를 간(看)하라고만 가르쳤다.「시체를 끌고 다니는 것은 누구인가」,「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어떤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등이 있다. 근래에 와서 제방에서 흔히 쓰는 것은 「염불하는 이는 누구인가」하는 화두 하나 뿐이지만 사실은 모두 다 같은 것이며 평범한 것이어서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하고자 한다면, 경을 읽는 자는 누구인가, 주문을 외우는 자는 누구인가, 부처님께 절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밥을 먹는 자는 누구인가, 옷을 입는 자는 누구인가, 길을 가는 자는 누구인가를 간하라. 이 모두는 같은 형식의 화두이다.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답은 마음이니, 말은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말의 머리며, 생각도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念頭]다. 만법이 다 마음으로부터 생기므로 마음은 만법의 머리이다. 실로 화두는 곧 이 생각의 머리이며 생각 이전의 머리는 곧 마음이다. 곧바로 말하면 한 생각도 생기기 이전이 바로 화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화두를 간하는 것이 마음을 관(觀)하는 것임을 안다.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은 바로 마음이며,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간(看)하는 것은 바로 관(觀)하는 것이다. 성품은 곧 마음이며 「듣는 것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反聞聞自性)」라는 것은 곧 관하는 것을 돌이켜 자기 마음을 관하는 것이다. 「청정한 깨달음의 모습을 원만히 비춤」에서 청정한 깨달음의 모습(淸淨覺相)은 마음이며 비춤(照)은 곧 관(觀)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염불이란 곧 관불(觀佛)이며 관불은 곧 관심(觀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간하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부처를 생각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했는데 이는 마음을 관(觀)하는 것이며, 곧 자기 마음이 청정한 깨달음의 본체임을 관조(觀照)하는 것이고, 또한 자성(自性)의 부처를 관조하는 것이다. 마음이란 곧 성품이며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마음이란 모습과 방향과 장소가 없으므로 얻을 수 없으며, 청정한 그대로 법계에 두루하여 나오는 것도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닌 본래 눈앞에서 완성된 청정한 법신불이다.

수행자가 육근(六根)을 거두어들여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살피고 화두를 관조하면 생각을 떠난 청정한 자기의 마음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면밀히 하고 담담하게 고요히 비추어 보면, 바로 오온(五蘊)이 다 공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고요하여 마침내 할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 이로부터 24시간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끄달림이 없이 여여(如如)하여, 오래 날이 지나 공부가 깊어지면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어 고통은 없어지고 제도하는 일도 끝날 것이다..

옛날 고봉(高峯)스님이 이르기를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살피되 마치 한 개의 기와쪽을 만길이나 되는 깊은 못에 던지면 곧 바로 못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하라. 이같이 하여 만약 7일이 되도록 깨닫지 못하면 나의 머리를 짜르라」고 했다. 대중들이여, 이 것은 몸소 겪은 분의 말씀으로 진실한 말이지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허망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어째서 현대인들은 화두를 드는 사람은 많으나 도를 깨치는 사람은 적은가. 이것은 현대인의 근기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면서 화두를 이치로만 대할 뿐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동서남북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닌 결과 늙어서도 안정되지 못하고, 화두를 대하나 아직도 명백하게 제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 화두이며 어떻게 화두를 들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생동안 말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여 말꼬리에만 마음을 쓰면서,「부처님께 참배하는 이는 누구인가」,「화두를 비추어 보라」하면서 화두를 들고 참구하지만 화두와는 서로 어긋나니, 어떻게 본연의 무위대도(無爲大道)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법왕의 위치에 도달하리요. 금가루를 눈에 넣으면 눈이 멀 것인데 어떻게 큰 광명을 방출할 수 있겠는가. 가련하고 가련한지고.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 도를 배운다는 것은 그 뜻과 원은 범상하지 아니하나 결과는 헛될 뿐이니 매우 불쌍하구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차라리 천년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루의 길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했으니, 수행하여 도를 깨달음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렵고도 쉬운 것이다. 마치 전기 불을 켜는 것과 같아서 알기만 하면 손가락 한번 퉁기는 사이에 큰 광명을 놓아 만년의 어두움을 단번에 없애나, 알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지고 등불은 꺼져 번뇌만 더욱 많아진다. 잠시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한 사람이 마(魔)에 집착하여 발광(發狂)하며 피를 토하고 병을 앓고, 무명의 불꽃이 커져 남이라는 소견과 나라는 소견이 깊어지는 경우가 바로 두드러진 예가 아닌가.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잘 조화하여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를 고르게 하기를 힘써, 걸림도 거리낌도 없고 나라는 소견과 남이라는 소견도 없이, 다니고[行] 머물고[住] 앉고[坐] 누울[臥] 때에도 현묘한 기틀과 오묘하게 계합(契合)해야 한다.

참선이라는 이 법은 본래 분별할 수 없으며 다만 공부해 갈 뿐이지만 초참자(初參者)에게는 초참자 어려움과 쉬움이 있고, 구참자(久參者) 에게는 오래된 대로 어렵고 쉬움이 있다.

초참자의 어려움이란 무엇인가. 몸과 마음이 순일하고 익숙하지 못하여 나아갈 길이 명확하지 못하고, 공부를 하여도 향상되지 않으며, 마음에 급하다는 생각이 없어 눈을 감고 세월만 보내나니, 「첫해는 처음 참구함, 2년째는 오래 참구함, 3년째는 참구하지 않음」이라는 결과를 이룰 뿐이다.

초참자의 쉬움이란 무엇인가.다만 신심(信心)과 장영심(長永心-길이 영원한 마음)과 무심(無心)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신심이란, 첫째 나의 마음이 본래 부처이며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과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믿는 것이요, 둘째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그 모든 법이 생사를 요달하여 부처를 이루는 도임을 믿는 것이다.

장영심이란, 어떤 한 법의 문을 선정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수행하되, 내생과 후 내생에 이르도록 이와 같이 수행함을 말한다. 참선을 이와 같이 참구하며, 염불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주문도 이와 같이 주문하며, 교학도 이와 같이 듣고 생각하여 수행한다. 어떠한 법의 문을 수행하더라도 다 계가 근본이 된다. 과연 능히 이와 같이 수행하면 장차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위산(僞山)노사는「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법을 수행하되 삼생(三生)을 능히 물러서지 않는다면 반드시 부처의 자리를 얻을 것이다」하였고, 또 영가(永嘉)노사는「만약 망녕된 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영원히 발설(拔舌)지옥에 떨어져 항하의 모래 수 같은 세월을 보낼 것이다」라고 했다.

무심(無心)이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아 종일토록 대중을 따라 일어나고 앉지만 다시는 아무런 분별심이나 집착을 일으키지 아니하여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는 것이다.

처음 발심하여 수행하는 사람이 이 세 가지 마음(信心, 永長心, 無心)을 갖추고, 화두를 들고 참선한다면 곧「염불하는 이가 누구인가」하라. 스스로 묵묵히 생각하다가 몇 번 소리를 내어「아미타불」을 부를 때, 염불하는 이는 누구며, 이 한 생각이 어디로부터 일어났는가를 살피라. 마땅히 알라. 이 한 생각은 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또한 나의 몸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만약 나의 몸이나 혹 입으로부터 나왔다면, 내가 죽은 후에도 몸과 입은 그대로 있는데 어찌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마땅히 알라. 이 한 생각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났으니, 곧 마음으로부터 생각이 일어난 곳을 찾아 그 곳을 자세히 보고 똑바로 살피기를, 고양이가 쥐 잡듯이 하여 온전히 정신을 집중하면 두 가지 생각이 없어질 것이다. 다만 느리거나 급하게 하지 말고 그 도를 적당히 하라. 조급하게 서두르면 병과 장애가 생길 것이다.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이와 같이 하여 날이 가고 공부가 깊어지면 참외가 익어 꼭지가 떨어지듯, 시절인연이 되면 잡거나 밀거나 할 때 홀연히 크게 깨달을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찬지 뜨거운지를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바로 의심할 것 없는 경지에 이르나니 마치 네거리에서 자기 아버지를 만나 큰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다.

구참자의 어렵고 쉬움이란 어떤 것인가. 구참자란 가까이 에서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였고, 여러 해 동안 공부하여 한 차례 단련되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잘 익었고 참선의 이치가 명확하여 자유자재하게 공부할 수 있으므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구참자의 어려움이란, 바로 이와 같은 자유자재가 명백하여 중간에서 머무는 것이다. 중간에서 머무르니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지 못하고, 고요하지만 움직임이지 못하니 진실한 쓰임새를 얻을 수 없다. 심지어 객관 세계를 대하면 곧 감정을 내어 취하고 버리는 것이 옛과 같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완연하다. 크고 작은 망상(妄想)이 구태의연하게 굳어져 있어, 하는 공부가 바위에 부딪치는 찬 물거품과 같아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며, 또 오래하면 피로하고 게을러져 마침내 아무런 결과도 쓰임도 얻지 못한다.

구참자가 이런 곤란을 알았다면 곧 본래 참구하는 화두를 일으켜 정신을 들어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높고 높은 봉우리에 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다니되 손을 놓고 마음대로 다니며, 불조(佛祖)와 함께 본체를 상견(相見)하게 되니 어디에 곤란이 있으리오. 쉬울 뿐이다.

화두란 곧 한 마음이며 그대와 나의 이 한 마음은 가운데에도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지만, 또한 가운데에도 안에도 밖에도 있는 것이니, 마치 허공이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곳에 두루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화두는 위로 끌어올리려고도 하지 말고 또 아래로 물리려고도 하지 말라. 위로 끌어올리면 흔들림을 야기하고, 아래로 물리면 혼침(昏沈)에 떨어져 본래의 심성을 어기므로 다 중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망상을 두려워하며 망상을 없애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노니 망상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또한 없애려고 노력하지도 말라. 망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다만 그대가 망상을 인식하고 망상에 집착하지 말며, 망상을 배척하려고도 말고, 오직 망상이 계속 되지만 않게 하면 망상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즉 「망상이 일어나면 곧 망상인 줄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질 것이다」.

만약 망상을 이용하여 공부를 한다면 이 망상이 어느 곳에서부터 일어났는가를 살펴라. 망상은 자성이 없고 바탕이 공한 까닭에 바로 본래부터 망상이 없었던 나의 심성으로 돌아가, 자성이 청정한 법신불이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진실로 말하노니 진여와 망상이 한 몸이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 보리와 번뇌가 모두 본래의 마음이며 본래의 성품이다. 분별심이 필요치 않으며, 좋아하고 싫어함도 필요치 않고, 취하고 버리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 이 마음은 청정하여 본래 부처이니 한 법도 필요치 않다. 어느 곳에 군더더기가 있겠는가. 참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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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참선수행의 입문과 방법


여러분들이 항상 와서 가르침을 청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여러분들은 날마다 수고롭게 나무를 하고 씨뿌리며 흙을 돋우고 돌을 치우다가 하루가 바쁘게 지나가 저녁에 이르면, 도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잊어버린다. 어떤 것이 도를 위하는 중요한 마음이며, 실제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 나는 도도 없고 덕도 없음을 부끄러워하여 가르침을 줄 수 없다. 다만 옛 사람들의 말씀 몇 구절을 이끌어 여러 분의 질문에 대답할 뿐이다.

⊙ 참선수행의 입문

도를 공부하는 방법은 많다. 지금 요약해서 말하고자 한다.

① 깊이 인과를 믿으라

어떤 사람이고 간에 특히 수행하여 도를 이루려는 사람은 먼저 깊이 인과(因果)를 믿어야 한다. 만약 인과를 믿지 않는다면 망녕되이 함부러 행동하니 도를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삼악도의 작은 부분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옛 스님이 이르기를 「전생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받고 있는 일이 곧 그 과보니라. 내세의 결과를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짓고 일이 그 결과니라」하였다.

또 설하기를 「설사 백천만겁이라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아서 시절인연이 오면 과보를 돌아와 스스로 받게 된다」하였다. 능엄경에서 이르기를 「원인이 바르지 않으면 결과도 바르지 못하다」했다. 그러므로 좋은 원인을 심으면 좋은 결과를 맺게 되고, 악한 원인을 심으면 악한 결과를 맺게 되는 것이니, 참외를 심으면 참외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 것은 필연적 도리이다. 인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가 두 가지 고사(故事)를 들어 증명해 보겠다.

◎ 유리왕(琉璃王)이 석가족을 죽인 고사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카필라성에 한 어촌이 있었다. 그 어촌 안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어느 때 가뭄으로 연못물이 말라 연못 속의 고기들은 모두 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잡아 먹혔다. 마지막으로 남은 꼬리가 아주 큰 고기 또한 잡혀서 삶아 죽었다. 마침 그때 과거부터 고기를 먹지 않던 어떤 소년이 이 큰 고기의 머리를 세 번 두드리며 희롱했다.

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파사익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렬히 믿어 석가족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태자를 낳았는데 이름을 유리라고 지었다. 유리가 어렸을 때, 석가족이 살고 있는 카필라성에서 공부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앉는 자리에 올라가 놀다가 사람들의 꾸지람을 들었으며 그들에 의해서 끌려 내려졌으므로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후에 국왕이 되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카필라성을 공격하여 성 안의 주민을 모두 살해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3일간 두통이 있으셨다.

모든 제자들은 부처님께 법을 설하여 저들을 구제하기를 청하였으나, 부처님은 결정된 업은 돌이키기 어렵다고 말씀 하셨다. 목건련 존자는 신통력으로 부처님 친족 오백인을 바루에 넣어 공중에 있게 하여 그들을 구출코자 했다. 그러나 바루를 내려놓으니 이미 모두 피로 변해 있었다.

모든 제자들이 그 이유를 부처님께 여쭙자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촌민들이 고기를 먹었던 일을 말씀하셨다. 그때의 큰 물고기는 현재의 유리왕의 전신이며, 그가 거느린 군대는 그 날 연못 속의 많은 물고기였고, 지금 피살된 카필라의 주민들은 그 때 고기를 먹던 사람들이었다. 부처님은 그 때의 소년으로 고기의 머리를 세 번 때린 원인으로 3일간 두통의 과보를 받았다. 결정된 업은 피하기 어려우므로 석가족 5백 사람은 비록 목련존자에게 구출되었으나 생명을 잃고 말았다. 그후 유리왕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원한과 원한이 서로 갚는 것은 기한이 없고, 원인과 결과는 진실로 있는 것이니 가히 두려워해야 한다.

◎ 백장(百丈)스님이 여우를 제도한 고사

백장스님이 하루는 법상에 올라 법을 설하였다. 법상에서 내려 온 후 사람들이 다 돌아갔는데 오직 한 노인만이 돌아가지 않았다. 백장스님이 그 노인에게 무엇하느냐고 물었다. 노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본래 사람이 아니라 여우가 둔갑한 것으로 전생에는 원래 이곳의 조실 (祖室)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학인이 나에게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하고 묻기에, 나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대답했습니다.곧 이 대답으로 인하여 떨어져 5백년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청컨데 스님께서는 자비심으로 가르쳐 주십시오』

백장스님이 말했다.『그대가 나에게 물어보아라』노인이 물었다.『스님께 묻겠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백장스님이 대답했다. 『인과에 어두워지지 않는다(不昧因果)』 노인은 이 한마디 말에 크게 깨달았다. 바로 감사의 예를 올리고 말했다.『이제 스님의 말씀을 듣고 제가 여우의 몸을 벗어 났습니다. 저는 뒷산 바위 아래 있으니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절집의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루어 주십시오.』 이튿날 백장스님은 뒷산 바위 아래에서 죽은 여우 한 마리를 지팡이로 꺼집어내어 절집의 법도에 따라 화장했다.

우리들은 이 두 가지 고사(故事)를 통하여, 인과가 가히 두려운 것이며, 비록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두통의 과보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과보의 상응함은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고, 결정된 업은 견고하여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 때 그때마다 두려워하고 삼가하여 원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② 엄격히 계율을 지켜라

수행하여 도를 이루는데는 첫째가 지계(持戒)이다. 계율은 곧 위없는 깨달음의 근본이며,계율(戒律)로 인하여 선정(禪定)이 생기고, 선정으로 인하여 비로소 지혜(智慧)가 나타난다. 계를 지키지 않고도 수행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능엄경에서 네 가지 청정(淸淨)을 명백히 밝혀 계를 지키지 않으면 삼매(三昧)를 닦는다하더라도 번뇌를 벗어날 수 없다고 알려주고 있다. 비록 많은 지혜와 선정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사마(邪魔)와 외도(外道)에 떨어질 것이니, 가히 지계의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계를 지키는 사람은 하늘과 용이 옹호하고 사마와 외도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계를 깨트린 사람은 귀신들이 큰 도적이라고 말하며, 그의 발자취를 쓸어버린다.

옛날 계빈국 근처에 절터가 있었는데 독용(毒龍)이 항상 나타나 그 지방을 해치므로 5백의 아라한이 함께 모여 선정의 힘으로 독용을 쫓고자 했으나 독용을 쫓지는 못했다. 후에 한 스님이 와서 선정에는 들지도 않고 독용을 향해서 한 마디 말했다.『어진이여, 여기서 멀리 떠나라』그러자 이 독용이 멀리 달아났다. 이 때 여러 나한들이 무슨 신통(神通)으로 독용을 쫓았냐고 물으니, 그 스님은 『나는 선정의 힘을 쓰지 않고, 바로 계행을 썼습니다. 가벼운 계율도 수호하기를 무거운 계율과 같이 지킵니다.』라고 말했다. 5백 아라한의 선정력이 계율을 엄수하는 한 사람의 스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한다.『육조(六祖)스님께서는 「마음이 곧은데 어찌 계율 지키는 일에 수고할 것이며, 행동이 바른데 어찌 참선이 필요하리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내가 묻노니 그대의 마음이 바르고 곧은가? 만약 달밤에 아름다운 여인이 옷을 벗은 체 온 몸을 드러내고 그대를 껴안는다면 그대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이치에 맞지 않게 그대를 욕하고 때린다면 그대는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가? 그대는 원수와 친한 이, 미움과 사랑, 나와 남,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아니할 수 있는가?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입을 열 것이요 그렇지 못하다면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③ 믿음을 굳게 가져라

수행하여 도를 이루려면 먼저 신심(信心)을 굳게 하여야 한다. 믿음은 도의 으뜸이며 공덕의 어머니이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신심이 없으면 잘 되지 않는다. 우리들이 생사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더욱 이 믿음을 굳게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은 있지만, 다만 망녕된 생각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능히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각종 법문은 중생들의 각종 마음 병을 치료하고자 함이다 라고 말씀 하셨다. 우리들은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않다고 믿어야 하며, 모든 중생이 다 성불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째서 성불하지 못하고 있는가? 법답게[如法] 죽음을 각오하고 공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우리는 콩으로 두부를 만들 수 있음을 알지만, 우리가 만들지 않는다면 콩이 스스로 두부로 변하지 않는다. 곧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또한 간수를 바르게 넣지 않으면 두부를 만들 수 없다. 만약 바르게 갈고 끓이고 적당하게 간수를 치면 반드시 두부(豆腐)가 된다. 도를 닦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노력하지 않으면 부처를 이룰 수 없으며, 바르게 노력하지 않으면 또한 부처를 이룰 수 없다. 만약 바르게 수행하고 물러나지도 잘못하지도 않으면 결정코 부처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마땅히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깊이 믿어야 하고, 다시 마땅히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결국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영가(永嘉)스님은 『실상(實相)을 증득하면 인간도 진리도 없어져, 찰라에 아비지옥의 업도 없어진다. 만약 내가 거짓말로 중생을 속였다면 영겁의 시간을 발설지옥에서 지내는 것을 자초하는 것이다』고 했다. 저 어른의 자비심은 뒷사람의 신심을 굳게 하기 위함이니, 그러므로 이 같은 큰 서원을 발한 것이다.

④ 수행의 길을 결정하라.

신심이 이미 갖추어졌으면, 한 가지 법의 문을 결정해서 수행해야 하며 절대 아침저녁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 염불도 좋고, 주력도 좋고, 참선도 좋다. 하나의 문을 결정해서 바로 달려 나아가 길이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오늘도 도를 이루지 못하고, 내일도 마찬가지이며, 금년에도 도를 이루지 못하고, 내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금생에 도를 이루지 하고 내생에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위산( 山)스님은 말씀하셨다. 『세세생생토록 만약 물러나지만 않는다면, 부처의 자리를 결정코 약속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수행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오늘은 어떤 선지식이 염불이 좋다고 하면 한 이틀 염불을 하고, 내일은 다른 선지식이 참선이 좋다고 하면 또 한 이틀 참선을 한다. 이렇게 동쪽으로 쏠렸다가 서쪽으로 쏠렸다 하며 일생을 방황하다 죽음에 이르니, 모두가 허송세월이요 조금도「성과」가 없으니 어찌 원수가 아니며, 잘못됨이 아니겠는가.

⊙ 참선수행의 방법

우리가 공부해야 할 법의 문은 많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은 참선으로써 위없는 미묘한 문으로 삼으셨다. 능엄회상에서 부처님은 문수보살에게 원통(圓通-불보살이 깨달은 경계)을 선택할 것을 가르치실 때에 관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으로써 으뜸을 삼으셨다. 우리는 들음을 돌이키어 자성(自性)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참선이며 이 안에 선방[禪堂]이 있다. 이제 참선법을 설명하겠다.

① 좌선(坐禪)이란

우리가 평소에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도(道)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행위이니 어느 곳인들 도량(道場) 아닌 곳이 있겠는가? 본래 어떠한 선실도 소용되지 않으며, 앉아야 비로소 참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선실이니 좌선이니 하는 것은 우리와 같은 장애가 깊고 지혜가 얕은 말세의 중생을 위해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좌선을 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잘 조절하고 길러야 한다. 만약 잘 조절하지 못하여 부족하면 병에 걸리게 되고, 지나치면 마(魔)가 붙게 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선방에서 향을 들고 경행(經行) 하는 것과 자리에 앉아 앞에 향을 피우는 것은 몸과 마음을 조절하려는 데에 그 뜻이 있다.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방법은 이 밖에도 많으나 중요한 것만을 가려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가부좌를 할 때에는 의식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지 말고 자연스럽게 바로 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기(火氣)가 위로 올라가 나중에 눈곱이 많아지고 입에서 냄새가 나며 기가 위로 솟구치고 입맛이 없어지는데 심할 경우에는 피를 토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리를 구부리거나 머리를 숙여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쉽게 혼침(昏沈)에 떨어지게 된다. 만약에 혼침이 온다고 느껴지면 눈을 크게 뜨고 허리를 한번 펴고 가볍게 엉덩이를 움직이면 혼침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공부를 지나치게 다그쳐서 마음이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는 모든 반연(攀緣)을 놓아 버리고 공부까지도 놓아 버려라. 향이 반 마디 탈 때까지 쉬면 서서히 편안해질 것이다. 그런 뒤에 다시 공부를 일으켜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날마다 쌓이고 달마다 누적되어 성품이 바뀌어 성미가 조급해 지고 쉽게 화를 내게 되며, 심할 경우에는 발광(發狂)을 하거나 마가 붙게 된다

좌선을 할 때 받게 되는 경계(境界)는 대단히 많기 때문에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경계에 대하여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장애가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괴이한 것을 보고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그 괴이한 것이 저절로 물러나게 된다」는 말이 바로 이를 이른 것이다. 비록 요망스런 마군이가 와서 그대를 뒤흔들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셔서 그대에게 마정수기(摩頂授記)를 주실지라도 상관하지 말며, 기뻐하지도 말라. 능엄경에서 이르되 「거룩하다는 마음을 짓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좋은 경계라 한다. 만약에 거룩하다는 알음알이를 지으면 바로 모든 사도(邪道) 빠지게 된다」는 말은 이를 이른 것이다.

② 공부는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 손님과 주인을인식하라

그렇다면 공부는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능엄회상에서 교진나 존자가 객(客)과 진(塵) 두 글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바로 우리들 초심자가 공부를 시작해야 할 곳이다. 교진나 존자는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마치 지나가던 손님이 객주집에 들려서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데, 먹거나 자는 일을 마치면 행장을 차려 가던 길을 떠나며 머물지 않지만 주인은 아무데도 가지 않는 것과 같다.머물지 않는 것은 손님이요, 머무는 것은 주인이다. 또 비가 개고 밝은 해가 하늘에 떠서 햇빛이 틈새로 들어와 하늘이 밝으면, 허공에 있는 모든 먼지가 요동하는 것이 드러나지만 허공은 고요하다. 맑고 고요한 것은 허공(空)이요, 요동하는 것은 먼지[塵]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손님과 먼지는 망상(妄想)에 비유한 것이요, 주인과 허공은 자성(自性)에 비유한 것이다. 항상 머물러 있는 주인은 본래 손님이 가든지 혹은 오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항상 머물러 있는 자성은 본래 망상이 갑자기 일어나든 갑자기 사라지든 망상에 따르지 않는 것과 같다. 다만 스스로 온갖 일에에 무심하다면, 만물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항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먼지는 저절로 요동하고 있으나 본래 맑고 고요한 허공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는 망상이 스스로 일어나든 없어지든 본래 여여(如如)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는 자성에 장애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른바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 가운데 손님[客]이라는 말은 비교적 거칠고[거친 망상] 먼지[塵]라는 말은 비교적 세밀하다[미세 망상]. 초심자가 먼저 「주인」과 「손님」의 뜻을 명확하게 인식한다면 자연히 망상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허공」과 「먼지」의 뜻을 명백하게 인식한다면 망상은 스스로 장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알면 억울한 결과가 되지 않는다』라는 이 도리를 요긴하게 살펴 알아차렸다면 공부하는 길은 반쯤 이룬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

③ 화두(話頭)와 의정(疑情)

옛날 조사스님들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했다[直指人心見性成佛]. 달마스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나, 육조스님의 오직 성품을 보는 것만을 논한다(唯論見性)는 법문처럼 다만 곧장 받아들였을 뿐 화두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뒷날 조사스님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옛과 같지 않고 법을 위해 죽으려는 마음도 없이 매양 거짓 기틀에 속아 남의 보물을 헤아려 자기의 보배로 삼는 것을 보고는 각각 저마다 기치[門庭]를 세우고 방편[手眼]을 내어 학인들에게 화두를 들게 하였다. 화두는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부모에게서 태어나기전 나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등등 많이 있지만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제일 많이 든다.

무엇을 일러 화두라 하는가. 화(話)는 말이며 두(頭)는 말하기 이전이다.「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은 화(話)고 염하기 이전은 화두(話頭)이다. 이른바 화두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때이니,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미 화미(話尾)가 되어버린다.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을 일러 나지 않음[不生]이라고 부르는 것이니, 흔들리지 않고[不掉擧], 잠들지 않고[不昏沈],고요함에 빠지지 않고[不著靜], 허무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空]. 또 불멸(不滅)이라고도 부르니, 시시각각 오직 한 생각으로 회광반조(回光返照-자기를 반성하여 심성을 돌이켜 봄) 한다. 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말을 일러 화두를 든다고 하며 혹은 화두를 비춘다고 한다.

화두를 들려면 먼저 의심하는 마음인 의정(疑情)을 일으켜야 한다. 의정은 화두참구의 길잡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정이라 하는가?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할 때,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입으로써 염하는가 아니면 마음으로써 염하는가? 만약에 입으로써 염한다고 한다면, 잠들었을지라도 입은 그대로 있는데도 어째서 염할 줄을 모르는가? 만약에 마음으로써 염한다고 한다면, 또 그 마음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가. 붙잡을 수도 없고 더듬을 수도 없으니 답답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처럼 명확하지 않은 까닭에 문득「누구」라는 말에 가벼운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다만 거칠게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되며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좋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오직 이 의심을 멈추지 않고 비추어 돌아보되 마치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볼 것이요, 두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만약에 의심이 있으며 움직이지 말아야 하고, 의심이 없다면 다시 가볍게 일으켜야 한다.

처음 참구할 때는 고요한 곳에서의 공부가 시끄러운 곳에서의 공부 보다 힘을 얻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절대로 분별하는 마을을 내서는 안되며 힘을 얻거나 못 얻거나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시끄러운 곳이든 고요한 곳이든 상관하지 말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지어나가면 공부는 좋아질 것이다.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하는 말 가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누구인가?」라는 말이니, 나머지 말은 그것을 늘려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자는 누구인가? 똥 누고 오줌 누는 자는 누구인가? 성내는 자는 누구인가? 능히 느끼는 자는 누구인가? 등과 같다. 어쨌든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누구인가?」라는 글자를 한번 들면 문득 쉽게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반복하여 헤아리거나 일부러 생각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인가?」라는 화두야 말로 참으로 참선의 묘법(妙法)이다. 「누구인가?」 혹은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것은 단지 부처님의 명호만 부르거나 사량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말을 참구하는 것을 의정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지만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하는 공덕이 더 크다. 또 어떤 이는 어지러운 망상으로써 동으로 찾고 서로 뒤지는 것을 의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들이 어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망상도 더욱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는가. 이는 마치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서 도리어 아래로 떨어지는 격이니,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초심인이 일으키는 의심은 아주 거칠어서 홀연히 끊어진 듯 하다가 이어지고, 익은 듯 하다가 미숙하여, 의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되며 그저 생각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점차 날뛰던 마음을 가두어 염두(念頭)에 무엇인가 잡히는 듯한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참구(參究)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점차로 공부가 익어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고, 자기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며, 몸과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고, 한 줄기 의심이 드러나 끊어지지 아니할 때에야 비로소 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처음에야 어찌 공부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겨우 망상을 부수는 정도이다. 진정한 의심이 드러나게 되는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공부를 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하나의 커다란 관문(關門)이 있으니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갈림길로 들어가기 쉽다.

(1) 아주 깨끗하고 한없이 가벼우며 편안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선정[覺照]을 놓치면 곧 가벼운 혼침 상태에 빠지게 된다.만약에 눈 밝은 이가 곁에 있다면 바로 알 수 있다. 이 경지는 「향나무 판자로 내려치자마자 온 하늘의 구름과 안개가 걷힌다」라는 것으로 흔히 이 경지를 도를 깨친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2) 아주 깨끗하며 텅 비고 툭 트인 상태여서 의정이 없으면 곧 무기(無記)에 떨어져, 마치 나무 등걸이나 바위덩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이것을 일러 「돌에 부딪치는 물거품」이라고 한다. 이 때에는 다시 화두를 들어야 하며 화두를 들면 곧 각조(覺照)에 들게 될 것이다 (覺은 미혹하지 아니함이니 곧 지혜이고, 照는 어지럽지 아니함이니 곧 선정이다).

오직 오롯한 이 한 생각은 고요하게 비추며, 여여(如如)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신령하여 어둡지 아니하며 분명하며 항상 안다. 마치 식은 재에서 연기가 나는 것처럼 한결같이 이어져 끊이지 않는다.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면 금강(金剛)과도 같은 눈동자를 갖추어야 하며, 다시는 화두를 들 필요가 없다. 이 때 화두를 든다면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올려 놓는 격이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스님에게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조주스님이 「놓아 버리라(放下來)」고 대답하자 그 스님은 다시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놓아 버립니까?」하고 물었다. 조주스님은 「놓아 버리지 않으려면 짊어지고 가거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 때의 소식을 말한 것이다.

이 소식은 물을 마셔본 자만이 그 물의 차고 따뜻함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말로서 표현할 수는 없다. 이 경지에 이른 이는 저절로 분명하게 알 것이요,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는 말해 주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이른바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검을 드러내 보일지언정, 시인이 아니라면 시를 지어 바치지 말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4) 조고화두(照顧話頭)와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어떤 이는 「관세음보살의, 들음을 돌이키어 자성을 듣는다는 것이 어떻게 참선이 되겠는가?」 라고 묻는다. 화두를 비추어 본다는 것은 언제나 오롯한 한 생각이 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회광반조(回光返照) 한다는 것이며, 「들음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反聞聞自性)」는 것 또한 언제나 오롯한 한 생각이 들음을 돌이키어 자성을 듣는다는 것이다. 「회(回)」는 곧 돌이키는 것[反]이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不生不滅]」은 바로 자성이다.

「들음(聞)」과 「비춤(照)」은 바로 흐를[順流] 때에는 소리를 따르고 모양을 좇기 때문에 청각(聽覺)은 소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시각(視覺)은 모양을 넘어서지 못하여 분별심이 뚜렷하다. 그러나 거꾸로 흐를[逆流] 때에는 돌이켜 자성을 관(觀)하므로 소리를 따르지 않고 모양을 좇지 않는다. 그래서 본래 「들음」과 「비춤」은 둘이 아니다.

우리는 화두를 비추어 본다거나 들음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거나 하는 것이 절대로 눈동자를 사용하여 보거나 귓부리를 사용하여 듣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눈동자를 사용하여 본다거나 귓부리를 사용하여 듣는다면 이는 소리를 따르고 빛을 좇아 물건에게 부림을 받는 것이어서 순류(順流)라 부른다. 만약에 오롯한 한 생각이 「불생불멸(不生不滅)」가운데서 소리를 따르거나 빛을 좇지 아니하면 이를 역류(逆流)라 부르며, 화두를 돌이켜 비추어 본다, 또는 들음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 라고 한다.

(5) 생사심(生死心)과 장원심(長遠心)

참선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사심[生死心-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절박한 마음가짐]이 간절해야 하며,또한 장원심[長遠心-멀리 내다보며 꾸준히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이다. 생사심이 간절하지 않으면 의정이 일어나지 않아 공부가 제대로 향상되지 않는다. 장원심이 없는 것은 마치 하루 햇볕을 쬐고 열흘 식히는 것(一曝十寒-하다 말다 하는 것)과 같아서 공부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만일 꾸준하고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진정한 의심이 일어나게 되며, 진정한 의심이 일어나면 티끌 번뇌를 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쉬어지게 되어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물은 모여 냇물을 이루게 된다.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 하나를 들려주겠다. 청(淸)나라 경자(庚子)년에 8국의 연합군이 북경에 쳐들어 왔다. 그때에 나는 광서황제(光緖皇帝)와 자희태후(慈禧太后) 일행과 함께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중간의 갈림길에서 섬서(陝西)방면으로 향했다. 날마다 수십 리씩을 도망하였으며 며칠 동안 밥조차 먹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길가에서 한 노인이 고구마 줄기를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는 다 먹고 나서 그 노인에게 이것이 무슨 물건인데 이렇게 맛이 있느냐고 물었다.

생각해 보라. 황제는 평소에 훌륭한 가마를 타고 당당한 위풍을 지니고 있었으니, 이전에는 어찌 몇 걸음이나마 걸어 보았을 것이며, 반끼라도 배를 곯아 보았을 것이며, 고구마 줄기를 먹어 보았을 것인가.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가마도 제대로 꾸미지 못하고 위풍도 거드럭거리지 못하고 길에서는 뛰어야 했으니, 배가 아주 고파 채소 뿌리라도 먹어야 했다. 어째서 그럴 수 있었을까? 연합군이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 까닭에 오로지 도망쳐 목숨을 구할 생각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협상이 이루어져 어가(御駕)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자 가마도 제대로 꾸미게 되었고, 위풍도 거드럭거리게 되었고, 길에서 뛰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배를 곯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러자 조금이라도 맛없는 음식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왜 그럴까? 연합군이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지 않으므로 이제는 도망 칠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그가 늘 도망칠 때의 마음가짐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어떤 일인들 안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장원심이 없었기 때문에 좋은 경계[順境]를 만나자 옛날의 태도가 다시 싹트게 된 것이다.

그대들은 동참하라! 무상살귀(無常殺鬼)가 바로 이 시각에도 우리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다. 저들은 영원히 우리와 협상을 하려 들지 않는다. 빨리 꾸준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내어 생사를 해탈하라. 고봉(高峯)스님은 말했다.「참선하여 공부를 이루려고 하려면 마치 천길 우물 밑에 떨어진 것과 같이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천 생각 만 생각 오직 벗어나기를 구하는 마음이어야 하며, 끝까지 결코 두 생각이 없어야 한다. 참으로 이렇게 공을 들여서 3일, 혹은 5일, 혹은 7일에 깨치지 못한다면 내가 오늘 대망어(大妄語)죄를 범한 것이니, 영원히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떨어지리라」 저 노인께서 한결같이 자비심이 간절하여 우리가 꾸준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할까 염려하여 이렇게 다짐을 거듭하고 우리에게 보증하신 것이다.

(6) 공부할 때 두 가지 어려움과 쉬움

공부하는 이에게는 두 가지의 어려움과 쉬움이 있다. 하나는 초심자(初心者)의 어려움과 쉬움이요, 다른 하나는 구참자(久參者)의 어려움과 쉬움이다.

◎ 초심자(初心者)의 어려움과 쉬움

초심자의 병통(病痛)은 망상(妄想)과 습기(習氣)가 놓아지지 아니한다는 점이다. 무명(無明)·아만·질투·장애·탐내는 마음·성내는 마음·어리석은 마음·애욕·나태 등을 좋아하며, 나와 남의 잘잘못을 따지고 뱃가죽만 가득 채운다면 어떻게 도(道)와 어울릴 수 있겠는가. 부잣집 출신인 경우에 습기를 잊지 못하여 약간의 모욕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벼운 고통도 견디지 못하니, 어떻게 공부하여 도를 깨치겠는가.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떠한 신분으로 출가 하셨는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얼마 안 되는 문자를 배워 문장을 찾고 글귀를 뽑아내어 옛 사람의 말을 사용하여 알음알이를 짓는다. 그는 스스로 대단히 여겨 크게 아만심을 일으키고 있지만, 한 바탕 큰 병을 만나면 비명이 하늘에 닿는다. 섣달 그믐[죽는 날]이 되어서 비로소 허둥지둥 하지만, 평소의 알음알이는 아무 곳에도 쓸데가 없어 그제야 후회한들 소용이 없을 뿐이다.

약간의 도심(道心)이 있는 사람은 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른다. 어떤 이들은 망상을 두려워하여 제거하고 또 제거해 보지만 제거하지 못한다. 종일토록 번뇌하다가 스스로 업장이 깊고 두터움을 원망하니 이로 말미암아 도심(道心)을 잃고 물러난다. 어떤 이들은 망상과 더불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씩씩거리며 주먹을 들어 기운을 돋우며 가슴을 내밀고 눈을 부릅떠서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벌일 기세를 보이며 망상과 한판 사생결단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망상이 없어지기는커녕 도리어 희롱 당하여 피를 토하며 발광을 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허무[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나 저들이 이미「귀신굴」에 태어났음을 알아야 한다. 비우려해도 비워지지 않고, 깨달으려해도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마음으로 깨달음을 구하지만, 도를 깨닫기를 구하거나, 부처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큰 망상임을 알아야 한다. 모래로는 밥을 지을 수 없는 법이니 당나귀의 해(12간지에 없는 해)가 올 때까지 구한다해도 결코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한두 가지[枝]의 맑은 향기에 부딪쳐 곧 환희심을 일으킨다. 이것은 눈 먼 거북이가 나무 구멍을 겨우 꿰뚫은 것처럼 우연히 부딪친 것이요 참으로 공부가 익어서가 아니다. 환희마(歡喜魔)가 이미 마음에 든 것이다. 어떤 이들은고요한 가운데서는 맑고 깨끗해서 공부가 잘 되지만 시끄러운 가운데서는 공부가 잘 안 되자,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추구한다. 하지만 저들은 이미 동정(動靜) 두 마왕의 권속이 되어 버렸다.

위와 같은 부류는 대단히 많다.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할 때 길을 바로 들어서지 못하면 진실로 어려움이 많다. 깨달음은 있으나 비춤이 없으면 산란하여 「낙당(落堂-당호를 얻음. 곧 깨달음을 인가 받음)」하지 못하고 비춤은 있으나 깨달음이 없으면 또한 고인 물(死水)에 앉아 빠져 죽게 된다.

공부 하기가 비록 어렵다고는 하나, 일단 길만 바로 들어서면 또한 대단히 쉬운 것이다. 어떠한 것이 초심자의 쉬움인가. 무슨 교묘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놓아 버릴 뿐이다. 어떠한 것을 놓아 버리느냐 하면, 곧 일체의 무명과 번뇌를 놓아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놓아 버릴 수 있는가.

장례를 치를 때 그 시체에다 대고 몇 마디 욕설을 퍼부어 보라.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를 몇 방망이 때려 보라. 대거리를 하지 아니할 것이다. 평소에 심술을 잘 부리던 자도 심술을 부리지 아니하며, 평소에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던 자도 그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평소에 습기(習氣)와 오염(汚染)이 많던 자도 그것이 없다. 아무것도 분별하지 않으며 무엇이라도 놓아 버린다.

그대들은 동참하라. 우리의 이 몸뚱어리가 숨 한 번 들이쉬지 못하면 곧 한 구의 시체가 되고 만다. 우리가 놓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몸뚱어리를 중요하게 여겨 나와 남, 옳고 그름, 사랑과 미움, 취하고 버림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몸뚱어리가한 구의 시체라고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할 것이며,그것을 본래의 나라고 보지 아니할 것이니 무엇인들 놓아 버리지 못하겠는가. 다만 놓아 버려야 한다.

하루 종일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고 움직이고 조용하고 한가하고 바쁘고를 막론하고,온 몸이 통째로 하나의 의념(疑念)이 되어 평온하고 온화하게 중단 없이 의심하여 가라. 터럭만큼도 다른 생각을 섞지 말라. 화두를 드는 것이 마치 천장검(天長劍)을 의지한 것처럼 하여 마군이 오면 마군을 베고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라. 어떠한 망상도 두려워하지 말라. 무엇이 그대의 한가로움을 깨트리겠는가.

또 어찌 부질없이 고요함과 움직임을 분별하여 집착하는가. 만일 공(空)에 집착하여 망상을 두려워하면 그것은 또 망상을 한 겹 더하는 것이다. 청정하다고 생각하면 이미 청정이 아니다. 공(空)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면 이미 유(有)에 떨어진 것이며 부처를 이룬다고 생각하면 이미 마군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물긷고 나무하는 것이 묘도(妙道) 아님이 없고, 김 매고 씨 뿌리는 것이 모두 참선이다. 하루종일 다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만 도 닦는다고 하지 않는다.

◎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어떤 것이 구참자의 어려움인가. 구참자는 참된 의심이 눈앞에 나타날 때면 깨달음도 있고 비춤도 있지만 생사(生死)에 속해 있으면 깨달음도 없고 비춤도 없고 허무에 떨어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참으로 어려움이 많다. 대개는 여기에 이르면 깨끗이 벗어나지 못하고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서 나아갈 방법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 경지에 이르면 정(定) 가운데서 조그만 지혜가 일어나, 옛 사람의 몇몇 공안을 건성으로 알아채고서는 곧 의정을 놓아버린다. 스스로 확철대오(確撤大悟) 했다고 생각하여 시를 읊조리고 게송을 지으며 눈을 끔벅이고 눈썹을 치켜올려 선지식이라고 떠들면서 자기를 알아주지 아니하는 자들은 마군의 권속이라고 한다.

또 어떤이는 달마스님의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헐떡이는 마음이 없어서, 마음이 담장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있다」는 뜻과 육조스님의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바로 이러한 때에 어느 것이 명(明) 상좌의 본래 면목인가?」라는 뜻을 잘못 알고서는 고목이나 바위덩이처럼 앉아 있는 것만으로 지극한 원칙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신기루를 보배 있는 장소로 알며 타향을 고향으로 여기는 것이니, 노파가 암자를 불사른 것도 바로 이러한 꽉 막힌 자들을 꾸짖기 위한 것이다.

어느 것이 구참자의 쉬움인가. 이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자만하지 말고, 중간에서 걷어치우지도 말고, 면밀하게 공부해나가야 한다. 면밀한 가운데 더욱 면밀하게, 미세한 가운데 더욱 미세하게 해야 한다. 시절이 한번 이르면 통의 밑바닥이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아니하면 선지식을 찾아서 못을 뽑고 쐐기를 빼야 한다.

한산(寒山)대사는 노래(頌)했다.

高高山頂上 높은 산봉우리 꼭대기에 올라
四顧極無邊 사방을 돌아보니 끝이 없구나.
靜坐無人識 조용히 앉아 있으니 아는 사람 없고
孤月照寒泉 찬 샘물에 외로운 달이 비쳐 있다.
泉中且無月 샘물에는 원래 달이 없으며
月是在靑天 달은 푸른 하늘에 있다.
吟此一歌曲 노래 한 곡조 불러 보나니
歌中不是禪 노래 가운데 선(禪)이 있지 아니한가.

첫 두 구절은 참된 실상이 홀로 드러나 일체에 구속되지 않고, 온 대지에 빛이 밝아서 터럭만큼도 장애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 다음 네 구절은 진여(眞如)의 미묘한 본체를 설한 것이니, 범부는 애당초에 알 수 없고 3세 제불도 나의 그 자리를 찾지 못하므로 아는 사람 없다고 한 것이다. 찬 샘물에 외로운 달이 비쳐 있다는 말은 이러한 경계를 비유한 저 노인네의 방편이다. 최후의 두 구절은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알까봐 특별히 우리들을 일깨운 것이다. 모두가 선 아님이 없다.

⊙ 결론(結論)

이제 나는 한 강설을 마쳤다. 그러나 이것 또한 넝쿨을 펴는 것이오 쓸데없는 길을 갈래 내는 것이다. 무릇 언설은 모두 참다운 뜻이 없다. 그러므로 옛 스님네들은 몽둥이로 때리지 아니하면 고함을 질렀다. 어찌 이처럼 너절하게 늘어놓는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요즘은 옛날과 같지 않아 억지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은 동참하라. 구경(究竟)에 있어서 손가락은 무엇이며 달은 무엇인가. 참구하라.

 

 

 

 

 

 

 

 

 

 

동채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eastandsouth/8064675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