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연기정신으로 돌아가자’
세상이 시끄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신문, 라디오, TV에서 종일 떠들어 댄다.
어디 그것뿐이랴. 자동차의 소음공해, 거칠어진 인간들의 다투는 듯한 소리, 여기를 가도 저기를 가도 TV, 라디오의 고음은 귓전을 때린다. 소리의 소음공해 속에서 시대정신에 메마른 우리들은 시달리고 지치고 그러다가 대립하고 투쟁하면서, 한도 끝도 없는 인생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기에 당신은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누가, 도대체 무엇이 이 대립과 소음의 불연속선을 그리게 했나, 정년 대화합의 장은 우리 시대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실인가를 진지하고도 깊은 사색을 통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참다운 인간상의 개발 없이 감각기관에 지배되는 욕망의 세계에 휘말리고 그 욕망은 기술과 생산에 촉진제가 되어 현대와 같은 물질적인 번영을 이루었지만 그 생산의 증대와 물질적 풍요가 우리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행복을 가져왔다거나 영화스러운 사회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산업사회의 발달과 부의 축적은 인간의 욕망을 더욱 자극시켰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를 더욱 팽창시켜 오늘의 이 귓전을 따갑게 하는 소음을 만들지는 않았는지 우리 모두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산업의 발달은 밑도 끝도 없는 경쟁사회로 치닫게 만들었고 자원과 자연을 고갈시키고 인간 사회의 투쟁을 유발시켰다고 말이다.
이로써 얻어진 좌절, 불만, 공포는 더욱 우리와 가까워지고 모든 이익과 부의 축적은 나 자신에게만 국한되고 자신만의 편리를 위하여 쓰여지기를 갈망하는 각종 편견과 아집, 대립과 투쟁으로 우매한 인간 군상들이 온갖 잘못된 사고와 인간 무지의 참담한 현실에 직면하여 있다. 이러한 온갖 잘못된 사고의 관념을 만들고 그릇된 생각을 만족시키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서로 야합하고 비리를 생산해 내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거침없이 저질러지는 세태 속에서 우리들의 화합은 깨지고 영화는 그들 자신에 의하여 위협당하고 파괴되고 있다. 삶의 현장을 각축장화 시켜 버린 인간 무지와, 인과법을 진정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 저들의 사고 영역과, 투쟁과 쟁취, 상대를 무너뜨려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경쟁적 사고의 팽창은 혼미와 혼란만을 가속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과 투쟁을 극복하여 대화합으로 지향시킨 부처님의 연기설을 받아들일 때, 지리한 장마도 서풍에 물러갈 것이며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새로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멸함에 이것도 멸한다’ 는 모든 존재가 존재로서 존립하고 유지되는 참모습을 그 근원적인 입장에서 밝힌 부처님의 가르침, 즉 이것과 저것 · 나와 너 사이가 아무런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우면서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와 현상은 종횡으로, 직·간접으로 상의상자(相依相資)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 이러한 인과의 법칙을 믿을 때, 뜨거운 연관관계 속에서 생성 발전의 원리가 되는 연기적 상의상자의 관계를 통해서 자연의 한 부분이 파멸될 때 다른 나머지 부분도 파멸할 조건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의 파괴가 저것의 파괴요 그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기에, 너와 나의 협력과 모든 것과의 조화야말로 평화로운 나와 우리들의 사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연기적 도리에 어두워 자아만을 고집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내세워 온갖 편견과 대립을 유발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불타는 욕망과 결부하여 끝내 파멸의 구덩이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일체의 모든 존재양상이 연기적으로 화합된 것이기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진리 앞에 우리는 서야 한다.
무자성(無自性)이요, 무실체(無實體)이기에 무상(無相)이요, 무아(無我)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오직 인연소생(因緣所生)이며 연기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자기중심주의의 독단과 편견을 파사(破邪)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모순과 편견의 갈등 속에서 업을 쌓고 너의 파멸은 나의 승리라고 착각하는 중생의 슬픈 존재양상을 보시고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 유와 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 의지처인데 이러한 두 극단을 떠나 중도가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는 까닭에 저것이 일어나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이 유와 무, 단과 상이라는 대립된 두 견해를 완전히 극복한 경지, 그 상태를 중도라고 한다.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되었기에 고정불변한 하나의 실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유(非有)와 비상(比常)이다. 불무(不無)요 부단(不斷)이요, 유와 무, 단과 상이라는 대립된 개념의 극복과 나아가 그 원인까지도 해결해 버리는 뜻으로서의 극복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중도 원리는 인생과 우주의 보편적 원리로서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움 등 일체의 모순과 대립을 원칙적으로 해결해 준다. 그리하여 악을 선으로, 모순을 조화로, 대립을 협동으로, 무지를 지혜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상호협조와 평화적 공생공존의 실천 원리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대한 가르침을 체득하여 마음의 평화, 나아가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조화된 모습으로 자신을 세우야 한다. ‘이기적인 욕망의 쇠사슬을 끊어버리면 너의 마음은 즐거우리라’는 교훈을 따라 이제 우리 모두는 동체대비의 한 몸이라는 교훈 앞에 서로를 미워하지 말자. 서로를 경쟁상대로 생각지 말자.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극단을 버린 중도의 연기정신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꼭꼭 새기자
1982.5.23
칠보사 조실 재직시
염화실 카페 http://cafe.daum.net/yumhwasil/8Hqs/64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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