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1(1~6)

수선님 2019. 8. 11. 12:07

조주록 강해


원문출처


조주록은 중국 당나라시대의 선승인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선사가 남긴 선어(禪語)를 기록한 책입니다. 선사의 호는 조주(趙州), 법명은 종심(從諗), 원래 성(姓)은 학(郝)씨이며, 사후에 중국 황제가 내린 시호는 진제(眞際)대사입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조주(曹州) 호통원(扈通院, 일설에는 靑州 龍興院)에서 출가했고, 14살에 남전보원(南泉普願, 748 ∼ 835)선사를 만난 후 20대에 도를 터득했다고 합니다. 조주선사가 남전보원대사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남전대사가 머무는 안휘성 남전의 조그만 절로 석공혜장이란 스님이 14살짜리 사미승을 데리고 남전을 찾아왔습니다. 석공스님이 먼저 남전선사를 만나 뵙고 청하기를, “제가 데려온 아이가 아주 영특한데, 저로서는 이 아이를 훌륭한 인재로 키울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스님께서 크신 법력(法力)으로 잘 지도해 주십시오.” 하고는 물러 나와서 조주를 조실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때 남전대사는 방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다가 인기척에 눈을 뜨고는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그렇다면 상스러운 모습을 보았는가?”

“아닙니다. 상스러운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워있는 여래는 보았습니다.”

그 말에 남전대사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습니다.

“너는 임자가 있는 사미인가, 임자가 없는 사미인가?”

“임자가 있는 사미입니다.”

“어디 계시는가?”

그러자 조주는 다짜고짜 남전대사에게 세 번 절했습니다. 그리고는 대답하기를,

“날씨가 추워지는데 큰스님께서는 늘 존체 만복하소서.”

조주선사는 남전대사가 입적할 때까지 대사를 모시고 있다가 837년경 예순이 넘어서야 제방으로 행각을 나서면서 “일곱 살 먹은 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이에게는 내가 그에게 물을 것이요, 백살 먹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는 내가 그를 가르치리라”고 했습 니다. 그 후 마조, 백장, 약산, 도오, 위산 등 중국 선불교에 있어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을 찾아 도(道)의 경지를 더욱 넓혔습니다.

20여년의 행각 끝에 80세가 되어서야 고향 인근의 조주성(趙州城) 동쪽 관음원 (觀音院)에서 선(禪)의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하여 120세로 입적하기까지 40여년간 천하의 조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선의 이치를 짧은 몇 마디의 말로 잘 설파하여 깨달음의 문을 활짝 열어 보여서 구순피선(口脣皮禪, 입과 입술의 선)이라고 알려지기도 한 조주선사의 선풍은 당시에도 많은 선객(禪客)으로부터 옛 부처(古佛)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무자화두(無字話頭)는 선종의 제 1화두로 간주되고 있으며,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판치생모(板齒生毛), 방하착(放下着) 등 후대에 길이 남을 많은 화두를 남겼습니다.

조주록은 원래 모두 3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주진제선사어록(趙州眞際禪師語錄)이라고도 하며, 여산서현보각선원(廬山棲賢寶覺禪院)의 주지(住持)인 징시(澄諟)가 편찬한 상정본(詳定本: 나라에서 사용하기 위해 찍은 책)을 1131년에 고산(鼓山)에서 중간한 것으로‘고존숙어록’과‘조당집’,‘송고승전’ 등에 전하던 조주선사의 어록을 처음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하권 말미에는 수행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모은 대기(對機)와 감변(勘辨), 게송이 실려 있습니다. 상당어(上堂語)와 시중어(示衆語), 문답 등을 비롯하여, 모두 520여 가지의 일화를 담고 있는데, 거의가 일상적인 평범한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주의 선을 임제(臨濟)의 할(喝)과 덕산(德山)의 방(棒)에 비유하여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1. '하려 들면 어긋나는 도(道)'

조주선사가 남전대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그래도 닦아 나아가면 됩니까?”

“무엇이든 하려 들면 어긋나 버린다.”

“하려 들지도 않고서 어떻게 이 도를 알겠습니까?”

“도(道)란 알고 모르고와는 상관이 없다. 안다는 것은 거짓된

깨달음(妄覺)이요,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無記) 것이다.

만약 참으로 의심할 것 없는 도를 통달한다면 허공 같이 툭 트이고

넓으니 어찌 옳고 그름을 따지겠느냐?“

조주선사는 이 말씀 끝에 깊은 뜻을 단박 깨닫고 마음이 달처럼 환해졌다.

조주선사가 스승인 남전대사의 가르침을 받아 처음 도(道)를 깨우치는 시기의 대화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많은 대화가 오고 갔을 것이고, 스승의 법문을 알아듣지 못해 밤새워 괴로워하고 애를 태우던 나날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날 마침내 시절인연이 닿았는지, 반푼어치도 되지 않는 “도(道)란 무엇입니까?”란 질문을 한 순간부터 실마리가 슬슬 풀리기 시작합니다.

도(道)가 무엇인지 물으니 남전대사는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평상심이 도(道)란 말은 남전선사의 스승인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대사가 먼저 말한 것입니다. 마조록(馬祖錄)에 보면, ‘도(道)를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무엇을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경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범부의 행동도 아니고 성현의 행동도 아닌 이것이 보살행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상심이란 그냥 일상적인 마음이란 뜻인데, 마조의 말을 조금 쉽게 풀어보면, 무엇을 한다는 생각 없이 무심하게 행동하며, 옳고 그름, 취하고 버림, 끝남과 영원, 중생과 부처라는 2분법식의 분별심을 완전히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붓다는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했습니다. 선가(禪林)에서는 보통 도인(道人)은 그냥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자고, 산보하고 싶으면 걷는다고 합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조계종(曹溪宗)의 최고 할아버지격인 육조혜능(六祖慧能)조사의 4대 손자뻘 되는 용담숭신 (龍潭崇信)선사가 스승인 천황도오(天皇道吾, 748~807)에게 “몇 년을 스님을 모셨지만 마음에 대하여 한마디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고 투정을 부리자, 도오선사는 "네가 차를 가져오면 너를 위해 차를 받아 주었고, 네가 밥을 공양하면 너를 위해 밥을 받아 주었으며, 네가 인사를 하면 내가 곧 머리를 숙였으니 어떤 점이 마음에 대하여 가르쳐주지 않은 것인가?" 라고 하자 용담선사가 즉시 깨달았다고 합니다. 도(道)란 목에 힘주어 거창하게 삶과 죽음을 논하고, 불경에 대하여 머리 아프게 설명하고, 선사와 1문1답하는데 있는게 아니라 그냥 일상생활에 녹아있는 일거수일투족에 도(道) 아닌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봄꽃은 활짝 피고, 새들은 노래한다.' 어느 봄날, 꽃이 만발하게 피어나고 새들은 즐겨이 노래부르는 이 가벼운 풍경을 풍경으로 보지 않고, 그 숨어 있는 뜻을 알아채면 더 이상 도(道)를 논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유치원생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이 문장이 바로 천황도오가 차를 가져오면 차를 마셔주고, 인사를 하면 머리를 숙여 받아준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로 눈을 뜨면 깨달음입니다.

조주는 ‘평상심이 도(道)’라는 말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그래도 닦아 나아가면 도를 깨칩니까?’ 하고 묻었습니다. 그러자 남전선사는 '무엇이든 하려 들면 어긋난다'고 말했습니다. 깨진 돌을 풀로 붙이는 꼴이라 선(禪)은 위에 마조대사의 말대로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 없는, 무위(無爲)의 법(法)입니다. 도(道)를 얻으려면 자기의 모든 견해(見解)를 버리라고 했습 니다. '나는 꼭 붓다가 되겠다. 나는 지금 도를 얻기 위해 모든 고통을 무릅쓰고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은 채 수행한다.' 이런 생각이 마음에 꽉 찬 채로 참선해 봤자 세월만 헛되이 보낸다는 뜻입니다.

모든 번뇌망상(妄想), 견해를 버린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조사, 선사들의 말을 깊이 의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전선사는 '(무엇을) 하려 들면 바로 틀려버린다' 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주는 아직 이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듯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려 들지도 않고서 어떻게 도를 얻겠습니까?' 하고 다시 물은 것입니다.

남전은 '도(道)란 알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도(道)는 아느냐 모르느냐, 옳으니 틀리니, 높으니 낮으니, 크니 작으니, 그 어떤 식으로도 분별해선 터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배고프면 배가 고프니 밥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선가(禪林)에 가장 유명한 문장 중의 하나로, 달마의 3대째 제자인 승찬(僧璨, ?~606)대사가 쓴 신심명(信心銘)에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선(善)도 악(惡)도, 좋고(愛) 싫음 (憎)도, 괴로움(苦)도 즐거움(樂)도, 그 무엇도 분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道)란 그 어느 것도 분별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길이 참선(禪)입니다. 그렇다고 악(惡)을 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남전대사는 누가 도(道)를 안다고 하면 이것은 분별심이 남아 있어 거짓 된 깨달음 이요, 그렇다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 무기(無記), 즉 아무 생각도 없는 바보같은 짓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알려고 하면 이는 그릇된 것임을 이해하겠지만, 알려고 하지 않으면 그 또한 바보라니, 그럼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맟추어 공부하라는 말씀인가? 하고 생각이 들 수도 있 습니다. 이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마음공부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것입니다.

무기(無記)란 나무나 돌같이 아무런 생각이 없는 멍한 상태로, 어떤 사람이 무기 (無記)에 빠져버렸다고 하면 올바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는 바보 천치가 되니 그래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선(禪)에서 무심(無心)하라는 말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심(無心), 무념(無念)의 뜻을 혼동하지 말고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전대사는 왜 모른다고 하면 무기(無記)라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함은 마치 바다 밑에 잠겨 영원히 잠들어 버린 것처럼 다시 살아나기가 어 렵다는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면 이도 저도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을 하자면 조금 어렵지만, 안다고 하지도 말고, 알려고 한다는 생각이 없이 무심하게 알려고 해야 합니다. 아마 처음부터 이러한 말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이렇게 알아 두고 너무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살펴보면서 하나 하나 알아 가도록 하는게 좋겠습니다.

남전은 참으로 도(道)에 통달하면 허공과 같이 깨끗하고 텅 비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분별을 떠난 자 리라 했습니다. 깨달으면 모든 것이 텅 비고 고요해서 따지고 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허공이 세상 만물에 대해 따질 일이 있겠습니까? 허공도 말이 없고 세상 만물도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텅 빈 것만은 아닙니다. 무기(無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죠? 마음은 그 텅 빈(空) 가운데 본래 완전한 지혜를 갖추고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합니다. 참으로 텅 비었는데도 오묘하게 있음(有), 지혜와 마음의 신통한 작용이 있다는 뜻입니다.

남전대사의 이 가르침에 조주는 선(禪)의 근본 이치에 곧 바로 눈을 떠 마음이 달처럼 환하게 밝아졌다고 합니다. 첫 강해가 너무 길어지는 것같아 여기서 그칩니다.

2. '밝음과 합하는가?'

남전대사가 상당하여 법을 설하는데 조주선사가 물었다.

“밝음과 합(合)합니까, 어둠과 합합니까?”

남전대사가 그냥 방장실로 돌아가버리자 조주선사는 법당에서 내려와 말했다.

“이 노화상이 내 물음에 한 마디도 못하는군.”

그러자 수좌(首座)가 말하기를, “노스님이 대답이 없었다고 하지 말게. 자네(上座)가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네.”

그러자 조주는 수좌스님을 한 대 때리면서 말했다.

“이 몽둥이는 주지이신 노화상이 맞아야 하는 것인데.”

오늘은 남전대사가 상당(上堂), 즉 법당의 강단에 올라가 설법을 하는 도중에 조주선사가 '(도는) 밝음과 합하는가, 어둠과 합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쌍도끼를 날리면 제 발등에 떨어지는데..마음의 눈을 뜬 뒤로 조주는 선(禪)의 이치를 더욱 연마하기 위해 스승에게 자주 선문답을 청했을 것입니다. 조주선사가 나중에 짧은 말 한마디에 번뜩이는 선기(禪機)를 담아서 천하에 명성을 떨친 사실을 감안해보면 몸짓이나 사물을 활용하여 도안(道眼)을 넓혀 나가기 보다는 말로써 그 오묘한 이치를 꿰뚫어 보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깨친 조주도 도(道)란 시비 분별을 떠나서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고(不生不滅), 밝지도 어둡지도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 중도(中道)의 자리임을 어찌 몰랐겠습니까만, 스승의 입을 통해서 그 이치를 확인해 보려고 이렇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남전대사는 아무 대답도 않고 그냥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 까요? 선(禪)에 대한 강의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으면 처음부터 선사들의 이상한 모습을 목격한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들을 만한 가치도 없는 질문이어서 인지, 말을 하기 싫다는 뜻인지, 다른 바쁜 일이 있으면 아무리 스승이라도 '다음에 말해 주겠다' 라는 말씀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처음부터 여러분에게 충격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바로 도(道), 또는 법(法), 진리를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깨달으려면 이를 바로 알아채야 합니다. 아니 그냥 자기 방으로 돌아간 행동이 진리라니, 무슨 말도 되지 않는 미친 소리를 하느냐고 곧 바로 이 강해를 덮어버린다면 영원히 도(道)를 알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너무 서둘지 말 것을 당부드립니다. 서울로 가는 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지금 제 강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말씀드립니다. 처음에는 그냥 다른 생각없이 강해를 마음으로만 읽어 보려고 하십시오. 제가 마음으로 읽으라고 하는 말에 밑줄을 크게 여러번 그어 보십시오. 저로서는 제 강해의 핵심 포인트로서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오직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이것은 머리를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머리로는 아무것도 생각해 보려고 하지 말고, 목 위로는 읽는 글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강조하지만 오직 마음으로, 혹은 가슴으로 읽는 훈련을 해 주실 것을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

마음으로 읽는 데에 익숙치 않아 처음에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냥 다음으로 넘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오직 마음으로 가급적 몇번이고 읽어 볼 것을 권합니다. 어차피 처음 선(禪)을 접하는 분들은 제 강해의 대부분이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마찬가지 였으니까요. 그래서 반복 연습, 훈련이 필요합니다. 제 말대로 해 가시다보면 그 이유를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공부! 도(道)를 터득하는 길은 일반적인 정신활동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강해로 돌아가서, 남전선사가 방으로 돌아가버린 것도, 말없이 앉아 있음도, 몸을 옆으로 비트는 것도, 훌쩍 자리를 떠나버림도 모두 도(道)를 나타내는 방편입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차츰 살펴보기로 하고, 조주는 아직 그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짐짓 스승이 자기 질문에 한 마디도 못한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이 노화상이 내 물음에 한 마디도 못하는군.” 그러나 조주의 이 말씀은 조금만치라도 남전선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뜻을 담고 있는게 아닙니다. 아니, 묻는 질문에 한 마디도 못한다고 했는데, 스승을 부정하는 게 아니면 그럼 무슨 소린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사들은 그 상황에 따라 아주 반어적(反語的)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음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선어(禪語)는 일종의 암호, 코드(code)입니다.

조주가 스승에게 투덜거리니 스님들 중에서 우두머리격인 수좌(首座)가 조주를 핀잔하기를, '조주 자네가 큰 스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다'고 말했는데, 조주는 대담하게도 수좌를 방망이로 때렸습니다. '스승인 남전을 한 대 때려야 하는데...' 라고 말 하면서. 꿩 대신 참새인가요?

이를 보면 조주는 이미 깨달은 상태에서 스승과 법거량에 도전해본 것임이 확실합니다.

남전선사가 아무 말도 없이 방장실로 돌아간 뜻도 알았지만, 도(道)는 얼마든지 말로써 나타낼 수도 있는데 왜 무언(無言)의 방법밖에 쓰지 않는가? 라고 힐책하는 뜻이 담겼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경지가 매우 깊어져야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전에 많은 선사들은 수행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방법으로서, 할(喝)이라고 하여 악! 고함을 지르거 나, 방망이(棒)로 때리거나, 불자(拂子), 손가락을 드는 등 몸짓을 통해 도(道)를 드러 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들까지 이런 모습을 흉내 내어 도인인체 거드럼 피우는 폐단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엉터리 선사에게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 온 뜻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불자(拂子, 날벌레를 쫓아내는 총채 같은 것)를 들어 보이곤 했는데, 다시 '그 불자는 안에서 나왔는가? 바깥에서 들어왔는가?' 물으면 안이니 바깥이니 하면서 말에 휘말려드는 사기꾼같은 이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실제 도인을 제대로 알아보는 안목을 가지기 위해서는 겉보기의, 몸짓 같은 행동 보다는 망상 분별심을 완전히 떠났는지 알아볼 수 있는 선문답을 활용할 줄 알아야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주의 "밝음과 합하느냐, 어둠과 합하느냐?"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무엇일 까요? 분별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여 ‘밝음도, 어두움과도 합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면 이치로는 맞는듯 하지만 선사들에게는 곧바로 방망이 30대를 맞아야 하는 대답이라고 할 것입니다. 선사들은 중도의 이치를 그렇게 직설적 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남전대사가 말로써 답했다면, "밝음이냐? 어두움이냐? 일러라 일러!" 라고 되받아 치든지, "그저 고향일 뿐이니라." 정도로 응했을 것입니다.

3. '산 아래 시주 집'

조주선사가 남전대사에게 물었다.

“있음(有)을 아는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저 산 아래 시주 집에 한 마리 물소(水牯牛 )가 된다.”

“화상께서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전대사가 말했다.

“엊저녁 삼경에 달이 창을 비추었다.”

“있음(有)를 아는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있음(有)를 아는 사람’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있음과 없음의 이치, 즉 중도(中道)를 알게 된 사람을 일컬을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모든 존재의 본질은 공(空)한 것이요, 공(空)은 곧 존재의 바탕이니 모든 존재는 있다고 할 수 없으나, 우리 눈에 보이는 바로는 실제로 없는 것도 아니어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합니다. 이런 말은 선(禪)의 기초로서 서서히 눈으로, 귀로 익혀 나가기 바랍니다.

여하튼 중도를 아는,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는데, 남전대사는 '산 아래 시주 집의 한 마리 물소(水牯牛 )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산과 습득이 이빨을 갈며 암소 흉내를 내는 격입니다. 수고우(水牯牛 )는 보통 덥고 물이 풍부한 곳에서 기르는 물소 로서, 중국 남부지방, 동남아 등지에서 많이 자라는데 우리나라는 풍토가 맞지 않아 키우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전대사는 도인(道人)은 실제로 죽어서 암소가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일까요?

선(禪)은 본질상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없다고 하니, 혹시 남전이 나중에 죽어 물소가 되어 여태까지 시주한 집을 위해 봉사하겠다 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큰 허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해석하다간 선사들의 몽둥이 세례를 받기 십상입니다.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라면 '산 아래 시주 집'이란 우리의 마음을 뜻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것입니다. 그러면 뒷말은 우리 마음에 한 마리의 물소(청정법신, 淸淨 法身)이 들어섰다, 즉 반야지혜의 깨달음이 자리잡았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선사와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선사로 대변되는, 중국 선종 5가(家) 중의 하나인 위앙종의 문을 연 위산(潙山)선사도 이 수고우를 소재로 하여 설한 바가 있습니다. 위산이 어느날 법당에 올라 설하기를, “노승(老僧)이 백 년 후, 산 아랫 마을의 시주집에 한 마리 수고우(물소)가 되어 있으리니, 왼쪽 옆구리에 다섯 자를 쓰되 ‘위산승 아무개(潙山僧某甲)’라 하겠다. 그때를 당해서 이 위산승(潙山僧)을 수고우라 부르겠느냐, 수고우를 위산승이라 부르겠느냐? 필경에 뭐라고 해야 되겠느냐?” 하자 , 앙산선사가 나와서 예배하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위산선사가 앞으로 백년이 지난 뒤에 물소로 태어나겠다고 다짐을 하고, 그 물소 옆구리에는 '위산승 아무개' 라고 찍혀 있을 것이라고 하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그렇게 태어났는지 확인해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위산이 그렇게 태어날 경우 그 수고우를 위산승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 법문은 지금의 나는 위산이 아니고 이름을 위산이라 할 뿐이고, 미래의 물소도 물소가 아니라 이름을 물소라 할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눈으로 보면 현재 보이는 모습은 본질상 전혀 그 실제 모습이 아니고 거짓된 모습이란 뜻입니다. 백년 후에 위산이 물소가 되어 있을 때 그 물소를 어찌 다만 물소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렇다고 위산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이렇게 해석을 했는데 이것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깊은 뜻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위산의 법문에 답을 한다면 '사위는 백년 원수이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옛날에는 딸의 남편인 사위가 너무 사랑스러워 백년 손님이라 했는데, 요즘은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서 장모도 사위를 원수처럼 바라본다는 뜻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의 뜻을 알아채면 위산선사의 말씀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앙산선사가 나와 예배하고 물러난 뜻도 드러날 것입니다. 한번 골똘히 생각해 보십시오.

위 문답에서 조주도 스승의 뜻을 알고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드렸 는데, 남전선사는 '엊저녁 한밤중에 달이 창을 비추었다'는 서정시 같은 대답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남전선사가 보기에 제자인 조주의 수행경지가 나날이 깊이를 더하여 조주의 마음의 창(窓)에 밝은 달이 휘영청 솟아올라 천지를 비출 때가 되었다 는 의미로 말했을 것입니다. 즉, 조주의 자성(自性)이 열매를 맺어 원숙해지는 경지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4. '마음 속의 불'

조주선사는 남전대사 회하에서 노두(爐頭)를 맡았다.

어느 날 대중 스님들이 모두 채소를 다듬고 있는데, 조주선사가 승당 안에서 갑자기 외쳤다.

“불이야! 불이야!”

대중들이 모두 한꺼번에 법당 앞으로 달려가자 선사는 법당 문을 잠가버렸다.

스님들이 어쩔줄을 몰랐는데 남전대사가 법당의 창으로 숟가락을 던져 넣으니 조주선사가 곧 문을 열었다.

조주선사는 남전대사와 함께 하던 시절, 절에서 화로(火爐)의 불을 책임진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모든 스님들이 채소를 다듬고 있는 와중에 '법당에 불이 났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잠자다가 심심하면 녹두 빈대떡이나 빚어 먹지.. 스님들이 모두 깜짝 놀라 다 모여 들었는데, 어럽쇼? 조주는 불난 법당에서 도망쳐 나오기는 커녕 문을 잠가버리는게 아니겠습니까? 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런데 그 뜻을 알아채는 스님은 아무도 없고 모두 어리둥절해 할 뿐입니다.

선사(禪師)의 한 말씀(一言), 한 행위(一行)는 모두 도(道)를 염두에 두고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합니다. 절대적인 자신의 성품(自性), 마음자리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말이요, 행동인 것입니다. '불이야!' 하고 외치고는 불구덩이에서 빠져 나오기는커녕 문을 잠가버렸다면 이미 물질적인 불이 아님을 알아채야 합니다. 어떠한 종류의 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마음에 불이 활활 붙은 것입니다. 마음에 불이 났음을 모든 대중에게 널리 밝혔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 법당 안에서 타 죽을 요량으로 문을 잠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스승이 이를 모를 리는 없어 바야흐로 남전대사가 숟가락을 던져 넣음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대중에게 도(道)를 깨우치려고 노력하는 답답한 네 속 그만 끓이고 이제 이것으로 풀라는 뜻입니다. 그제야 조주는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불을 숟가락으로 끌 수 있습니까? 누가 숟가락 대신 다른 것으로 꺼줄 수 있겠습니까? '밥 먹고 나서 세수해라. 평상심이 도(道)이니라!'

보통 아침밥을 먹기 전에 이빨 닦고 세수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밥 먹고 나서 세수해라니 거꾸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이 밥과 세수(洗手)가 무슨 상관이 있기에 평상심이 도라고 부연했습니까? 그런데 이 '밥 먹고 나서 세수해라'는 말의 숨은 뜻을 안다면 평상심이 도라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냥 밥 먹고 손씻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선어(禪語)는 말의 암호화, 코드화입니다.

5. '구원의 사다리'

조주선사가 남전대사 회하에 있을 때, 하루는 우물 누각(井樓)에 올라가 물을 푸다가 남전대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기둥을 끌어안고 다리를 매단 채 소리질렀다.

“살려줘요, 살려줘요!”

남전대사는 사다리를 오르면서 말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조주는 잠시후 나가서 사례를 드렸다.

“방금 저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주선사는 젊을 때 장난 끼가 수시로 발동했는가 싶습니다. 물론 선(禪) 수행의 차원 에서 한 행동이지만 이 책에는 엉뚱한 장면이 여럿 나와 후세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냅니다. 하루는 우물 누각에서 물을 푸고 있다가 스승인 남전대사가 지나가는 걸 보고 '살려 주세요‘ 하 고 외쳤는데, 이미 도(道)에 눈을 뜬 후 그 경지를 넓혀 나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뭔가 계속 도전해 보고 그 해답을 찾는, 문제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조주의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고 남전대사는 누각에 이르는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라고 세었는데, 이는 무슨 뜻일까요? '눈동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여기는 고기 뺨이네.' 아주 급하게 살려 달라고 하니 천천히 숫자를 세면서 급박한 마음을 이렇게 달래야 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주가 '살려 달라'고 외친 뜻을 모를 리 없는 남 전대사는 '너의 마음 작용에 대하여 나는 이런 도(道)로 답한다' 라는 뜻으로 무심 (無心)에서 나오는 작용으로 시, 공간을 초월하여 숫자를 센 것입니다. 천천히 같이 한번 세어보십시오. '하나, 둘, 셋, 넷, 다섯' 셈 끝에는 모든 말도 끊어지고 모든 생각도 달아나 버릴 것입니다.

무심(無心) 가운데 아무런 분별을 하지 않고 행동하는데도 상황에 꼭 적합한 도리를 드러내니 이래서 마음은 원래 모든 지혜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조주는 잠시 후 '스승께서 구해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했는데 숫자 세면서 사다리 오른 것이 조주를 구원한 것입니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들릴 것입니다만, '살려 달라 '는 조주선사의 선(禪)적인 질문에 남전대사가 적절하게 잘 응대해 주신 것에 대하여 조주는 감사를 표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주가 좀 더 실감나게 남전선사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없었을까요? 차라리 처음 장난끼가 발동한 것과 어울리게 ‘스승님의 콧구멍은 셋, 둘, 하나입니다’ 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이 무슨 망발의 말인가요?

6. '새끼 고양이의 슬픔'

남전대사 회상에서 동당, 서당의 수좌(首座)가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는데, 남전대사가 방에 들어와 고양이를 치켜들면서 말했다.

“한 마디 말하면 베지 않겠지만, 말하지 못한다면 베어버리겠다.”

대중이 다 한마디씩 했지만 아무도 남전대사의 뜻에 계합하지 못하자 남전은 즉시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저녁 늦게 조주선사가 밖에서 돌아와 인사드리러 가니 남전대사가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말해 주고 물었다.

“그대 같으면 어떻게 고양이를 구할 수 있겠느냐?”

그러자 조주는 신발 한 짝을 머리에 이고 나가버리니 남전대사가 말했다.

“만일 그대가 있었더라면 저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텐데..”

우리는 매일 아침 부처와 함께 눈을 뜨고, 밤에는 부처를 품에 안고 잠을 잡니다.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원래 마음이 부처이니 항상 우리 몸에 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침에 눈뜨고 잠잘 때까지 하는 모든 행위가 도(道)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부처가 움직이고 나아가는 모든 행동이 도이기 때문에 비록 깨닫지는 못했더라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도(道) 임을 미리 알고는 있어야 합니다.

머리로 이것을 잘 이해하기만 해도 선(禪)에 조금은 가깝다 할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깨닫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계속 공부해 나가다 보면 어느 날 ‘아, 이것이구나!’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게 깨달음이요, 도(道)입니다. 조금 빠르고 늦음이 있을 뿐이지 공부하면 결국에는 모두 도달합니다. 인생의 일대사를 마치는 날입니다. 생사를 떠나 마침내 영원한 대자유인이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위 고양이 사건은 화두로도 매우 유명합니다. 남전, 조주의 일생에서 대표적인 일화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東), 서(西) 두 선방의 수좌들이 귀여운 고양이를 두고 서로 우리가 키우는 고양이라고 다투는 모습을 보고, 남전대사는 도(道)에 대하여 제대로 한 마디 말하면 고양이를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칼로 베어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 습니다. 많은 스님들이 한마디씩 했지만 아무도 선(禪)의 이치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자 결국 고양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좀 한심한 느낌이 듭니다. '바다로 들어가는 강물 줄기가 도중에 모두 사라져버렸네.' 어째서 바다로 향하는 물줄기가 한꺼번에 다 사라져 버렸다고 하는지 알아챈다면 남전이 고양이를 벤 뜻을 알 것입니다.

그날 밤 남전대사가 조주에게 '고양이를 구할 수 있는 방도를 말해보라' 고 하자, 조주는 짚신 한 짝을 머리에 이고 나가버렸습니다. 옛날에 달마대사가 입적한 지 3년 후에 짚신 한 짝만 지팡이에 매고 중국을 떠난 일화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무슨 소리인가 하는 사람은 달마대사의 일대기를 찾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여튼 조주의 행동은 남전대사의 물음에 적절한 답이 되었으나 애석하게도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난 후여서 고양이를 되살릴 길은 없었습니다.

도(道)는 여러분이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곳에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은 도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조주가 신 한짝을 머리에 인 것은 아주 작은 하나의 도(道)를 나타냈을 뿐입니다. 마음을 머리에 인 것인가요? '조주가 머리에 인 신발 한짝, 바다 속에 피어나는 뭉게 구름'

[출처] 조주록 강해 1(1~6)|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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