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같은 것과 다른 것'
조주선사가 남전대사에게 물었다.
“다른 것(異)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무엇이 같은 것(類)입니까?”
남전대사가 두 손으로 땅을 짚자 조주는 발로 밟아 쓰러뜨리고, 열반당에 돌아가 안에서 소리질렀다.
“후회스럽다, 후회스러워!”
남전대사가 듣고는 사람을 보내 무엇을 후회하느냐고 묻게 하니, 조주선사가 말했다.
“내가 더 밟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아직까지는 조주선사가 남전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조주는 남전대사에게 ‘다른 것(異)은 그렇다 치고 같은 것(類)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두 마리 해오라기가 눈밭 위에서 리랄라 춤을 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것과 같은 것을 함께 묶으면 이류(異類)로서 바로 인간, 축생, 아귀 등의 6도 중생을 통털어 말하고, 같은 것(類)은 인간 대 인간, 다른 것(異)은 인간 대 짐승의 관계 등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익경(思益經)에서 말하길, 법에서 하나라거나 다르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물어야 바르게 묻는 것이라고 했는데, 조주의 이 질문은 거리가 좀 먼것 같습니다.
이 질문이 나온 근거는 남전대사는 선 수행을 함에 있어 이류중행 (異類中行), 사람과 다른 종류(동물) 가운데에서 수행함을 강조 했다고 말을 하는데, 세속을 떠나지 말고 중생 속으로 들어가서 수행하고 그 중생을 모두 제도하라는 의미도 있고, 인간과 달리 동물은 헛된 생각(妄想)을 하지 않으므로 이들의 행위를 본받아 도(道)를 닦아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한 뜻은 같고, 다름의 2분법식의 분별을 떠난, 평등한 지혜의 자리인 근본 마음(本心)을 깨달아 그 안에서 수행 아닌 수행으로 완전한 도(道)를 이루어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 없이 구원하려고 노력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문답에서 ‘같은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남전대사는 두 손을 땅에 대며 네 발 달린 짐승의 모습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자신과 남(自他)이 없는 진여, 마음의 세계에서는 같은 것도 다른 것도 다 한가지입니다. 네발 달린 소, 말, 개, 돼지도, 두발로 걷는 침팬지, 사람도 마음일 뿐입니다
남전대사가 두 손을 땅에 대자 조주는 대사를 발로 밟아 쓰러뜨렸는데 스승에게 이러한 짓을 하다니 깨달음의 세계를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조주로서는 같은 것(類), 다른 것(異)이든 간에 본분의 일(本分事), 즉 자성의 근원을 밝혀 달라고 했는데 짐승의 행동을 보이니 그런 꼴이 보기 싫어서 스승이라도 밟아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그렇게 축생을 표현하면 이렇게 밟아줌으로써 응대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한 것일가요?
남전대사도 이런 뜻을 모를 리는 없지만 제자의 파렴치한 행동을 묵묵히 받아 들였는데, 나중에 조주가 돌아가서 '후회스럽다'고 외치니 남전대사가 사람을 시켜 후회스럽다고 말한 이유를 들어 보니 스승에게 몹쓸 짓을 해서가 아니라 더 밟아주지 못해서 후회스럽다고 하니 눈 위에 서리를 더하는 꼴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기가 막힐 일입니다.
선(禪)의 세계에서는 부처고 조사고 오는 대로 다 쳐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으면 모든 법이 다 공(空)함을 알아 마음 속에 부처, 조사, 중생, 스승이니 하는 그 어떤 개념도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 조사도 다 쳐버려라 해서 스승도 모르고 부처도 욕하면서 마음대로 행동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알게 되면 더욱 스승과 붓다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고, 또 평생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8. '구멍 없는 콧구멍'
남전대사가 욕실을 지나가다가 욕두(浴頭)가 불을 때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무얼 하느냐?” “목욕물을 데우고 있습니다.”
“수고우(물소)를 부르러 오는 걸 잊지 말게.”
욕두가 “예" 하고 대답했다.
저녁이 되어 욕두가 방장실로 들어오자 남전대사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물소께서는 가서 목욕하십시오.”
남전선사가 말하기를, “소고삐는 가져왔느냐?” 욕두는 대답이 없었다.
조주선사가 문안드리러 오자 남전대사가 이 이야기를 들려주니 조주가 말했다.
“제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자 남전대사가 물었다. “고삐를 가지고 왔느냐?”
조주가 앞으로 불쑥 다가가서 남전대사의 코를 틀어쥐고 잡아끌자 대사가 말했다.
“옳기는 하다만 너무 거칠구나.”
오늘은 남전대사가 목욕물을 데우고 있는 욕두스님에게 준비가 다되면 '잊지 말고 물소를 불러라'고 말하니, 그 스님은 남전대사가 부르라고 한 사람이 대사 자신을 가리킨 것을 알아듣고 '물소는 물 다 데웠으니 목욕하십시오' 라고 제대로 말했으나, '소고삐는 가져 왔느냐?' 라는 선어(禪語)에 대꾸를 못해 그만 땅속으로 곤두박질 당해 버렸습니다.
나중에 조주선사는 '소고삐는 이것입니다' 라는 의미로써 손으로 스승의 코를 비틀어 버렸는데 남전의 말대로 맞기는 하지만 정말로 거칠게 행동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 선불교를 다시 부흥시켰다고 일컫는 경허(鏡虛, 1846∼1912)선사는 한때 최상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턱 아래에다 송곳을 놓고 목숨을 건 참선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사를 시봉하던 동은이란 사미승이 질문을 하는데, "중 노릇 잘못하면 죽어서 소가 된다는데 그 소가 코뚜레를 꿸 콧구멍이 없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소가 코뚜레 꿸 콧구멍이 없다”는 이 말은 아랫 마을에 사는 이처사란 사람이 한 스님에게 가르친 것인데 동은이 듣고 와서 선사에게 물은 것입니다.
'콧구멍 없는 소' 라는 이 한마디를 들은 경허선사는 그동안 읽고 들은 백, 천가지 법문과 수천 나날의 좌선 수행이 얼음 녹듯이 모두 녹아내려서, 보통 통밑이 쑥 빠졌다 고 하는데, 모든 기억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드디어 눈을 뜨게 된 것인데, 이에 게송을 짓기를, “홀연히 코뚜레 꿸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라고 노래했습니다.
남전대사나 조주, 경허선사의 콧구멍은 한 가지입니다. 모두 코뚜레 뚫을 콧구멍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 가족 식구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구멍없는 콧구멍을 맛보면 같은 식구가 됩니다. 모두가 한 마을, 한 고향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코뚜레 꿸 콧구멍이 없는 소' 입니까? 바로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이제 찾으십시오.
9. '말없음의 우레 함성'
조주선사가 남전대사에게 말했다.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고서 달리 한 말씀 해주십시오.”
남전대사가 바로 방장실로 돌아가버리자 조주가 말했다.
“이 노화상이 평소에는 잘도 말하더니만 묻기만 하면 한마디도 못하는군.”
곁에 있던 시자가 말했다.
“큰스님께서 대답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시오.”
조주는 별안간 뺨을 한 대 갈겨버렸다.
불교 관련 서적에 사구백비(四句百非)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우선 그 용어에 대한 개념을 조금만 알아둡시다. 먼저 사구(四句)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개념을 기준으로 모든 현상을 판단하는 네 가지 형식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유(有)와 무(無)를 기준 으로 하면, 있다(有), 없다(無),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非有非無)의 사구(四句)가 성립되고, 같음(하나, 一)과 다름(異), 상(常)과 무상(無常), 자(自)와 타(他) 등의 경우에도 사구가 성립됩니다.
백비(百非)는 유(有)와 무(無) 등의 모든 개념 하나하나에 아니다(非)를 붙여 그것을 부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4구와 함께 백구(百句)를 만들어 이를 백비 (百非)라고 합니다. 곧 불교의 진리는 사구의 분별도 떠나고 백비의 부정도 끊어진 상태라는 뜻입니다. 다른 데서 빌려 와서 사구백비를 풀이했는데 선가(禪家)에서는 직관적으로 모든 것은 공(空)하여 아무 분별함이 없음으로서 족합니다.
하여튼 조주는 스승에게 '모든 분별을 떠난 우리 마음의 근원, 이름하여 진여자성, 청정법신(淸淨法身)의 자리에서 한마디 해주십시오' 라고 부탁했는데, 스승은 그냥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남전대사는 아마도 달마대사의 가르침인 이심전심 불립문자(以心傳心 不立文字), 즉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지 문자(言語)를 세우지 않는다는 말씀을 철저히 지켰을 것입니다. 어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한 마디를 할 수 없을까마는 말없이 몸을 움직임으로써 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천성은 말 없음이다.
조주도 그 의미를 어찌 모를까마는 '평소에는 말씀을 잘 하시더니 왜 묻기만 하면 저러실까?' 하고 짐짓 주변의 스님들을 자극하려고 의심의 구름을 퍼뜨렸습니다. 그러자 딱 미끼에 걸린, 뜻도 모르는 시자가 하는 '스승이 말씀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소리에 따귀를 한 대 올려쳐 도(道)를 보인 것입니다.
10. '문 여는 한 마디'
남전대사가 어느 날 갑자기 방장실의 문을 닫아버리고는 빙 둘러 재를 뿌리면서 스님들에게 말했다.
“누구라도 말할 수 있다면 문을 열겠다.”
많은 스님들이 한마디씩 했으나 모두 남전대사의 뜻에 계합하지 못했다.
조주선사가 “아이고, 아이고(蒼天 蒼天)!” 하고 말하니 남전대사가 곧 문을 열었다.
옛 선사(禪師)들은 선원에서 생활하면서 수시로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몹시 이상한 행동이나 말을 하면서 공부하는 제자들을 일깨우려 했습니다. 화두란 것도 의심에 의심을 더하여 결국 그 의문점을 깨뜨려야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평소에도 자꾸 마음을 자극시켜 줘야 의심을 해결하는 지혜가 문뜩 솟구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사들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엉뚱한 행동으로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분별심을 싹 없애버리는 방법들을 자주 쓴 것입니다. 앞에서 조주가 법당에서 문을 닫고서 '불이야' 하고 외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불화살에 불을 당기는 노릇을 해볼까 합니다. 모두 여러분들을 위해서입니다.
이번에는 스승이 자기 방 주변에 재를 뿌리는 행동으로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후, 진여자성, 그 바탕의 소식을 한마디씩 일러보라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그 많은 제자 중에서 선의 도리를 깨친 자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조주선사가 ‘창천, 창천 (蒼天蒼天)’ 이라고 외쳤는데, 이 말은 중국의 상가집에서 '아이고 아이고' 곡(哭)을 할 때 쓰는 말로써 '슬프고도 슬프구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스승이 세상의 이목을 무릅쓰고라도 단 한 명의 제자라도 더 깨달음으로 이끌겠다는 간곡한 뜻으로 괴이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깨친 자가 나오는 게 이리도 어려우니 우리 스승 '불쌍해서 어찌하나!' 라는 의미로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말하니 스승이 금방 방문을 열었으니 하는 말입니다. 선사들의 말이라고 꼭 본성의 바탕만 드러낸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는 현상과도 항상 통해야 합니다. 이를 잘 가려내는 깨달음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출처] 조주록 강해 2(7~10)|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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