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마음이 곧 부처이다.'
조주선사가 남전대사에게 물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며 지혜는 도가 아니라면, 그래도 허물이 있습니까?”
남전대사가 말씀하시기를, “허물이 있다.”
조주선사가 이르기를,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남전대사는 앞서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며 지혜는 도가 아니다."
조주선사는 바로 나가버렸다.
즉심시불(卽心是佛) 혹은 즉심즉불(卽心卽佛), 즉, '마음이 곧 부처이다' 라는 말은 석가모니가 설한 경전중 '관무량수경'에 처음(?) 쓰여졌다고 합니다. 선종에서는 무문관 37칙에 나오는 남악회양의 법을 이은 마조도일선사와 대매법상스님 간의 선문답이 매우 유명합니다.
법상스님이 물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조선사가 답했다. "즉심시불(마음이 곧 부처이니라.)"
훗날 어느 스님이 마조선사에게 '왜 마음이 곧 부처이다' 라고 하는지 물으니, 마조는 '우는 아이 달래기 위해서다' 라고 했고, '울음을 그치고 난 뒤에는 뭐라고 하는지 물으니, '비심비불, 즉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조선사로부터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답을 듣고 대매산에 들어가 40년을 수행한 법상스님은 나중에 마조선사가 이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고 설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늙은이, 사람을 홀리고 있구나. 비심비불이라고 하건 말건 나는 오직 마음이 곧 부처다." 라며,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마조선사는 "대매산의 매실이 잘 익었구나!" 라며 법상스님을 칭찬하였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이란 말은 선(禪)의 기본 명제입니다.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려고 수 십년을 수행하는데 부처가 아니라고 하면 이보다 더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석가도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고, 역대 부처, 조사 모두 '마음' 하나 알아가지고 성불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조는 왜 나중에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고 설했습니까? 부처라고 한 것은 우는 아이 달래는 것이고, 울음을 그친 뒤에는 비심비불이라고 한 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무슨 말인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믿음으로 공부에 공부를 더하여 나아가지만 결국 깨달은 후에는 모든 것이 다 공(空)하여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고, 물건도 아닌 그것과 맞부닥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은 무엇인가?' 라는 큰 화두와 만나야 합니다.
위 문답에서 조주는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지혜는 도가 아니다.' 라는 명제를 꺼내면서 허물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성인으로써 수많은 후손들을 길러낸 마조선사의 말을 빌리면 '비심비불', 즉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하는 말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우선 '지혜는 도(道)가 아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반야심경에서 모든 부처(道)는 반야바라밀다, 즉 반야지혜(반야는 곧 지혜다)의 수행을 통해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얻는다고 했는데 지혜는 도가 아니라니 이치상으로 보면 틀린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처라고 했다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고 했으니 이걸 보면 꼭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중도의 이치에서 보면 마음이 부처이기도 하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지혜는 도이기도 하고, 도가 아니기도 합니다. 사구백비를 떠난 일입니다. 이렇게 뒤죽박죽 머리를 헝클어뜨리면 어떻게 하냐고 하소연해도 할 수 없습니다. 우선 깨닫고 볼 일입니다.
그러면, 조주의 질문에는 허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허물이 있다고 하니 조주는 어디에 허물이 있는지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남전은 그 대답으로서 조주의 물음인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지혜는 도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도대체 '허물이 있다'고 해놓고선 허물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에 동문서답식으로 대답하니 조주는 불쑥 나가버렸습니다. 조주는 알아챘을까요?
나중에 조주선사에게 한 스님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으니 한번은 '있다'고 했고 다음 번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입니다. 남전대사의 허물이 있다, 없다는 말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중도의 자리에는 허물이 있고 없음도 없고, 지혜, 도(道), 마음, 부처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제자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하지만 그 어떤 견해도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냥 자기가 서 있는 자리그대로가 바로 진리입니다.
12. '뜰 앞의 잣나무'
조주선사가 상당하여 대중에게 설했다.
“이 일은 너무도 분명하여 대인(大人)이라도 여기를 벗어날 수 없다. 노승이 위산에 갔을 때 한 스님이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고 묻자 위산스님은 ‘내게 의자를 가져다 주게’ 라고 말했다. 종사(宗師)라면 모름지기 본분의 일로 사람을 지도해야 한다.”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조주선사는 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다.”
그 스님이 이르기를, “큰스님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지 않는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이 또한 유명한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화두에 대한 선문답입니다. 이전까지는 조주선사가 스승인 남전대사와 함께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이제부터는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남전대사가 입적하시고, 조주선사가 20여년간 천하를 돌면서 더욱 수행한 후, 80세가 넘어서야 조주(趙州) 관음원에서 상주하기 시작하면서 설했던 법문과 선문답 위주로 진행될 것입니다.
조주선사가 스님들을 모아 놓고 설했습니다. "이 일, 즉 선(禪)을 논(論)하는 일은 바로 지금 현재의 마음자리를 밝히는 것이니, 역대 부처나 조사들 모두 예외가 없다. 예전에 위앙종의 문을 연 위산대사를 만났을때 한 스님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위산대사는 '나에게 의자를 가져다 주게' 라고 말했다. 선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본래면목(自性)을 바로 드러내어 공부하는 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여기서 본분의 일(本分事)이란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일이고, 성품을 바로 보는 것, 즉 자신의 근본 마음(本心)을 바로 아는 일입니다.
예전 조사들의 어록들을 보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즉 달마대사가 서쪽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건너온 큰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수행자들의 질문이 태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습니다. 선종(禪宗)이 이어져온 계보로는 인도(西天)에서 석가모니를 초조(初祖)로 시작하여 2대 가섭존자에서 28대 보리달마까지 28조사가 있고, 중국으로 건너온 후에는 달마대사를 초조로 하여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慧能)조사의 순으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달마대사가 인도를 떠나 그 먼 길을 건너와서 중국에 선(禪)을 전한 것은 선종사에서 크나큰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조사서래의를 묻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달마대사의 그 선(禪)의 큰 뜻은 정말로 무엇인가요?
결국 마음(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라는 말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달마는 이 마음 깨달음의 가르침을 '이심전심 불립문자(以心傳心 不立文字)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이 16자로 요약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조사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데 글과 말(文字言語)을 앞세우지 말고, 곧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스스로의 성품을 보게 하여 부처가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지인심(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을 곧 바로 가리키는(찌르고 두드리는) 것이요, 배우는 쪽에서는 자기 성품(마음)을 봄으로써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위 글에서 조주는 본분의 일로 지도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게 바로 직지인심, 곧바로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마음을 어떻게 가리킵니까? 저는 가르치는 자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근원적인 참 모습을 바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모두 어려운 말인데 지금 당장에 모두 이해하라고 할 수도 없고, 이해시키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선은 우리의 텅 빈 무심(無心)의 바탕에서 밝게 비추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앞으로 차츰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위산에게 한 스님이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건너온 깊은 뜻을 물었는데, '내게 의자를 가져다 주게' 라고 한 말은 마음을 바로 가리킨 것일까요? 마음의 시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능력을 믿고, 세상만물이 모두 법임을 체득하려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알아야 합니다.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직지인심입니다.
'내게 의자를 가져다 주게' 바로 여기서 퍼뜩 깨어나십시오. 이보다 더 좋은 화두도 없을 듯 싶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르겠다면 그저 마음만으로 의심해 보십시오. ‘내게 의자를 가져다 주게 라니!’ 이 세상에는 도(道)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딘들 다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래 모든 게 법이고 도이지! 하지는 마십시오. 그랬다간 어느 세월에 깨칠지 알 수 없습니다.
조주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습니다.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건너온 큰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조주는 왜 달마가 온 뜻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하십시오. 그리고 스스로의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십시오. 아니 원래 이루어져 있는 자기 부처를 재확인 하십시오. 그 뿐입니다.
[출처] 조주록 강해 3(11~12)|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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