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解題)
조주 종심(趙州從諗:778~897,全諗이라고도 함)스님은 조주(趙州)의 학향(郝鄕, 혹은 靑丘 緇丘人이라고도 함)출신으로 속성은 학(郝)씨이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고향의 (護國院, 조당집에는 龍光寺라고 함)으로 출가하여 경과 율을 익히지 않고 곧바로 참선을 하였다. 그러다가 은사스님을따라 지양(池陽)에서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스님을 참례하고 입실하였다. 그 후 남전스님이 입적하기까지 40여 년을 시봉하였다.
스님이 남전스님에게서 깨달은 인연에 대해서는 어록의 처음에 실려 있는데, 그 시기는 스님의 나이 20세 전후인 듯하다. 그리고는 곧 이어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고 그 도행을 널리 익힌 것으로 보인다. 어록 가운데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90년 전 , 마조대사 문하에서 80여 선지식을 친견하였는데......”
남전스님이 입적하신 후 스님의 나이 60이 도어 제방에 행각을 나섰는데, 이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일곱 살 먹은 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이는 내가 그에게 물을 것이요, 백살 먹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는 내가 그를 가르치리라.”
스님의 행각하면서 문답했던 선지식으로 이 어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스님들은 마조, 백장, 약산, 도오, 위산, 임제, 댓자, 동관, 운거, 투자, 수유, 보화, 동산, 낙포, 설봉, 한산, 습득, 풍간 등 대략 20여 명이나 된다 .
이 가운데 임제스님과의 인연은 특이하다. 즉 두 분 스님은 출생한 곳도 같은 조주(趙州)이면서 훗날 교화를 펴신 지역도 같은 진주(鎭州)이다.
스님은 나이 80이 되어 행각을 그만두고 고향 근방의 조주(趙州) 관음원(觀音阮)에서 청빈하게 살았다. 어록에 의하면 스님께서 처음 세속에 나왔을 때에 두행군(竇行軍)이라는 신도가 스님께 절을 지어드리고서 진제선원(眞際禪阮) 또는 두씨네 동산(竇家園)이라고 하였다 한다. 스님께서는 관음원에 주석하신 이후 오랫동안 이 곳에 살면서 납자들을 지도하다가 120살에 입적하셨다.
스님의 입적 연대에 대하여 어록의 행장(行狀)에서는 무자년(戊子年,868년 또는 928년) 11월 10일에 단엄히 앉은 채로 입적하셨다고 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전등록(傳燈錄)」의 기록에 따라서 당(唐) 건녕(建寧)4년(897) 11월 2일, 세수 120오른쪽으로 누워서 입적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주스님의 행장이나 어록 등을 전하는 것으로는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제13권, 제14권 이외에도 「조당집(祖堂集)」 제18권, 「전등록(傳燈錄)」제10권, 「연등회요(聯燈會要)」 제6권, 「오등회원(五燈會元)」제 4권,「송고승전(宋高僧傳)」 제11권 등이 있다.
그런데 「고존숙어록」속의 기록에 의하면, 조주스님의 어록이 처음 정리 된 것은 후당(後唐) 보대(保大) 11년(953)이다. 또한 「고존숙어록」에서 물물대관(物物大觀)이 쓴 중간(重刊) 서(序)에 의하면, 위색장주(渭賾藏主)가 이것을 중간하면서 조주스님 등 20여 스님에 대한 기연을 따로 수집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모두 48권 중에서 조주스님에 관한 것은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 13권은 ‘조주진제선사오록 및 행장 권상(趙州眞際禪師語錄幷行裝券上) ’라 제목하였고, 제 14권은 ‘조주진제선사어록지여(趙州眞際禪師語錄之餘)’ 라 하여 그 나머지를 싣고 있다. 제 14권의 끝에 있는 게송 중 십이시가(十二詩歌) 이외의 4수는 조주스님이 지은 것이지만 스님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중간하면서 실은 것 같다.
이 어록에는 약 520여 가지의 기연들을 싣고 있는데, 거의가 일상의 간결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임제스님의 할(喝)이나 덕산스님의 방(棒)에 비견하여 조주스님의 선은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 평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조주스님의 무(無)자 공안은 종문의 제 1공안처럼 보편화되어 있다. 또 ‘뜰앞의 잣나무’, ‘청주의 베옷’, ‘진주의 큰 무우’ 등의 공안도 조주스님의 인연에서 채택되었다. 「벽암록(碧巖錄」 100칙 가운데서 조주스님의 인연에 관한 공안이 12칙이나 된다. 설봉스님이 조주스님을 가리켜 “고불 고불(古佛 古佛)”이라 한 면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다.
또 이 어록에는 신라스님과의 대화나 당말(唐末) 신라(新羅)사람들이 중국 산동반도에 세운 절인 신라원(新羅阮)을 방문한 기록도 보인다.
1. 행 장
스님은 남전(南泉: 748~835)스님의 문인이다. 속서은 학(郝)씨이며, 본시 조주(曹州) 학향(郝鄕) 사람으로 법명은 종심(從諗)이다. 진부(鎭府)에 있는 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스님께서는 칠백 갑자*(조주스님은 120세를 살았는데 (778~897) 그 날짜수가 700갑자(甲子)에 해당한다.)나 살았다! 무종(武宗)의 폐불법란(癈佛法難: 842~845)이 있자, 저래산(岨崍山)으로 피신하여 나무열매를 먹고 풀 옷을 입으면서도 승려로서의 위의(威儀)를 바꾸지 않으셨다.”
스님께서 처음 은사스님을 따라 행각하다가 남전스님 희하에 이르렀다. 은사스님이 먼저 인사를 드리고 나서 스님(조주)이 인사를 드렸는데, 남전스님은 그때 방장실에 누워 있다가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는 불쑥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상서로운 모습(瑞像)은 보았느냐?”
“상서로운 모습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누워 계신 여래를 보옵니다.”
남전스님은 이에 벌떡 일어나 물었다.
“너는 주인 있는 사미냐, 주인 없는 사미냐?”
“주인 있는 사미입니다.”
“누가 너의 주인이냐?”
“정월이라 아직도 날씨가 차갑습니다. 바라옵건대, 스님께서는 기거하심에 존체 만복하소서.”
남전스님은 이에 유나(維那)를 불러 말씀하셨다.
“이 사미에게는 특별한 곳에 자리를 주도록 하라.”
스님께서는 구족계를 받고 난 다음, 은사스님이 조주(曹州)의 서쪽 호국원(護國院)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곳으로 돌아가 은사스님을 찾아뵈었다. 스님이 도착하자 은사스님은 사람을 시켜서 학씨에게 알렸다.
“귀댁의 자제가 행각길에서 돌아왔습니다.”
학씨 집안 친척들은 몹시 기뻐하며 다음날을 기다렸다가 함께 보러 가기로 하였다. 스님께서는 이를 듣고 말씀하셨다.
“속세의 티끌과 애정의 그물은 다할 날이 없다. 이미 양친을 하직하고 출가하였는데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그리고는 그날 밤으로 짐을 챙겨 행각에 나섰다.
그 후 물병과 석장을 지니고 제방을 두루 다니면서 항상 스스로에게 말씀하셨다.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이는 내가 그에게 물을 것이요, 백 살 먹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는 내가 그를 가르치리라.”
스님께서는 나이 80이 되어서야 조주성(曹州城) 동쪽 관음원(觀音院)에 머무셨는데, 돌다리(石橋)에서 10리 정도 되는 곳이었다.
그때부터 주지살이를 하셨는데, 궁한 살림에도 옛사람의 뜻을 본받아 승당에는 전가(前架“승당 앞에 설치된 좌선하는 자리)나 후가(後架:승당 뒤쪽에 설치된 세면장)도 없었고, 겨우 공양을 마련해 먹을 정도였다. 선상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 타다 남은 부지깽이를 노끈으로 묶어 두었는데, 누가 새로 만들어 드리려 하면 그때마다 허락지 않으셨다. 40년 주지하는 동안에 편지 한 통을 시주에게 보낸 일이 없었다.
한번은 남방에서 한 스님이 와서 설봉(雪峰:822~908)스님과 있었던 일을 거론하였다.
“제가 설봉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태고적 개울에 찬 샘이 솟을 때는 어떻습니까?“
설봉스님이 말하였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도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마시는 이는 어떻습니까?’
‘입으로 들이마시지 않는다.’”
스님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 말씀하셨다.
“입으로 들이마시지 않으면 콧구멍으로 들이마시겠군.”
그 스님이 스님(조주)에게 물었다.
“태고적 개울에 찬 샘이 솟을 때는 어떻습니까?”
“쓰다(苦).”
“마시는 이는 어떻습니까?”
“죽는다.”
설봉스님은 스님의 이 말을 듣고 찬탄하였다.
“옛 부처님이시다,옛 부처님이시다!”
설봉스님은 이런 일이 있은 뒤로 학인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로 한번은 하북(河北)의 연왕(燕王)이 군사를 이끌고 진부(鎭府)를 점령하기 위하여 경계까지 이르렀는데, 기상(氣像)을 보는 사람이 아뢰었다.
“조주 당은 성인이 사는 곳이라 싸우면 바드시 패할 것입니다.”
연왕과 조왕(趙王)은 연회를 베풀고 싸우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연왕이 물었다.
“조나라에 훌륭한 분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화엄경을 강의하는 대사님이 계시는데, 절개와 수행이 높으십니다. 만약 그 해에 큰 가뭄이 들어 모두 오대산에 가서 기도해주시기를 청하면, 대사께서 돌아오기도 전에 감로 같은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이에 연왕은 말하였다.
“그다지 훌륭한 것 같지는 않다.”
또 한 사람이 말하였다.
“여기서 120리를 가면 조주 관음원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선사(禪師) 한 분이 계시는데 나이아 승랍이 높고 도를 보은 안목이 밝습니다.”
그러자 모두 말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상서로운 징조가 아니겠는가.”
두 왕이 수레를 풀고 이미 절 안에 이르렀는데, 스님께서는 똑바로 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셨다. 연왕이 물었다.
“인왕(人王)이 높습니까, 법왕(法王)이 높습니까?”
“인왕이라면 인왕 가운데서 높고, 법왕이라면 법왕 가운데서 높습니다.”
연왕은 그렇다고 하였다.
스님께서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물으셨다.
“어느 분이 진부(鎭府)의 대왕입니까?”
조왕이 대답하였다.
“저올시다.” *(조주(趙州)는 진부(鎭府)에 속하였으므로, 지중한 예의로써 알렸다.【원문주】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노승은 그저 산야에서 남루하게 지내다 보니 미처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잠시 후 주위사람이 대왕을 위하여 설법을 청하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께서는 주위사람이 많은데 어지 노승더러 설법하라고 하십니까?”
이에 주위사람에게 명하여 스님 주변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문원(文遠)이라는 사미가 있다가 큰소리로 말하였다.
“대왕에게는 존호(尊號)가 많아서 스님께서는 그 때문에 설법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연왕이 말하였다.
“선왕께서는 이름 따위는 개의치 마시고 설법해 주십시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아십시오. 과거세의 권속은 모두가 원수입니다. 우리 부처님 세존의 명호는 한 번만 불러도 죄가 소멸하고 복이 생기는데, 대왕의 선조들은 사람들이 이름을 입에 담기만해도 금방 성을 냅니다.”
스님은 자비롭게도 지치는 줄 모르고 많은 설법을 하셨다. 그때 두 대왕은 머리를 조아리고 찬탄하며 존경해 마지않았다.
다음날 두 왕이 돌아가려고 하는데, 연왕 휘하의 선봉장이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임금에게 오만하게 대하였음을 힐책하기 위하여 새벽에 절 안으로 들어왔다. 스님께서 이 말을 듣고 나가서 영접하니 선봉장이 물었다.
“어제는 두 대왕이 오는 것을 보고도 일어나지 않으시더니, 오늘은 어째서 제가 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서 맞아주십니까?”
“그대(都衙)가 대왕만 같다면 노승도 일어나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오.”
선봉장은 이 말을 듣고 스님께 두 번 세 번 절하고 물러갔다.
그 뒤 조왕은 사신을 보내 스님을 모시고 공양 올리고자 하였다. 스님께서 성문에 다다르자 온 성안이 모두 예의를 갖추고 영접하였다. 스님께서 성안에 들어와 보배수레에서 내리자마자 왕은 절을 올리고 스님께 전각(殿)의 가운데 자리에 앉으시라고 청하였다. 스님께서는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이마에 손을 대고 내다보면서 말하였다.
“계단 아래 서 있는 이들은 무슨 관청의 책임자입니까?”
주위사람들이 말하였다.
“여러 절의 노스님들과 대사 대덕들입니다.”
“저 분들도 각기 한 지방을 맡아 가르침을 펴는 분들인데, 그 분들이 계단 아래 서 있다면 노승도 일어나겠습니다.”
그러자 왕은 모두 전각 위로 오르도록 하였다.
이 날 법회(齊宴)가 끝나려고 할 때, 승려든 관원이든 위로부터 아래까지 차례차례 한 사람이 질문 하나씩을 하도록 하였다.
한 사람이 불법에 대해 묻자 스님께서는 멀리 바라보면서 물었다.
“무얼 하는건가?”
“불법을 묻고 있습니다.”
“노승이 이미 여기에 앉아 있는데, 어디에 무슨 법을 묻는건가? 두 부처님은 함께 교화하지 않는 법이오.” *(이 구절은 경에 나오는 말씀이다.【원문주】)
왕은 여기서 그만두도록 하였다. 그때 왕비(王后)가 왕과 함께 곁에서스님을 모시고 서 있다가 여쭈었다.
“선사께서는 대왕을 위하여 마정수기(摩頂授記:부처님께서 수기하시면서 제자의 이마를 만져주심)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스님께서는 손으로 대왕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씀하셨다.
“대왕께서는 노승만큼 장수하소서.”
이때 스님을 임실 가까운 절에 계시도록 하고, 날짜와 장소를 택하여 선원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스님께서는 사람을 시켜 대왕에게 알렸다.
“만약 풀 한 포기라도 건드리면 노승은 다시 조주로 돌아갈 것이오.”
그때 두행군(竇行軍)이란 사람이 과수원 한 곳을 희사하였다.
그곳은 일만 오천 관의 값이 나가는 땅이었는데, ‘진제선원(眞際禪院)’ 도는 ‘두씨네 동산(竇家園)이라고 불렀다.
스님께서 그 절에 들어오시자 바다 같은 대주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때 조왕은 예의를 다하여 연왕이 유주(留州)에서 조정에 아뢰어 금란가사(命服)를 바쳤으며, 진부(鎭府)에서는 위의를 갖추어 이를 영접하였다. 스님께서는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으시니, 곁엣 사람들이 상자를 스님 앞에 옮겨 놓으면서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선사님의 불법을 위하시기 때문이니, 이 옷을 꼭 입으시기 바라십니다.”
“노승은 불법을 위하기 때문에 이 옷을 입지 않습니다.”
곁에서 말하였다.
“그렇지만 대왕의 체면을 보아 주십시오.”
“그게 속관(俗官)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마침내 대왕이 몸소 옷을 들어 스님 몸 위에 걸쳐드리면서 두 번 세 번 절하고 축복해 드리자, 스님께서는 그저 받기만 할 뿐이었다.
스님께서는 조주(曹州)에 2년을 살았는데,* (조주曹州는 진부(鎭府)인 듯하다) 세연을 마치려 하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뜨고 나면 태워버리되 사리를 골라 거둘 것 없다. 종사의 제자는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다. 더군다나 몸뚱이는 허깨비니, 무슨 사리가 생기겠느냐, 이런 일은 가당치 않다.”
스님께서는 제자를 시켜 불자(拂子)를 조왕에게 보내면서 말을 전하였다.
“이것은 노승이 일생동안 쓰고도 다 쓰지 못한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무자(戊子)년 11월 10일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임종하셨다. 그때 두씨네 동산에는 승속의 수레를 끄는 말과 수많은 사람의 슬피우는 소리로 천지가 진동하였다. 이리하여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비탄의 눈물은 쿠시나가라(부처님이 열반하신 곳)에서 황금관(棺)이 빛을 잃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높다란 안탑(贗塔)* (안탑:청정한 수행승을 휘아여 세운 탑을 말한다)
을 세우고 특별히 커다란 비석을 세웠는데, 「진제선사광조지탑(趙州眞際禪光祖之塔)이라 시호하였다.
후당 보대(保大) 11년(953) 4월 13일에 한 학인이 동도(東都) 동원(東院)의 혜통(惠通)선사께 옛스승 조주스님께서 교화하신 유적을 찾아 묻고는 절하고 물러나오자, 이에 붓을 주어 기록토록 하였다.
1. 평상시의 마음이 도이다.
스님께서 남전스님께 물으셨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시의 마음이 도이다."
"그래도 닦아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 하려 들면 그대로 어긋나버린다.”
“하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고에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헛된 지각(妄覺)이며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지각도 없는 것(無記)이다. 만약 의심할 것 없는 도를 진정으로 통달한다면 허공같이 특 트여서 넓은 것이니, 어찌 애써 시비를 따지겠느냐?”
스님께서는 이 말끝에 깊은 뜻을 단박 깨닫고 마음이 달처럼 환해졌다.
2. 남전스님과의 여러 인연들
남전스님께서 상당하시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밝습니까, 어둡습니까?”
남전스님께서 곧 방장실로 돌아가버리자 스님께서는 법당에서 내려와 말씀하셨다.
“이 노장이 내 물음에 아무 대답도 못했다.”
그러자 수좌가 말했다.
“노스님의 대답이 없었다고 하지 말게. 자네가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니.”
스님께서는 대뜸 후려갈기면서 말씀하셨다.
“이 몽둥이는 정작 당두 sfmr은이가 맞아야 하는 거지만….”
스님께서 남전스님께 물으셨다.
“(불법이) 있음을 아는 이는 어디로 갑니까?”
“산밑 시주 집에 한 마리 물소가 되는 거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젯밤 삼경에 달이 창을 비췄다.”
스님께서 남전스님 희하에서 노두(爐頭)를 맡았다. 대중이 운력으로 채소를 다듬고 있는데, 스님이 승당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불이야, 불이야!”
대중이 한꺼번에 승당 앞으로 달려가자, 스님께서는 승당 문을 잠가버렸다. 대중이 어쩔 줄을 몰랐는데 남전스님께서 승당 창으로 열쇠를 던져 넣자 스님께서는 곧 문을 열었다.
스님께서 남전스님 희하에 있을 때였다. 우물 누각에올라가 물을 푸다가 남전스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기둥을 끌어안고 다리를 매단 채 소리질렀다.
“살려줘요, 살려줘요!”
남전스님이 사다리를 오르면서 말씀하셨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스님께서는 잠시 후 다시 가서 사례를 드렸다.
“아까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전스님 회상의 동당과 서당의 수좌가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는데, 남전스님께서 승당으로 들어와서 고양이를 치켜들면서 말씀하셨다.
“말을 한다면 베지 않겠지만, 말하지 못한다면 베어버리겠다.”
대중이 말을 하였으나 아무도 남전스님의 뜻에 계합하지 못하자 당장에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스님께서 늦게야 밖에서 돌아와 인사드리러 가니 남전스님께서는 앞의 이야기를 다 말해 주고 물으셨다.
“그대 같으면 고양이를 어떻게 살리겠느냐?”
그러자 스님께서 신발 한 짝을 머리에 이고 나가버리니 남전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스님께서 남전스님께 물으셨다.
“다른 것(異)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무엇이 같은 것(類)입니까?”*(이(異)는 다른 것,류(類)는 같은 것, 이류중행(異類中行)은 보살이 성불한 후 6도(六道)가운데 윤회하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행을 말한다.)
남전스님께서 두 손으로 땅을 짚자 스님께서 발로 밟아 쓰러뜨리고 열반당으로 돌아가 안에서 소리질렀다.
“후회스럽다. 후회스러워!”
남전스님께서 듣고는 사람을 보내 무엇을 후회하느냐고 묻게 하니 “거듭 밟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하셨다.
남전스님께서 욕실을 지나가다가 (浴頭)가 불 때고 있는 것을 보고는 물으셨다.
“무얼 하는가?”
“목욕물을 데웁니다.”
“물소가 목욕하도록 부르러 오는 걸 잊지 말게.”
욕두는 “예” 하고 대답했다. 저녁이 되어 욕두가 방장실로 들어오자 남전스님께서 물으셨다.
“무엇 때문에 왔는가?”
“물소께서는 가서 목욕하시기 바랍니다.”
“고삐는 가져 왔는가?”
욕두는 대답이 없었다.
스님께서 문안드리러 오자, 남전스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제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자 남전스님께서 물으셨다.“
“고삐는 가지고 왔느냐?”
스님께서 앞으로 불쑥 다가가서 남전스님의 코를 틀어쥐고 잡아끌자 남전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옳기는 하다만, 너무 거칠구나.”
스님께서 남전스님께 물으셨다.
“사구(四句 )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고서 스님께서는 달리 한 말씀 해주십시오.”
남전스님께서 문든 방장실로 돌아가버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노장이 평상시는 잘 지껄이면서 묻기만 하면 한마디도 못한다.”
시자가 말하였다.
“큰스님께서 대답을 못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스님께서는 별안간 뺨을 한 대 후려갈겼다.
남전스님께서 갑자기 방장실의 문을 닫아버리고는 빙 둘러 재를 뿌리면서 말씀하셨다.
“말을 할 수 있다면 문을 열겠다.”
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하였으나 모두 남전스님의 뜻에 계합하지 못하자 스님께서는 “아이고, 아이고!” 하셨다.
남전스님께서 문을 열자 스님께서 남전스님에게 물으셨다.
“마음이 부처가 아니며 지혜가 도가 아니라면, 그래도 허물이 있습니까?”
“있다.”
남전스님께서 앞서 했던 말을 그대로 하자 스님께서는 바로 나가버렸다.
3. 뜰 앞의 잣나무
스님께서 상당하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하여 격을 벗어난 장부라도 여기를 벗어날 수는 없다. 노승이 위산(潙山)에 갔을 때 한 스님이 위산스님에게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고 묻자 위산스님은 ‘나에게 의자를 가져다 주게’ 하였다. 종사라면 모름지기 본분의 일로 납자를 지도해야 한다.”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스님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않는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그리고는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노승이 90년 전 마조(馬祖)대사 문하에서 80여 선지식을 친견하였는데, 모두가 솜씨좋은 선지식들로서 가지와 넝쿨 위에 또 가지와 넝쿨을 만드는 지금 사람들과는 달랐다. 성인 가신 지가 오래되어 한 대(代) 한 대가 틀리게 나날이 다르다. 남전스님께서는 항상 말슴하시기를 ‘이류(異類) 가운데서 행(行)해야 한다
.*(이(異)는 다른 것,류(類)는 같은 것, 이류중행(異類中行)은 보살이 성불한 후 6도(六道)가운데 윤회하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행을 말한다.)
고 하셨는데, 그대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는 가? 요즈음은 주둥이가 노란 어린 것들이 네거리에서 이러쿵저러쿵 법을 설하여 널리 밥을 얻어먹고 절을 받으려 하며 3백명이고 5백명이고 대중을 모아 놓고는 ’나는 선지식이고 너희는 학인이다‘라고 하는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청정한 가람입니까?”
“두 갈래로 머리 땋아올린 소녀다.”
“누가 그 가람에 사는 사람입니까?”
“두 갈래로 머리 땋아올린 소녀가 아이를 뱄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남전스님을 친견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진주(鎭州)에는 큰 무우가 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습니까?”
스님께서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서쪽하고도 저 서쪽이지.”
한 스님이 물었다.
“법에는 별다른 법이없다는데, 그 법이란 무엇입니까?”
“바깥도 비고 안도 비고 안팎이 다 비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님의 참 법신은 무엇입니까?”
“다시 무엇을 의심하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마음자리(心地)법문입니까?”
“고금의 표준이지.”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객 가운데 주인(賓中主)입니까?”
“산승은 색씨에게 묻지 않는다.”
“무엇이 주인 가운데 객(主中賓)입니까?”
“노승에게는 장인어른이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일체 법이 항상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노승은 조상의 휘호(諱號)를 부르지 않는다.”
그 스님이 또 물으려 하자, 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늘은 그만 대답하겠다.”
4. 일생동안 총림을 떠나지 않고
스님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형제여! 오래서 있지 말라. 일이 있거든 거론해 볼 것이요, 일이 없거든 자기 자리(衣鉢下)에 앉아 도리를 캐는 것이 좋다. 노승은 행각하면서는 죽 먹고 밥 먹는 두 때만 잡된 마음에 힘을 썼을 분 나머지는 별달리 마음을 쓴 곳이 없었다. 만약 이와같지 못하면 출가란 몹시 먼 일이 될 것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만물 가운데 무엇이 가장 견고합니까?”
“욕을 하려거든 서로 주둥이가 맞닿을 만큼 해야 하고, 침을 뱉으려거든 너에게서 물이 튈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아침 저녁으로 쉼이 없는 때는 어떻습니까?”
“승려 가운데는 그처럼 세금을 두 번 내는 백성은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한마디(一句)입니까?”
“그 한마디만 붙들고 있으면 그대는 늙고 만다.”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만약 한 평생 총림을 떠나지 않고서 5년이고 10년이고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도 그대들을 벙어리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그런 다음에는 부처님도 너희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 목을 베어라.”
5. 조주의 주인공
스님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형제여! 그대들은 바로 제3생의 원수
*(첫번째 생(生)에는 어리석은 복을 짓다가 견성(見性)하지 못하고, 두 번째 생에는 어리석은 복을 받고서 악업을 짓고, 세 번째 생에는 어리석은 복이 다해 쏜살같이 지옥에 들어가니, 어리석은 복 짓는 일은 3생에 걸친 원수라는 뜻이다.)
안에 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다만 옛날의 행위만을 고칠 뿐, 옛날의 사람은 고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대들이나 나나 스스로 출가하여 이제껏 일없이 지내왔는데 새삼스럽게 20명, 30명씩 몰려와 선을 묻고 도를 묻는 것이 흡사 내가 그대들에게 선이나 도를 빚지고 있기라도 한 것 같구나. 그대들이 나를 선지식이라고 부른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노승이 말장난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저 옛사람들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워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그대는 스물 네 시간의 부림을 받지만 나는 스물 네 시간을 부릴 수 있다. 그대는 어느 시간을 묻는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주의 주인공입니까?”
스님께서 “이 통테 매는 놈아!” 하고 호통을 치니 학인이 “예” 하고 대답하자, 스님께서는 “통테나 제대로 둘러라” 하셨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 본분의 일입니까?”
“나무가 흔들리면 새들이 날아가고 고기가 놀라면 물이 흐려진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바보 같은 사람입니까?”
“내가 그대만 못하다.”
“저는 스님을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바보가 되었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분별간택함을 꺼려할 분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지금 사람들의 병통입니다.”
“이전에 누가 나한테 물었으나 5년 동안을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어떤 관리가 물었다.
“단하(丹霞:739~824)스님이 나무 불상을 태웠는데 원주는 무엇 때문에 눈썹이 빠졌습니까?”*(단하스님이 추운날 목불을 불살라 불을 쬐고 있는 것을 원주가 보고 비방하였다. 스님이 사리를 찾고 있다고 하자 원주는 목불에 어찌 사리가 있겠느냐고 꾸짖었는데, 그 후 원주는 눈썹이 빠졌다.)
“관리의 집에서는 생것을 익히는 일은 누가 합니까?”
“하인이 합니다.”
“그 사람 솜씨가 좋군요.”
한 스님이 물었다.
“비목선인(毘目仙人)이 선재동자의 손을 잡고 티끌수만큼의 부처님을 보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스님께서는 그 스님의 손을 잡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무얼 보느냐?”
한 비구니가 물었다.
“무엇이 사문의 행위입니까?”
“아이를 낳지 마라.”
“스님께서는 관계하지 마십시오.”
“내 그대와 관계한다면 어찌하겠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주의 주인공입니까?”
“촌놈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왕이 선타바를 찾는 것입니까?”
*(선타바:원래는 소금, 물, 말(馬)을 뜻하는 말, 왕의 마음을 잘 아는 총명한 신하가 제때제때 알아서 이것들을 바친 데서 유래하여 지혜로운 이를 가리킨다.)
“그대는 노승이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하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현 가운데 현(玄中玄)입니까?”
“무슨 현 가운데 현을 말하느냐?” 일곱 가운데 일곱, 여덟 가운데 여덟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선타바입니까?”
“고요한 곳에 스바하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법이며 법 아님(法非法)이라 함은 무엇입니까?”
“동서남북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천지사방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현 가운데 현입니까?”
“이 스님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나이가 일흔 너댓은 되었을 것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왕이 선타바를 찾을 때는 어떻습니까?”
스님께서는 벌떡 일어나 몸소 차수(叉手)를 하셨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도입니까?”
“어찌 감히, 어찌 감히!”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법입니까?”
“칙칙 섭섭!” *(도교에서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외우는 기도문)
한 스님이 물었다.
“조주에서 진부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3백리다.”
“진부에서 조주까지는 얼마나 됩니까?”
“거리가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현 가운데 현입니까?”
“현(玄)한 지가 얼마나 되느냐?”
“현한 지가 오래 됩니다.”
“노승을 만났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현(玄) 때문에 바보가 죽을 뻔했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의 자신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가 보이느냐?”
6. 조주의 한마디
스님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오래 참선을 해온 납자라면 진실치 않은 사람 없고, 고금을 통달치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신참이라면 반드시 이치를 캐야 한다.
그대들은 이 쪽의 3백, 5백 도는 천명의 대중을 쫓아가거나, 저쪽의 비구,비구니 대중을 쫓아가지 말라. 총림에 주지한답시고 자칭하면서 막상 불법에 대해 물으면, 마치 모래를 볶아 밥을 짓는 것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한마디 말도 할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도리어 남은 그르고 나는 옳다고 하여얼굴에 열을 올리니, 세간 사람들이 법답지 못한 말들을 내놓게 한다. 진실로 이 뜻을 밝히고자 한다면 노승을 저버리지 말라.”
한 스님이 물었다.
“(여래가) 세속에 있으면서 여러 보살을 위하여 설법함은 모두 옷을 걸쳐 주는 따위의 일입니다. 스님께서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도하십니까?”
“그대는 어느 곳에서 나를 보느냐?”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법당 안의 모든 스님들이 이 스님의 말을 모른다.”
다른 한 스님이있다가 말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가 말해라. 나는 듣겠다.”
한 스님이 물었다.
“진정한 교화는 자취가 없으니 스승과 제자가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누가 너더러 와서 물으라 시키더냐?”
“딴 사람이 시킨 게 아닙니다.”
스님께서는 별안간 그 스님을 후려쳤다.
한 스님이 물었다.
“이 일은 어떻게 해내야 합니까?”
“나는 너를 이상하게 여긴다.”
“어떻게 해내야 합니까?”
“나는 네가 해내지 못한 걸 이상하게 여긴다.”
“보임(保任)하면 됩니까?”
“보임하건 보임하지 않건 마음대로 해 보아라.”
한 스님이 물었다.
“알음알이(知解)가 없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무얼 말하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께서 선상에서 내려와버리자, “바로 그것입니까?” 하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불법은 멀고 먼데,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그대는 앞사람이나 뒷사람이나 천하를 장악했다가도 죽을 때가서는 자기 몫은 반푼어치도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세상 사람은 보배를 귀하게 여기지만, 사문은 무엇을 귀하게 여깁니까?”
“어서 입 다물어라.”
“입만 다물면 됩니까?”
“입을 다물지 않으면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주의 한마디입니까?”
“반 마디도 없다.”
“스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노승은 한마디가 아니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만 모든 경계에 혹하지 않습니까?”
스님께서 한 발을 내려뜨리자 그 스님이 얼른 신발을 내밀었다. 스님께서 발을
거두고 일어서자 그 스님은 말이 없었다.
어떤 속인 관리가 물었다.
“부처님께서 계실 때에는 일체 중생이 부처님께 귀의하지만, 부처님이 멸도하신 다음에는 일체 중생이 어디에 귀의합니까?”
“중생이란 있은 적이 없다.”
“지금 묻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더 무슨 부처를 찾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4은3유(四恩三宥)에 보답하지 않는 자도 있습니까?”
“있다.”
“어떤 자입니까?”
“이 아비 죽인 놈아! 가만 보니, 너는 다만 이 한 물음이 모자랐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스님의 뜻입니까?”
“아무 것도 베풀 것이 없다.”
7. 진정한 선사는 만나기 어렵다.
스님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형제여! 과거를 뉘우쳐 미래를 닦으면 될 뿐이다. 만약 뉘우치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지옥에 묶일 것이다. 노승이 이 곳에 30여 년을 있으나 선사라고는 한 명도 찾아온 적이 없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와서는 하룻밤 자고 한 끼 먹고는 편하고 따뜻한 곳으로 서둘러 떠나버린다.”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문득 선사가 찾아온다면 그에게 무슨 말슴을 하시렵니까?”
“3만근의 쇠활은 생쥐를 잡기 위해서 당기지 않는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형제여! 남쪽에서 오는 사람은 짐을 내려주고, 북쪽에서 오는 사람을 짐을 더 실어 주어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윗사삼을 가까이 하여 도를 물으면 도를 잃고, 아랫사람을 가까이 하여도를 물으면 도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형제여!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말하면 삿된 법이 따라서 바르게 되고, 삿된 사람이 바른 법을 말하면 바른 법이 따라서 삿되진다. 제방에서는 보기는 어렵고 알기는 쉬우나, 이곳에서는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
한 스님이 물었다.
“선악에 혹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우뚝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뚝 벗어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우뚝 벗어나지 못합니까?”
“바로 선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한 비구니가 물었다.
“이제껏 내려왔던 말씀 말고 한마디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께서 “이 불에 타 깨진 쇠물병아!” 하고 호통을 치자 비구니는 쇠물병에다
물을 담아 와서 “대답해 주십시오” 하니 스님께서는 웃으셨다.
한 스님이 물었다.
“세계가 변하여 캄캄한 굴이 된다는데, 그때 이 몸은 어느 길로 떨어집니까?”
“점칠 수 없다.”
“점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촌놈아!”
한 스님이 물었다.
“말(言)도 없고 뜻(意)도 없어야만 비로소 한마디(句) 얻었다고 하겠지만, 이미
말이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한마디라고 합니까?”
“높아도 위태롭지 않고 가득 차도 넘치지 않는다.”
“지금 스님께서는 가득합니까 넘칩니까?”
“그대가 내게 묻는 바에야 어찌하겠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신령스러움이란 어떤 것입니까?”
“깨끗한 땅 위에 똥 한 무더기를 싸놓는 것이다.”
“스님께서는 명확한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를 어지럽게 하지 말라.”
한 스님이 물었다.
“법신은 작위(作爲)가 없어서 어느 법수(法數: 법의 테두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럼 말하는 것은 허용됩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그렇다면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웃으셨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이며, 무엇이 중생입니까?”
“중생 그대로가 부처이며, 부처 그대로가 중생이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중샙입니까?”
“묻고 또 묻는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큰 도에는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제접하여 설명해야 합니까?”
“바로 그대가 제접하여 설명하고 있다.”
“뿌리가 없다 함은 또 어떻습니까?”
“이미 부리가 없으니 어디에다 그대를 얽어매 두겠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제대로 수행하는 사라도 귀신에게 들킵니까?”
“들킨다.”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하고 찾는 데 있다.”
“그렇다면 수행을 하지 않겠습니다.”
“수행하여라.”
한 스님이 물었다.
“외로운 달이 허공에 떠오를 때, 빛은 어디서 생깁니까?”
“달은 어디서 생겼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듣자오니 스님께서는 ‘도는 수행하는 데 속하지 않으니 물들지만 말라’ 고 하셨다는데, 무엇이 물들지 않는 것입니까?”
“안팎으로 점검해 보아라.”
“스님께서도 점검하십니까?”
“점검한다.”
“스스로에게 무슨 허물이 있어서 스스로 점검하십니까?”
“그대에게는 무슨 일이 있느냐?”
8. 다가오는 대로 비춰주는 구슬같이
스님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이일은 마치 손바닥에 있는 밝은 구슬과 같아서
변방 사람이 오면 변방 사람이 나타나고
중국 사람이 오면 중국 사람이 나타난다.
나는 한줄기 풀을 가지고
열여섯 자 되는 금빛 부처님 몸으로 쓰기도 하고
열여섯 자 금 부처님을 한줄기 풀로 쓰기도하니
부처 그대로가 번뇌이고, 번뇌 그대로가 부처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부처는 누구에게 번뇌가 됩니까?
모든 사람들이 번뇌가 된다.
어떻게 해야 면할 수 있습니까?
면해서 무얼 하려느냐?
9. 본분사(本分事)로써 지도한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곳에서 본분사(本分事)로 학인을 지도한다. 만약 나더러 그들의 근기에 따라 지도하라 한다면, 으레껏 3승12분교로 지도할 것이다. 그래도 이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허물인가? 뒤에라도 솜씨좋은 선지식을 만난다면, 내가 그들을 저버린 것은 아니라고 말하여라. 다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본분사로 그를 지도할 따름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에로부터 지금까지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마음 그대로가 아닌 것을 저에게 헤아려 물을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마음 그대로인 것은 그만두고라도, 그대는 무엇을 묻는다는 것이냐?”
한 스님이 물었다.
“옛 거울은 닦지 않아도 비칩니까?”
“전생은 인(因)이고 금생은 과(果)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3도(三刀)가 떨어지지(落)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빽빽하다.”
“떨어진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아득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3계를 벗어난 사람은 어떻습니까?”
“가둬 놓을 수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우두(牛頭: 594~657)스님이 사조(四祖)를 뵙기 전에는 온갖 새들이 꽃을 물어다 공양을 올렸는데, 뵙고 난 다음에는 무엇 때문에 새들이 꽃을 물어다 공양 올리지 않았습니까?”
“세간에 맞춰주기도 하고 맞춰주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흰구름이 자재로이 노닐 때는 어떻습니까?”
“봄바람이 곳곳마다 한가로이 부는 것만이야 하겠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넓은 땅 위의 흰 소(露地白牛)입니까?”
“달빛 아래서는 색깔이 필요없다.”
“흰 소는 무엇을 먹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씹는 것이 없다.”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응당 이럴 뿐이다.”
10. 용녀가 구슬을 바치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려 하면 그대로 어긋나버린다.”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마음으로 하려고 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스님께서 세 번을 후려치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대를 저버렸다고 하겠는가?”
한 스님이 물었다.
“문답이 있으면 모두 분별(意根)에 떨어지는데 스님께서는 분별에
떨어지지 않고서 어떻게 응대하시겠습니까?”
“물어보아라.”
“그럼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에서 시비하지 말라.”
한 스님이 물었다.
“용녀(龍女)가 몸소 부처님께 바쳤다고 하는데 무엇을 바쳤습니까?”
스님께서는 두 손으로 바치는 시늉을 했다.
11. 조주의 일을 알고자 한다면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의 불법은 어렵다고 말하면 쉽고, 쉽다고 말하면 어렵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는 어려우나 알기는 쉽지만, 이 곳에서는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 이것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천하를 돌아다녀도 된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조주에서 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매몰시켜버리는 것이니, 그대들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한 스님이 물엇다.
“눈에 닿기만 해도 스님을 비방함이 되는데, 어떻게 해야만 비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비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벌써 비방해버린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로 수행하는 길입니까?”
“수행을 알면 되겠지만, 수행을 모른다면 자칫 인과에 떨어질 것이다.”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 그대들에게 말하는 법을 일러주겠다. 만약 누군가 묻거든 다만 ‘조주에서 왔다’ 고만 하라. 갑자기 ‘조주스님은 무슨 법문을 하시던가’ 라고 묻거든, 그저 ‘추우면 춥다 하고 더우면 덥다고 하더라’ 고 하여라. 그래도 다시 ‘그런 일을 물은 것이 아니다’ 하고 묻는다면, 다만 ‘무얼 묻는 케냐?’ 하여라. 그대도 다시 ‘조주스님은 무슨 법문을 하시던가’ 라고 묻는다면, 그에게 ‘스님께서 오셨을 때, 그대에게 전하신 말씀이 없었다. 그대가 만약 조주의 일을 알고자 하거든 직접 가서 묻도록 하라’ 고 말해 주어라.”
한 스님이 물었다.
“앞뒤를 돌아보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앞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그만두고 너는 누구한테 묻느냐?”
12. 이조가 골수를 얻었다는데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가섭은 아난에게 전하였는데, 달마는 누구에게 전하였는지 말해 보아라.”
한 스님이 물었다.
“이조(二祖)가 골수를 얻은 것은 어찌 됩니까?”
스님께서 “이조를 비방하지 말라” 하시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달마가 또한 말하기를 ‘밖에 있는 자는 가죽을 얻고 안에 있는 자는
뼈를 얻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안에 있는 자는
무엇을 얻었겠는가 말해 보아라.”
한 스님이 물었다.
“골수를 얻은 도리는 무엇입니까?”
“가죽이나 알아내도록 하여라. 여기 내게는 골수란 있지도 않다.”
“무엇이 골수입니까?”
“그렇다면 가죽도 만져보지 못했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그처럼 당당하심이 스님의 제모습(正位)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수긍치 않은 자가 있음을 아느냐?”
“그렇다면 다른 모습이 있습니까?”
“누가 다른 사람이냐?”
“누가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까?”
“마음대로 불러라.”
한 스님이 물었다.
“상상근기라면 한번 건드리기만 해도 깨닫겠지만
하근기가 올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그대는 상상근기냐 하하근기냐?”
“스님께서 대답해 주십시오.”
“이야기에 주인고이 없구나.”
“저는 7천리를 달려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심통부리지 마십시오.”
“그대가 이렇게 묻는 한 심통을 부리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 스님은 하룻밤만 자고 바로 가버렸다.
한 스님이 물었다.
“방계(傍系)를 이어받지 않은 자는 어떻습니까?”
“누구 말이냐?”
“혜연(惠延)아 말입니다.”
“무엇을 묻느냐?”
“방계를 이어받지 않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손으로 그를 어루만져 주셨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납승 문하의 일입니까?”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한 스님이 물었다.
“진여(眞如)니 범성(凡聖)이니 하는 것은 모두 꿈속의 말입니다.
무엇이 참된 말씀(眞言)입니까?”
“그 두 가지를 다시는 말하지 말라.”
“두 가지는 그만두고 무엇이 참된 말씀입니까?”
“옴 부림 파트!”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주입니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정(定)입니까?”
“정(定)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학인 본분의 일입니까?”
“끄달리는구나, 끄달려,”
한 스님이 물었다.
“옛사람은 30년 만에 한번 당겨 두 발에 성인 반쪽을 쏘아 맞혔는데,
오늘 스님께서는 완전히 맞혀 주십시오.”
스님께서는 불쑥 일어나 가버리셨다.
13. 분명함 속에도 있지 않은데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따져서 가림을 꺼릴 뿐이다.’ 하였다.
말로 표현했다 하면
그것은 따져서 가림이 되고 분명함이 된다.
그러나 나는 분명함 속에도 있지 않은데,
도리어 그대들이 애지중지하겠느냐?”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이미 분명함 속에도 계시지 않다고 하셨는데,
또 무엇을 애지중지한다는 것입니까?”
“나도 모른다.”
“스님께서 이미 모르신다면
무엇 때문에 분명함 속에도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
“묻는 일은 됐으니, 절이나 하고 물러가거라.”
14. 불생불멸의 도리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법이란 본래 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말을 꺼냈다 하면 나는 것이요,
말을 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것이다’ 라고 말할 것도 없으니,
여러분은 무엇을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도리라고 하겠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벌써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이 아닙니까?”
“이 놈이 그저 죽은 말만 알아듣는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따져서 가리을 꺼릴 뿐이다 ’
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꺼냈다 하면
그것은 따져서 가리는 것이 되는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치시겠습니까?”
“왜 옛분의 말슴을 다 인용하지 않느냐?”
“거기까지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따져서 가림을 꺼릴 뿐이다.”
15. 생사를 벗어나는 길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경전을 보아도 생사 속에 있고
경전을 보지 않아도 생사 속에 있으니,
그대들은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한 스님이 불쑥 물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되겠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한 스님이 물었다.
“예리한 칼날이 잘 드는 때는 어떻습니까?”
“나의 예리한 칼은 어디가 잘 드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마침 잘 됐다!”
16. 사람 얻기 어렵다.
상당하여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대중은 다 왔는가?”
“다 왔습니다.”
“한 사람이 더 오면 그때 말하겠다”
한 스님이 말하였다.
“아무도 오지 않으면 그때 가서 스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 얻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17. 금강선(金剛禪)을 버려라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 ‘마음이 나니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니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고 하였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스님이 물었다.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너는 그 물음 하나로 됐다.”
스님께서 법문할 때(參次) 말씀하셨다.
“밝기도 하고 밝음 이전이기도 하여 어둡다고 하자니
밝아지려고 하는데,
그대들은 어느 쪽에 있느냐?”
한 스님이 말하였다.
“양쪽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있겠구나.”
“중간에 있다고 하면 양쪽에 있는 것이 됩니다.”
“이 중이 여기 나에게 얼마간 있더니
이런 말을 다 하지만 3구(三句)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설령 벗어난다 해도 역시 3구 속에 있으니
그대는 어찌하겠느냐?”
“저는 3구를 부릴 수 있습니다.”
“왜 진작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방에 통달하는 것입니까?”
“금강선(金剛禪)을 버려라!”
18. 부처님 머리 위에 눌러앉아서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납자라면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에
그대로 눌러앉아야 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에
그대로 눌러앉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대의 경계가 아니다.”
19. 큰 도는 눈앞에 있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큰 도는 눈앞에 있는데 보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엇다.
“눈앞에 무슨 물건이 있길래 제게 보라고 하십니까?”
“강남이건 강북이건 네 마음대로 해라.”
“스님께 사람들을 위하는 방편이 어찌 없으시겠습니까?”
“아까는 무얼 물었더냐?”
“법계에 들어오면 ‘있음’을 알게 됩니까?”
“누가 법계에 들어오느냐?”
“그렇다면 법계에 들어와서 나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싸늘한 재나 죽은 나무가 아니라 꽃비단이
백 가지로 나타나는 것이다.”
“법계에 드는 경계에서의 작용이 아닌지요?”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것이 실다운 이치라면 어디서 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대는 한 번 더 말하도록 하라.”
한 스님이 물었다.
“만 가지 경계가 한꺼번에 일어날 때,
혹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지.”
“어떤 사람이 혹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그대는 불법이 있음을 믿느냐?‘
“불법 있음을 믿는 것은 옛사람이 이미 말씀해 놓았으나
누가 혹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왜 내게 묻지 않느냐?”
“이미 물었습니다.”“혹했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옛사람과 지금 사람 사이에 가까운 데가 있습니까?”
“가깝다면 가까운 것이겠지만, 같은 한 몸은 아니다.”
“어째서 같지 않습니까?”
“법신은 법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신이 법을 설하지 않는다면
스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십니까?”
“나는 여기에서 답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법신이 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여기에서 너의 아비를 구하고자 하나
그는 끝내 나오지를 못하는구나.”
“학인이 서로 보지 못한다고 말할 때
그곳에 서로 통함(廻互)이 있습니까?”
“서로 통하는 도리를 헤아려냈구나.”
“그것을 헤아릴 수 없다면,
서로 통함이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음은 그대 자신이다.”
“스님의 경계를 남들이 헤아릴 수 있습니까?”
“사람이 더욱 가까워지면 도는 더욱 멀어진다.”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스스로 숨으십니까?”
“나는 지금 너와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 전신(轉身)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래야만 맞기 때문이다.”
20. 제 3 생의 원수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교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금생의 일이지만,
교화시킬 수 없는 사람은 제 3생의 원수이다.
만약 교화하지 않는다면 일체 중생을
떨어뜨리게 될까 두렵고 교화한다 해도 역시 원수니,
그대들은 교화하겠느냐?”
한 스님이 말하였다.
“교화하겠습니다.”
“일체 중생이 그럼 그대를 보느냐?”
“보지 못합니다.”
“어째서 보지 못하느냐?”
“모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이느냐?”
“스님께서는 중생이 아니옵니다.”
“죄를 알았으면 됐다.”
21. 저절로 된 일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용녀가 마음으로 몸소 부처님께 바쳤던 것은
모두가 저절로 그렇게 된 일이다.”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이미 저절로 된 일이라면,
무엇 때문에 바쳤습니까?”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저절로 그렇게 되는 줄을 알겠느냐?”
22. 하나의 도인 찾기 힘들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되려는 사람은 8백명이나 있어도
도인 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도 없고 사람도 없는 곳에 수행이 있습니까?”
“그 두 가지를 없앴다 해도 백천만억의 수행이 있다.”
“도인이 올 때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수행하지 말라.”
그 스님이 절을 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꼼짝없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흰 구름이 머뭄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나는 천문(天文)은 모른다.”
“그래도 주객이야 없겠습니까?”
“나는 주인이요 그대는 손님인데,
흰 구름은 어디 있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매우 훌륭한 사람이 형편없이 보일 때는 어떻습니까?”
“대들보로 쓸 재목을 망가뜨려 놓았구나.”
23. 부처 불(佛)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부처 불(佛)자를 나는 듣기 좋아하지 않는다.”
한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십니까?”
“사람들을 위하지.”
“어떻게 사람들을 위하십니까?”
“깊은 뜻(玄旨)을 알지 못하면 생각만 고요히 해도 헛수고로다.”
“깊은 것(玄)은 그렇다치고, 무엇이 뜻(旨)입니까?”
“나는 근본을 붙잡지 않는다.”
“그것은 깊은 것이고, 무엇이 뜻입니까?”
“그대에게 대답함이 뜻이다.”
24. 각자의 선과 도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각자에게 선(禪)이 있고 도(道)가 있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도냐고 그대들에게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하겠느냐?”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이미 각자에게 선과 도가 있는데,
예로부터 지금가지 말슴은 무엇을 위함입니가?”
“그대의 떠도는 혼을 위함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위해야 합니까?”
이에 스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말씀이 없었다.
25. 생각하는 그 자는 누구냐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한가로이 지내지 말고 부처를 생각하고 법을 생각해라.”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 자신의 생각입니까?”
“짝이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이 바보야!” 하고 꾸짖으셨다.
26. 제 1구의 도리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제 1구에서라면
조사와 부처의 스승이 되고,
제 2구에서라면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며,
제 3구에서라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던 것이 제 1구입니까?”
“조사와 부처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다시 묻는 것이 좋겠다.”
학인이 다시 묻자
“다시 인간과 천상으로 간다.”하셨다.
27. 긴 한숨으로 대답하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그가 물어오지 않은 것도아니요,
내가 대답해 주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한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무얼 가지고 대답하십니까?”
스님께서 길게 한숨을 쉬자
그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신다면,
저를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대가 방금 나를 긍정했더라면
내가 그대를 저버린 것이지만,
그대가 나를 긍정하지 않았으니
내가 그대를 저버린 것은 아니다.”
28.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내 오늘 저녁 답을 하겠으니,
물을 줄 아는 사람은 나오너라.”
한 스님이 나오자마자 절을 하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구운 벽돌을 던지고
구슬을 빼앗아오려 하였더니
이젠 굽지 않은 벽돌뿐이구로나.”
한 스님이 물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에서
아래로는 개미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습니까?”
“그에게 업식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법신입니까?”
“응신이다.”
“저는 응신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대에게는 응신뿐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밝은 달이 공중에 떠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스님은 이름이 무언가?”
“아무개입니다.”
“밝은 달이 공중에 떠서 어느 곳에 있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마침 열엿새일 때는 어떻습니까?”
“동쪽은 동쪽, 서쪽은 서쪽이지.”
“무엇이 ‘동쪽은 동쪽, 서쪽은 서쪽’입니까?”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제가 전혀 알지 못할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나는 더 모른다.”
“스님께서는 도리가 있는 줄을 아십니까?”
“나는 나무토막이 아닌데, 어찌 모르겠느냐?”
“알지 못한다 하시니, 정말 좋습니다.”
스님께서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사람이 도인입니까?”
“내가 전에는 ‘불인(佛人)’이라고 말했었지.”
한 스님이 물었다.
“말을 꺼낸다거나 손발을 꿈쩍거린다거나 하면
그 모두가 저의 그물 가운데 떨어지게 됩니다.
스님께서는 이것을 떠나서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점심을 먹고 아직 차를 마시지 않았다.”
마대부(馬大夫)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수행을 하십니까?”
제가 만약 수행한다면 큰일 나지요.“
“스님께서 수행하지 않으시면서
누구더러 수행하라 하십니까?”
“대부야말로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찌 수행한다 하겠습니까?”
“대부가 만약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인왕(人王)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겠소?
굶주림에 허덕이며 꽁꽁 얼어붙은 경지에서
풀려나올 기약이 없을 것이요.”
대부는 이에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물러났다.
29. 청주의 베옷은 일곱 근이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물어올 것도 아니요,
내가 대답할 것도 아니다.”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는 차수(叉手)하거나 합장하지 말라.
나도 선상이 불자로 대답하지 않겠다.”
한 스님이 물었다.
“생각과 기억으로는 미칠 수 없는 곳은 무엇입니까?”
“이쪽으로 오너라.”
“이쪽으로 오는 것은 미칠 수 있는 곳입니다.
무엇이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까?”
스님께서는 손을 일으켜 내세우면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것을 뭐라고 부르느냐!”
“손이라고 부릅니다만 스님께서는 뭐라고 부르십니까?”
“백 가지 이름으로 나는 말할 수 있지.”
“스님의 백 가지 이름에는 미칠 수 없겠으니,
우선 뭐라고 부릅니까?”
“그게 바로 그대가 생각과 기억으로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그 스님이 절을 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에게 생각과 기억이 미치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무엇입니까?”
“석존의 가르침과 조사의 가르침이 그대의 스승이다.”
“조사와 부처라면 옛분들이 다 말씀해 놓았는데,
무엇이 생각과 기억으로도 미칠 수 없는 곳입니까?”
“석존의 가르침과 조사의 가르침이 그대의 스승이다.”
“조사와 부처라면 옛분들이 다 말씀해 놓았는데,
무엇이 생각과 기억으로도 미칠 수 없는 곳입니까?”
스님께서 다시 손가락을 들어올리면서 말씀하셨다.
“뭐라고 부르겠느냐?”
그 스님이 한참을 잠자코 있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뜻 말하지 못하고 다시 무엇을 의심하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스님의 가풍입니까?”
“나는 귀가 어두우니 큰 소리로 물어라.”
그 스님이 다시 묻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나의 가풍을 물으니 내가 그대의 가풍을 알겠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온갖 경계가 한꺼번에 일어날 때는 어떻습니까?”
“온갖 경계가 한꺼번에 일어난다.”
“한 번 묻고 한 번 대답함은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선상(禪床)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스님이 막 절하려는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문답을 기억하겠느냐?”
“기억합니다.”
“어디 한번 기억해 보아라.”
그 스님이 말을 꺼내려는데 스님께서 물으셨다.
(‘스님께서 물으셨다〔師問’ 다음에 문장이 탈락된 듯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눈앞의 부처입니까?”
“불전(佛殿)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양만의 부처입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음 그대로가 그것이다.”
“마음 그대로인 것이라 해도 그것은 테두리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음 없는 것이다.”
“마음 있음과 마음 없음을 제가 가려내도 괜찮습니까?”
“마음 있음과 마음 없음이 이미네게서 다 가려졌는데,
더 이상 내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냐?”
한 스님이 물었다.
“멀리서 와 스님께 귀의하온데 무엇이 스님의 가풍입니까?”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말씀해 주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나의 가풍이다.”
“스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아도
이미 4해(四海)에서 몰려들어 스님께 귀의하는 것은 어찌합니까?”
“그대는 바다일지라도 나는 바다가 아니다.”
“바다 속의 일은 어떻습니까?”
“내가 한 개를 낚아올렸다.”
한 스님이 물었다.
“조사와 부처도 가까이할 수 없는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조사와 부처가 아니다.”
“가까이하지 못한 걸 어찌합니까?”
“그대에게 ‘조사와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물건도 아닌 것이다’라고 말하면 되겠느냐?”
“그게 무엇입니까?”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조사이거나 부처이거나 중생이다.”
“그렇게만 해서도 안됩니다.”
“결국 너하고는 이야기가 안되겠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평상심(平常心)입니까?”
“늑대와 여우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슨 방편을 써야만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것은
그만두고 이제껏 무얼 들어왔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듣자오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빛깔 따라 달라지는 마니주’라는 것이 있다는데,
무엇이 본래 색깔입니까?”
스님께서 그 스님의 이름을 부르니
“예” 하고 대답하자 “이 쪽으로 오너라”하니,
그 스님은 이 쪽으로 와서 다시 물었다.
“무엇이 본래 색깔입니까?”
“자, 색깔 따라 달려가거라.”
한 스님이 물었다.
“평상시의 마음이 된 사람도 교화를 받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의 문전은 밟아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쪽 사람을 침몰시킨 것이 아닙니까?‘
“아주 훌륭한 평상심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제가 보임(保任)할 물건입니까?”
“미래제(未來際)가 다하여도 가려내지 못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이가 수행을 많이 한 사람입니까?”
“절 안의 강유(綱維:대중의 기강을 통솔하는 직책. 유나)이다.”
“저는 이제 막 왔기 때문에 이 집안일이 어떤지 전혀 모릅니다.”
“그대는 이름이 무언가?”
“혜남(惠南)입니다.”
“모른다는 그것이 참 좋다.!”
한 스님이 물었다.
“제가 배우고자 하나
그것은 스님을 비방하는 것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비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대는 이름이 무언가?”
“도교(道皎)입니다.”
“조용한 곳으로 가거라, 이 쌀통아!”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스님으 큰 뜻입니까?”
“크고 작은 것이 없다.”
“그것이 바로 스님의 큰 뜻 아닙니까?”
“털끝만큼이라도 있으면 만겁토록 여여하지 못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만법은 본시 한가한데 사람 스스로가 시끄럽다’하는데,
이것은 누구의 말씀입니까?”
“나오는 족족 죽는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한 이 말씀은 부정논법〔斷語〕입니다.
무엇이 부정논법 아닌 것입니까?”
“하늘 위 하늘 아래 나만이 존귀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입니까?”
“나는 어려서 출가한 이후로 눈병을 앓아본 적이 없다.”
“스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십니까?”
“부디 그대가 비로자나의 원만한 상호를 길이 보기를 바라노라!”
“부처님과 조사가 계실 때에는 부처님과조사가 서로 전하지만,
부처님과 조사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누가 전합니까?”
“예나 지금이나 모두 내 일〔分上〕이다.”
“그 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들도 모두 생사에 속하는 것이다.”
“조사스님을 매몰시키지 마십시오.”
“그럼 무엇을 전하는가?”
한 스님이 물었다.
“범(凡)도 성(聖)도 다했을 때는 어떻습니까?”
“그대는 부디 고승대덕이 되거라.
나는 불조께 폐나 끼치는 지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멀리서 조주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는데,
어째서 보이지 않습니까?”
“내 허물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밝은 달이 공중에 떠 있을 때, 방안의 일은 어떻습니까?”
“나는 출가하고부터 살 궁리를 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금시(今時)를 위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 병도 못 고치면서 어찌 남의병을 고치겠느냐.”
“제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는 건 어찌합니까?”
“의지한다면 땅을 디디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동쪽이건 서쪽이건 네 마음대로 하여라.”
한 스님이 물었다.
“마음마음이 헤아리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누구를 헤아리는가?”
“자기 자신을 헤아립니다.”
“둘이란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을 때는 어떻습니가?”
스님께서 물병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어냐?”
“물병입니다.”
“정말 훌륭하다. 그 끝과 겉을 보지 않음이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근본으로 돌아감입니까?”
“돌아가려 하면 곧 어긋나버린다.”
한 스님이 물었다.
“말을 여의지 않고서 어떻게 해야 해탈할 수 있습니까?”
“말을 여의는 것이 해탈이다.”
“조금 전에 아무도 저를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느냐?”
“스님께서 어찌 가려내지 못합니까?”
“나는 벌써 가려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마음이 아니면 지혜에 즉(卽)하지 못합니다.
스님께서 한마디 해주십시오.”
“내가 그대만 못하다.”
“무엇이 귀결점입니까?”
“귀결점이다.”
“어느 귀결점 말씀입니까?”
“내가 귀결점이거늘 그대는 말을 물을 줄 모르는구나.”
“묻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귀결점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한 스님이 물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이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습니다.”
“정말 훌륭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대로 본받아라.”
“어디를 말씀입니까?”
“남의 자리를 차지하지 말라.”
한 스님이 물었다.
“공겁(空劫)가운데는 누가 주인입니까?”
“내가 그 안에 앉아 있다.”
“무슨 법을 설하십니까?”
“그대가 묻는 것을 말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옛 말씀에 ‘텅 비고 밝아 스스로 비춘다’고 하였는데,
무엇이 ‘스스로 비춤’입니까?”
“남이 비추지 않음을 말한다.”
“비춤이 닿지 않는 곳은 어떻습니까?”
“그대는 말에 떨어졌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바로 그것〔的〕’입니까?”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법왕입니까?”
“주부(州府)의 대오아이다.”
“스님이 아니십니까?”
“그대는 모반을 일으켜 왕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의 마음입니까?”
“그대는 마음이고 나는 부처이나,
받들 것인지 아닌지를 그대 스스로 살펴라.”
“스승이 없는 건 아니나 받들어 모실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교화해 보아라.”
“3신(三身)가운데 어느 몸이 본래 몸입니까?”
“하나만 빠져도 안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이 나라에서 어느 분이 조사이십니가?”
"달마스님이 오신 이래로 이 쪽에서는 모두가 조사이다.“
“스님께서는 몇 번째 조사이십니까?”
“나는 순서에 떨어지지 않는다.”
“어느 곳에 계십니까?”
“그대 귓속에 있다.”
한 스님이 물었다.
“근본도 버리지 않고 지말도 좇지 않으니
무엇이 바른 길입니까?”
“매우 훌륭한 출가승이로다!”
“저는 여태 출가한 적이 없습니다.”
“귀의불하고 귀의법하라.”
“나갈 집이 있습니까?”
“곧장 집을 나서면 된다.”
“그를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집 안에 앉아 있거라.”
한 스님이 물었다.
“눈 밝은 사람은 모든 것을 본다는데, 빛깔도 봅니까?”
“후려쳐버려라!”
“어떻게 후려칠 수 있습니까?”
“힘을 쓰지 말라.”
“힘 쓰지 않고 어떻게 후려칠 수 있습니까?”
“힘을 썼다 하면 어긋나버린다.
한 스님이 물었다.
“조사와 부처의 큰 뜻은 누구를 위함입니까?”
“다만 금시(今時)를 위한다.”
“그럴 수 없는데야 어찌합니까?”
“누구의 허물이냐?”
“어떻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지금 같아선 아무도 알아들을 자가 없다.”
“그렇다면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없다고 하지는 말아라.”
한 스님이 물었다.
“일을 다 마친 사람은 어떻습니까?”
“정작 큰 수행을 하지.”
“스님께서도 수행을 하십니까?”
“옷 입고 밥 먹는다.”
“옷 입고 밥 먹는 것은 일상사인데 수행이랄 것이 있습니까?”
“그럼 말해 보아라. 내가 매일 무얼 하더냐?”
최랑중(崔郞中)이 물었다.
“큰 선지식도 지옥에 들어갑니까?”
“내가 맨먼저 들어가지.”
“큰 선지식이신데 어째서 지옥에 들어갑니까?”
“내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낭중을 만날 수 있겠는가.”
한 스님이 물었다.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날 때는 어떻습니까?”
“천지차이로 벌어진다.”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천지차이로 벌어진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잠들지 않는 눈입니까?”
“범안(凡眼)과 육안(肉眼)이다.”
스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비록 천안(天眼)을 얻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육안의 힘이 이와 같다.”
“어떤 것이 잠자는 눈입니까?”
“불안(佛眼)과 법안(法眼)이 잠자는 눈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대유령 꼭대기까지 쫓아갔으나
무엇 때문에 의발을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스님께서 누더기를 잡아당기면서 말씀하셨다.
“이 옷은 어디서 났느냐?”
“이것을 물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잡아당겨도 떨어지지는 않겠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합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것은 어떻게 구분합니까?”
“그대도 한 개를 가졌고 나도 한 개를 가졌다.”
“이것은 합치는 것입니다. 무엇이 흩어지는 것입니까?”
“그대가 합쳐버렸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길을 잘못 들지 않는 것입니까?”
“마음을 알고 성품을 봄이 길을 잘못 들지 않는 것이다.”
“밝은 구슬이 손바닥에 있을 때, 빛이 납니까?”
“빛이 없지는 않으나 무엇을 구슬이라고 하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신령스런 싹에 뿌리가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그대는 어디서 왔느냐?”
“태원(太原)에서 왔습니다.”
“정말 훌륭하다. 근원이 없다니.”
한 스님이 물었다.
“제가 부처가 되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몹시도 힘을 들이는구나.”
“힘을 들이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부처가 되거라.”
한 스님이 물었다.
“저는 둔하고 어두워 한번 들떴다가 한번 가라앉고 하는데,
어찌해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스님께서 그대로 자리에 앉아계시기만 하자 그 스님이 말하였다.
“저는 스님께 진실로 여쭌 것입니다.”
“그대의 어느 곳이 들떴다 가라앉았다 하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범(凡)에도 있지 않고 성(聖)에도 있지 않으니
어떻게 이 두 갈래 길을 면할 수 있습니까?”
“두 갈래를 없애고 오면 대답해 주마.”
그 스님이 “안녕하십니까?” 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인사말은 어디서 나왔느냐?
여기에 있을 때는 나에게서 나왔다 하겠거니와,
시장에 있을 때는 어디서 나오겠느냐?”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정하지 못하십니까?”
“내 그대에게 가르쳐 주마, 왜 ‘오늘은 바람이 좋습니다.
’하고 말하지 못하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대천제(大闡提:성불할 가망이 없는 사람)입니까?”
“내가 대답해 주면 그걸 믿겠느냐?”
“스님의 지중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천제인(闡提人)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갑자기 나타나면 어찌합니까?”
“데리고 가거라.”
한 스님이 물었다.
“작용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작용은 없지 않으나 나타나는 건 누구냐?”
한 스님이 물었다.
“공겁(空劫)에도 수행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엇을 공겁이라고 하느냐?”
“한 물건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비로소 수행이라고 하겠는데,
무엇을 공겁이라고 하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출가입니까?”
“높은 명성도 따라가지 않고,
더럽고 허물어짐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한 법도 가리키지 않고서 무엇이 스님의 법입니까?”
“나는 묘산(茆山:唐代 道敎의 중심지)의 법은 설하지 않는다.”
“묘산의 법은 말씀하지 않으신다니, 무엇이 스님의 법입니까?”
“너에게 묘산의 법은 설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더냐.”
“그게 바로 스님의 법입니까?”
“나는 이제껏 이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친 적이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눈앞에서 홀로 벗어나는 한 길입니까?”
“둘도 없고 셋도 없다.”
“눈앞의 길에 제가 나아가도 됩니까?”
“그러면 천리만리 어긋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비로자나부처님 이마 위의 향상사(向上事)입니까?”
“나는 그대 발 밑에 있다.”
“스님께서 어찌하여 저의 발 밑에 계십니까?”
“그대는 원래 향상사가 있는 줄을 몰랐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합당한 것입니까?”
“그게 바로 네가 합당치 못한 것이다.”
“무엇이 합당치 못한 것입니까?”
“앞 구절에서 알아내도록 하라.”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스님의 분명한 뜻입니까?”
“그만, 그만! 더 말하지 말라.
나의 법은 미묘하여 생각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한 스님이 물었다.
“너무나 깨끗하여 한 점 티끌도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구덩이에 바지고 굴 속에 떨어진다.”
“무슨 허물이 있어서입니까?”
“그대가 그런 사람을 몰아넣기 때문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출가하여 위 없는 깨달음을 맹세코 구할 때는 어떻습니까?”
“아직 출가치 않았을 때는 깨달음에 부림을 받지만,
출가하고 나서는 깨달음을 부릴 수 있다.”
한 선비가 스님 손에 있는 주장자를 보고 말하였다.
“부처님은 중생의 바람을 빼앗지 않는다는데,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스님께 손에 든 주장자를 달래도 되겠습니까?”
“군자는 남이 좋아하는 것을 빼앗지 않는 법입니다.”
“저는 군자가 아닙니다.”
“노승도 부처님이 아닙니다.”
스님께서 절 밖에 나왔을 때
한 노파가 밭에서 모종 심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갑자가 사나운 범을 만나면 어찌하겠소?”
“마음 쓸 법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님께서 “퉤퉤!”하니 노파도 “퉤퉤!”하였다.
스님께서 다시 말슴하셨다.
“아직도 그게 남아 있구나.”
한 선비가 하직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저는 여기 있으면서 스님께 오래도록 폐를 끼쳤으나,
스님께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뒷날 한 마리 나귀가 되어 와서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내게 안장 매는 법을 가르쳐 주게.”
스님께서 도오(道吾:769~835)스님의 처소에 갔을 때,
승당에 들어가자마자 도오스님이 말하였다.
“남전의 화살 한 발이 왔구나.”
“화살을 보십시오.”
“지나갔다.”
“명중하였습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백골이 썩어 흩어지고
한 물건만이 길이 신령스러울 때는 어떻습니까?”
“오늘 아침도 바람이 인다.”
한 스님이 물었다.
“3승12분교는 묻지 않겠습니다만,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물소가 새끼를 낳았으니 잘 보아라.”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른다.”
한 스님이 물었다.
“만국이 와서 조공(朝貢)을 올릴 때는 어떻습니까?”
“사람을 만나도 부르지 말라.”
한 스님이 물었다.
“하루 스물 네 시간에 어떻게 깨끗이 씻어냅니까?”
“내하(奈河)의 물은 흐리고,
서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급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문수보살을 친견할 수 있습니까?”
“이 멍충아! 어디 갔다 오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도량입니까?”
“그대는 도량에서 와서 도량으로 간다.
전체가 다 도량인데 도량 아닌 데가 어디냐.”
“싹이 아직 트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갈라진다.”
“냄새 맡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그같은 한가로운 공부란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수량을 헤아립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숫자로 헤아림에 구애받지 않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세계에 밤낮이 없습니까?”
“바로 지금이 낮이고 밤이다.”
“지금을 물은 것은 아닙니다.”
“난들 어찌하겠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가섭의 두타의(頭陀衣)는 조계의 길을 밟지 않았다’고
하는 데 어떤 사람이라야 입을 수 있습니까?”
“허공은 세간에 나오지 않고, 도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섞여도 잡스럽지 않는 것입니까?”
“나는 오래도록 채식만 해왔다.”
“그래 가지고 초연할 수 있겠습니까?”
“공양을 다 마쳤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옛사람의 말씀입니까?”
“잘 들어라, 잘 들어라!”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의 본분사입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꺼리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나는 청주에서 베옷 한 벌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사람이 출가한 사람입니까?”
“천자도 배알하지 않고 부모가 도리어 절을 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얼굴을 서로 마주하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대가 바로 얼굴을 마주한 자이다.”
'조주록(趙州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주록 강해 4(13~19) (0) | 2019.08.25 |
---|---|
조주록 강해 3(11~12) (0) | 2019.08.11 |
조주록 강해 2(7~10) (0) | 2019.08.11 |
조주록 강해 1(1~6) (0) | 2019.08.11 |
[스크랩] 조주록趙州錄 下 (0) | 2018.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