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인류는 모두 형제자매'
조주선사가 상당하여 말씀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들은 바로 3생의 원수 가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다만 옛날의 행위만을 고칠 뿐, 옛날의 사람은 고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여러분이나 나나 스스로 출가하여 이제껏 일없이 지내왔는데, 새삼스럽게 20명, 30명씩 몰려와 선(禪)을 묻고 도(道)를 묻는 것이 흡사 내가 그대들에게 선이나 도를 빚지고 있기라도 한 것 같구나.
그대들이 나를 선지식이라고 부른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노승이 말장난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저 옛사람들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워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과거 우리가 수백 수천생의 삶을 살아오면서 어느 때는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어느 삶에서는 형제 자매 또는 때로는 원수지간으로 지내온 사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류가 형제자매라는 이야기죠. 조주선사는 이를 ‘여러분들은 바로 3생의 원수 가운데에 있다’고 설했습니다 .
또한 우리가 현재 받고 있는 복(福)이나 업(業)은 과거생에 일어났던 자신의 행위 때문에 물려받은 것이고, 현재의 행위는 미래생의 복이나 업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잘못된 업은 이번 삶에서 깨끗이 씻어버리고,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 생사를 초월한 깨달음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옛 성인은 이것을 ‘다만 옛날의 행위만을 고칠 뿐, 옛날의 사람은 고치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옛날의 사람’은 모든 중생이 본래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붓다의 성품을 말합니다. 인간의 성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하지만 이 성품은 원래 고칠 수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얻을 수도 없는 것이죠? 이 뜻을 곧 바로 알아채면 만사형통입니다.
조주선사는 자신을 빚장이처럼 쫓아다니면서 도를 묻지 말라고 말합니다. 선지식도 아니고 빚장이도 아니고 범부도 성인도 아니고, 단지 자신일 뿐입니다. 무심(無心)으로 하루하루 지내는 늙은이일 뿐이란 말이죠. 그렇지만 공부하는 자들은 참선하는 와중에 수시로 자신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스승은 말을 하기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대대로 이어온 중생 구제심(救濟心)으로 대답을 합니다. 한 마디 말끝에 바로 깨닫기를 바라면서..
28. '마음대로 쓰는 24시간'
한 스님이 물었다.
“하루 24시간 동안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조주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24시간의 부림을 받고 있지만 노승은 24시간을 쓰고 있다. 그대는 어느 시간에 대하여 묻는 것이냐?”
깨달음은 무심(無心)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오직 의심하는 화두만 염두에 두고 마음에 잡다하고 분별하는 생각이 일어나면 원래 모든 법(法)은 무생(無生, 생겨나지 않는 것)임을 잘 이해하여 그냥 지켜만 볼 뿐 망념에 집착하지 않 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스님은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지 묻고 있는데, 조주선사는 ‘그대는 24시간 마음의 부림을 받고 있으나 나는 24시간 동안 내 마음대로 마음을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깨달음은 1초간에도 수십 번, 이쪽저쪽 끌려 다니는 마음을 자기 스스로 항복시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쓸 일이 있으면 쓰고, 쓸 일이 없으면 그저 그대로 무심을 지킬 뿐입니다. 여기에 시간 개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29. '너의 주인공을 알라!'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주의 주인공입니까?”
조주선사가 "이 똥장군 같은 놈아!” 하고 호통을 치니 그 스님이 “예”하고 대답하자
선사가 말했다.
“여법하게 똥통이나 잘 져라.
‘조주의 주인공, 즉 청정자성, 법신이 무엇인가?’ 물었는데, 조주는 짐짓 "어허, 이런 똥이나 푸면서 돈 벌려 다니는 놈아!" 라고 꾸짖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네까짓게 나를 시험하려고 하느냐는 의미로 나무란 것일까요? 도를 가르치는 선사가 그런 이유로 공부하는 자를 욕하지는 않습니다. 선사의 말씀은 어차피 학생이 이미 깨달음에 들었는지 파악해 보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자들에게는 충격을 주거나 정신을 혼란시켜 단박에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똥을 지고 다니든, 황금을 품고 다니든 너의 참 모습은 무엇이냐? 하고 반응을 떠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예' 하고 자기가 똥장군이라고 스스로 인정하였으니, 언제쯤이나 자성을 볼 것인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실 우리는 몸속에 똥뿐만 아니라 온갖 더러운 것은 모두 달고 다닙니다, 피, 고름, 오줌, 나쁜 세균 등등. 위 똥장군이란 말은 바로 똥을 짊어지고 다니는 자기 자신을 뜻하는 겁니다.
조주선사는 "불법의 이치에 맞게 똥통이나 잘 지고 다녀라"고 법문을 내렸는데 이 뜻을 모르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 똥통 잘 지니고 있습니다." 라고나 했으면 조주선사의 눈에 어느 정도 생기가 돌 텐데...
'똥통 잘 져라'는 말은 바로 좀 깨달으라는 암호입니다. 어떻게 '똥통을 지라'는 소리가 '깨달으라'는 말인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이것만 알아채면 건방진 말이지만 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30.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學人) 본분의 일(本分事)입니까?”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새들이 날아가고, 고기가 놀라면 물이 흐려진다.”
공부하는 학생이 근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새들이 날아가고, 고기가 놀라면 물이 흐려진다.” 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분명히 무심의 경지에서 나온 조주선사의 훌륭한 법문일 텐데 시적으로 표현하니 아리송합니다.
깨달음을 목표로 선을 공부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말과 마음의 길이 끊겨 내가 없고(無我), 마음도 없는(無心) 경지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한번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이죠.
일단 크게 죽으려면 의심 덩어리인 화두에 몰입되어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잠이 들었을 때나 깨었을 때나 화두가 또렷또렷한 오매일여의 경지를 돌파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 나무를 흔들면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 버리고, 물속의 고기가 놀라 움직이면 물이 흐려지는 것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쉽게 마음이 움직여 화두가 달아나 버린다면 공부인의 자세가 아직 안된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아 엎어지더라도 의심이 타파되기 전까지는 과거생의 모든 습기를 제거하고 세상의 일에 동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나면 이미 틀렸다.'
31. '선사는 흐리멍텅'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바보같은 사람입니까?”
조주선사가 말했다.
“나는 그대보다 못하다.”
“저는 스님을 이겨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바보가 되었느냐?”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아무 할 일이 없는, 어쩌면 바보같이 흐리멍텅한 분이라고 하는 말을 이 스님이 들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보같은 사람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조주선사는 '나는 그대보다 못해' 라는 말로써 내가 바로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깨달은 자는 평소에는 완전한 무심(無心)의 경지에만 들어 있어 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선사가 멍청하고 바보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에 대하여 묻거나 법거량을 할 때에는 청산유수처럼 사자후를 토하는 게 선사입니다.
조주선사의 '나는 너보다 못해' 라는 말에 이 스님은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만 선사의 말에 끌려가 버렸습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선사들의 법문은 공(空)을 바탕으로 하는 마음의 근원에서 나오는 도리입니다. 이 근원에 대하여 자신의 근본 마음으로 응하는 것이 법거량이요, 깨달은 자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큰 스님을 이길 도리가 있습니까? 하고 바로 꼬리를 내린다면 '자네는 진짜 바보구나' 라는 핀잔을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주선사가 '나는 너보다 못해' 라고 했을때 어떻게 응답하면 되겠습니까? 자신의 참 모습을 그대로 밝히십시오. "저보다 더 멍청했던 놈이 있겠습니까?" 라든지, "바보 큰스님은 존체 잘 보존하십시오." 등등.
32. '무분별의 병통'
한 스님이 물었다.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려 선택하지만 말라고 했는데, 이것이 요즘 사람들의 병통(病痛) 아닙니까?“
조주선사가 말했다.
“이전에도 누가 나에게 물었으나 5년 동안을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유명한 3조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 나오는 첫구절입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다시 한번 풀이하면, 지극한 도(道), 즉 대오(大悟), 큰 깨달음은 별로 어려움이 없으니 다만 분별하여 선택하지만 않으면 된다. 곧 사량분별(思量分別), 알음알이(지식)으로 헤아려 구별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요즘 시대의 큰 병이라는 말은 그 당시 공부하는 자들 중에서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오직 사량분별만 하지 말라고 했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지’ 하고는 억지 선정 속에만 깊이 들어가서 바보 같은 무기(無記)에 빠져, 암흑의 소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게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되면 깨닫는게 아니라 진짜 바보같이 아무 기억도 하지 못하고, 무슨 말을 들어도 마음이 작동치 못하여 전혀 반응을 나타낼 수 없게 되는 모양입니다.
텅 빈 마음속에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무궁한 지혜를 활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깨달음인데 텅 빈 마음만 가지게 되는 셈이죠. 이것은 참선으로 병을 낫게 하려다 도리어 병이 더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질문에 조주선사는 '이전에도 누가 물었는데, 지난 5년 동안 아무 대답을 못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오직 가려 선택하지만 말라‘는 승찬대사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으며, 그 뜻을 정확히 알아채는 사람 또한 얼마나 되겠습니까? 잘 아는 사람끼리도 말 한 마디 실수하면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데, 아직 눈도 뜨지 못한 학생을 가르칠 때는 너무 감당키 어려운 말씀은 당분간 하지 않는게 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주의 이 말은 뜻이 다른데 있습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분별하지 않는 일이냐고 물어서 이에 대답을 하면 왜 분별하느냐고 반박을 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문을 알아 듣는 자체가 분별하는 것이고, 말하는 것도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분별과 무분별에 대한 안목이 바로 서지 않으면 이런 억지성 견해만 늘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조주는 '지난 5년간 아무 대답을 못했다'는 대답으로 분별을 떠난 대답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의 참 뜻을 알아들어야 무위(無爲), 무념(無念)의 상태에서 분별없는 분별을 할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의 마음은 본래 이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발견만 하면 됩니다.
[출처] 조주록 강해 6(27~32)|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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