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5(20~26)

수선님 2019. 8. 25. 11:40

조주록 강해


원문출처


20. '손님, 주인을 떠나라!'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손님(客) 가운데 주인(賓中主)입니까?”

조주선사가 답했다.

“산승(山僧)은 각시에게 묻지 않는다.”

“무엇이 주인 가운데 손님(主中賓)입니까?”

“나에게는 장인어른이 없다.”

임제종의 문을 연 임제의현선사가 제자들에게 사빈주(四賓主, 4 종류의 손님과 주인)라는 것을 가르쳤는데, 선지식(선생)과 수행자(학생) 간의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의 정도를 가늠해 보는 방법을 말합니다.

깊이 깨달은 선생이 어리석은 학생을 알아내는 것을 주인이 손님을 알아본다 하여 주간객(主看客), 깨달은 선생이 깨달은 학생을 알아보는 것은 주인이 주인을 알아본다 하여 주간주(主看主), 선생도 학생도 깨닫지 못한 경우는 서로 손님 노릇 밖에 못한다 하여 객간객(客看客), 깨달은 학생이 선생의 어리석음을 알아보는 것은 손님이 주인을 알아본다 하여 객간주(客看主)라 합니다.

나중에 임제종의 맥(脈)을 이어 받은 풍혈연소선사는 이 사빈주를 주중주(主中主), 주중빈(主中賓), 빈중주(賓中主), 빈중빈(賓中賓)으로 표현하여 그 뜻을 풀이했는데, 위 차례 대로 선생이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 경우는 주중주,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만한 역량이 없는 경우는 주중빈, 학생의 경지가 선생 보다 뛰어난 경우는 빈중주, 선생도 학생도 어리석어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는 빈중빈이라 합니다.

위 문답에서 조주선사는 손님 가운데 주인, 즉 빈중주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나는 각시에게 묻지 않는다'고 답했고, 주인 가운데 손님, 즉 주중빈에 대해서는 '나는 장인어른이 없다' 라고 답했습니다.

학생의 경지가 선생을 능가하는 것은 '나는 여자 색시에게 묻지 않는다'는 것이란 말은 스스로 모든 지혜를 갖추고 있는 마음이 자유자재로 크게 작용(用)한다는 말입니다. 학생이 깨쳤든 말든 조주 자신은 상관치 않고 모든 것을 마음에 맡긴다는 소리죠.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만한 역량이 없는 것은 '나는 장인어른이 없다'는 것이란 말은 이것 저것 따질 마음조차 사라져서 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항상 텅 빈 무심(無心), 무념(無念)의 경지에 있어 아무데도 걸릴게 없는데, 손님 가운데 주인이든, 주인 가운데 손님이든 무슨 쓰잘데 없는 구분을 하느냐, 나는 그 어떤 분별심도 떠났느니라고 말하는듯 합니다. 주인(主), 손님(客)이란 양변을 떠나지 못하면 정녕 길을 잘못 든 것입니다.

조주선사는 진실로 머리를 써서 헤아려보거나 생각을 돌이켜 궁리하는 알음알이를 벗어나 평생토록 그저 물 흐르는 듯한 가르침만 펼치다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21. '마음은 영원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일체 법이 항상하다는(常住)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그 스님이 다시 물으려 하자 선사가 말했다.

“오늘은 대답 안하겠다.”

화엄경에서 '일체 법은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라고 했고, 반야심경에도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즉 '이 일체법의 공(空)한 모습은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일어나지만 자체 고유한 성품(性)이 없으므로 실제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이를 법공(法空), 또는 법무아(法無我)라고 합니다. 모든 법은 텅 비고, 자신이라고 할 그 자체가 없다는 소리죠.

이것은 모든 법이 연기설에 의해 인연으로 생겨나지만 역설적이게도 연기설, 인연이 되는 원인과 조건, 결과 등이 모두 그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어 허공처럼 텅 비고, 존재성이 없어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법이 생겨남이 없다(無生)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커피잔'을 예로 들어 봅니다. 분명히 현상적으로는 '커피잔 '이 우리 눈앞에 있으니 이 잔이 생겨나지(만들어지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그 본질을 살펴보면 흙, 유리, 기계, 공장, 기술자 등이 원인, 조건이 되어 결과물인 이 이 이루어졌으니 이 '커피잔' 자체는 제 성품이 없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 잔이 생겨나지 않았으니 또 없어질 리는 있겠습니까? 이것을 깨닫는 것을 무생법인(無生法印), 또는 무생(無生)을 깨쳤다고 하는데 불교에서 참으로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분별심이 완전히 없어져야 스스로 체득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커피잔은 생겨나지 않았다고 하면 눈앞에 보이는 이것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눈으로 보면 이 잔이 분명히 앞에 있지만 깨달음은 본질, 근원,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눈으로 보면, 이 잔은 꿈이요, 거품이요, 그림자, 환영인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넘어야할 큰 관문이 남았는데, 이것은 마음이 드러난(나툰) 것일 뿐입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라 합니다. 꿈, 그림자같은 이 잔(盞)도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미친 소리 듣기 싫어서 마음공부를 포기한다는 사람도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넘어서야 합니다.

빅뱅이론은 한 점이 대폭발하여 이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마음이 우주의 근원인데, 간단히 비유하여 우리 마음이 없으면 이 우주도, 커피잔도, 가족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람 마음이 없다면 그 무엇도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상인 이 우주, 커피잔, 모든 법은 마음이 만든 것이요, 마음이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 법, 우주가 마음 하나라는 말을 들어, 일심상주법계(一心常住法界), 즉 마음 하나만이 항상 머무는 법의 세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주선사는 왜, 일체 법이 항상하다는 의미는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자신은 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까? 여기서의 조상이란 누구를 지칭한 것일까요? 우리의 마음(佛性)은 우주가 형성되기 전부터 있었고, 미래에 우주가 사라진다 해도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므로 영원한 선조요, 동시에 후손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성품을 보지 못했으면 함부로 선조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 스님이 재차 물으려 하니 ‘너 같은 놈 하고 더 이상 말해본들 무슨 도리를 알겠느냐’는 의미인지 조주는 오늘은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내일은 대답할까요? 후후.

22. '잡된 마음을 쓰지 말라'

조주선사가 상당하여 말했다.

“형제들이여 오래 서 있지 말라. 일이 있으면 거론해 보고, 일이 없거든 자기 자리에 앉아 도리를 캐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노승이 행각하면서는 죽 먹고 밥 먹는 두 때만 잡된 마음을 썼을 뿐, 나머지 시간은 별달리 마음을 쓴 곳이 없었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면 출가란 매우 먼 이야기가 될 것이다.”

조주선사는 그 전에도 행각을 했었겠지만 스승인 남전대사가 입적한 후 20여년을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선지식들과 교분을 나누며 철저히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수행할 때에 하루 2 차례 밥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심(無心), 무념(無念)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니 한 생각(번뇌망상)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겠죠. 이 말은 또한 생각을 해도 생각에 생각이 없다는 말이니 그 무슨 번거로움이 있었겠습니까? 번뇌가 깨달음이요, 진리이니 웃으면서 맞이해야 합니다. 번뇌란 생겨남이 없으니 없어질 리도 없습니다.

이것이 출가의 큰 뜻이라는 말씀이니, 물어볼게 없으면 오직 육조혜능대사가 말한 대로 '어떤 한 물건이 있어 이렇게 왔는고?' 라고 한 그 '한 물건'이 무엇인지 깊이 참구하면 좋을 것입니다.

23. '절대 물러서지 말라'

한 스님이 물었다.

“만물 중에 무엇이 가장 견고합니까?”

조주선사가 말했다.

“욕을 하려거든 서로 주둥이가 맞닿을 정도로 하고, 침을 뱉으려거든 그대의 입에서 물이 튈 정도가 되어야 한다.”

‘만물 중에 가장 견고한 것이 무엇인가?’ 세상에서는 다이아몬드(금강석)이 그 어떤 물건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가장 견고한 보석이라고 합니다. 선(禪)의 세계에서는 금강(金剛)과 같은 마음(心)이라 하여 어떤 바깥 경계(유혹)에도 요지부동하여 굴복하지 않는, 수행자들의 꺾이지 않는 강한 마음을 금강심이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 마음입니다.

질문 속에 대답이 있다고 했듯이 이 스님도 어느 정도 경지에 들었든지, 아니면 어디서 얻어 듣고선 ‘마음은 만물 중에서 가장 견고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가장 견고한 것을 물었는데, 조주선사는 갑자기 “욕을 하려거든 서로 주둥이가 맞닿을 정도로 하고, 침을 뱉으려거든 그대의 입에서 물이 튈 정도로 해라.” 고 했으니 그 스님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만약 알았으면, 조주에게 절을 올리든지, ‘큰스님의 칭찬이 너무 지나칩니다.’ 정도로 대꾸하곤 옷깃을 털고 그냥 나와 버렸겠지만 알지 못했다면 정신이 얼떨떨하고 어리둥절해서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주선사는 역시 큰 선지식이라 오직 본분으로써 일을 처리하여 그 스님의 가슴에 칼을 박았는데, 위 말은 선(禪)을 깨달으려면 서로 입을 맞대어 욕을 하거나, 큰 소낙비를 퍼붓듯이 침을 세게 뱉을 정도로 물러서지 않는 용맹스러운 마음으로 노력에 노력을 더하라는 뜻이리라.

24. '한번 크게 깨달아 무학(無學)'

한 스님이 물었다.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승려 가운데는 그처럼 세금을 두 번 내는 백성은 없다.”

위 질문은 아침 저녁으로 무엇을 쉬지 않고 한다는 말인가요? 선(禪)을 수행하는 가람에서 쉬지 않고 하는 일이 무슨 다른 일이 있겠습니까? 참선뿐이겠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한 물건'이 무엇인지, 이뭐꼬? 이뭐꼬? 의심에 의심을 더 해 가면 결국 아침에 해가 솟아오르듯이 깨달음이 옵니다. 그러면 더 이상 할 일 없는, 공부할 필요가 없는 도인이 됩니다.

“승려 가운데는 그처럼 세금을 두 번 내는 백성은 없다.”

선사들의 무심(無心)에서 툭 튀어 나오는 말씀은 참으로 해석할 수도 없고 알음알이로 해석해서도 안 되지만, 조주선사의 이 대답도 그냥 입을 콱 다물게 만들어버립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아침, 저녁 쉬지 않고 참선하는 것과 승려들이 세금을 두 번 내지 않는 것의 상관관계를 그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1년에 두 번 세금을 내지만 그 당시 중국의 세금제도는 1년에 한 번만 곡물이나 비단 등 귀중한 물건으로 납부했겠죠. 그러나 참선과 세금 한 번 내는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정말 괴상한 대답이지만 한 말씀도 허투루 하지 않는 조주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면 궁극적인 무학(無學), 즉 배움이 끊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알아채려면 단번에 구경각에 올라서지 두번, 세번 질질 끌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하늘을 덮고 땅을 치받치는, 참으로 긴장된 순간이지만 ‘다만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없으면 툭 트여 명백하리라!’ 헐!

25. '마음을 밝히는 한마디'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한 마디(一句)입니까?”

조주선사가 말했다.

“만약 그 한 마디만 계속 붙들고 있으면 늙어버리고 말 것이다.”

선가(禪家)에서 삼구(三句), 말 세 마디란 말을 많이 쓰는데, 임제선사의 삼구로서 제 1구에 깨달으면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고, 제 2구에서 깨달으면 사람과 하늘의 스승이 될 것이며, 제 3구에서 깨달으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지식이 배우는 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푸는데 처음에 매우 높은 경지의 선어(禪語)를 던져 보고 깨닫지 못하면 다시 중간 경지의 질문을 하고,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다소 낮은 경지의 질문 순으로 가르치라는 말도 되겠지만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구분할게 없습니다.

‘제 1구(一句)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주선사는 ‘그 한 마디만 계속 붙들고 있다간 그대는 깨치기도 전에 그냥 늙어 죽을 것이다’ 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그 놈의 1구, 2구, 3구, 개가 닭을 잡으려고 하루 종일쫓아다녀 봤자 맨날 허탕만 치듯이 아무 쓸데없는 이야기에 신경 딱 끊으라는 말입니다. 조주는 평생 동안 그냥 물 흐르듯, 평소 사는 방식 그대로 도(道)를 사용하였지 다른 가르침의 방편을 전혀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냥 무심에서 우러나오는 그 마음뿐입니다.

26. '말과 상관없는 부처'

조주선사가 상당하여 대중에게 말했다.

“만약 한 평생 총림을 떠나지 않고서 5년, 10년이고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도 여러분을 벙어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는 부처님도 너희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노승의 목을 베어라.”

이 가르침에서는 묵언(默言) 수행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천 용화선원의 송담스님도 10년 동안 묵언수행을 하셨다고 하는데 조주선사도 상당한 기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선을 하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 인연, 저런 인연 부닥칠 때 대화를 기피할 수만은 없겠죠. 그러나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분별심(分別心)을 버려야 하는데, 고르고 가려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뒤처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수행자가 5년, 10년 말없이 수행할 수는 없겠지만 가급적 말은 삼가는게 좋습니다.

부처는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그냥 우리 자신 안에 있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목을 자르리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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