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작가여! 중생들 속으로 들어가라!'
조주선사가 다시 말했다.
“노승이 90년 전 마조대사 문하에서 80여 선지식을 만나보았는데, 모두가 솜씨좋은 작가들로서 나뭇가지와 넝쿨 위에 또 가지와 넝쿨을 만드는 지금 선지식들과는 달랐다. 이제 큰 성인께서 가신 지가 오래 되어 한 대(代), 한 대 지나면서 나날이 다르다.
남전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다른 것, 같은 것(異類) 가운데 행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대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요즈음 주둥이가 노란 어린 것들이 네거리에서 이러쿵저러쿵 법을 설하여 널리 밥을 얻어먹고 절을 받으려 하며, 300명, 500명이고 대중을 모아놓고는 ’나는 선지식이요, 너희는 학인이다‘고 하는구나.”
마조대사는 중국에서 선종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선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법을 이은 선지식(善知識)이 84명이라고 하는데 모두 크게 깨친 선사들입니다. 선지식이나 작가(作家)라는 말은 깨달은 선사, 조사, 거사, 큰스님들을 말합니다. 조주는 마조대사의 제자들은 아주 솜씨 좋은 종장들인데 비해, 요즘의 선지식들은 나뭇가지와 넝쿨 위에 또 다른 가지와 넝쿨을 만들듯이 해탈하기는커녕 견해에다 견해를 더 얹어 번뇌를 더 키우는 모양새라고 말합니다.
남전대사는 이류중행(異類中行) 즉, 다른 것, 같은 것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세속을 떠나지 말고 중생 속으로 들어가서 수행하고 제도하라는 의미나 인간과는 다른 종류, 즉 동물은 망상이 없으므로 이들 가운데서 도를 구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름과 같음이란 개념을 벗어난, 무분별한 마음에만 의지함 없이 의지하여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조주는 마조대사의 80여 후손들이 활약하던 상황을 돌이켜 보고, 남전대사의 깊은 뜻을 새삼 되새겨 보니 오늘날의 선지식들이라 하는 사람들은 너무 엉터리가 많아 도(道가) 매우 쇠퇴하였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저처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300, 500명 모아 놓고 법이라고 설하는걸 들어보니 가관이다 이 뜻이겠죠. 헐!
14. '청정한 가람의 터전'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청정한 가람(伽藍)입니까?”
“머리를 땋아 올린 소녀다.”
“그 가람에 어떤 사람이 삽니까?”
“머리 땋아 올린 소녀가 아이를 뱄구나.”
한 수행자가 맑고 깨끗한 가람(伽藍, 절), 즉 수행처(修行處)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마음 이외에 따로 다른 수행의 장소는 없습니다.
조주선사는 이 가람(근본 마음)을 '머리를 땋아 올린 소녀'라고 했습니다. 무심(無心) 중에서 나온 말이니 그 의미를 종잡기가 어려우나 이 말도 마음을 가리킨 것이고, 마음을 암호화한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어(禪語)는 코드(code)화된 마음의 언어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화두를 들 때에도 이 의미를 곰씹으면 마음이 한결 편안할 것입니다. 이 코드(code)를 풀면 끝납니다.
그러면 '머리를 땋아 올린 소녀'는 어떤 '마음'을 코드화한 것일까요? 본각(本覺)을 찾은 마음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이 말에 문득 스쳐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가람에 누가 삽니까?' 조주는 그 안에 사는 붓다를 상징적으로 '머리땋은 소녀가 아이를 밴' 것이라고 했습니다. 붓다는 온갖 지혜를 갖추고, 바른 법을 설하여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여 생사를 벗어나도록 구원합니다.
15. '큰 무가 나다'
한 스님이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남전대사를 친견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진주에는 큰 무가 난다.”
남전대사를 친히 보았다는 이 말은 붓다를 친견했다는 말과 비슷하게 남전대사에게서 확실히 도를 깨쳤다는 것을 에둘러서 말하는 것입니다. 남전대사도 붓다이니, 붓다를 친견했냐고 물었는데 조주선사는 엉뚱하게도 진주 지방에 큰 무가 많이 난다고 답했습니다.
무는 깍두기, 무국 등으로 우리나라에서 배추 다음으로 많이 먹는 채소입니다. 아마도 중국 진주 지역의 특산물이 무인데 큰 도인도 많이 나와서 이로써 비유했을 법한데 과연 그럴까요?
“진주에는 큰 무가 난다.”
이 말씀도 참선하는 수행자들 사이에 화두로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남전대사를 친견했느냐고 물었는데, 조주는 어째서 진주에는 큰 무가 난다고 했는가?’ 아무리 머리로 헤아려 봐도 쉽게 풀리지 않을 문제일 것입니다. 여러번 읽어 보고, 오직 마음으로 깊이 의심해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운문선사(864-949)가 지은 벽암록을 보면, 이 화두는 맛없는 말로써 사람의 입을 막아버리고, 우물쭈물 생각으로 분별하려 하다간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알아채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것과 맥을 같이 하는 공안의 한 예로서 구봉선사와 한 스님간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연수선사를 친견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앞산에 보리가 익었느냐?”
‘진주에는 큰 무가 난다’ ‘앞산에 보리가 익었느냐?’ 운문선사는 이 두 말씀을 들어, ‘두 개의 구멍없는 철주(鐵柱)가 너무나 같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콱 잡아채기 바랍니다. 사실은 이 둘 다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인데 말로써는 한 마디 꺼내자마자 벌써 틀려버린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처음부터 어긋나지 않을까요? ‘깨친다. 깨달았느냐? 무등산 속의 수박이 머리를 깨고 나오는구나.’
16. '내가 태어난 우주'
한 스님이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조주선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서쪽하고도 또 저 서쪽이지.
“조주스님은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물으니, “서쪽하고도 또 저 서쪽이지‘ 라고 했는데 그 곳은 어디입니까? 붓다는 본래 서방의 깨끗한 땅에서 태어난다고 하여 저 서쪽 인도를 가리킨 것일까요? 그러면 인도 사람이 되겠죠. 그런데 조주선사의 출신지는 본래 지금 중국 산동성에 있는 청주 임치(臨淄), 혹은 조주(曹州) 학향(鄕)이라고 하니, 조주(趙州) 관음원에서 보면 차라리 남쪽이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저기 서쪽 그 너머 서쪽’이라고 했을까요? 조주선사가 가리킨 ‘서쪽’은 서쪽이 아닙니다. 자성(自性)의 근원은 태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방향도 없고, 자취도 없고, 그러면서 온 우주에 두루하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뚱이는 부모님과의 인연으로 어머니의 태(胎)에 들어서 고향에서 태어나지만 자신의 성품은 어디서 생기고 어디로 감이 없습니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기원도 없는 때(無時)로부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데 태어난 곳을 이르라니, '저기 서쪽'이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주가 한 몸인데 또 어딘들 조주가 없는 곳이 있으랴!
17. '존재의 본질, 공(空)'
한 스님이 물었다.
“법에는 특별한 법이 없다는데 법이란 무엇입니까?”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바깥도 비고 안도 비고, 안팎이 다 비었다.”
경전의 가르침을 보면, 금강경 제7분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에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란 말이 나옵니다. 무유정법(無有定法), 즉 특별히 정해진 법이란 없고, 이름하여 무상정득각(無上正等覺), 최고의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해가 될지 모르겠는데 법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이름 지었을 뿐이란 말입니다. 산(山)은 산이 아니고 그 이름이 산일뿐이고, 물(水)은 물이 아니라 이름을 물이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스님이 금강경에서 빌려왔는지 모르지만, “법에는 특별한 법이 없다는데 법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조주선사는 “바깥도 비고 안도 비고, 안팎이 다 비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을 세상에 있는 물질로써 비유를 해 보면,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은 수소(H) 2개와 산소(O) 하나가 서로 인연으로 화합하여 H2O가 되어 물이라 부르고, 또한 수소 원자(H)는 하나의 원자핵과 하나의 전자가 인연화합하여 수소라 부르고,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인연화합하여 원자핵이라 하고, 양성자는 몇 개의 쿼크(quark)라는 초소립자(超素粒子)가 인연화합하여 양성자라 부를 뿐으로써 이 우주의 근원을 그 뿌리까지 캐 내려가 보면 궁극적으로 모든 만물의 본질은 텅 빈 것입니다.
현대 양자물리학에서는 최소의 물질 단위라는 초소립자(超素粒子) 쿼크(quark) 뿐만 아니라 양성자, 중성자, 전자 등도 입자(물질)도 아니고, 파장(에너지, 空)도 아니라는 점을 과학적으로 밝혀 냈습니다. 현재 과학기술로는 이 쿼크도 더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인지 알아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궁극이 마음입니다.
삼라만상의 본질이 모두 공(空)한 것이므로 그 텅 빔 속에는 몸과 정신 작용(色受想行識)도 없고, 빛깔, 소리, 향기, 맛, 닿음, 인식도 없고, 4제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없고, 아는 것도, 얻는 것도 없으니(無智無得) 그 밖에 무슨 특별한 법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조주는 만법이 모두 안이고, 밖이고, 중간이고 모두 텅 빈 것임을 밝혔습니다.
18. '마음, 법(法)의 본바탕'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님의 참다운 법신이란 무엇입니까?”
“다시 무엇을 의심하느냐?”
어느 스님이 붓다의 참 법신(法身)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법신을 대신하는 말로 경전상으로는 진여, 자성, 승의제(勝義際), 제일의(第一意) 등으로도 부르고, 선가(禪林)에서는 줄 없는 거문고, 콧구멍 없는 소, 그림자 없는 나무, 눈금 없는 자, 밝은 구슬, 여의주 등 그 이름도 수없이 많습니다.
여기서는 이 스님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청정법신을 멀리서 찾고 있으니 조주선사는 한심해서 '네가 부처인데 다시 무엇을 의심하느냐?' 라고 핀잔을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붓다임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면 더 이상의 깨달음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죠. 그러므로 마음으로 왜 내가 붓다라고 하는지 깊이 의심해 보십시오. 하다 보면 이 마음이 스스로 길을 찾아갑니다.
19. '마음, 옛과 현재의 표준'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마음자리 법문(心地法文)입니까?”
“고금(古今)의 표준이다.”
임제종의 문을 연 임제의현의 스승인 황벽대사가 쓴 전심법요(傳心法要)를 보면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만법이 이 마음을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므로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성품 위에다가 경계에 대한 알음알이를 굳이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음자리 법문(心地法門)은 한 말로 무심(無心)에서 나온 말씀이란 뜻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자성(自性), 근본 마음의 작용일 뿐이라서 수많은 이름이나 형상, 개념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니 돌아오는 곳도 마음이라,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합니다. 이 근본 마음자리는 ‘옛이나 현재(古今)의 표준’으로서 석가모니 출가 이전부터 이미 우주가 형성되기 전의 근원이요, 출발점입니다. 이를 불성(佛性)이라고도 합니다.
[출처] 조주록 강해 4(13~19)|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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