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9(39~46)

수선님 2019. 9. 8. 11:28

조주록 강해


원문출처


39. '고요한 선타바'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선타바(仙陀婆)입니까?”

“고요한 곳에 스바하!“

앞의 37 문답에서 왕이 선타바를 찾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물으니 조주선사는 “그대는 노승이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하느냐?” 고 했는데, 이번에 다른 스님이 비슷한 질문을 하니까 조주선사는 '정처살바하(靜處薩婆訶)'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선타바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했죠?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달린다'는 말과 같이 불심이 깊은 상근기는 무언(無言)의 가르침에도 당장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스승의 침묵 속에서 길을 찾는 셈이죠.

조주의 대답에서 '정처(靜處)'는 고요한 곳이란 뜻이고, '살바하(薩婆訶)'는 '스바하'란 진언(眞言, 주문)으로서 '~해 주소서' 등 기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요한 곳에 귀의하게 하소서' 정도의 뜻으로 해석됩니다. 결국 선타바란 말도 깨달음과 동의어로서, 모든 사량분별심이 끊어진, 고요하고 텅 빈 청정자성(마음)을 스스로 체득할 뿐입니다. 모든 인류가 청정자성을 체득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헐!

40. '법(法), 탁 트인 허공'

한 스님이 물었다.

“법(法)이며 법 아님(非法)이라 함은 무엇입니까?”

“동서남북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천지사방(上下四維)이다."

법(法)과 비법(非法)에 대해서 논한 글은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많이 나오지만 대표적으로 '능엄경'에서 석가모니가 설한 것을 예로 들어 봅니다.

'어느 왕이 부처님께 여쭈기를,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법도 버려야 할 것인데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 하셨습니다. 어째서 법과 비법(非法)을 버려야 하며, 또 법과 비법은 무엇을 가리킨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병은 깨어지는 것이므로 그 실체가 없는 것이오. 그런데 사람들은 병의 실체가 있는 줄로 압니다. 이와 같이 보는 법을 버리지 않으면 아니 되오. 안으로 자기 마음의 본성을 보면 밖으로 집착할 것이 없소. 이와 같은 바른 견해로 법을 보는 것이 곧 법을 버리는 것이오. 비법이라고 하는 것은 토끼뿔이라든지 석녀(石女)의 자식처럼 사실은 없는 것을 가리키오. 이처럼 집착할 것이 못 되기 때문에 버려야 합니다."

위 석가모니의 법문을 풀이해 보면, 제법무자성(諸法無自性), 즉 세상의 모든 법(사물, 존재, 현상을 총망라한 것)은 연기설에 의거하여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것으로, 그 본질을 살펴보면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이며, 텅 빈 것이므로 그 어떠한 모습도 없는 무상(無相)이며, 텅 비고 모습도 없으므로 무엇을 바란다는 게 있을 수 없어 전혀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석가는 법을 버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한편, 비법(非法)은 토끼뿔, 돌로 만든 여자의 자식처럼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며, 이 비법도 버려야 한다고 설했습니다. 달리 풀이하면, 산(山)이나 물(水)은 그 이름이 산, 물이지 그 본질은 텅 빈 것(법)이며, '돌호랑이가 새끼를 낳는다'는 말은 말로는 성립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비법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법도 비법도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법과 비법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조주선사는 '동서남북, 사방(四方)‘을 들고, 잘 모르겠다는 반응에 다시 ’상하사유(上下四維), 즉 아래, 위와 서북, 서남, 동북, 동남쪽을 합쳐 십 방위‘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아무 방향도 생각할 필요 없는 허공이란 얘기죠. 법도 비법(非法)이란 모두 버려야할 텅 빈 것이요,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41. '헛된 현묘함'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현 가운데 현(玄中玄) 입니까?”

“이 스님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나이가 일흔 너댓은 되었을 걸.”

앞에서도 물었죠? 현묘함 가운데 현묘함이 무엇이냐고? 7 가운데 7이고, 8 가운데 8이라는 답변에 그 스님인지 다른 스님인지 모르지만 아직도 갈팡질팡하여 세월이 흘렀는데도 집요하게 다시 묻는 것 같습니다. 조주도 이제는 선(禪)적인 답변을 유보하고, 헛되게 세월만 보내고 아직도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스님을 한심하다고 꾸짖는게 아닌가 합니다. ‘나이 일흔 너댓 될 때까지 현중현을 찾아 다니는가?”

42. '선타바를 찾을 때'

한 스님이 물었다.

“왕이 선타바를 찾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선사는 벌떡 일어나 몸을 숙이면서 차수(叉手)했다.

선타바(仙陀婆)에 대한 질문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여기선 조금 달리 해석하여 왕(王)을 마음의 왕(心王)으로 간주해 보면, 심왕이 선타바를 찾을 때란 자신의 성품을 보게 되는, 즉 견성성불하는 때를 말하는데, 이럴 경우 어떠합니까? 하고 물어본 셈이 됩니다. 결국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와 같은 뜻입니다.

조주선사는 벌떡 일어나서 몸을 숙이면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인사하는 흉내를 내었는데, 선사가 뜻하지 않게 움직이는 이 모습에 그냥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견문각지(見聞覺知) 그 어느 것에 도(道)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부처님! 견성성불 축하드립니다’ 헐!

43. '도(道)를 우습게 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어디 감히, 어디 감히!”

도(道)가 무엇인지? 물으니 '어디 감히'라! 싹수가 보이는지 반응을 점검해 보려는 것이겠죠. 그러면서 '어디 감히' 라고 말하는 이것이 바로 도(道)임을 알아채라는 소리입니다. ‘큰 스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44. '법(法)을 바로 집행하라!'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법(法)입니까?”

“칙칙 섭섭(敕敕攝攝)!”

“무엇이 법(法)입니까?”

선(禪)의 세계에서도 세상과 마찬가지로 법(法)을 집행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법은 왕이 말하는 법 또는 칙령(敕令)이나 국회에서 제정하는 법이 아니라, 선지식이 가르침을 펼칠 때 후배들을 노파심으로 최대한 간절히 일깨우는 방법이나, 다짜고짜 방망이로 때리거나 고함을 질러 얼이 빠지게 만듦으로써 번뜩 정신이 들게 하는, 이런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법을 쓴다고 합니다. 마조대사가 백장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질러 3일 동안 귀가 들리지 않았다는 고사(故事) 등이 대표적입니다.

한 스님이 법(法)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칙칙 섭섭 (敕敕攝攝)” 이라고 했는데, 이게 누군가는 무슨 못된 귀신을 쫓아낼때 쓰는 주문(呪文)이라고 하고, 어린애가 제 마음대로 내뱉는 소리라고도 할듯 한데 솔직히 중국말을 잘 몰라 해석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법(法)에 대해서는 정말로 세상에 법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물, 현상, 생각, 모습을 모두 법이라 합니다. 그러나 조주선사가 이런 뜻으로 대답할 리는 만무합니다.

선사들이 법을 쓰는 것을 거두기도 하고 놓기도 한다, 또는 빼앗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아니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선사의 법 씀(用)에 크게 죽었다가 다시 크게 살아나면 깨달음에서는 제일입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秒直入如來地)란 말이 있듯이 깨달음은 한 순간에 곧 바로 부처의 지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선사가 엉뚱한 수단을 써서 가르치더라도 바로 깨달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서 거두는 것은 법을 집행한다고 하여 황제의 명령인 칙(敕)을 쓰고, 놓는 것은 편안하게 감싸안는 것이니 섭(攝)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방망이로 때리거나 고함을 질러 혼을 빼놓는 것은 칙(敕)을 강력하게 집행하여 '칙칙(敕敕)', 육조혜능조사가 현각선사와 처음 만났을때, 현각이 “생사의 일이 크고, 덧없는 세월은 빨리 흘러갑니다.” 라고 하니, “어찌 생겨남 없음(無生)을 체득하여 빠름이 없는 것을 밝히지 않는가?” 라고 되물었고, 현각이 “체득하면 생겨남이 없고, 밝히면 본래 빠름이 없습니다.”고 답하니 육조가 그대로 인정하여 “그렇다. 그렇다.”고 한 것처럼 제자를 놓아주는 것을 '섭섭(攝攝)'이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해 봅니다. 둘을 합하면 '칙칙섭섭(敕敕攝攝)'이라, 제 마음 가는 대로 풀었는데 이치에 맞을까요? 틀릴까요? 한번 판가름 해주시기 바랍니다.

45. '찰나의 묘미'

한 스님이 물었다.

“조주에서 진부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3백리다.”

“진부에서 조주까지는 얼마나 됩니까?”

“거리가 없다.”

‘조주에서 진부까지는 3백리고, 진부에서 조주까지는 거리가 없다.’ 일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조주-진부간 실제 거리는 300리 정도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조주는 이 스님의 쓸데없는 질문에 처음에는 실지 거리로 답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진부에서 조주로 오는 데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물으니 이번에는 선(禪)적으로 일깨우는 답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이 스님도 실제로 보통내기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조주에서 진부까지의 거리를 물은 후에 되돌려서 진부에서 조주까지의 거리를 다시 물어보는 것이 예삿일입니까? 그 스님에게 뭔가 느낌이 오지 않았다면 이런 뒷 질문이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주선사는 당연히 말할 바로서 “거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진부에서 나, 조주에게 오는 길은 언하(言下)에 바로 깨치면 한 순간에 도달하니 공간적인 거리도 없고, 오는데 걸릴 시간도 없으니까 단박에 깨달으라는 소리입니다. 너와 나 모든 만물은 마음 하나로 일체(一體)인데 무슨 거리감이 있겠습니까? 이를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46. '현묘함에 매몰되어'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현 가운데 현(玄中玄)입니까?”

“현(玄)한 지가 얼마나 되느냐?”

“현(玄)한 지가 오래됩니다.”

“노승을 만났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 바보는 현(玄) 때문에 죽을 뻔했구나.”

앞에서 여러 번 현중현(玄中玄)에 대한 질문이 나왔는데, 이는 임제선사(?~867)가 말하기를, '대체로 불법을 거론할 때에는 모름지기 한 구절(一句)에 삼현(三玄)을 갖춰야 하고 일현(一玄)에 삼요(三要)를 갖춰야 한다.'고 한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삼현은 첫째, 체중현(體中玄)으로서 삼세(三世)가 한 생각(一念)일 뿐이라는 등 절대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 것이고, 둘째는 구중현(句中玄)으로서 언어로 표현되기는 하나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화두(話頭) 등이며, 셋째는 현중현(玄中玄)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질이라 말없이 앉아 있거나 수행인을 방망이로 치거나 고함을 지르는(喝) 것 등을 뜻합니다.

한자로 현(玄)이란 심오(深奧)한, 신묘(神妙)한 등의 뜻인데, 조주선사가 '현(玄)한 지 얼마나 되었지?'란 말로 비꼬듯이 '심오한 깨달음을 구하려고 얼마나 수행하였지?'라고 물었는데, '현(玄)하여 온 지 오래됩니다'고 하자마자 왜 방망이를 내려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노파심이 남아 '내가 아니라면 이 어리석은 스님은 평생 동안 심오함만 찾다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가 알아들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자신이 깨달은지 오래 되었다는 말은 깨달았다는 망상에 깊이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소리입니다. 텅 빈 그 불법에 무슨 깨달음이니, 심오함이니, 성스러움을 찾는단 말입니까? 조주에게는 '현(玄)'이니 '요(要)'니 쓸데없는 알음알이요, 분별망념을 일으키는 헛된 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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