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흔적 없는 가르침'
한 스님이 물었다.
“참다운 가르침은 자취가 없으니 스승과 제자가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누가 그대더러 와서 질문하라 시키더냐?”
“다른 사람이 시킨게 아닙니다.”
조주선사는 별안간 그 스님을 후려쳤다.
'참다운 가르침은 자취가 없음'은 석가모니가 49년 동안 법을 설했어도 한 법도 설한 바가 없으며, 깨우침을 주기 위한 한 마디 그 어디에도 아무 모습(相)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도대체 헤아려볼 수 없는 말씀이므로 머릿속 에 아무 모습도 그려지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조금 단적인 예를 들어, 암호화된 선어(禪語)의 하나로 '산호 가지마다 보배 달이 열렸다.' 또는 '긍정하고 승낙함이 온전치 못하다.' 라고 한다면, 깊은 바다속 땅바닥에서 자라는 산호의 가지 가지마다 보석 같은 달이 줄줄이 열린 모습이 머리로 그려집니까? 또한 긍정과 승낙이 온전치 못하다는 말에 무슨 토라도 달 수 있겠습니까? 깨치지 못하면 그 어떤 형상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까마득하게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에는 스승도 제자도 없습니다. 그냥 깨달음이 오지만 온 것도 아닙니다.
사실 물음 속에 이미 해답이 나와 있는 질문인데, 이 스님이 위와 같이 묻자 조주선사는 '그런 질문은 누구에게서 배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시킨 게 아닙니다.” 아무도 가르쳐 준 사람이 없고 스스로 하는 질문이라고 대답했는데 조주는 그 스님을 후려쳤습니다.
아니, 제대로 아주 훌륭한 질문을 던졌고, 남이 시킨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물은 것이라고 했는데 조주선사는 어째서 그에게 매를 가했을까요? 선사가 말귀를 잘못 알아들었거나 일부러 귀여운 아이 매 하나 더 준다고 때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깊이 의심해야 할 화두입니다.
그 스님은 질문의 뜻도 제대로 모른 채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어 가지고 선사에게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조주선사는 어디서 이것을 금방 알아챘습니까? 말따라 다녀서는 백전백패입니다. 더 이야기 하면 군더더기라 선(禪)의 참 모습을 알 도리가 없이 한 대 맞을 수밖에, 그런데 후려친 것은 그 흔적이 남는가? '그냥 고향의 봄일 뿐이구나.'
51. '무분별의 분별심'
한 스님이 물었다.
“이 일은 어떻게 밝혀야 합니까?”
“그대는 참 이상하구나.”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밝힐 수 있습니까?”
“그대가 밝히지 못하는 게 참 이상하다.”
“보림하면 됩니까?”
“보림하든 말든 스스로 알아서 해라.”
이 문답은 50번의 이야기와 계속 연결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상관 없습니다. '이 일'은 바로 '그 일'이고 '그 일'은 바로 '이 일' 뿐임을 이제는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마음일 뿐이고, 세상사 도(道) 아닌 것이 없고, 천하 만물 모두 부처라 했잖습니까? “이 일은 어떻게 밝혀야(辨) 합니까?”
그런데 이 스님은 선(禪)의 경지를 머리로 생각하고 헤아려서 판단하려 하니 '그대는 참 이상한 놈이구나!' 라고 조주의 질타를 받습니다. 질문 속의 변(辨)은 분별함을 뜻합니다. 하물며 앞, 뒤 분간도 못하면서(사량분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보림(保任)까지 하겠다고 하니 조주선사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에라 이놈아, 보림 하든 말든 니 스스로 알아서 해라!'.
여기서 의심드는 부분은 여러분 스스로 마음으로 깊이 의심해야만 합니다. 다 해설해서 가르쳐 준들 또 다른 문제가 나오면 말짱 도루묵으로 돌아갑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의심하지 않는 것이 병이다.'란 말은 마음공부의 철칙입니다.
52. '알음알이를 없애라'
한 스님이 물었다.
“알음알이(知解)가 없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지해(知解)란 알음알이라 하여 깨달음에 들기 전에 세상에서 서적, 불경전을 보거나 누군가에게 들어서 아는 모든 지식인데, 선사들은 이런 알음알이를 하나도 기억하지 말고 모조리 버리라고 합니다. 심지어 화두를 강조하는 간화선에서는 아예 경전이라곤 보지 말라고 수행자가 방안에 숨겨둔 책까지 모두 찾아서 태워버리기도 합니다. 기존 세속적인 관념이 남아 있어서는 절대로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예전에 법정스님도 몇 번인가 가지고 있던 책이란 책은 다 뺏긴 적이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알음알이가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조주선사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알고서 묻는 것이냐고 되묻는 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을 헷갈리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통달해서 그 뜻을 밝혀 알라는 의미로 하는 소리이니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스님이 이 말씀을 퍼뜩 알아채면 곧바로 눈을 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깨달으면 이전에 알았던 지식이 반드시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보고 견성을 하여 깨달으면 모든 것에 통달할 듯 생각되지만 실지 처음에는 그렇게 많이 알지를 못합니다. 마음은 허공과 같이 텅 비고 온갖 지혜를 갖추지만 소위 세상의 모든 지식, 교리까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닫고 난 후부터 실질적인 공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전에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경전의 내용이 얼음 녹듯이 술술 풀려버립니다. 물론 이전에 배워서 쌓아 두었던 알음알이도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깨닫기 전에 너무 경전을 읽고 외우는데 일생을 바치다가 나중에 깨달으면 그동안 들인 노력이 매우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옛날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선사는 모든 불경전을 다 섭렵하고도 부처의 뜻을 알 수 없었는데, 서산을 찾아뵙고서야 도(道)를 터득했으며, 덕산의 몽둥이로 유명한 중국의 덕산선감(780∼865)선사도 주금강(周金剛)으로 불릴 정도로 경전, 특히 금강경에 정통했지만 용담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에는 가지고 있던 경전을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어도 눈을 뜨지 못하면 봉사요, 귀머거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닫기 전에는 불교의 기초상식 정도만 아는데 그칠 정도로 경전을 공부하는 게 좋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모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깨달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으니 아예 아무것도 공부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깨닫고 나면 그 뒤부터는 전혀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선의 이치에 통달하고 나면 참 희한하게도 저절로 알고 익혀지니 불가사의하다 할 수 밖에 없습니다.
53. '말하지 않은(無言) 뜻'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선사가 선상에서 내려와 버리자 “바로 그것입니까?” 하니 선사가 말했다.
“나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는 선문답에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입니다. 달마대사가 그 먼 인도에서 단신으로 중국까지 건너와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선(禪), 불도(佛道)의 요체(要體)요, 핵심입니다. 그런데 달마가 중국으로 와서 가르친 것이 정말로 무엇입니까? 뭐 별거 아니죠! 마음 하나뿐입니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에서 마음을 전하고(以心傳心), 자기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라(見性成佛)' 이것이죠. 그래서 임제선사가 스승인 황벽에게서 방망이 60대를 맞고 눈을 뜨고 난 뒤에 한 말이 '황벽의 불법이 별거 아니구먼!' 하지 않았습니까?
한 스님이 달마의 깊은 뜻을 물었는데 조주선사는 설법하는 선상(禪床)에서 내려와 버렸습니다. 실제 이것이면 조사의 뜻을 다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님이 조사의 뜻이 그것이냐고 물었는데, 조주는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스님이 그 순간 바로 알아채고 조주선사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다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정답을 말해 놓고도 알지 못하는 그 노릇이 너무도 딱합니다. 가고 오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멈추고에 도(道) 아닌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조주의 움직임에 도(道)가 드러나 있습니다. 이를 알아내야 합니다. 찬찬히 살펴보면서 찾아보십시오. 여우가 눈물 흘리는 것은 정말로 슬퍼서가 아닙니다.
54. '마음을 없애라'
한 스님이 물었다.
“불법은 멀고먼데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그대는 앞사람이나 뒷사람이나 천하를 장악했다가도 죽을 때
가서는 자기 몫은 반 푼어치도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불법은 멀고먼데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깨닫기 위해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불법은 참으로 가까운데 이 스님은 멀고멀다고 하는군요.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깨닫는데 수천 년이 걸릴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조주선사의 대답은 중국의 5호 16국 시대든 수, 당시대든 누군가는 전국을 제패하여 왕권을 잡았지만은 그 어떤 왕이나 황제도 죽을 때는 지옥으로 돈 한 푼도 들고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시황이라도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갔지, 아방궁이나 수많은 토용을 만들어놓은 묘지 속에서도 자기가 가지고 간 것이 있습니까? 후손들을 위한 관광거리로 잘 활용되도록 한 측면은 있습니다.
불법을 위해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물었는데, 죽을 때는 반 푼도 들고 가지 못한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조주의 한 마디는 그야말로 쏜살같고, 사람의 입을 콱 다물게 만들어 버립니다. 위 질문과 대답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천하의 조주가 동문서답할 리는 만무합니다. 그럼 전혀 알 수 없는 것일까요?
한 순간 알아채야 합니다. 제왕들이 제아무리 많은 부귀와 권력을 잡았든지간에 죽을 때는 반 푼도 머리에 이고 갈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의식, 생각)을 쓰면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 어떻게 마음을 없앨 수 있습니까?
'마음을 없앤다.' 이 말이 참으로 어려운 것인데 이것을 잘 소화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마음이라고 하는 마음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근본이 되는 마음(本心, 본심)인데 이것을 그림에 비유하면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하얀 도화지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근본 마음(본심)이 스스로 작용하는 마음인데, 의식, 생각을 말합니다. 이것은 도화지 위에 색칠을 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도(道)란 이 첫번째 근본 마음(본심)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은 이 근본마음을 알지 못하고, 두번째 마음인 의식, 생각을 우리 마음이라고 여겨 매일 따지고 분별하는 이것에 끌려 다니며 온갖 희로애락을 다 겪는 것입니다. 이 둘째 마음, 즉 의식, 생각을 없애야 하는데, 없앤다고 해서 아예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육조조사의 말을 빌면, 마음이 없는 것(無念, 무념)이란 '생각에 생각이 없는 것'인데, 이것은 생각은 하되 그 어떤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어떻게 어떤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도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이 될 것인데, 이는 모든 생각(法, 법)이 본래 나지 않는 것(無生)임을 통달해야 합니다. 생각이 어떤 인연화합으로 일어나는듯 하지만 그 자체는 고유한 성품이 없어 텅 비고, 존재성이 없습니다. 생각이 텅 비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아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無生, 무생). 생겨난 것이 아니면 없어질 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없는 생각은 모두 헛된 꿈이요, 허깨비같은 모습임을 깊이 알아채어 생각을 해도 그 생각에 전혀 걸림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말로써 이해하기는 정말로 어렵고, 불법, 선, 도(道)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법(法)이기 때문에 우선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모든 법(法)은 무생(無生), 즉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말의 의미를 계속 참구하고 참구하여 철저히 파헤쳐 깨쳐야 합니다. 이 말이 몸과 마음, 뼈속까지 사무치게 스며들어야 의식, 생각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 열반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출처] 조주록 강해 11(50~54)|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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