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나는 누구인가?'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學人) 제 자신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가 보이느냐?”
“무엇이 제 자신입니까?” 어느 스님이 '제가 마음공부를 좀 하고 있는데 도대체 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큰 스님께서 저를 좀 밝혀 주십시오.' 하고 부탁한 꼴입니다. 학인이란 불도(佛道)를 닦고 수행하는 자를 말함인데, 자신의 참 모습(본래면목, 法身)이 원래 부처(깨달은 자)임을 깨닫는 것이 그 수행 목적 아니겠습니까?
붓다, 조사들이 모두 마음이 부처이고, 너의 본 모습은 벌써 깨달은 자임을 목이 터지게 외쳐도 전혀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도(道)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경전을 아무리 읽고 외어도 마음으로 체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먼저 깨달음을 굳게 믿고서 선사의 언구(言句)를 깊이 의심해야만 합니다. 정신이 한번 확 뒤집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크게 죽고 난 후 다시 크게 살라는 말이 도(道)의 기본원칙이라면 원칙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가 보이느냐?” 이것은 '앞마당의 잣나무'가 그대의 본래면목, 그대의 부처라는 뜻인데 이 말에 한번 꼴까닥 죽었다가 살아나야 합니다. 앞에 보이는 잣나무가 나의 참 모습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죠? 말로써 생각으로써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해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게 임제선사가 말하는 말귀 가운데의 현묘함(句中玄)이요 화두가 아니겠습니까? 이 강해를 읽으면서 머리를 쓰지 말고 오직 마음으로 계속 의심하십시오. '내 자신이 누구인지 물었는데, 조주는 왜 뜰 앞의 잣나무가 보이느냐고 했는고?' 라고.
48. '모래를 쪄서 밥을 짓지 말라'
조주선사가 상당하여 설하였다.
“오래도록 참선을 해 온 수행자라면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고금을 통달치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신참이라면 반드시 도리를 밝혀야 한다. 그대들은 이쪽의 3백, 5백 또는 천명의 대중을 쫓아가거나 저쪽의 비구, 비구니 대중을 쫓아가지 말라.
총림에 주지한다고 자칭하면서 막상 불법에 대해 물어보면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한마디 말도 할 줄 모른다. 그러면서 도리어 남은 틀리고 나는 옳다고 하며, 얼굴이 벌게져서 다툼을 일삼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법답지 못한 말들을 내놓게 한다. 진실로 이 뜻을 밝히고자 한다면 노승을 저버리지 말라.”
오랫동안 참선한 사람이라면 일심(一心)에 매우 가까이 다가선 수행자일 것입니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은 만물의 실상(實相)이 공(空)함을 체험하여 이치적으로나 현상적으로나 아무 얽매임이 없다는 것이며, 이 우주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갓 선문(禪門)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도(道)의 본질은 언어를 초월하고, 모든 법은 텅 빈(空) 도리를 참선을 통해 깨달아야 하겠죠. 이는 스스로 깊이 의심하여 체득하는 것이지, 대중 스님들이나 조사, 선사를 쫓아다녀서는 평생 헛고생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조사, 선사가 뭘 압니까? 불식(不識)이고 무지(無知)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입니다. 깨달음은 얻을(得) 바도 없고, 깨우칠 바도 없고, 가르쳐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모든 걸 가르쳐줄 테니 나에게 물어봐라 하는 선사에게 의지한다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지어본들 먹을 수 없는 것처럼 결코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소위 선원(禪院)의 큰 스님이라고 하는 양반들이 차별, 분별심을 벗어나지 못한 채, 선문답을 해보면 제대로 말도 한 마디 못하면서 '너는 나의 법을 이었으니 나를 봉양해야 한다', '저쪽의 선사는 틀렸으니 거들떠도 보지 말라'는 등 다툼만 일삼는 족속들도 꽤 많았던 모양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이런 사이비 스님들은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불법(不法)이 판을 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뜻을 밝히고자 한다면 노승을 저버리지 말라.“ 조주 자신은 마음의 근원(本來心)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의 작용만 펼칠 뿐이니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분별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오직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말에 끌려가지 말고, 옳고 그름의 분별심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불법(佛法)의 참 뜻을 알게 된다 이 말입니다.
49. '옷을 스스로 걸쳐라!'
한 스님이 물었다.
“이렇게 세속에 있으면서 여러 성자들을 위하여 설법함은 모두 옷을 걸쳐주는 따위의 일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그대는 어느 곳에서 나를 보느냐?”
“스님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법당 안의 모든 스님들이 이 스님의 말을 모른다.”
다른 한 스님이 말했다.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가 말해라. 나는 들으리라.”
‘이렇게 세속에 있으면서 여러 성자들을 위하여 설법함은 모두 옷을 걸쳐주는 따위의 일입니다’는 말은 여래가 이 세상에 머물면서 만나는 수행자들마다 ‘모두 옷을 걸쳐 준다’, 즉 그들의 기본 바탕에 맞추어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와주나 옷을 입는 것, 즉 깨닫는 것은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질문을 할 정도가 되면 수행이 어느 정도 깊은 경지에 들어간 스님이었을 것입니다.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란 질문에 '그대는 어느 곳에서 나를 보느냐?' 라고 되물었습니다. 나의 깨달음의 경지와 가르침을 묻고 있는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마찬가지의 말입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스님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라고 했는데, 조주선사의 말에 끌려가지 않는 모습이 매우 용하니 '저는 여기 이대로 있으니 큰 스님께서 달리 보시는 바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라는 소리 정도 됩니다. 청정자성에서 반사적으로 우러나는 반야지혜의 작용이 빼어난 축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조주는 그 스님의 경지를 알아보고는 법당 안의 대중들에게 말합니다. “법당 안의 모든 스님들이 이 스님의 말을 모른다.” 이것은 '그대들은 저 스님이 분별심에 빠지지 않고 선(禪)의 큰 뜻을 밝힌 것을 알고 있는가? 아는 사람은 말해보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한 다른 스님이 선사에게 좀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조주는 '그대의 본래면목은 그대 스스로 밝히는 것이니라.' 하고 바톤을 넘깁니다. '그대가 말하면 나는 들으리라!'
[출처] 조주록 강해 10(47~49)|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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