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12(55~61)

수선님 2019. 9. 22. 11:22

조주록 강해


원문출처


55. '우선 입을 다물라'

한 스님이 물었다.

“세상 사람들은 보배를 귀하게 여기지만 사문 (沙門)은 무엇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까?”

“그 입을 다물어라.”

“입을 다물기만 하면 됩니까?”

“입을 다물지 않으면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느냐?”

사문(沙門)은 불문(佛門)에 들어와 도를 닦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 특히 여성들은 금, 은, 다이아몬드 등 각종 구하기 어려운 보물들을 제일 좋아하죠. 그렇지만 ‘선(禪)을 수행하는,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제일 귀하게 여겨야 하겠습니까?’

어느 스님의 이 질문에 조주선사는 "빨리 그 입 다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도(道)를 닦는 자들이 수행하는데 있어 마음에 깊이 담아두어야 할 요체(要體), 즉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조주는 왜 '입 닥쳐라'고 말했을까요? 선사의 법어는 한 치도 허투루 말하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선(禪)의 가르침의 철칙은 달마대사 이래로 직지인심(直指人心), 불립문자(不立文字) 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는' 것이지 절대로 문자(文字), 즉 글이나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 하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알기 위해서는 물을 직접 마셔 보아야지 쳐다만 보다가는 물속에서 목말라 죽는 놈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선사들은 말로나 글로서는 이 마음을 정확하게 전하기 어려워 말 없는 행동으로 그 뜻을 나타내거나, 격외구(格外句), 즉 선(禪)에서 어려운 말로 언어 이전의 소식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가르침을 펴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주가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라고 말한 뜻은 '말에 이끌려 생각하지 말고 언어 이전의 소식을 즉시 알아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청정법신(自性)은 원래 말 있음도 아니고, 말 없음도 아닌 무상(無相) 여래이다' 라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10년 동안 묵언수행(默言修行) 했다는 말이 있듯이 자성을 깨치는 데에는 자신의 내부를 바라볼 것이지 언어에서 찾으려 하면 쓸데없이 바깥에서 구하려고 하는 꼴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 말에서 즉시 알아채야 할 점은 이 언어 이전의 소식, 즉 근본 마음은 입을 열기만 하면 그것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는 말로써, 생각으로는 미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모든 말, 생각을 끊고 돌이켜 비추어 봐야 합니다. 또 아무리 볼려고 해도 보이진 않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이 강해를 읽는 사람만 들어볼 수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누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다리가 움직이고, 두 팔이 앞뒤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의 흔들리는 다리, 팔을 바라봅니다. 무엇으로 봅니까? 눈으로 본다고 하겠죠. 그러나 그 사람을 보는 성품은 눈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입니다. 아직 믿지 못하더라도 그 흔들리는 팔, 다리를 보는 당신의 성품에 전혀 움직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못느끼면 이것을 또 느껴야 합니다. 보고 있는 가운데 내면을 돌이켜보아 고요한, 움직이지 않는 그 무엇이 없는지 살펴 보십시오.

길을 다니면서 이 실험을 계속 해 보십시오. 앞사람의 흔들리는 모습이 그대로 여러분의 마음에 비추어질 것입니다. 아니, 지금 당장 컴퓨터 커서(cursor)가 깜박거리는 것을 보십시오. 바라보는 커서는 깜박깜박 움직이지만 바라보는 당신의 성품은 아무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 흔들림 없는 성품이 여러분의 근본 마음입니다. 그곳에 무슨 말이나 생각이 미칠 수 있습니까? 본래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마음입니다.

​ 위 문답에서 '입 다물라'고 하니까 그 중은 '입만 다물면 됩니까?' 라고 되물었는데, 입만 다물어서야 무슨 수행이 되겠습니까? 그래도 조주는 할 수 없이 일단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어떻게 깨닫겠느냐는 의미로 '입을 다물지 않으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대답합니다. 말을 할 필요도 없고, 스승의 가르침의 뜻을 돌이켜 보아 스스로 체득해야 합니다. 그래봤자 얻을 것이란 없는 것이 도입니다.

56. '한 마디가 뭐라고'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주의 한 마디(一句)입니까?”

“반 마디(半句)도 없다.”

“큰스님께서 거기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한 마디(一句)가 아니다.”

선(禪)에서의 일구(一句), 즉 한 구절 또는 한 마디는 불법의 가장 핵심적인 뜻을 말 한마디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조주의 한 마디' 라면 조주선사 문하(門下)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풍(家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한 마디가 무엇인지 물으니 조주는 자기에게는 ‘반 마디(半句)도 없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선종이 발달하면서 여러 종파로 나눠지고 선사들 간에 유행하듯이 무슨 일구(一句), 3구(三句) 등이 남발되는데, 조주는 그런 데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데 무슨 정해진 한 마디가 있겠느냐는 그런 의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스님은 다시 말하길, '큰스님께서 거기 계시니 핵심되는 한 마디 해주십시오.' 라고 재촉하니, '난 한 마디가 아니야!' 하고 물리쳤습니다. 이게 또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퍼뜩 깨닫는 자도 옛날에는 더러 나왔을 것입니다. '난 반 마디도 없고, 한 마디도 아니다' 계속 의심해 나가야 할 격외구입니다만 우리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이 자리는 반 마디, 한 마디도 없고, 그러면서 세 푼짜리요, 100척 길이도 되는 신비스러운 곳입니다.

57. '경계란 원래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만 온갖 경계에 현혹되지 않습니까?”

조주선사가 한쪽 발을 내려뜨리자 그 스님이 얼른 신발을 내밀었다.

선사가 발을 거두고 일어서자 그 스님은 말이 없었다.

불교, 특히 선(禪)에서의 경계(境界)란 주관인 참된 나(眞我)와 대칭되는 주변의 모든 객관의 세계를 말합니다. 자신의 참 모습 외에 하늘, 땅, 나무 등의 자연, 바루, 의복, 불상 등의 사물, 경전의 가르침 등의 불법, 마음속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까지 포함하여 매우 폭넓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모든 수행자들은 이러한 경계에 무애자재(無碍自在)하여,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경지를 누리는 것이 도를 닦는 궁극적인 목적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님은 조주선사에게 '주변의 수많은 경계에 현혹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초월하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주선사는 앉아 있다가 즉시 한쪽 발을 내려뜨렸습니다. 그 스님이 현혹되지 않으려는 그 경계를 바로 나타내 보인 것이죠. 그러면 깨친 사람 같으면 조주의 발을 그냥 걷어차거나, 이게 조금 심하다 싶으면 손으로 쓰다듬어라도 줬을 텐데, 이 어리석은 스님은 경계에 이끌려 조주선사가 어디로 나서려고 한다 생각하곤 신발을 내놓았습니다. 경계에 정신 팔리지 않으려는 수행자가 곧 바로 덫에 걸려든 셈입니다. 이처럼 입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경계에 끄달리지 않겠다고 아무리 마음을 굳건히 먹어도 분명히 깨닫지 못하면 경계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원래 경계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은 모두 마음의 거짓된 작용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확실히 알면 어떤 경계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조주선사는 바로 경계에 이끌려온 그 스님을 바라보면서 그 발을 다시 거두어 버렸습니다. 시험해 본 그 목적은 이미 달성한 셈입니다. 이것을 깊이 의심해 봐서 바로 깨달아 버리면 스승과 제자가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스님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애재라! 그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억!

58. '중생은 본래 부처'

어떤 세속의 한 관리가 물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만 부처님이 멸도하신 다음에는 일체 중생이 어디에 귀의합니까?”

“중생이란 있은 적이 없다.”

“지금 묻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무슨 부처를 찾을라고.”

석가모니가 세상에 태어나 불법을 설하고 가르침을 펼칠 때에는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에게 의지하여 나아갈 바를 깨달았지만 열반 해탈하여 세상을 떠난 지금 이 시절에는 무엇에 의지하여 수행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주선사는 “중생이란 있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는데, 이는 '언제 중생이 있은 적이 있느냐?' 라고 되묻는 셈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깨닫지 못한 인간, 축생 등 3계(界)의 모든 중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그 관리는 ‘지금 여쭙고 있는 제가 바로 중생임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조주선사는 이상한 대답으로 “다시 무슨 부처를 찾을라고”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찾을 부처가 또 있는가?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다가옵니까?

우리 모두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중생이란 있어 본 적이 없다'고 하고, ‘제가 중생이 아니면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부처를 달리 또 찾는가?' 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 너무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채야 우리 모두 본래 붓다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관리는 자신이 붓다임을 모르니까, 조주는 당신이 붓다인데 다시 무슨 부처를 찾으려고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로서는 중생은 '깨달을 자, must-be' 이고, 부처는 '깨달은 자' 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미 다 갖추고 있는데 아직 찾는 방법을 몰라서 못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그 '너 자신'도 알고, 부처도 되찾는 방법으로 이 강설을 깊이 의심하고, 화두도 부지런히 들으란 소리입니다. 거저 흥밋거리로 읽어봐야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59. '참된 보은(報恩)'

한 스님이 물었다.

“4은 3유(四恩三有)에 보답하지 않는 자도 있습니까?”

“있다.”

“어떤 자입니까?”

“이 아비를 죽인 놈아! 가만 보니 너는 다만 이 한 물음만 모자랐더냐?”

사은(四恩), 네 가지 은혜란 사람이 태어나서 받는 부모의 은혜, 선생의 은혜, 국왕의 은혜, 시주의 은혜를 들기도 하고,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 국왕의 은혜, 삼보(三寶, 불, 법, 승)의 은혜를 들기도 합니다. 삼유(三有)란 경전에 나오는 중생의 3가지 생존 양상으로서, 탐욕이 들끓는 욕계(欲界)의 생존인 욕유(欲有), 탐욕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형상(形相)에 얽매여 있는 색계의 생존인 색유(色有), 형상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무색계의 생존인 무색유(無色有)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번뇌망상인 탐진치(貪瞋癡) 3독, 즉 탐욕과 성냄(瞋), 어리석음(癡)을 벗어나 맑고 깨끗한 자성을 되찾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위 질문은 '사람이 태어나서 이러한 4가지 은혜를 입고, 열심히 마음공부 하여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끊고 모든 경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서도 그 은혜를 잊고 보답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라고 물은 셈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조주선사는 '그런 자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선사의 이 대답에 만약 그 스님이 '제가 그런 자입니다.' 라고 했다면 조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나도 그렇다네' 하고 인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시 '어떤 자입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선사는 '이 애비를 죽인 놈아! 네게 부족한 것이 이 한 질문 밖에 없냐?' 고 호통을 쳤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옛 부처라는 애칭을 얻은 조주도 공적인 면(法)에 있어서는 바늘 하나 꽂을 데가 없습니다. 후배들이 깨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는 피도 눈물도 없이 혹독하다는 말이지요.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그 업(業)에 따라 6도를 윤회하기 때문에 인간, 축생의 세계 등에서 서로 원수가 되어 만났다가 다시 부모 형제가 되기도 하고, 다시 원수 관계가 되기도 하는 등 서로 거미줄 같이 얽혀서 삶을 이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 생에서 자기 부모를 죽인 중생이 또 한 생에서는 그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서로 형제자매, 친척관계로서 어느 누구도 해쳐서는 안 될 한 가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조주선사는 너 같은 놈은 어리석어 과거 애비를 죽인 것도 모르고, 부족한 것이 부지기수로 많은데 그따위 질문만 하다가는 어느 세월에 깨치겠느냐고 꾸짖고 있습니다. 조사의 이 한 소리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바로 깨친 후 부모, 형제, 나아가 전 인류를 눈뜨게 해야 궁극적으로 4은 3유(四恩三有)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인류가 살아가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60. '베풀 것이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큰 스님의 뜻입니까?”

“아무 것도 베풀게 없다(無施設處)."

'큰스님의 뜻'은 위 문답에서의 '조주의 한 마디'와 같은 말로서 조주선사가 머무는 관음원의 가풍(家風)은 무엇이냐고 물은 셈입니다. 조주는 '(내게는) 시설할 곳이란 없네(無施設處)' 라고 대답했습니다. 불교에서 시설(施設)이란 불법을 가르치는 것, 또는 그 방법, 수단 등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설할 곳도 없다'는 말은 나는 특별히 법을 가르치는 방법이나 수단이란 걸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가르칠 대상도, 법도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공부에 대해 물어 오면 그저 일상생활의 범주 내에서 적절히 대응해 주는 게 조주의 독특한 가풍입니다. 다른 조사들과는 매우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는 게 선이요, 불법이지만 조주선사는 베품 없이 모든 것을 베풀고 있습니다.

61. '마음공부 하지 않으면'

조주선사가 상당하여 설했다.

“형제들이여! 다만 과거를 뉘우치고 미래를 위하여 닦으면 된다.

만약 뉘우치지 않으면 그대들이 갈 곳이 마련되어 있다.“

조주가 상당하여 가르침을 펼칩니다. 여기서 상당(上堂)이란 선원에서 방장, 또는 조실이란 이름의 선사가 월 1회씩이든 정기적으로, 또한 동,하안거 결제나 해제시 법당의 강단에 올라가 공식적으로 설법하는 법문을 말합니다. 교회로 보면 매주 일요일 목사가 설교하는 자리를 말하는 것이죠.

위 조주선사의 말씀은 이미 지나간 과거 생의 삶, 그 업(業)을 참회하고, 미래의 대열반해탈을 위하여 현생의 어리석은 무명(無明)의 번뇌망상을 결연히 뿌리치고, 묵묵히 도(道)를 닦아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사들의 말에 쉽사리 걸려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의 청정법신 속에서 이치를 궁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의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스스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법문을 읽고 들으면서 경절문(徑截門, 화두 등)을 통과해야 합니다. 항상 선사의 말 한 마디를 의심해야 한다는 말이죠.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하지만 한번 크게 머리가 뒤집어져야 합니다. 모든 깨달은 자는 그렇게 해서 진리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경전의 말을 열심히 경전을 읽고 이해해 본들 물을 직접 마셔보는 게 아닙니다. 물빛만 쳐다보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뉘우치고 수행하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만약 뉘우치지 않으면 그대들이 갈 곳이 마련되어 있다’ 조주는 이처럼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씀했는데 아마도 좋은 곳은 아닐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스스로 그려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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