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선악 가운데 있다'
한 스님이 물었다.
“선악(善惡)에 혹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우뚝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뚝 벗어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벗어나지 못합니까?”
“바로 선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지.”
한 스님이 선(善)과 악(惡)에 혹(惑)하지 않는다면, 달리 말해서 좋은 것이라고 해서 좋아하지도 않고, 나쁜 것이라고 싫어나지도 않는, 선악에 흔들리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홀로 해탈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옛날에 육조혜능 조사를 해치려고 쫓아온 도명선사에게 육조(六祖)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자리에서 그대의 본래면목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말하자 도명이 곧바로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선악에 대하여 차별하지도 않고, 선악을 뛰어넘을 수 있으면 깨달아 해탈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조주선사는 이 질문에 대하여 해탈하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스님은 분명히 선악이든, 싫어하고 좋아하든(憎愛), 괴롭거나(苦) 즐겁든(樂), 상대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고 사량 분별하지 않는다면 큰 도(大道)를 이룬다고 들었는데, 선사가 해탈열반에 이르지 못한다고 가르치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겠죠. 신심명에 분명히 '지극한 도(道)는 어려움이 없으니 선택하고 분별하지만 말라. 다만 (차별해서) 싫어하든지 좋아하지만 않으면 확실히 도에 통하리라.' 고 했거든요. 왜 못하냐고 앙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사의 대답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선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지.” 아니, 선악이란 개념에 혹하지 않는, 즉 선악에 홀려 흔들리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린 사람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선악 가운데에 있다니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조주의 이 말은 '선악에 혹하지 않는 사람은 선악 가운데에 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헤아려야 합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선악에 혹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말은 그렇지만 아직 선악이란 모습(相)에 머물러 있다는 말씀입니다. 선악에 혹하지 않는다는 그 생각 조차 마음속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선악을 초월한다는 것이 '아, 그래. 나는 선악에 신경쓰지 않는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거야, 이 선악 뿌리쳐야지!' 하고 생각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물론 선악을 초월하겠다는 굳은 결심은 해야 되겠죠.
그렇지만 도를 이루는 것은 아예 선악, 깨달음, 해탈이라는 개념조차 마음속에서 사라질 때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 마디 말(言句)을 계속해서 붙들고 오직 마음으로 의심해야 합니다.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66. '불타 깨진 쇠물병'
한 비구니가 말했다.
“이제껏 내려왔던 말씀 말고 한 마디 가르쳐 주십시오.“
조주선사가 “이 불에 타 깨진 쇠물병아!” 하고 호통을 치자 그 비구니는 “쇠물병에 물을 담아 와서 대답해 주십시오.” 하고는 다시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조주선사는 “껄껄” 웃었다.
이번에는 걸출한 한 여승이 등장했습니다. 조주선사에게 대뜸 “이제껏 내려왔던 말씀 말고 한 마디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부터 달마, 육조혜능, 마조도일 등 역대 부처와 조사들이 남기신, 이심전심으로 전해온 말씀 말고 조주선사 자신의 색다른 한 마디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조주가 수행자들에게 가르친 조주의 가풍을 포함해서 말이겠죠.
조주가 생각하는 불법, 선(禪), 도(道), 부처, 깨달음(覺)의 최대 핵심은 무엇인지, 모든 부처가 나온 바로 그 곳이 어디인지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조주선사는 이렇게 묻는 비구니가 괘씸하다고 생각했는지 '이 불타 깨진 쇠물병아!'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조주는 그 여승의 말이 아니꼬워서 질책조로 ‘불타 깨진 쇠물병’이라고 불렀겠습니까? 혹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 본래 뜻은 그 비구니도 자체 부처이니, 바로 부처는 불타 깨진 쇠물병이라고 정의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운문선사에게 부처가 무엇인지 물으니 '마른 똥막대기다' 라고 대답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는 일견 '불에 타 다깨진 물병' 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과 '깨진 물병', '마른 똥막대기'와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개념에 있어 도교의 물아일체(物我一體)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주는 왜 부처는 불타 깨진 물병이라고 했는가?' 라고 계속 의심하여 자신이 깨진 물병이 되어야 합니다. 깨닫는 방법은 이것을 알아채는 수 밖에 없습니다.
'불타 깨진 물병'이라는 소리에 그 여승은 대담하게 "깨진 물병에 물을 담아 와서 대답해 달라"고 했습니다. "빨리 말해달라" 고 재촉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이 정도 되면 조주선사도 '허허!' 웃을 수밖에 없겠죠. 조사의 한 마디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의 참 모습을 제대로 나타내는 수행인은 거의 처음 만난 것 같습니다. 비구니지만 지음(知音)을 만난 기쁨에 '차 한잔 해라' 라고 따뜻이 권했을 것입니다.
67. '점치지 않는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세계가 변하여 검은 구멍(黑穴)이 된다는데 그럴 때 이 몸은 어느 길로 떨어집니까?”
“점치지 않는다.”
“점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촌놈아!”
'세계가 변하여 검은 구멍(黑穴)이 된다‘ 이 말의 출처를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아마 교(敎)에서 바라보는 우주의 소멸시기인 괴겁(壞劫)과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불교의 우주론은 이 우주도 주기적으로 생겼다가 없어진다고 봅니다. 우주가 생성되고(成劫), 안주하고(住劫), 소멸되고(壞劫), 텅 비게 되는(空劫) 과정을 1주기로 보는데 시간적으로는 약 128억년만에 생멸(生滅)하며, 우주가 멸망해 가는 괴겁(壞劫)에는 이 세계가 모두 불타 없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세계는 불타 없어지고 텅 빈 허공, 캄캄한 공허만 남게 된다는 말이지요.
위 질문에서 흑혈(黑穴)이란 검은 구멍 또는 캄캄한 굴, 영어로는 블랙홀(Black Hole)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현 시대라면 한 행성이 없어질 때는 중력의 힘이 엄청난 블랙홀로 떨어져 사라진다고 하는 말과 유사한 표현이라고 느껴집니다. 이처럼 정말로 지구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날이 올지 조금 두려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스님은 어디로 떨어질지 걱정하고 있네요. '나는 어느 길로 떨어집니까?'
조주선사는 세계가 변해 블랙홀이 될지 아닐지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라는 뜻으로 '나는 점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선(禪)의 세계에서는 깨달음을 통해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지 검정되지 않은 가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습니다. 물론 신통력을 갖춘 선사들 중에는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豫知力)도 있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이를 노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점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큰 스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인데 모를 리가 있습니까? 저를 놀리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점치지 않는 자라고 말하는 큰 스님이 바로 제 앞에 있지 않습니까? 라고 재촉하는 듯한데, ‘점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어볼 정도면 보통내기 스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주선사의 '이 촌놈아!' 라는 말로 이 책에서의 선문답은 끝나버렸는데 그 뒤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점치지 않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는 관견이기도 합니다. 그냥 조주선사가 점치지 않는다고 했으니 조주이지 누구냐? 라고 해선 안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점치지 않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68. '모양 없는(無相) 깨달음'
한 스님이 물었다.
“말도 없고 뜻도 없어야(無言無意) 비로소 한마디(句)를 얻었다고 하겠지만 이미 말이 없는데(無言) 무엇을 가지고 한마디라 합니까?”
“높아도 위태롭지 않고, 가득 차도 넘치지 않는다.”
“지금 큰스님께서는 가득합니까? 넘칩니까?”
“그대가 내게 물으니 어찌하겠는가?”
"말 있음(有言)으로도 묻지 않고, 말 없음(無言)으로도 묻지 않겠습니다." 어느 외도(外道: 불법외의 것을 공부하는 자)가 석가모니에게 질문한 내용입니다. 석가가 한참 말없이 잠자코 있자, 외도는 찬탄하며 말합니다. "세존께서 대자대비로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시고, 저에게 깨달음을 체득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말도 없고, 뜻도 없음으로 한 마디(一句)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을 앞세우고 뜻을 드러내어 보아야 깨달음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한 마디는 말 있고 없음도, 뜻이 있고 없음도 뛰어넘어야 얻습니다.
이 스님의 질문은 "말도 뜻도 없어야 한 마디를 얻는다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말 없는 한마디 라는 게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본 것입니다. '말 없는 한 마디' 이 말도 알쏭달쏭하죠. 말 없는 가운데 얻은 한 마디, 이것은 말없이 체득하게 되는 깨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외도가 세존의 말 없음 속에서 불법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언어 이전의 참 소식, 자기의 본래면목(참 모습)을 세존의 침묵 가운데 퍼뜩 잡아챌 수 있었던 것이었죠. 여러분도 이렇게 체득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얘기를 마음으로 계속 읽어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새 깨달음에 도달할 날이 있음을 장담합니다. 의심스러운 한 마디를 계속 마음으로 의심하십시오. 간절하면 통하지 않는 게 없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말 없는 한 마디'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조주선사는 ‘높아도 위험하지 않고, 가득 차도 넘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청정법신의 특징을 예로 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게 반야심경의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不生不滅),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不垢不淨),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不增不減)' 것이죠. 높아도 높지 않고, 가득 차도 가득 차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닙니다.
조주의 이 말씀에 그 스님은 "그럼 큰 스님은 가득찹니까? 넘칩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가득차도 넘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병에 물이 가득 차면 넘쳐 흘러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치를 생각하고 이렇게 물은 것이겠죠. 말귀를 못 알아 들으니 조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을 뿐입니다. “그대가 내게 물으니 어찌하겠는가?” 가득 차니, 넘치느니 말하지도 않습니다. 네가 물으니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고 그 스님의 혀를 막아버립니다. 이럴 때는 그냥 절하고 달아나는 게 상책입니다.
69. '신령스러움'
한 스님이 물었다.
“신령스러움이란 어떤 것입니까?”
“깨끗한 땅 위에 한 무더기 똥을 싸놓은 것이다.”
“제발, 큰스님! 분명한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 노승을 그만 괴롭혀라.”
신령(神靈)스러움이라! 조선 선조시대때 휴정 서산대사의 말씀(선가귀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소소영영(昭昭靈靈)하여 일찌기 나지도 죽지도 않고, 이름 지을 수도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여기서 '소소영영(昭昭靈靈)'이란 한자어는 밝을 소(昭) 두개에 신령스런 영(靈) 두개가 합하여 '한없이 밝고 신령스럽다' 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있는 이 한 물건은 바로 우리 마음(自性)이고, 똑바로 깨치면 마음은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운 물건임을 서산대사가 앞장서서 증명하겠다는 뜻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밝디 밝고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령하다는 것이죠.
‘신령스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니 조주선사는 정말로 뜻밖에 ‘깨끗한 땅 위에 한 무더기 똥을 싸놓은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그때 그 스님의 가슴이 철렁했는지, 머리가 멍해졌는지, 멍청하게 그냥 조주를 바라만 보았는지, 한번 그 표정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참 좋을 텐데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수행이 익을 만치 익었다면 이 소리에 퍼뜩 깨쳐야 합니다.
'마른 똥막대기', '땅 위에 싸놓은 똥 한무더기', 위에 또 무어라 했죠? '깨진 쇠물병'이다. 신령스러움과 전혀 동떨어진, 더럽고 하찮다 할 사물들이 귀한 것이라니, 그래서 '귀하게 사서 천하게 판다'라는 선어(禪語)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의심해야 합니다. 깊이깊이 마음속으로.
그 스님은 '큰스님 제발 농담 그만하시고, 제대로 된 불법의 뜻을 말해주십시오.' 라고 조주에게 다시 간청합니다. 조주는 '이 놈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나도 괴롭다. 차라리 내가 빌고 비니 더 이상 괴롭게 만들지 말라'고 대답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조주는 '자신이 판 무덤에 스스로 빠진다' 하는 격입니다.
70. '하는 게 없는(無爲) 마음'
한 스님이 물었다.
“법신(法身)은 하는 게 없어(無爲) 온갖 수(諸數)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럼 말하는 것은 허용됩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그렇다면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조주선사는 그냥 웃었다.
'법신은 하는 게 없다. 무위(無爲)다'란 말은 우리 마음이 애써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어서 마주치는 인연에 따라 그냥 자연스럽게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온갖 수(諸數)에 떨어지지 않는다' 라니, 이건 또 무슨 뜻입니까? 참으로 불교에는 어려운 단어들이 많습니다. 깨쳤다고 처음부터 이런 말을 다 아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깨닫고 난 뒤에 공부하다 보면 모두 이해하게 되지만 모른다고 해도 절대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일희일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잡아함경에 '(깨치면) 현세에 있어서는 모든 번뇌를 다하고, 죽은 후에도 수(數)에 떨어지지 않나니 영원히 반열반에 머물러 사느니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으면 지금 이 생에서는 모든 번뇌망상이 다 끊어지고, 이 몸뚱이를 떠난 후에도 중생으로 떨어지지 않고 열반적정의 세계에 산다고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이 수(數)는 이처럼 존재(有)하는 수량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무위가 아닌 유위(有爲)로써 셀 수 있는 것이니 제수(諸數)란 온갖 중생(衆生)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뜻을 조금 더 확대해 보면, 중생이고, 유위고 무위고, 모든 존재, 개념, 생각조차 모두 법(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수(數)도 법의 범주에 포함되어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다'는 말을 쓰고 있듯이 법수(法數)란 용어를 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온갖 수(諸數)에 떨어지지 않는다' 라는 말은 어떤 법의 테두리도 벗어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위 질문의 뜻은 '법신(法身)‘, 결국 우리 마음은 무위(無爲)라 힘쓰지 않고 저절로 작용하기 때문에 어떤 법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런데 마음이 말한다고 하는 것은 법과 상관없이 이치에 맞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것으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이 풀이도 참으로 어렵죠? 마음에 통하지 않으면 사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달리 풀어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세상의 모든 법(法)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은 잘 아시죠? 마음이 없으면 이 우주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 현상, 개념, 생각 등(이 각각을 다 법이라 합니다) 일체의 법을 바로 마음이 만들어냈다고 합니다(증명은 다음에 하고).
그런데 근본 마음은 원래 허공(空)과 같아 높으니 낮으니, 힘을 쓰니 쓰지 않으니, 무엇을 하니 하지 않으니 그 어떤 개념도 없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 무위(無爲)입니다. 그러나 마음이든 무위든 이미 이름을 부르거나 그 개념의 모습을 표현하면 바로 법이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그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없으니 마음은 법(法)의 테두리를 벗어납니다. 그런데 마음이 모든 법을 만들어내니 말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도 법이죠. 그러므로 이 마음이 말(언어)이나 생각이란 법을 만들어내니(사용하니), 법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활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말한다고 하는 말은 이치에 틀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잘 따라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조주선사는 '말하는 것은 허용됩니까?' 라는 질문에 짐짓 그대의 질문이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뜻인지 '무슨 말을 하느냐?' 하고 되물었는데, '네 질문에 대해 네 스스로 한번 대답해 봐라' 하고 궁지에 내몬 모습입니다. 깨달음은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 깨달아서 남에게 넘겨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살펴보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말은 '바로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네 마음이 말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라는 뜻을 담아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대답의 바톤(baton)이 넘어 오니, 그 스님은 어쩔 줄 모르고 '그렇다면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자기가 한 질문의 뜻을 어느 정도 알았다면 '네가 한번 말해봐라'는 조주의 대답에 왜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했겠습니까? 산천 유람이나 하듯이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뜻도 모르고 말이나 주워 담았다가 선사들에게 대답을 넘겨버리려 한다면 종국엔 한심한 꼴이 되겠죠. 조주의 허탈한 웃음소리만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허허!
[출처] 조주록 강해 14(65~70)|작성자 byunsdd
'조주록(趙州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주록 강해 16(76~79) (0) | 2019.10.20 |
---|---|
조주록 강해 15(71~75) (0) | 2019.10.06 |
조주록 강해 13(62~64) (0) | 2019.10.06 |
조주록 강해 12(55~61) (0) | 2019.09.22 |
조주록 강해 11(50~54) (0) | 2019.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