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13(62~64)

수선님 2019. 10. 6. 11:16

조주록 강해


원문출처


62. '3만근의 화살을 당긴다'

조주선사가 또 말했다.

“노승이 이곳에 30여 년을 있었으나 선사라고는 한 명도 찾아온 적이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와서는 하룻밤을 자고 한 끼 밥만 먹고는 편하고 따뜻한 곳을 찾아 서둘러 떠나버렸다.“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문득 선사가 찾아온다면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삼만 근이나 되는 화살을 생쥐를 잡기 위해 당기지는 않는다.”

위 상당법문에서 계속 연결됩니다. 조주선사도 참 불쌍합니다. 30년 동안이나 관음원에서 행여나 물소의 구멍없는 콧구멍을 꿰뚫는 걸물을 만나거나 법을 이어받을만한 한 물건이 오기를 기다려봤지만 제대로 된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설령 싹수가 조금 보이는 자가 오기는 했더라도 하룻밤 자고 밥 한 끼 먹고는 가난에 찌들어 사는 관음원은 싫다고 더 크고 재산도 많은 다른 절로 다 가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깨달은 제자 한 명 얻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도(道)가 성행했던 그 옛날도 이러니 요즘 세상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모두 용돈도 많이 주고 공부도 석박사 딸 수 있을 정도로 지원해주는 그런 사찰만 찾는 게 아닌지? 박사되어서는 무얼 하려는지? 무엇 때문에 도를 닦는지는 알기나 하는지! 휴!

그러자 한 스님이 “문득 선사가 찾아온다면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전후 문맥이 확실하진 않지만 제가 바로 그와 비슷한 사람이니 한 마디 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로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조주는 “삼만 근이나 되는 화살을 생쥐를 잡기 위해 당기지는 않는다.” 고 했습니다. 아마도 '너 같은 생쥐를 잡으려고 3만근이나 되는 화살을 당기겠느냐?' 하고 핀잔을 준 것일 겁니다. 그때 이 스님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겠죠? 여기서 확 바로 깨쳐야 하는데, 조주의 노파심에 찬 한 마디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순간입니다.

선사의 한 마디는 모두 깨달음을 자극하기 위한, 사람을 죽였다가 되살리는 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번 죽었다 살아나면 활인검(活人劍)이요 죽어버리면 살인도(殺人刀)가 될 뿐이겠죠.

63. '북쪽 사람은 짐을 더 실어 주라'

조주선사가 설했다.

“형제들이여! 남쪽에서 오는 사람은 짐을 내려주고, 북쪽에서 오는 사람은 짐을 더 실어 주어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윗사람을 가까이 하여 도를 물으면 도를 잃고, 아랫사람을 가까이 하여 도를 물으면 도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상당법문이 계속 됩니다. 조주선사는 '남쪽에서 오는 사람에게는 짐을 내려주고, 북쪽에서 오는 사람에게는 짐을 더 실어 주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남방에서 오는 사람은 모두 존귀한 자들이라 짐을 푸는데 도움을 줄 것이지만, 북방에서 오는 사람은 모두 오랑캐들이니 도움을 주기는커녕 더 힘들게 만들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만유 평등을 표방하는 선계(禪界)의 거장이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을 차별해야 한다는 뜻으로 설법할 리는 만무합니다.

곧이어 조주는 옛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윗사람에게 도를 물으면 도를 잃고 아랫사람에게 도를 물어야 도를 얻는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아니 도(道)나 덕(德)이 높은 윗사람에게 도를 물어야 도를 얻지, 어떻게 낮은 사람에게 도를 물어야 도를 얻는다는 말입니까? 혹시 실수하여 반대로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선사들이 한 마디 한 마디 마다 파놓은 함정이요, 암호입니다. 마음공부 하는 자들을 계속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 의심을 풀어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주는 왜 윗사람에게 도를 묻지 말고 아랫사람에게 도를 물어야 도를 얻는다고 했는가?' 라고 계속 의심하십시오. 이 말과 자기 자신이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온갖 개념, 알음알이로 뭘 안다는 사람은 모두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시 위 문장 '남쪽에서 오는 자는 짐을 내려주고, 북쪽에서 오는 자는 짐을 더 실어 주어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언어 밖의 소식을 알아채야 합니다. 힌트로서, 남쪽, 북쪽이라는 방향과는 관계없이 그 이면의 의미를 참구하면 다소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에게 주장자가 있으니 주장자를 주고, 그대에게 주장자가 없으니 그대에게서 주장자를 뺏노라.' '주장자는 청정법신이다.' 이 두 언구로 퍼즐게임을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64. '보기는 쉬우나 알기는 어렵다'

조주선사가 다시 설했다.

“형제들이여! 바른 사람이 삿된 법(邪法)을 말하면 삿된 법(邪法)이 정(正)에 따라서 ​바르게 되고, 삿된 사람이 바른 법(正法)을 말하면 바른 법이 사(邪)에 따라 삿되어진다. 제방에서는 보기는 어렵고 알기는 쉬우나, 이곳에서는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

이 설법도 분명하게 깨닫기 전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법문이라 하겠습니다. 말을 풀이해 보면, '바른 법(正法)을 잘 아는, 깨달은 사람이 거짓된 법(邪法), 즉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인 정법과 동떨어져 보이는 법을 설하더라도 그 본질의 뜻은 도리에 어긋남이 없어 수행자들을 가르치는데 부족함이 없고, 그 반대로 바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깨닫지 못한 자가 경전이나 조사들의 말씀에서 인용한 법문 등 자기로서는 아무리 바른 법이라고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하더라도 그 깊이 숨은 뜻을 알지 못하므로 불법의 이치에 맞지 않고, 수행자들을 잘못 인도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본들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로서, 운문문언(864-949)선사는 '무엇이 부처입니까?' 라는 한 스님의 질문에 '간시궐(乾屎厥), 즉 마른 똥막대기다.' 고 대답했습니다. 붓다란 그냥 곧 바로 마른 똥막대기다고 설한 것입니다. 무슨 똥막대기와 비슷하게 더러우나, 더러운 게 더러운 것이 아니라는 등 군말은 하나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존엄하고 귀한 부처를 그 천하디 천한 똥닦는 막대기에 비유하다니 완전히 삿된 말씀이라고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란 법문은 지금도 많은 수행자들이 마음공부하는 화두로 삼고 있으며, 운문선사 또한 훌륭한 부처 중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삿된 법으로 들릴지라도 그 근본적인 뜻은 바른 법(正法)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이와 반대되는 한 사례로서 육조단경을 보면, 지상스님이라는 분이 대통신수화상에게 ‘어떤 것이 저의 본래 마음이고 본성입니까?’ 하고 물으니 대통화상은 설하길,‘그대의 본성(本性)은 허공(虛空)과 같다. 볼 수 있는 한 물건도 없음을 깨달으면 이것을 바르게 본다고 한다. 알 수 있는 한 물건도 없음을 깨달으면 이것을 참된 앎이라고 한다. 푸르거나 누렇거나 길거나 짧음이 없다. 다만 본래의 근원이 깨끗함을 보아서 깨달음의 바탕이 두루 밝으면 곧 이름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하고 또한 여래지견(如來知見)이라 한다.’ 라고 했습니다.

석가도 모든 법은 공(空)하다고 했고, 조사들도 자성(自性)은 본래 무일물(無一物), 즉 한 물건도 없다고 했으며, 맑고 깨끗하고 적멸하다고 했으니 이치에 바른 법(法)으로 들릴 듯도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육조혜능조사가 대통의 법문의 삿된 점을 지적하기를, “그 스님의 말씀에는 여전히 보는 것과 아는 것이 남아 있구나. 그 까닭에 그대를 깨닫게 하지 못한 것이다." 고 말하곤 한 게송을 들려 주었습니다.

'한 법도 보지 않고 보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마치 뜬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과 같다. 한 법도 알지 않고 아는 것이 비었다고 한다면 도리어 허공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지견이 문득 일어나면 잘못 알아차린 것이니 어찌 방편을 이해하였겠는가? 그대가 한 순간에 스스로 잘못을 안다면 자기의 신령스런 빛이 늘 드러나 있을 것이다.'

육조의 말씀은 대통화상이 아직 자아가 텅 비고(我空), 법이 공(法空)한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한 물건'이라는 모습(相)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고, 또한 '한 물건도 없다'는 단견(斷見)에 집착하여 양변을 초월한 중도의 이치를 통달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삿된 법문 때문에 수행자들을 바른 깨달음의 문으로 인도하지 못함을 탓하고 있습니다.

다시 조주선사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제방에서는 보기는 어렵고 알기는 쉬우나, 이곳에서는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 라고 설했습니다. 원문에 '諸方難見易識 我者裏易見難識'이라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제방(諸方)'이란 말의 해석에 따라서 중국 천하의 선사들과 조주선사의 법을 상호 비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다만 조주선사의 법을 천하의 수행자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조주 자신의 견해는 무엇인지 서로 비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느 경우든 그 뜻이 어디로 가겠습니까마는 여기서는 전자로 생각하고 한번 풀어봅니다.

조주선사가 활동하던 중국 당나라 시대는 마조도일, 석두희천 대사 등의 문하에 많은 깨달은 제자들이 생겨나서 동산양개, 위산영우, 덕산선감, 임제의현선사 등이 법을 펼치면서 선종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선(禪)을 가르치는 방편으로서 유명한 것이 덕산의 방망이(捧), 임제의 할(喝), 구지의 한 손가락 선(一指禪) 등이 나타났습니다.

덕산은 수행자를 만날 때마다 먼저 방망이로 때리고 시작했으며, 임제는 보자마자 고함을 질렀고, 구지는 평생 동안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려 도를 나타내는 등 선사의 몸짓이나 방망이, 불자, 구슬 등의 선의 도구를 활용한 가르침이 많이 성행했습니다. 이에 비해 조주선사는 거의 전적으로 촌철살인 같은 짧은 말 한마디에 선(禪)의 요체를 담아 수행자들을 깨닫게 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중국 전역의 수행자들 사이에 여러 선사들의 법문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논의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덕산, 임제는 어떻고, 조주는 어떻고 삿대질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선사들의 법(法)에 대하여 조주선사는 방망이로 때린다든지, 고함을 지른다든지, 손가락을 세우고, 몸을 벽 쪽으로 돌아버리는 등의 이상야릇한 법은 두 눈 버젓이 뜨고도 당한다는 말이 있듯이 눈으로 보고 들어도 도대체 어째서 저런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를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방망이로 내리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다 보이니 무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알기는 쉽다'고 말한 뜻입니다.

그런데 조주 자신의 법은 그 반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조주는 주로 '차 한잔 마셔라', '방하착(放下捉), 즉 내려놓아라', '뜰 앞의 잣나무', '조주의 돌다리' 등 우리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물건, 도구, 생각 등을 활용한 짧은 말 한마디로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 수행자들을 앞에 두고 과거에 조주선사와 만나본 적이 있든 없든 모든 스님들 에게 똑같이 '차 한잔 마시라'고 말하는 것은 알아듣기는 아주 쉽지 않습니까? 이것이 내 법은 보기는 쉽다고 말한 뜻입니다. 그런데 조주가 아무 뜻없이 괜히 '차 한잔 해라'고 말하겠습니까? 내 말은 알아보기가 쉽지만 그 숨겨진 뜻을 알아채기는 매우 어렵다는 뜻으로 '알기는 어렵다'고 말한 것입니다. 서로 아는 한 식구들이 아니라면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법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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