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16(76~79)

수선님 2019. 10. 20. 11:49

조주록 강해


원문출처


76. '손바닥 위의 구슬'

조주선사가 상당하여 설하였다.

“이 일(此事)은 마치 손바닥에 있는 밝은 구슬과 같아서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가 나타나고, 중국 사람이 오면 중국 사람이 나타난다.”

선가(禪家)에서의 선(禪) 수행이란 도를 닦으면서 마음공부하고, 불법을 배우고, 자성을 깨쳐 깨달음을 얻고, 다시 하화중생(下化衆生)하여 세상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후배를 길러 선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특히 중요한 것은 불법에 대한 바른 견해(見解), 안목(眼目)을 갖추는 것인데, 위 법문에서 조주가 말하는 이 일(此事)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조주선사는 이 일(此事)은 손바닥 위의 밝은 구슬이 사물을 비추어 보는 것과 같아서, 구슬에 오랑캐가 비치면 그대로 오랑캐가 나타나고, 한족이 비치면 그대로 한족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법안문익선사가 "옛 성인들이 본 모든 대상 경계는 오로지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고 했는데, 조주의 위 말도 오랑캐면 오랑캐, 한족이면 한족, 꽃이면 꽃, 동물이면 동물이 오가는 모습이 그대로 자신의 마음 위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모든 바깥 경계, 사물들이 마음 위에서 놀고 춤춘다 또는 '우주의 근원이 춤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속에 담긴 참된 의미를 스스로 맛볼 수 있어야 그때부터 실제 공부가 시작된다고 할 것입니다.

77. '부처는 한줄기 풀'

조주선사가 또 설했다.

“나는 한 줄기 풀을 가지고 장육금신(丈六金身)으로 쓰기도 하고, 장육금신을 가지고 한줄기 풀로 쓰기도 하니, 부처 그대로가 번뇌이고, 번뇌 그대로가 부처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는 누구에게 번뇌가 됩니까?”’

“모든 사람에게 번뇌가 된다.”

“어떻게 해야 면할 수 있습니까?”

“면해서 무얼 하려느냐?”

'나는 한 줄기 풀로써 장육금신(丈六金身), 즉 열 여섯자 되는 금빛 부처로 쓰기도 하고, 부처의 몸인 장육금신은 풀 한포기로 쓰기도 한다'는 말은 '한줄기 풀'이 곧 '부처'이고, '부처'는 곧 '한줄기 풀'이다는 뜻입니다. 또한 '부처 그대로가 번뇌이고, 번뇌 그대로가 부처이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 대신 '보리(깨달음)'란 말을 써서 '번뇌가 곧 보리이고, 보리가 곧 번뇌다' 라고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한 마디로 온갖 분별을 떠나 오직 마음(唯心) 뿐이란 말입니다.

불경전 (화엄경 등)에서는 사사무애(事事無碍)라 하여 세상 모든 일(존재, 현상, 법)이 서로 막힘없이 통하여 걸림이 없다는 이치를 가르칩니다만, 선(禪)에서는 그냥 풀이 곧 부처고, 부처가 곧 풀이고, 번뇌가 곧 보리고, 보리가 곧 번뇌입니다. 보리, 부처, 풀, 번뇌, 똥막대기, 호화만찬, 물병, 호떡이든 가릴 것 하나 없이 모두 마음이 나타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처 그대로 번뇌고, 번뇌 그대로가 부처' 라고 하니까, 이 스님은 '부처는 누구에게 번뇌가 되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니 모든 사람이 생각하기에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도리어 괴로운 번뇌 망상이라고 하니 도대체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원하는 게 없는 것(無願)입니다. 부처가 꼭 되어야 한다는 이 생각도 떨쳐버려야 할 집착심으로 바로 번뇌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처라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고 부처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을 아예 버리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대로 번뇌의 세계에 머물고 맙니다.

이 스님은 “(부처는) 모든 사람에게 번뇌가 된다.”고 하니까, 이제 번뇌를 면할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면할 수 있습니까?” '번뇌 그대로가 바로 부처' 라고 방금 전에 가르쳐 줬는데 면할 방법을 찾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항상 분별심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마음은 꼭두각시처럼 의식(생각)에 조종을 당하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이런 잡생각이 헛된 번뇌망상이고, 생겨난 것도 아니구나! 하고 알아채면 그 순간부터 번뇌가 부처, 깨달음의 활력소로 작용합니다. 이 생각은 나의 때묻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구나! 다시는 마음에 떠올리지 않는게 좋겠지. 모두 텅 비어 원래 생기지도 않는 거짓된 것이야! 하고 스스로 자각하고 멀리 하는 마음의 훈련을 반복하면 바로 번뇌가 부처로 변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당장 한 생각 쓸데없이 떠오르면 마음속으로 부처가 떠올랐구나 하고 나는 부처조차도 싫으니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떨쳐 버리십시오. 이렇게 반복 연습하면 서서히 진짜 부처가 되어 갑니다.

번뇌가 바로 부처이니, 모든 괴로움(苦), 망상(妄想), 망념(妄念)이 모두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거꾸로 이것을 모면할 방법을 찾고 있으니 '너는 면하지 말라!'고 해서는 안되겠죠? 조주는 뭘 면하려고 하느냐! 했지만 그래도 면해야 합니다.

78. '오직 본분사(本分事)로 지도한다'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설했다.

“나는 이곳에서 본분의 일(本分事)로 사람들을 지도한다. 만약 나에게 그들의 근기에 따라 지도해달라고 한다면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가 있으니 스스로 저들을 지도할 것이다.

그래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허물인가? 뒤에라도 솜씨 좋은 선지식(作家)을 만나거든, 내가 그들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해라. 다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본분의 일(本分事)로만 지도했다고 해라.”

위 설법은 뜻만 조금 풀이하면 이해될 듯합니다. 조주선사는 이 관음원을 찾아오는 수행자들에게 본분사(本分事)로만 가르쳐왔고, 앞으로도 본분사로만 지도하지 다른 방편 수단은 쓰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본분의 일이란 청정법신인 자성(自性), 부처가 하는 일(事)이요, 본래면목이 하는 작용을 말하는데, 조주의 참 모습, 도리(道理) 만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直指人心) 선객(禪客)들을 지도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수행자의 근기(根機), 즉 기본 바탕이 우수한지, 중간인지, 뒤떨어졌는지 그 수준에 맞추어 방편으로 지도해 달라고 한다면, 경전의 가르침인 3승 12분교, 즉 8만대장경에 사람의 수준에 따라 단계별로 부처에 이르는 방법을 기록해 놓았으니 그런 사람은 경전을 참조해라 이 말씀입니다.

하지만 조주선사는 중생을 한 순간에 바로 부처의 지위로 끌어 올려야 하기 때문에 오직 세상의 입을 틀어막는 한 마디로서 학인들을 내리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구의 허물인가?' 했는데 무엇을 이해한다는 말입니까? 본분사로만 가르치는 도(道)요, 선(禪)이요, 깨달음이요, 조사, 선사, 큰스님이요, 부처입니다. 이를 바로 알아듣지 못한다면 누구의 잘못입니까? 듣는 사람이 귀머거리일 뿐이죠.

‘뒤에라도 솜씨 좋은 선지식(作家)을 만나거든, 내가 그들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해라. 혹시 여러분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 여기저기서 안목이 높은 선지식(善知識), 작가(作家), 조사, 선사(모두 같은 말이죠), 부처를 만나거든 조주는 이런 상근기든 저런 하근기든 만나는 수행자들을 잘못 가르친다고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본분의 일(本分事)로만 지도했다고 해라’ 다시 누가 조주의 법에 대해 물어오면, 저 노승(老僧)은 오직 부처님의 참 모습만을 드러내어 바로 가르치더라고 말해라, 이 뜻입니다. 조주의 비장한 지도 철학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정신은 매우 존중합니다만, 제가 이렇게 강설하는 것은 모든 부처(중생)들을 본분의 일로만 가르쳐선 쥐구멍에 햇빛 들 날 있는 것처럼, 간혹 수만 명 중에 한 사람 정도 눈을 뜨게 될 뿐인데 그렇게 되어서는 영원히 선(禪)의 그 가치는 세상의 빛과 만나지 못하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뜻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깨달음에 들게 하여 인생이 무엇인지, 세상에 머무는 이 '나'가 진정 누구인지, 주변의 모든 사람, 짐승들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깨달은 후에는 이 세상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고 바로 실천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깨닫고 그대가 깨닫고, 그 다음에는 다단계 보급방식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대여! 하늘의 해와 달이 되라!'

79. '헤아리면 어긋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하는데, 제게 마음 그대로가 아닌 것(不卽心)을 헤아려 짐작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마음 그대로인 것은 그만두고, 그대는 무엇을 헤아려 짐작해 보겠다는 것이냐?”

달마, 마조대사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 라고 설해 왔습니다. 그래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성품을 볼 수 있게 하여 부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선사들은 바로 마음을 가리키는, 마음에 큰 충격을 주어 반사적으로 깨닫게 하는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이 스님은 즉심(卽心), 즉 마음 그대로라는 말을 빙 돌려서 부즉심(不卽心), 즉 마음 그대로가 아닌 것이란 무엇인지 조주선사께서 가르쳐 주시겠느냐고 질문을 한 것인데, 조주에게 시비를 한 번 걸어보려고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 마음 그대로가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말장난일 뿐인데, 선적으로는 마음 그대로가 아닌 것도 마음입니다.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법유심(諸法唯心)일 뿐으로서 털끝만큼이라도 벗어나는 게 없습니다. 무얼 벗어나려고 합니까?

조주선사는 그 학인의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어, ‘마음 그대로(卽心) 라는 건 그렇다 치고, 다시 말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대는 도대체 무엇을 헤아려 보겠다고 하는 것이냐?’고 되묻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다 그만두고 '이 놈아! 즉심시불이고 부즉심이고, 헤아려 봄(思量分別)이고 모두 방하착(放下着), 놓아버려라!' 자신의 마음, 성품을 확실하게 보아야 분별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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