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15(71~75)

수선님 2019. 10. 6. 11:17

조주록 강해


원문출처


71. '중생 그대로 부처'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이고, 무엇이 중생입니까?”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부처는 곧 중생이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중생입니까?”

“묻고 또 묻는구나!”

'부처는 무엇이고, 중생은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조주선사는 '중생이 곧 부처(衆生卽是佛)이고, 부처는 곧 중생(佛卽是衆生)'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달마대사와 마조대사는 제자들에게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가르쳤고, 마조대사는 나중에는 '마음도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라고 설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불교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중생이 곧 부처' 라는 말은 거의 일반 상식화 되었지만 그 진실한 뜻을 아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되겠습니까?

중생은 있는 그대로 부처. 본질적으로 모든 중생, 축생이든 인간이든 생명체는 모두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중생이 부처요, 부처가 중생이기도 합니다만, 이 말은 중생이 깨달으면 부처이고, 깨치지 못하면 중생이라는 것이 아니라 깨치지 못한 중생 그대로 부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참으로 체득하기 어려운 것인데 선사들은 깨달음을 증명하는 잣대로서 이것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중생이 지금 현 상태 그대로 부처라는 말은 사실 깨달음이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큰 충격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면 깨닫기 위해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 아닙니까?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이 필요없다는 사실, 지금 이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올 것을 길을 빙 둘러 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육조혜능이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쓰라'는 금강경의 한 구절에 곧바로 알아챈 것처럼 이 미친 자의 미친 소리를 듣고 곧바로 자신을 찾으십시오.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 이대로 진리임을 발견할 뿐입니다. 이건 제 목숨을 걸고서 하는 말이니 더 이상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기 전까지는 중생은 그대로 중생으로 '깨달을 자'요 , 부처는 진리를 찾은 붓다로서 '깨달은 자' 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깨달을 자가 깨달은 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 정진하는 것이 선(禪) 수행이요, 마음공부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중생인 당신이 그대로 붓다(覺者)다.' 라고 아무리 불러 주어도 부처임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스님. '아무래도 모르겠습니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중생입니까?' 하고 다시 묻습니다.

이렇게 묻고 물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곧 부처이니 확신을 꽉 붙잡아 매고,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가 무슨 뜻인지 오직 마음으로 깊이 의심하십시오. 평소에 시간나는 대로 화두를 들다가 휴가 때나 기회가 닿으면 단 3일만이라도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이 화두에 집중하면 도달할 수 있는 게 깨달음입니다.

72. '큰 도(道)는 뿌리가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큰 도(大道)에는 뿌리가 없는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대가 받아들여 잘 설명하고 있다.”

“뿌리가 없다고 함은 또 어떻게 합니까?”

“이미 뿌리가 없는데 어디에다 그대를 묶어 두겠느냐?”

큰 도(大道)는 선(禪)이요, 마음(自性)이요, 부처요, 불법이요, 진리요, 진공묘유(眞空妙有)요, 삼라만상을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도(道)가 스며들어 있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란 말이 있습니다. 삼라만상 두두물물, 세상의 모든 물건 물건마다 불성이 있고, 도(道)가 온 시방에 두루 가득차 있으니 대도(大道)입니다.

확실히 깨치면 기쁘고 좋은 것만 보리열반이 아니라 괴롭고, 힘들고, 슬픈 일, 시시각각으로 떠오르는 쓸데없는 생각조차 도(道)요, 보리요, 부처입니다. 그래서 잡되고 헛된 생각이 그대로 보리요,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부처로 체감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 하나뿐인 도(道)에 무슨 근원(根源), 뿌리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텅 비고 아무 모습도 없어 의지할 데도 없고, 뿌리박을 곳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마음에 맡겨 인연 맞닿는대로 걸림 없이 사는 사람이 도인입니다. 말로써 도를 논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대도는 허공처럼 온 세계에 가득차 있어 그 누구도 붙잡을 수 없고 조주선사 말처럼 묶어 둘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허공이 팍 쪼개져 강물 속으로 내리꽂힌다'는 경지를 알아야 합니다.

73. '구하지 말라'

한 스님이 물었다.

“바른 수행을 하는 사람도 귀신에게 들킵니까?”

“들킨다.”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허물은 구하고 찾는 데 있다.”

“그렇다면 수행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수행해라.”

'도를 닦는데 수행을 제대로 하면 귀신에게 들킵니까? 안 들킵니까?' 요즘 귀신 믿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실지로 있든 없든, 답은 '안 들킨다'고 해야 수행할 마음이 나겠죠. 똑바로 수행하는데도 귀신에게 들킨다면 기분 좋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수행해도 귀신에게 들킨다고 하니까 '무슨 잘못이 있는 것입니까?' 하고 그 스님은 묻습니다. '뭔가 구하려고 하는게 잘못이다'.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하고 마음이 진정 무엇인지 탐구하려고 하는 그 행동이 잘못이다는 말입니다.

아니 수행하는 목적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고, 자성(自性)을 깨달으려고 하는 것인데 그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근본부터 잘못된 게 아닙니까? 그럼 수행하지 않는게 올바른 행동이죠.

그래서 그 학인은 '그렇다면 저 수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조주는 '그래도 수행해야만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그래도 노력 정진해야 합니다. 경전과 조사어록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으면서, 의심나는 화두 '동쪽 산이 물위로 간다'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합니다. 방석에 구멍이 뚫릴 지경으로 오랫동안 좌선(坐禪)해라는 뜻이 아니라 마음의 참 모습, 그 근원을 화두를 통해 꿰뚫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자신이 '물 위로 걸어가는 동쪽 산'이 될 때까지, 수행한다는 생각이 끊어지고, 부처니 조사를 구하는 생각도 없어지고, 화두를 들고 있다는 마음까지 없어져 텅 비어버릴 때까지 의심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수행하는 승려들을 위해서 동물들이 먹을 것을 공급하고, 새들은 꽃을 물어 와서 머리에 뿌려주고, 귀신은 수행을 방해하는 마군들을 물리치고 지켜주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도를 깨닫기 전에는 열심히 돌보고 보호하던 동물, 귀신들이 깨달은 후에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깨닫기 전에는 이 동물이나 귀신이 유심(有心)의 마음을 알아챘는데 완전하게 깨달은 후에는 마음이 없어져(無心) 수행인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위 문답에서 바른 수행을 하는 자라도 아직 무심의 지경이 되지 못하면 귀신에게 들킨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74. '허공에 걸린 달'

한 스님이 물었다.

“외로운 달이 허공에 떠오를 때 빛은 어디서 생깁니까?”

“달은 어디서 생겼느냐?”

깨달음의 경지를 이야기할 때 허공(하늘)에 외로운(孤) 달이 두둥실 떠오르는 모습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청정법신, 자성을 달에 비유하여 도대체 바라보이지 않던 달이 허공에 돌연히 걸려 있는 그런 장면을 연상해 보면 느낌이 올 것입니다. 한순간에 깨닫는 그 모습을 자연의 현상으로 상징화한 것이죠. 그래서 '20년 동안이나 자연 풍경을 음풍농월하는 경계로 잘못 알았다'는 오조법연선사의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알아채야 합니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천 봉우리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새는 바위 앞에서 떨어진 꽃잎을 물고 있더라.'

그런데 '외로운 달이 허공에 떠오를 때 빛은 어디서 생깁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주는 '(빛은 그만두고) 그 달은 어디서 생기느냐?' 하고 되묻습니다. 빛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허공에 떠오르는 그 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고 묻는 것인가? 라는 뜻입니다.

말만 어디서 주워 가져와서 조사를 시험하려 들면 안되죠. 그 정확한 의미도 모르면서 ‘마하반야 바라밀다..’ 반야심경만 줄줄 외어서야 무엇에 소용되겠습니까? 선어(禪語)의 의미도 계속 곰씹어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의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저 위의 빛은 달에서 나오는 빛입니다. 달 스스로 뿜어내는, 온 누리를 뒤덮는 생명의 빛이요, 우리 자성에서 비추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대기대용(大機大用), 전광석화처럼 뛰어난 임기응변을 자랑하는 조주선사의 그 마음작용입니다.

75. '물들지만 말라'

한 스님이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도(道)는 수행하는데 속하지 않으니 물들지만 말라’고 하셨다는데, 무엇이 물들지 않는 것입니까?”

“안팎으로 점검해 보는 것이다.”

“어떻게 스스로 점검합니까?”

“또 점검”

“자신에게 무슨 허물이 있어 스스로 점검합니까?”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우리나라 조계종의 최고 할아버지격인 조사는 육조혜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달마, 혜가 등 대대로 이어온 가사와 선종의 법을 오조홍인으로부터 물려받아 중국 전역에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입니다.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엮은 책만을 경(經)이라고 부르는데, 유일하게 혜능조사가 남긴 어록인 '육조단경'은 경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육조혜능이 제자인 남악회양선사를 처음 만났을 때 묻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니 남악회양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이 꽉 막혔습니다. 육조가 말한 '이 물건'이 무엇인지 참구한 지 무려 8년 만에야 그 말뜻을 깨닫고는 스승에게 말합니다.

"스님, 제가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그래! 네가 무엇을 깨달았느냐?"

"설사 한 물건이라고 말해도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닦아서 증득(證得)할 수 있느냐?"

이에 남악회양이 대답합니다.

"닦아 증득함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육조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더럽힐 수 없는 그것이야 말로 모든 부처님께서 보호하시는 바로다. 네가 이미 그와 같고, 나 또한 그와 같구나!" 하고 남악의 깨달음을 인가했습니다.

이 문답에는 참으로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남악회양이 8년 만에야 알아챈 '이 물건'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이 물건을 3년, 5년, 8년 걸려서 깨달으시겠습니까?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단번에 알아채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경전이나 선사어록도 찾아보기가 귀하고, 아마도 체계적인 마음공부 방법도 거의 전무했을 것입니다. 오직 스승의 입 하나만 바라보고 공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즘은 인터넷, 공공도서관, 동영상 강설이니 뭐니,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은 천배 만배 나을 것입니다. 남악이 8년 걸린 것 3-6개월이면 알아챌 수 있는 시대입니다. 시도해 보질 않으니 그것이 병입니다.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고 회양이 답하자 육조는 '그러면 닦아 증득할 수는 있는 성질의 것인가?' 라고 묻습니다. 위에서 한 스님은 조주에게 '도(道)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고 화상께서 말씀하셨다.' 라고 했죠? 이 말은 도는 닦아 증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란 소리입니다. 그런데 남악회양은 '닦아 증득함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즉, 닦아 증득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두 조사가 서로 상반되는 의견을 내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말로 풀이한들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운데, 깨달으면 수행한다는 생각 없이 수행하고, 증득했다는 생각 없이 증득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조혜능도 자기가 물어보고는 나중의 대답에서 닦고 증득함에 대해서는 언급도 안합니다. '닭은 추우면 횃대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속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뒷부분의 말은 일치합니다. 조주도, 회양도, 육조도 물들지 말라, 오염되지 말라, 더럽히지 말라, 다 같은 말입니다. 육조는 이것이야 말로 모든 부처가 제일 가치 있게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죠. 선종사상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세 분의 조사가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이 부분이야 말로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할 설법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이 뜻은 무엇입니까? 무엇에 물들지(오염되지, 더럽히지) 말라는 말입니까?

단적으로 말하면, '선악에 물들지 말라'는 한마디입니다. 육조가 도명선사에게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너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라고 가르친 것이나, 승찬대사의 신심명에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만 않으면 명백히 통하리라!'고 한 말이나, 화엄경의 이사무애(理事無碍)나 사사무애(事事無碍)든 모두 선악, 고락을 뛰어넘어 중도(中道)의 자리를 지키란 한 마디로 귀결됩니다. 이 중도를 성취하려면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원(無願)의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주는 물들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자신의 마음 안팎을 계속 점검해 보라고 합니다. 아직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貪瞋痴)의 3독(毒)에 물든 것은 아닌지, 좋은 것을 구하고 싫은 것을 피하지는 않는지, 마음에 번뇌망상이 계속 일어나지 않는지, 자기에게 욕한 사람이 아직도 마음이 걸리적거리는지, 그리하여 그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아 아무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이 되었는지 확신할 때까지, 조주처럼 그렇게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합니다.

어미 닭은 때(時)가 익어야 새끼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밖에서 쪼아 줍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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