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가 마음이고 佛法 - 청담 스님[靑潭]
마음이 모든 생각의 주체主體다. 그런데 이 마음이 생각이 아니다.
지식知識 사상思想 정치政治 경제 예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 아니다.
그런데 결국 이 '나'라는 것도 한 개의 생각이다.
자기 마음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돈 없는 가난한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다.
저 가난한 사람이 밥이 없다고 가난한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 없어 가난하다.
자기 마음만을 믿으면 이것이 곧 부자富者다.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客觀이 있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또 벌어질 수 있으니
일체 유심[一體唯心]이라, 지을 조[造]하나를 빼버려야 알기 쉽다.
오직 마음뿐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佛法이다.
우리 마음이 동서남북東西南北 하늘 땅 천당 지옥을 쏘다닌다.
어디에 가면 좋은 음식 좀 얻어먹을까 어디에 가면 좋은 사람을 만날까,
이런 번뇌망상으로 잠을 못 자고 부산 갔다 대구 갔다 하며
이런 짓거리로 업業을 짓고 있다.
그런데 이 번뇌의 마음을 버리면 부산 대구 생각하던 그 마음이
없어진 것뿐이지 대구大邱나 부산釜山 생각하던 마음자리까지
어디로 간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마음자리만은 그대로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마음을 깨친 이 말고는 참 지도자라 할 수 없는것이다.
마음이 우주의 핵核인 까닭이다.
그러니 우주의 핵인 이 마음을 깨치기 전에는
누가 옳은 지도자가 되겠는가?
짐승이나 사람이나 죽을 때는 아주 죽는 줄 안다.
심지어 공자 님도 죽으면 영원히 죽는 줄 알고 죽었지만
아직까지도 죽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살아 생전의 모습과 같은 존재로 또 무엇이 되어 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다.
이 마음 못 깨달았으니 천당이나 지옥이나 개나 소가 되어 가지고
지금 돌아다니고 있다.
그것이 그렇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제 마음대로 만들기 때문이다.
조화의 힘이란 이 마음밖에 없다.
물질도 조화를 못하는 것이고 허공도 조화를 할 수 없는 것이다 .
살아있는 이 마음밖에는 조화를 부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이 우주의 주체인 진리의 핵이 된다면 산 것이다 .
허공虛空은 진리眞理가 될 수 없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이 마음이 우주의 핵이 되기 싫어도 되는 수밖에 없다.
오직 내 마음이 우주를 주재하는 유일한 주인공이란
붓다[Buddha]의 유심唯心사상만이 참혹한 암흑暗黑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하는 참된 길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는
지구상이 평화와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점차 서광曙光이 비춰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인류의 등불인 부처님의 정법의 새싹이 이 땅에서 싹트고 자랄 수 있는
모든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행히 이 땅에 태어났을 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 육신과 이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용맹정진勇猛精進참회하여야 겠다.
육신은 기계와 같고 자동차와 같으며
마음자리는 운전사와 같고 기사와 같으며
몸뚱이가 옷이라면 말하고 듣는 이 마음자리는
옷을 입은 사람의 몸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알 줄 알고 말할 줄 아는 이 마음자리인 나는
육체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거두어 치웠을 때나
변變하지 않는다.
중생놀음하는 범부시절에도
마음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이 제 성능을 다 하고 있으며
이 다음에 성불해서 부처가 되었을 때에도
무엇을 알 줄 아는 그 힘이 더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다 .
마치 소금을 입에 집어넣어서 짠맛을 아는 것은 아기 때나
학사 박사博士 때나 변함없이 똑같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육체는 그대로 산송장이다 . 눈동자가 무엇을 볼 줄 아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지각知覺성을 가지지 못한 그것이
생리적으로 체계 있게 조직이 되어 있다고 해서
알 줄 아는 능력이 물질物質에서 나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눈이 볼 줄 알고 귀가 들을 줄 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범부凡夫였을 때는 눈을 빌어서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람이 뚫린 창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사진기의 렌즈를 통해서 사진을 찍듯이
사람이 창구멍으로 비치는 것들을 내다보고 알고
필름에 찍혀 나온 물건을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지
창窓구멍이나 렌즈 자체가 알 줄 아는 것은 아닌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 맡는 것이 아니다 .
할 줄 아는 마음자리가 직접 보고 냄새맡고 듣고 하는 것이다.
육체가 내가 아닌 진리를 깨닫고 나면
지식 사상思想이 내가 아닌데 그러면서 또 지식知識을 알고
사상을 아는 참 나를 찾게 된다.
이제까지 육체가 나라는 착각으로 고생을 하고 육도를 돌아다니다
도인道人을 만나 마음이 나지 육체가 나는 아니다.
육체는 내 소유는 될지 언정(소유도 될 수 없는 것이지만)
나 자체일 수는 없다.
이런 진리를 듣고 이제부터는 참마음을 단속團束해야 겠다.
지식知識이나 학사 박사 노벨상 다 필요 없다.
돈도 권리도 의식주도 필요 없다고 결심하여
육체본위肉體本位의 생활을 차차 청산해 간다.
하루 세끼에서 두끼만 먹고 두끼에서 한끼로
나중에는 안 먹어도 된다.
정신精神의 도가 높아지고 마음의 힘도 커져서
이 마음이 우주도 창조할 수있으므로 굶어도
몸이 축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는 것이 불법佛法이라는 것도 아니고
도道의 깊이를 굶는 능력으로 안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집착도 구속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부정否定 긍정肯定의
아무 생각 없이 대對하라.
누워 자도 장사를 해도 정치를 해도
나를 위爲해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나는 망亡고 내가 없을 때 그리고 남만을 위해서 살 때
나는 자꾸 커진다. 온 우주가 전부 내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법을 어떨게 알 수 있는가,
나의 평생 과제는 오로지 이 마음의 수련에 두고 있다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마음이란 물질도 허공도 아니며 선도 악도 아니며,
여성도 남성도 아니며 지식도 신앙도 사상도 아니다.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닌 것이 마음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이 마음은 불에 탈 수도 없는 것이고
물에 젖을 수도 없는 것이고 자살도 타살도 할 방법이 없다.
나라는 나는 영원불멸의 것이요 절대자유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실체,
즉 우주 이전의 실체實體요 차원 이전의 것이므로
나를 앞서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가 앞서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다 내 이후以後의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마음이 창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창조하면 하느님도 있고,
부처님도 있고, 태양도 있고, 온 우주宇宙가 건설되는 것이다.
인류5천년 문화가 다 이 마음의 건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이 나라의 마음을 가리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말한다.
오직 나만이 거룩한 것이다. [天上天下唯我獨尊]
그리하여 우리 육신은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사멸이 있으나 마음은 사멸이 없다.
사멸死滅이 없으므로
이 육신이 떠난 후에도 다시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생윤회三生輪廻라 한다.
부처자리는 청정한 것이며 어둡고 깜깜한 것이며
생사로 말미암아 헤매는 것이라고만 고집한다면,
이 사람은 결코 영겁永劫토록 마음의 대도는 깨닫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말과 글에 팔려서 명상[名相]을 고집한 까닭이다.
만약에 이 마음자리, 이 소식, 이 도리, 이놈, 이것,
이 법法을 의논하고자 한다면,
어찌 그대가 저 말과 글귀에서 이 도리를 알 수 있을 것이며,
또한 한 생각에서나
한 가지 사물로써 이 도리를 알아낼 수가 있으랴.
그러므로 이 마음, 이 도리, 이놈, 이것은
상대도 절대도 다 초월한 것이므로 인식조차
미치지 못하거늘 하물며 말로써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다만 살짝 가만히 이렇게 들어맞출 뿐인 것이다.
이렇게 된, 이 한 소식문門을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아니하는
무위법문無爲法門이라고 한다.
만일 이 마음을 깨달아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이 마음자리가 본래 무심無心한 것을 알면 된다.
일체동작이 다 이 마음의 무심한 소식이니
제 스스로가 가만히 살짝 번개처럼 이것을 챙겨서 자취없이 깨달아
귀신도 모르게 돌아서 들어맞는 것은 될 수 있는 일이지마는
그렇지 아니하고 만일 그대가 남에게서 듣고 보고 배운 찌꺼기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따져서 알려고 든다면
그럴수록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니 어찌하랴.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일체 언어 동작과 모든 생각들이 저 목석과 같이
다 무심無心한 짓이 된다고 하면 조금이라도 도道를 배울 만한 분수分數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마음 하나만 깨달으면 그 사람이 곧 참 부처이니,
천지天地와 만법萬法이 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衆生이 그 마음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마치 저 허공이 일체 만물萬物과는 섞여지지도 아니하며
또한 허공은 깨뜨릴 수도 없는 것과 같으며,
해가 떠서 온 천지天地가 밝되 허공은 밝아진 것이 아니며
해가 져서 온 천지가 어둡되
또한 저 허공은 어두워지지 아니하는 것과 같아서
밝고 어두운 것이 번갈아 바뀌되
허공虛空은 여전히 변동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와 같아서 부처[Buddha]와 중생衆生도
그 마음은 항상恒常 그대로인 것이다.
슬프다. 인생이여! 억울하게도 까닭없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데
공연히 천당·지옥으로 돌아다니면서 고苦와 낙樂을 지은 대로 받으며
끝없는 생사고를 여읠 수 없으니 아무리 따지고 생각하여 보아도
이 부처님이 깨치신 실상선나實相禪那,
곧 달마선達磨禪을 깨달음만 같지 못하다.
이 선나禪那법은 곧 이 마음이다. 마음밖에 불법佛法은 없다.
이 마음이 곧 불법佛法이므로 불법밖에 마음은 없다.
세상 사람들이 도道를 배우려고 모든 부처님이 이 마음법을 전傳하였다고 말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되, 이 마음 가운데 별달리
깊고 묘妙한 도리道理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구求하여 얻을 것인가?
그러한 사람은 이 마음이 곧 정법이요,
정법이 곧 이 마음인 것을 알지 못하여 또한 믿지도 못한 때문이니,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을 다시 따로 찾아 구求한다면
될 뻔이나 한 일인가?
천만 겁劫을 지내도 마침내 얻을 수 없을 것이니,
아예 당장에 무심無心하여 문득 본정신,
본마음대로인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모든 것을 초월한 적멸寂滅은 곧 이 마음이며
이것은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마음에서 흘러가고 흘러오고 한다.
그러나 마음은 오고가지도 아니하며
그렇다고 해서 또한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만사는 마음의 장난으로 고락, 성쇠盛衰가
한량없이 바꾸어지는 유식唯識이며 몽환夢幻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것에 의지依支하며 그것들을 탐착貪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득이하여 이 생각 저 생각을 다 버리고
내 고장이며 전 인류의 고장이며 또한 우주의 고장인
이 마음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이다.
먹거나 굶거나 죽거나 살거나 하는 것은 다만 인연因緣에 맡겨둘 뿐이다.
그날 그날을 무사無事태평으로 뜻없는 세상을 살아가니
마치 넋을 잃은 사람과 같다.
온 세상에서 그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없으며
그대를 역시 세상이 알거나 모르거나 아무런 관심觀心이 없어져
그 마음씨가 저 만길 땅속에 깊이 묻힌 바위와 같아서
도무지 금이 간 데가 없을 것이다.
문 : 어떻게 하여야 이 마음법法을 알 수 있을까?
답 : 이 마음법은 깨달은 것도 없고 또한 아는 것도 없나니,
만약 이 마음 가운데 과연 깨달은 것도 아는 것도 없다면,
이 사람은 법法을 아는 사람이다.
법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니, 마음에 안 것도 본 것도 없으며
그것은 마음을 본 것이며, 한 법法도 깨닫지 못한것이 법法을 얻은 것이며, 한 법도 보지 못하는 것이 법을 본 것이며,
한 법法도 따지지 아니하는 것이 법法을 잘 따진 것이다.
문 : 이 마음은 아무것도 보는 게 없는 것인데,
어떠한 것이 걸림이 없는 지견知見가?
답 :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걸림이 없는 일체 알음알이의 바탕인
알음알이이며,
또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 보는 데 걸리지 아니하는 규規이다.
문 : 탐심과 욕심을 무슨 마음이라고 하나?
답 : 범부凡夫의 마음이라고 한다.
문 : 생멸生滅이 없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 : 성문聲聞 나한羅漢의 마음이다.
문 : 세상법에나 불법에나 아는 생각도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세상법에나 불법에
흔들리지도 아니 하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 : 대승보살大乘菩薩의 마음이다.
문 : 아무것도 깨달은 것도 없고 또한 아무 소견所見도 없으면
그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 : 아무 말도 아니하겠다.
이 본래의 마음자리는 생각만 해보려고 하여도 벌써 10만 8천리나
어긋나고 마는 것인데 어찌 말로써 대답할 수 있으랴.
이 마음은 무심無心한 자리며 말이 없는 자리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자리며,
특별한 불법의 정지견正知見도 가진 것이 없으며,
또한 피차彼此도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생명이다. 영혼靈魂이다, 귀신鬼神이다, 혹은 불성佛性이다,
보리菩提다, 열반涅槃이다, 성품性品자리다, 중도中道의 뜻이다
또는 반야般若다, 법화法華다 원각圓覺이다, 화엄華嚴이다 하는 그 많은 소리가 팔만대장경 속의 곳곳에 이름이 달리 나오고 그 어의語義를 쫓아서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보니 불교의 근본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현혹眩惑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술어述語를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한마디로 밖에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곧 마음이다. 마음이란 이 소리에는 앞에서 말한 열반이나 반야,
불성, 생명, 중도 영혼 등이 함축되어 표현된 것이다.
우리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죽음 그 자체에 의해서만이 결정된다.
천하의 영웅과 만고의 호걸도 이 죽음 앞에선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저 순종順從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마치 남의 일처럼
새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아니 죽음이라는 구렁이 앞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세계에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학자, 종교가, 철학자 등 일체중생이 누구나 다 업보중생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보는 견해도 역시 업안業眼으로 밖에는 보지를 못함이 또 사실이다. 우리 일체중생이 이 업안을 해탈하여 진리의 눈[心眼]으로 세상을 보고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런 진리의 눈[法眼]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심성心性수양 곧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함이니 견성見性이다.
견성[見性]이란 자기 성품(바탕)자리 일체만유一切萬有의 본성자리 곧,
진리이니 이 진리인 본심本心자리를 맑고 청정히 가져 만사만리萬事萬里를 통찰 할 줄 아는 지혜의 눈[慧眼]을 얻는 것이다.
출처 : ‘청담 스님 탄생100주년 기념말씀 모음집’ 중
[출처] 일체가 마음이고 불법[佛法] - 청담 스님[靑潭純浩]|작성자 곡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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