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구원, 해방, 깨달음
Salvation, Deliverance, Enlightment
자기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어야 한다
다양한 종교의 신학에서 구원은 또한 어리석음 · 죄악 ·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 · 선 · 지혜로 가는 해방으로 간주되었다. 339
위대한 역사적 종교에 소속된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무기한의 개인적 존속이라는 행복한 사후(死後) 조건(선한 행동과 올바른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리고 육체를 지닌 삶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었던 불행들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되는)을 의미하며 언제나 그런 의미를 지녀오고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종교 전통 안에서 영원의 철학을 하나의 이론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로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해왔던 사람들에게 ‘천국’은 뭔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시간 속에 살아가는 분리된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신성한 근본바탕과 결합하는 앎 속에서 실현되는 영원으로 진입하기를 동경했다. 현생에서 신성한 근본바탕과 결합하는 앎을 얻을 수 있고, 얻어야 하기 때문에(이들의 궁극적 의도는 이런 앎뿐이다), ‘천국’이란 전적으로 사후에 일어나는 조건이 아니다. 지금 여기here and now로 구출된 사람만이 완전하게 ‘구원된다’.
구원의 수단들은 윤리적인 동시에 지적이고 영적인 것으로서, 붓다의 팔정도(八正道)가 이것들을 탁월할 정도로 명료하고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340
첫째, 고통과 죄악의 원인은 분리된 에고 중심적인 존재를 향한 갈망이며, 그 결과 ‘나’, ‘나를’, ‘나의 것’이라는 갈망과 집착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아주 분명한 사실임을 올바로 믿는 것(정견)이다. 둘째는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올바른 의지(정사유), 셋째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을 향한 자비심과 최고의 사랑의 인도를 받는 올바른 언어(정어), 네 번째는 평화와 선의를 만들고 유지하려는 목적을 지닌 올바른 행위(정업)이다. 다섯 번째는 올바른 생계수단으로, 이를 수행하는 가운데 모든 인간 존재 또는 가능하면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직업의 선택(정명), 여섯 번째는 자기 조절을 향한 올바른 노력(정정진正精進), 일곱 번째는 삶의 모든 상황에서 훈련함으로써 그 결과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는 이유로 단지 부주의해서 그릇된 것을 저지르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올바른 주의 혹은 회상(정념), 여덟 번째는 근본바탕과 결합하는 앎인 올바른 묵상(정정正定)이다. 341
엄격한 20세기 실험 물리학자들만큼이나 ‘실체가 없는 질문’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던 팔리 경전 속의 붓다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돕기 위해 신성한 근본바탕이 사용하는 수단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렸다. 그가 말할 준비가 되어 있던 모든 것은 ‘슬픔과 슬픔의 종식’이었다. 이것은 고통과 악에 관한 엄청나게 잔혹한 사실과 그만큼 실증적인 또 하나의 사실, 즉 개인이 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를 둘러싼 세상에서 악의 총합을 줄이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힌두교와 특히 그리스도교 신학의 사색 주제에 부합하는 은총의 신비들을 풍부하게 다루면서 논의한 것은 오로지 대승불교뿐이다. 해방에 대한 초기 소승불교의 가르침은 마지막으로 기록된 붓다의 말씀, 즉 “형성된 모든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부지런히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라”를 그저 상세히 설명한 것일 뿐이다. 342
그 자신의 자아를 참자아로 깨달음으로써, 그는 자아가 사라진다.
그 덕분에 그는 조건 지어지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이는 최고의 신이며, 해방을 나타낸다. 자아가 없음으로 인해 그는 즐거움이나 고통에 관여하지 않고 완전함을 성취한다. <마이트라아나 우파니샤드> 346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역사상 중요한 신앙에 있는 것도, 멀리 있거나 부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지식에 있는 것도, 신앙 ․ 일 ․ 참회 ․ 죄악의 용서나 정당화와 신성화에 관한 어떤 공식적인 의견에 있는 것도, 그대로부터, 혹은 최고의 인간과 서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리나 정당성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대 안에서 되살아나고 재탄생한 신의 생명 혹은 신의 그리스도에 있으며, 다시 말해서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양면적인 삶을 회복하고 완전하게 결합하는 데에 구원이 있다. 윌리엄 로
여기에서 로law는 뵈메와 정통 프로테스탄트, 루터교도, 칼뱅교도, 영국성공회교도들이 무시하거나 박해하는 것을 인정했던 (이들이 의견일치를 볼 수 있었던 아주 소수의 항목 중 하나였다) 여타의 ‘영적 개혁가’들의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와 그들이 영혼 속에서의 새로운 신의 탄생이라고 불렀던 2천 년도 더 된 과거에 힌두교도들이 내면에서의, 그러나 개별적 에고를 초월하고 있는 참자아의 실현이라고 설명했던 경험과 분명 근본적으로 같다.
게으른 자도, 어리석은 자도, 둔한 자도
모든 매듭을 풀어주는 니르바나에 도달하지 못하리. 《본사경》 347
이것은 충분히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게으름을 즐기고, 항상 애써 묵상에 잠길 수 없으면서도 나태함과 비자각이 낳은 결과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한다. 그 결과 무엇보다 종말의 때에 우리 삶에 끼어들어,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게을렀던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단숨에 잘라낼 알렉산더 대왕 같은 구세주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은 조롱받지 않는다. 세상일이란 게 보통 그러하듯, 완전한 무아의 성취 여부에 따르게 되는 근본바탕과 결합하는 앎은, 설령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있을지라도, 아직 자아가 비워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아미타불이나 예수의 구원하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구원은 《우파니샤드》, 불교 경전,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의 저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전적인 해방이 아니다. 그것은 그 정도나 성질에 있어 전혀 다르다.
이 참자아Sef는 연구 혹은 지성과 학습을 통해서 깨달을 수 없다. 스스로 참자아에게 몰두하는 사람만에게만 참자아는 그 본질을 드러낸다. 부도덕한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는 사람, 내면에 평화가 없는 사람, 마음이 산만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참자아를 깨달을 수 없다. 《키타 우파니샤드》349
영적 즐거움과 육체적 즐거움 간에는 차이가 있다.
육체적 즐거움은 그것을 얻기 전에는 욕망이 생기지만 얻은 후에는 싫증이난다. 반면에 영적 즐거움은 그것을 얻기 전에는 모르다가 얻은 후에 욕망이 생긴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 351
10세기 무슬림 성자인 이집트인 니파라가 구원이라는 주제에 대해 쓴 것
'신은 내게 바다를 지켜보게 하셨다. 나는 배가 가라앉고 널빤지가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후 널빤지마저 가라앉았다. 그러자 신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떠도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떠도는 대신 물로 뛰어드는 사람은 위험을 무릅쓴다. 떠돌면서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바다 표면은 잡을 수 없는 섬광이다. 바닥은 칠흙 같은 어둠이다. 그 둘 사이에는 두려움의 대상인 거대한 물고기들이 있다." 352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마태복음 22;14>
14 불멸과 존속
Immortality and Survivial
어디로도 가지 않고, 어디에서도 오지 않는 자
불멸Immortality은 신성한 근본바탕의 영원한 현재에 참여하는 일이고,
존속Survivial은 어떤시간형태를 고집하는 일이다.
완전한 해방의 결과가 불멸이다. 존속이란 부분적으로 해방되어 천국으로 가거나, 전혀 해방되지 않은 채 자기 고유의 비 초월적 성질이 가진 법칙으로 인해 방금 떠나온 상태보다 더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속죄하는 혹은 체현된 노예상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355
영원 속에서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이전에도 이미 보존해오고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보존 하고 있다. 신성의 충만함 속에 계신 신은 자신의
이미지인 영혼soul속에 영원히 거주하고 계시므로. 에크하르트
물결이 일거나 잠잠하거나 물은 항상 물이다.
육체 안에 있든 육체를 벗어나든, 해탈한 자에게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고요하든 사나운 비바람이 일든 바다의 동일함은 아무런 변화를 겪지 않는다. <요가바시스타> 356
우리와 같은 영적 피조물에게는 육체가 필요하다.
그것을 앎으로써 축복받는 것들에 유일하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앎은,
몸이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성 베르나르 358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드물고 축복받은 일을 달성했으니, 현명한 사람이라면 모든 허망한 것을 허망한 이들에게 내버려 두고 삶이 죽음으로 바뀌기 전에 신 오직 그분만을 알기 위해 분발해야 한다. <스리마드 바가바탐>
선한사람들은 자신의 심신체mind-body를 영적으로 만들고,
악한 사람들은 그들의 영을 육체적이고 정신적으로 만든다.
완전히 영적인 심신체는 여래如來이며, 죽었을 때 어디로도 가지 않는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알지도 못한 채 잠재적으로는 항상 존재해왔던 곳에 그는 이미 실제적 그리고 의식적으로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359
존속이란 지속되는 의식과 심령매체의 어떤 변형이 합쳐진 결과물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특정 인간이 한가지 이상의 사후 형태로 존속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의 '영혼soul', 즉 과거나 미래 인격들의 비 개인적인 바탕이자 요소는 어떤 한 가지 존재 양태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반면, 그의 생각과 의도가 심령매체에 남긴 자취들은 새로이 개별화된 존재의 출발점이 되어 전혀 다른 존재 양태를 띨 수 있다. 362
15 침묵
Silence
갈망과 혐오의 목소리를 고요하게 잠재우는 일
"잘 들어라. 심판의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 <마태복음 12:36>
이기적이고 몰인정한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이런 쓸모없는 말들은 모두 신성한 근본바탕과 결합하는 앎으로 가는 길에 놓인 방해물이자, 내적, 외적 광명을 흐리게 하는 먼지나 날파리의 춤에불과하다.
혀를 감시하는 일은 물론 마음을 감시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모든 고행 중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엄중하며, 그 결실은 가장 크다.
삶 혹은 죽음과 관련된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활동하며 거래하고 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식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윌리엄 로 365
저는 진심으로 당신의 행복을 바라기에, 당신에게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할 만큼 이미 충분히 말한 것 같고, 실제로 무언가 필요하다면 정작 필요한 것은 쓰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일뿐이기 때문입니다.
말은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만, 침묵과 일은 생각을 모으고 영Sprit을 강화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언급된 말들을 이해했다면, 의견을 나누고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침묵과 집중을 통해 배운 것을 겸손과 사랑속에서 또 자신을 개의치 않으면서 착실하게 수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366
모든 광고물은 의지will가 침묵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하는 단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무욕Desirelessness은 해방과 깨달음을 위한 조건이다.
욕망의 작용을 확장하고 강화시키는 것은 고통과 악행의 주된 원인이자
인간의 영혼과 그것의 신성한 근본바탕 사이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368
16 기도
Prayer
제 안에서 당신 스스로에게 기도하소서
청원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신을 알거나 사랑할필요가 없으며, 마음속에 신에 대한 이미지를 알거나 사랑할 필요도 없다.
저 밖 이 우주 안에는 달콤한 말로 구슬리거나 강제로 그런 욕망들을 충족 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강한 확신으로, 자신의 에고와 에고의 욕망이 중요하다는 것을 뜨겁게 감지하는 것이 그에게 필요하다.
필요한 만큼의 믿음과 인내심을 갖고 '내 뜻대로 이루어지리라'를 반복한다면, 조만간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내 의지가 신의 의지와 일치 하는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영적. 도덕적 혹은 물질적으로도 좋은 것인지는 내가 미리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시간과 영원만이 대답해 줄 것이다. 370
신이시여, 당신께 무엇을 달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나이다.
당신만이 제가 필요한 것을 아시나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것보다 당신께서 저를 더 사랑하시나이다. 아버지여, 스스로도 어떻게 달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을 당신의
아들에게 주시옵소서. 저를 세차게 때리시거나, 치유하시거나, 저를 절망케 하시거나 고양시키거나 간에 저는 당신의 목적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을 모두 숭배하나이다. 저는 침묵하옵고, 저 자신을 제물로 바치나이다. 당신께 무릎을 꿇나이다. 당신의 의지를 성취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욕망도 가지지 않겠나이다. 저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 주소서. 제 안에서 당신 스스로에게 기도하소서. 페늘롱 373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와 관련된 존재로서의 신이 아니라 본질적인 그분 자체를 통해 신의 절대적 존엄을 우러러 공경하고, 인식하며, 경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것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선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그 분의 선하심을 사랑하는 것이다. 보르고잉 375
기도란 지성이 있는 영혼이 신께로 향하는 발동작용actuation으로써,
모든 선한 것들의 창조자이자 근원이신 그 분께 전적으로 의지함을 표현하거나 적어도 암시한다. 또한 그분께서 현존하시는 가운데 자아와 모든 피조물들을 낮추고 완전히 소멸시킴으로써 그분께서 마당히 받아야 할 온전한 사랑, 온전한 복종, 숭배, 영광, 예찬을 드리고자 하는 의지와 기꺼움을 표현하거나 적어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란 영을 그분에게 결합시키고자 하는 소망이며 의도이다.
그러므로 기도란, 이성적인 영혼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하면서도 신성한 행동으로 보인다. 모든 행동과 의무 중에서 기도는 가장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어거스틴 베이커 377
그대가 깨달음을 추구하는한,
특히 스스로 그것을 위해 수행하는 한, 그대는 도달할 수 없다.
영가 현각 <증도가>
어떻게 그것을 붙잡을 수 있겠는가? 잡으려 하지 말라.
더 이상 잡는 것이 없을 때 남는 것이 참자아the Self니라. 판치다시
나는 그대에게 신 안에서 혹은 신과 가까이 머물기만 하라고 명하노라.
거기에서 아무것도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분께서 권유하지 않으신 한 신께 아무것도 묻지 말라. 성 프랑수아 드 살 381
17 고통
Suffering
돌아오라,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창조의 목적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는 현혹적인 분리에로의 충동과 분리감에서 벗어나, 결합하는 앎unitive knowledge을 통해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383
살아있는 생명체의 존재는 궁극적으로 그들 각각의 최고선에 해당하는
목표와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체의 고통은 하나의 사실이면서 생명이 있는 존재에게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385
고통은 고통받는 자에게 분리감을 강화시키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갈망을 자극할수도 있고, 고통받기 이전의 갈망으로 그대로 남겨둘 수도 있으며,
고통을 완화시켜 자포자기 및 신에 대한 사랑과 앎 쪽으로 가도록 진보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388
사랑을 위해 고통받는 자는 고통스럽지 않다.
모든 고통을 잊기 때문에. 에크하르트
이 삶에서 연옥이란 없고 천국과 지옥만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내심으로 고난을 견디는 사람은 천국을,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성 필립 네리 389
보살菩薩의 서원誓願이란, 자아를 비우고 스스로 통로가 되는 은총과 보살의 노력 덕분에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최종적이고 완전한 해방에 이를 때까지 깨달음이라는 즉각적인 결실을 멀리하고 환생rebirth과 그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고통이나 죽음을 되풀이해서 받아들인다는 약속이다. 391
실제로 우리 모두는 신, 대자연, 다른 사람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신성하고 자연적이며 사회적인 환경과 적절한 관계를 맺는다면 천지창조로 인해 피할 수 없게 된 고통만이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 대자연 그리고 최소한 몇
사람과는 만성적으로 잘못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잘못된 관계의 결과는 사회적 수준에서 전쟁. 혁명. 착취. 무질서로 드러난다.
자연적 수준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원의 낭비와 고갈로,
생물학적 수준에서는 퇴행성 질병과 쇠퇴로, 도덕적 수준에서는 도가 지나친 오만함으로, 영적 수준에서는 신성한 실재에 대한 무분별함과 인간 존재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완전한 무지로 드러난다. 392
18 믿음
Faith
믿음은 극락으로 이끌지만, 다르마는 니르바나로 이끈다
궁극적인 영적 실재보다 낮은 어떤 초자연적 실체의 존재나 힘에 대한 믿음. 자기부정이 부족한 모든 형태의 숭배에 대한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라면 분명 인격 개선을 가져오며, 사후에 '극락 같은' 조건에서 개선된 성격으로 살게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시간적 질서 안에 존재하는 이런 개인적 생존은 근본 영과의 영원한 결합에서 오는 영생은 아니다. 이런 영생은 신성보다 낮은 무언가에 대한 믿음에서가 아니라 신성을 '아는'데서 성립한다.
'카르마'란 시간 속의 인과적 연쇄를 말하며, 시간적 자아에 대해서 '죽고' 시간과 원인을 넘어선 영원한 것과 결합함으로써만 그로부터 해방된다.
19 신은 조롱받지 않는다
God is Not Mocked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당신은 왜 “내가 그토록 많은 죄를 지었는데도
자비로운 신께서는 나를 벌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으셨습니까?
내가 당신을 수없이 많이 때렸는데도 당신은 전혀 모르십니다.
당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당신의 가슴에는 녹이 쌓이고 쌓여
신성한 신비를 보지 못합니다.
완고한 사람이 악한 행위를 할 때
그는 분별력의 눈 위에 먼지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는 죄악에 대해 오래된 수치심이 있으며
더 이상 신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의 거울에는 먼지가 다섯 층이나 쌓입니다.
녹슨 곳이 그의 강철을 갉아먹기 시작해서
그가 지닌 보석의 빛깔은 점점 흐려만 갑니다.
- 잘랄루딘 루미 400
만약 자유가 있다면(심지어 결정론자들도 자유를 확신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행동하지만), 그리고 아는 의식의 최종점이자 목적인 영적 실상이 있다면(이 주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항상 확신하고 있듯이), 모든 삶은 일종의 지능검사와 비슷한 일이 되며, 자각 수준이 높고 생명의 잠재력이 클수록 던져지는 질문이 날카로우면서도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월터 배젓Bagehot의 말을 인용할 경우 “우리가 기대하는 우주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신의 섭리, 혼란스러운 삶, 이상야릇한 물질세계, 한창일 때 갑자기 뚝 꺾이는 생활 등은 실제로 곤경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혹은 그와 비슷한 것들은 예속된 존재로 살아가는 도덕적 삶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삶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서 좋게도 나쁘게도 대답을 할 수 있다. 나쁜 대답을 한다면 스스로를 조롱하는 일self stultification이 될 것이다. 대부분 이런 자기조롱은 미묘하고도 즉각 감지할 수 없는 형태를 띠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올바로 대답하지 못함으로써 우리 존재의 보다 높은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자기조롱이 때로는 신체적인 수준으로 드러나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재앙을 맞거나 천천히 붕괴될 것이다. 올바른 대답은 영적 성장 및 숨겨진 잠재력의 점진적인 인식이라는 일차적인 보상을 받으며, 이차적으로는 (상황이 가능한 경우) 나머지 사람들 모두를 현실화된 신의 나라에 초대하게 되는 보상을 받는다. 카르마는 존재하지만 거기에 해당되는 행위와 보상은 초기 불교도들이나 히브리 저자들이 그래야만 한다고 순진하게 상상한 것처럼 항상 분명하면서도 물질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부유하게 살고 있는 나쁜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면적으로는 녹술고 어두워져 부식되는 반면, 고난을 겪고 있는 착한 사람은 그 보상으로 영적 성장의 과정에 있을 수 있다. 신은 조롱받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을 이해할 수 없음을 언제나 기억하자.
따라서 너희의 세상에 부여된 시각으로 영원한 정의를 보는 것은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
해변에서는 바닥을 볼 수 있지만
바다 한복판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바닥은 거기에 있지만 심연이 그것을 감추고 있노라.
단테의 신곡 중 천국편 제19곡
가슴이 순수한 자는 신성한 저의의 깊이를 저 멀리 내다볼 수 있으며,
우주과정의 세부사항을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원리와 성질을 일별할 수는 있다. 401-402
인간 삶의 목표와 목적은 신과 결합하는 앎에 있다.
그런 목표에 도달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될 수단으로 올바른 행위를 꼽을 수 있으며, 성취된 미덕의 정도와 종류를 통해서 해방을 주는 앎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고 그 질도 평가할 수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무는 그 결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신은 조롱받지 않는다. 406
* 이런 잘못된 신념들에는 한 가지 공통 요소가 있는데,즉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과대평가하고,영원히 지속되는 영원의 무시간적 사실을 과소평가한 점이다. 그러므로 머나먼 역사적 사건들의 구원이 최고 중요하다는 믿음은 매우 적절치 않으며 종종 혼란스러운 기록을 해석하는 데 있어 피비린내 나는 논쟁을 초래한다. 407
[출처] 영원의 철학 / 다섯|작성자 곡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