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고행, 비집착, 올바른 생계
Mortification, Non-Attachment, Right-Livehood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용하기
신의 나라에 있는 이 보물은 시간과 다양성multiplicity, 영혼 스스로의 작업, 혹은 간단히 말해 피조물의 본성에 의하여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영혼은 신의 나라를 그 자신 속에서 드러내는 경우, 이 다양성으로 부터 스스로를 분리할 수 있다. 여기서 그 영혼과 신성은 하나다.
에크하르트 175
격정을 궤멸하고 파괴하는 일은 미덕이지만 궁극적인 미덕은 아니다.
지혜의 발견이야말로 뛰어난 미덕이다.
이것을 발견하면 모든 이가 노래 부를 것이다. 필로 177
고행하는 자가 고행하지 않는 자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종종 더 나쁠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 소설, 기술심리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적 · 도덕적으로 엄격한 청교도들은 온갖 세속적인 미덕, 즉 검약 · 용기 · 인내 · 정절 등을 훈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악인일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이런 미덕들은 자만심, 질투, 만성적 분노, 때로는 적극적인 잔인함으로까지 발전된 냉혹함 lovelessness이라는 죄를 수반하거나 이것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수단을 목적으로 혼동함으로써 청교도들은 자신이 금욕적으로 엄격하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금욕적인 엄격함은 단지 덜 훌륭한 것을 희생시켜 에고의 보다 훌륭한 측면을 추어 올린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신성함이란 불명예스러운 것뿐 아니라 훌륭한 측면 속에서도 분리적 경향이 있는 자아를 완전히 부정하고, 그 의지를 신에게 바치는 일이다. ‘나', ‘나를’, ‘나의 것'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는 한 신성한 근본바탕에 대한 헌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과 결합된 앎 또한 없다. 무집착이나 (성 프랑수아 드 살의 표현으로는) 신성한 무관심holy indifference’의 정점까지 고행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의지self-will를 그저 한 채널에 서 다른 채널로 옮긴 것일 뿐, 자기의지의 전체 양이 줄어들지 않았 을 뿐 아니라 때로는 실제로 늘어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둣이 최고가 타락할 때 최악이 된다. 178
고행을 하지만 여전히 자만심에 차있고 자기중심적인 금욕주의자와 고행을 하지 않는 쾌락주의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후자는 칠칠치 못하고 야심이 없으며,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서 , 자신의 몸 · 마음 · 영 외에는 많은 해를 끼칠 에너지와 동기가 부족하다. 전자는 모든 부수적인 미덕을 갖추고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매우 큰 규모로 해를 끼치려고 마음먹을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도덕적인 준비가 되어 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종교적 언어로 ‘부도덕’하다는 말은 거의 세속적으로 자기탐닉적인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욕심 많은 사람들. 야망에 찬 사람들, 존경 받는 완강한 사람들, 권력과 지위를 향한 갈망을 올바른 종류의 이상적인 위선의 말로 감추는 사람들은 비난받지 않을 뿐 아니라 미덕과 독실함의 모델로 지지를 얻기까지 한다. 조직화된 교회의 대표자들은 전쟁과 혁명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의 머리에 후광을 씌우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하소연하듯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인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한다. 179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고행은 주로 혹독한 신체적 금욕생활이 아니다. 특정 상황에 처한 어떤 사람에게는 혹독한 신체적 고행이 인간의 최종 목적을 향해 진보하는 데 도움이 된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금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매우 다른 ‘초능력적인’ 힘의 성취다. 간청의 기도에 응답받을 수 있는 능력,치유나 그 밖의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 미래나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요령 같은 능력들은 종종 단식, 잠자지 않기, 자기 형벌과 어떤 인과적 연결이 있는 것 같다. 신을 중심으로 삼는 위대한 성인과 영적 스승들 대부분은 비범한 능력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런 것들을 비난하였다. 싯디Siddhis라고 부르는 그런 것들이 해방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환상이라고 인도인들은 말한다. 이런 것들은 삶의 주요 이슈와 무관하며, 이런 것들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거나 여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영적 진보 의 길에 방해가 될 뿐이다. 180
이런 이유 하나로 육체적 고행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극도로 수행할 경우 건강에도 해롭다. 그리고 건강하지 않다면 영적인 삶이 요구하는 지속적이고 꾸준한 노력의 성취가 아주 어려워진다. 또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보통은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육체적 고행은 신기록을 수립하려는 경쟁심과 허영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속적인 유혹이 된다. “육체적 고행을 하면 그대는 위대해지고 칭송받는다 ” 하인리히 조이제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적었다. 그를 이끌었던 경험들은 수 세기 전에 고타마 붓다가 그랬던 것처럼 , 그의 육체적 고행의 과정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성 테레사는 스스로에게 엄청난 고행을 가하는 것이 인내와 자비와 겸손으로 매일매일 일어나는 가족생활의 평범한 십자가를 견뎌내는 것보다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죽음의 순간까지 가장 괴로움을 주는 자기고 문의 형태를 수행하지 않도록 막지는 못했다. 이런 고행이 신과 결합하는 앎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심령능력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지며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180
* 다음은 《신성한 지혜Holy Wisdom》의 저자가 거트루드 모어 수녀를 위해 정한 규칙이다.
첫째, 인간의 법이든 신성한 법이든 간에 그녀는 그 법을 통해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 둘째,인간 혹은 신성한 법이나 신성한 영감이 그녀에게 금지한 것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그녀는 가능한 한 강한 인내심과 순종으로 신의 손길이 지워주신 모든 십자가와 자신의 자연스러운 의지에 반하는 것들을 감내해야만 한다. 빈약dia, 유혹, 고통이나 신체적 통증, 병, 불구, 더 나아가 친구의 상실, 필요한 물품이나 안락의 결핍들이 그 예다. 그런 십자가가 신으로부터 온 것이든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수단을 통해 온 것이든 간에 이 모든 것을 인내심으로 견뎌야만 한다… 이런 것들은 거트루드 수녀님이나 그 밖의 다른 영혼에게 충분한 고행이었으며, 누구에게도 다른 것을 조언하거나 강요할 필요가 없었다.
어거스틴 베이커
요약하면, 자기의지,사리사욕, 자기중심적 생각,소망과 상상을 제거하는 것이 최고의 고행이다. 극도의 신체적 고행은 이런 고행을 하도록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물론 우리의 죄에서 출발한 것은 제외하고)을 수용하는 것이 이런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특별한 자기부정 훈련을 실시할 경우에는 눈에 띄지 않으면서, 비경쟁적이고,건강에 해롭지 않아야 한다. 식이요법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양전문가들이 건강에 해롭다고 조언한 모든 음식들을 먹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경우, 자기부정은 자칭 겸손하다는 겉치레의 행위가 아닌 혀와 기분을 조절하는 형태를 띠어야 한다. 이것은 몰인정하고 실없는 말을 하지 않으며 (실제로 일상대화 중 약 50퍼센트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외부 상황이나 몸의 상태가 우리를 불안,우울,혹은 지나치게 들뜨게 만들 때 고요하게 그리고 침착한 쾌활함을 지니며 행동하는 것이다. 182-183
천상에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또는 명예, 보상, 두려움 때문에 자비를 행한다면
그런 자비에는 어떤 공덕도 없을 것이다. 《다르마의 분별과 수호에 관한 경》
신이시여, 지옥이 두려워 당신을 섬긴다면 저를 지옥의 불에 타게 하소서. 낙원에 갈 것을 소망하며 당신을 섬긴다면 낙원에서 쫓아내버리시옵소서. 그러나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당신을 섬긴다면, 당신의 아름다움을 거두지 마옵소서. 수피 여성 성자 라비아 184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의 자아중심적 신앙을 비난할 때,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자기 행동의 결실에 대한 개인적 갈망이나 두려움 없이 운명 지어진 신성한 의무를 행하라고 말할 때만큼이나 강했다.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만일 교황이 예수회 신학대학을 탄압한다면 어떤 기분이겠냐 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25분 정도 기도하고는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고행 중에서 가장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이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신성한 무관심’을 달성하는 것 말이다. 크게 성공한다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실패한다 해도 역시 좋은 일일 수 있는데, 그것이 시간에 속박된 제한된 마음에게 지금 여기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기만 한다면 말이다.
감정의 격동이 없는 사람이란 선이나 악이 그의 내적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고, 일어나는 일과 조화를 이루고,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한다. 《장자》 185
다음 날을, 다음 장소를 걱정하지 말라.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불안은, 우리 고민의 대상인 멀리 있거나 예측만하는 나쁜 일로 지금 여기를 물들기만 할 뿐이다. 186
가슴이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며 울고 있을 때,
영spirit은 찾은 것을 즐거워한다. 무명 수피의 격언 190
자기중심적인 삶을 잃어버림으로써, 지금껏 잠재된 채로 있아 발견하지 못했던 삶, 우리 존재의 영적 부분에서 볼 때에는 신성한 근본바탕과 고유하고 있는 삶을 지키게 된다. 새로이 발견한 이런 삶은 다른 삶보다 ‘더 풍요로우며’ 색다르고 더 고상하다. 그런 삶을 사는 일은 영원으로의 해방이며, 이런 해방은 더 없는 지복beatitude이다. 왜냐하면 아트만과 하나인 브라흐만은, 존재이며 앎인 동시에 지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뒤를 잇는 근본 영의 최종 결실은 기쁨이다. 고행은 고통스럽지만 그런 고통은 축복받기 위한 선행조건이다. 영적 경험에 관한 이런 사실은 때로 그것이 서술된 언어로 말미암아 모호해졌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은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지만(이 단순한 구절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매우 감동적이다), 우리는 매우 많은 노력을 하고 철저한 자기부정의 과정을 밟으려고 하지 않는 한 어린아이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191
많은 사람들이 이성과 의지로 이웃을 향한 겸손, 인내, 자비라는 미덕을 갖추지만 이는 영적 기쁨이나 사랑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종종 불평을 품고, 부담을 느끼며, 냉소적이 되는데도 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성을 불러일으켜 이런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이성과 의지로 미덕을 행하는 것이지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총과 영적이고 신체적인 훈련을 통해 이성이 빛으로, 의지가 사랑으로 바뀌면 사랑으로 미덕을 행하게 된다. 월터 힐턴
어떤 것도 나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으면 모두가 우리의 것이 된다.
모두가 우리의 것일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사랑은 싸구려 물건이나 진흙과는 다르다.
나누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지만, 영sprir의 재화를 제외하고는 완전한 공산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집착과 자기부정 상태에 있는 사람이 그런 재화를 소유하고 있을 때만이 공산주의가 가능하다. 단순한 지적, 미적 재화를 창조하고 즐기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고행은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예술가나 철학자, 과학자의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은 경우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가난한 삶을 선택한다. 그들이 떠맡아만 하는 고행은 결코 이런 것만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예술가는 실용적이면서 자기 존중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생각하는 평범한 인간의 경향성을 부정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철학자는 자신의 상식을 극복해야 하며, 연구자는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관습적으로 생각하려는 유혹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신비스러운 사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미적, 지적 재화를 창조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그런 것이 재화가 창조된 후 이를 즐기는 자에게도 해당된다. 193
<마이트라야나 우파니샤드>의 구절에 "그 자신의 자아를 참자아로 봄으로
써, 그는 자아가 사라지고(그러므로 사심 없이 행동하며) 그 덕분에 그는 조건 지어지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이는 최고의 신비이며, 해방을 나타낸다. 자아가 없음으로 인해 그는 즐거움이나 고통에 관여하지 않고(다시 말해 무집착 또는 신성한 무관심의 상태로 들어감). 완전함을 성취한다."
고행이 완전해졌을 때, 그것의 가장 특징적인 결실은 단순함simplicity이다.
고행이란 사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 즉 도道. 진여.신의 의지와 조화를이루는 반응들을 마침내 배우게 되는 공부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206
진정한 단순함이란, 성찰이 불가능할 정도로 영혼이 외부대상에 압도되지도 않지만 자의식이 유도하는 끝없는 정교함에 몰두하지도 않는, 모자란 생각이나 꾸미는 태도 양쪽 모두에서 자유로운 중용에 있다. 모든 단계에 대해 논쟁을 벌이거나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가고자 하는 곳을 바라보는 그런 영혼은 진정한 단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단순성이 실로 위대한 보물이다.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값진 진주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첫 번째 단계는 영혼이 외부 대상들을 치우고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진정한 관심을 아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올바르고 자연스럽다. 대부분은 영리한 자기애에 불과한데, 이것은 세상의 중독을 피하려는 것이다.
다음 단계에서 영혼은 자신에 대한 묵상에 더하여 자기가 두려워하는 신에 대한 묵상을 추가해야 한다. ~
세 번째 단계에서 불완전한 자기묵상으로부터 벗어난 영혼은 그 대신 신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하며, 그 분 안에서 점차 자신을 잊어버린다. 영혼은 그분으로 가득차고, 자기만으로 사는 것을 중단한다. 그런 영혼은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하거나 자신의 잘못에 무관심하지도 않다. 그런 것들을 예전보다 더 잘 알아차리며, 더 많은 빛이 그들을 더 단순한 형태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자기 앎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불안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페늘롱 202
얼마나 놀랍도록 정확하고 섬세한가! 가장 근거없고 황당한 20세기의 허영 한 가지는 프로이트 시절 이전에는 아무도 심리학에 대해 몰랐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심리학자들은 그 선조들 중 가장 유능한 심리학자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페늘롱과 라로슈푸코는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깊고 불명예스러운 동기를 표면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종종 페르소나persona의 공손한 가면 아래 작동하는 실제적인 힘은 성(性)과 권력에의 의지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203
“ ~ 윗사람 모두가 열망하는 더 높은 복종이 있는데, 성 바울조차도 여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했지. ‘모든 사람들에 대한 모든 것’이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이런 보편적인 복종을 통해서라네. 우리 주님을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모든 것을 우리 윗사람으로 존중한다네.”
이런 규칙에 따라서 나는 종종 성 프랑수아 드 살이 모든 사람을, 그에게 다가오는 가장 천한 사람에게조차도 자신이 더 낮은 사람인 것처럼 대하는 것, 누구도 거절하지 않고, 훼방꾼이 아무리 집요하고 타이밍이 좋지 않아도 조금도 지치거나 성마르거나 짜증내지 않고 말하거나 들으면서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는 것을 관찰하였다. 왜 당신은 시간을 그렇게 낭비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그는 끊임없이 대답했다. “그것은 신의 의지입니다. 이것은 그가 내게 요구하는 것이지요.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내가 이 일을 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의 신성한 의지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빛을 발하는 중심입니다. 그밖의 것들은 지루하기만 하거나 흥분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장 피에르 카뮈 216
07 진리
Truth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두루마리가 진짜 경전이다
붓다는 실로 어떤 진리도 설파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내면에서 진리를 깨달아야 함을 통찰하셨기 때문에. <장엄경론>
이른바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 《금강경》223
사실인 진리Truth-the-Fact의 성질은 그것과 올바로 상응하지 않는 언어적 상징이라는 수단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기껏해야 넌센스나 모순으로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영적 저술가들은 피할 수 없는 이런 역설에 고의적이고 계산된 엄청난 양의 언어들(지성의 원죄인 자족인 자기만족으로부터 독자들을 놀라게 만들고 충격을 줄 수 있도록 고안된 난해한 말, 과장, 모순되거나 유머 넘치는 엉뚱한 생각)을 덧붙였다. 도교와 선불교 스승들은 이런 간접적인 역설들을 특히 선호하였다. 사실, 선불교는 그릇된 추론과 심지어 난센스조차도 ‘폭력으로 천국을 빼앗으려는’ 마태복음 11: 12 도구로 활용하였다. 완성의 삶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비논리적인 문구에 대해 추론적 명상discursive meditation을 수련하도록 장려되었다. 그 결과는 모든 자기중심적이고 세계중심적인 추론과정에 대한 일종의 귀류법(歸謬法) ‘이성’으로부터 직관적인 ‘지성intellect',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본바탕을 진정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지성‘에까지 이르는 갑작스런 돌파구였다. 우리에게 이런 방법은 낯설면서도 기괴한 인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마침내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metanoia, 또는 의식과 성격에서의 변용을 일으킬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다. 224
깨달은 사람이 가르침을 펴지 않는다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말이란 한 번 정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많은 경우에 치명적이다.
예수: 자신이 들장미 숲보다 더 나쁜 칼sword을 주러왔다.
성 바울: 사람을 죽이는 문자와 사람을 살리는 영spirt을 구분
이 삶에서 상상력으로 상상할 수 있고, 이성으로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신과의 결합에 있어서 직접적인 수단도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십자가의 성 요한 226
언어와 분별의 등불을 들고
언어와 분별을 넘어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능가경》
지성적 혹은 직관적인 ‘깨달음의 길’로의 진입은 ‘언어와 분별’의 이성적이고 정서적인 길을 따라간 후 그것을 버림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자아가 비워짐으로써 문장서 영spirit으로, 이론에서 직접적인 앎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화된 그리스도 교회들은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는 치명적인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32
언어화된 진리에 익숙해지는 것,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특별한 철학 분야를 연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가장 평범한 경험조차도 제대로 혹은 적절하게 언어로 설명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233
후기 불교 철학에서는 언어가 인간의 창조적 진화를 결정하는 주된 요소 중 하나였다. 존재의 다섯 범주, 이름, 모양, 분별, 바른 지혜, 진여가 인식되었다. 첫 세 개는 나쁜 것, 마지막 두 개는 좋은 것과 관련이 있다. 감각기관을 통해 모양이 구별된 후 이름 붙이기를 통해 구체화됨으로써 언어는 사물로 간주되며, 상징들은 현실의 척도로 사용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언어는 분리감을 일으킬 뿐 아니라 개인적 자족감이라는 신성모독적인 생각을 만드는 주요 원천으로, 필연적으로 탐욕 ․시기 ․권세욕 ․분노 ․잔인함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이런 유해한 격정으로부터, 무한정 오래 지속되고 반복되는 분리된 존재라는 필요성이 갈망과 집착의 저절로 계속되는 조건들 속에서 나타난다. 유일한 탈출은 의지의 창조적인 행위에 의해, 붓다의 가피를 받으면서, 무아를 통해 바른 지혜로 인도되는 것인데, 이는 다른 무엇보다 이름 ․모양 ․분별의 참된 평가로 이루어진다. 바른 지혜를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을 도취시키는 ‘나’, ‘나를’, ‘나의 것’이라는 망상으로부터 벗어나며, 시기상조의 편향된 황홀경 상태에서 세계를 부정하거나 또는 평범한 육체적인 인간처럼 살면서 세계를 긍정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면서, 마침내 삼사라와 니르바나가 하나라는 거룩한 자각, 순수한 진여Suchness(언어적 상징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암시만 할 수 있을 뿐인 궁극적인 근본바탕)의 통합적인 이해에 도달한다. 235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불행히도 키츠Keats는 자신이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238
그의 문장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아름다움이란 근본적인 사실이며, 근본적인 사실은 아름다움으로, 이는 모든 특별한 아름다움의 원리이다.’라는 의미와 또한 ‘아름다움은 직접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이 직접 경험은 원리로서의 아름다움, 태고의 실재로서의 아름다움과 ed일하다’라는 의미이다. 첫 번째 진술은 영원이 철학이 갖고 있는 신조에 충분히 부합된다. 형언할 수 없는 일자(一者)가 스스로 드러난 세 가지 중에는 선, 진, 미가 있다. 우리는 전체의 부분들 사이에 존재하는 조화로운 간격에서 아름다움을 지각한다.
두 번째 의미에서 살펴본 키츠의 진술에 영원의 철학 옹호자들은 분명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은 신성한 근본바탕이나 신성에 대한 직접적이고 결합적인 경험과 질적으로 유사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동일하지 않으며, 경험된 특정한 아름다움은 이것이 어떤 신성한 성질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신성Godhead과는 꽤 거리가 멀다. 시인, 자연 애호가, 심미가들은 자아를 비운 묵상가에게 허락된 바와 유사한 실재를 포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완벽히 자아를 비우는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성한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는 것이 불가능했다. 시인은 은총과 영감에 있는 약간의 특성을 다른 사람들이 백지의 공간, 즉 그가 지은 시의 행간에서 느낄 수 있도록 단어를 배열하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 이런 재능은 위대하고 소중한 재능이다. 그러나 시인이 자신의 재능에만 만족한다면, 자기가 비워짐으로써 신성한 근본바탕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 자체를 포착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지 않고 예술과 자연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계속 숭배한다면, 그는 우상숭배자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그런 우상숭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에 머물고 만다. 239-240
아름다움의 경험은 순수하고 자명하며, 기쁨과 의식의 똑같이 혼합되어 있고, 그 밖의 다른 지각과 뒤섞여 있지 않으며, 신비 체험과 쌍둥이 형제이다. 그것의 생명은 초감각적인 경이로움이다...
신의 형상은 그 자체가 그것이 인식되는 기쁨이듯이, 스스로 거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즐긴다. 비스바나타 240
위대한 진리는 대중들의 가슴을 사로잡지 않는다.
이세상 모두가 잘못을 저지를 때,
진정한 길을 알고 있다 해도 어떻게 내가 안내할 수 있단 말인가?
성공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성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알고 있다면, 이것은 또다른 오류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때는 단념하고 더 이상 애쓰지 않는 것이 좋다.
내가 애쓰지 않는데 누가 애를 쓸 것인가? <장자>242
그대의 영리함을 팔아서 당혹감을 사들여라.
영리함은 의견일 뿐이지만, 당혹감은 통찰이다. - 잘랄루딘 루미 (p.244)
더 이상 동물이 아닌 영적 수준에서 영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분리된 자아를 의식적으로 초월할 수 있으려면 우선 스스로를 분리된 자아로 자각해야만 한다.
신성한 비자아Not-Self와 같은, 내면의 더 높은 자아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더 낮은 자아와 싸움을 벌여야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영리함을 너어서서 진리의 지적 비젼,신성한 근본바탕과 결합하는 직접적인 앎으로 가기 위해 자신의 영리함을 이용해야만 한다. 245
자기의지와 에고 중심의 영리함이 활동을 그치면 영원한 진여의 텅 비고 순수해진 영혼 속에서 활동할 수 있다.
내면의 정점에서 영원을 알게 되면, 바깥세상 경험의 충만함 속에서도 그것을 알게 된다.
시간의 날개에서 영광스러운 영원을 불현듯 본 적이 있는가?
어느 한 대상의 작은 점에서 빛나는 무한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영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올라가는 첨탑.
그들은 거기에서 만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삶의 심연에서 만족하며 앉아 있다. 피터 스테리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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