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철학/올더스 헉슬리
20 종교로 인해 짓는 죄
Tantum religio potuit suadere malorum
가장 근본적인 속박의 원인은 잘못된 믿음과 무지
야망에 찬 이상주의자들은 기록된 역사를 통해서 그들 자신의 말솜씨와
권력에의 갈망으로 인해 자신들은 형제들의 최고선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확신할 정도로 스스로를 기만함으로써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해악을 끼쳤다. 과거의 경우 그런 사악함을 정당화시킨 것은 '신'혹은 '교회' 혹은
'진정한 신앙'이었다. 오늘날 이상주의자들은 '혁명', '새로운 질서', '보통사람들의 세상' 혹은 단순히 '미래'라는 명목하에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며 착취한다. 마지막으로는 가짜 종교인들인 자신들의 종교를 빙자한 마술적인 수행의 결실인 힘을 얻기 시작할 때 생기는 유혹들이 있다. 왜냐하면
제대로 한 경우 제물, 주문, '빈말의 되풀이'는 특히 신체적 고행과 함께
수행하는 경우 실제로 결실을 맺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결실의 일부는 자기암시의 산물이다(쿠에가 환자들 스스로 병을 치료하게 만든 것은 '빈말의 되풀이'를 통해서였다) 409
의식과 빈말의 되풀이는 묵상의 보조수단으로써, 산란한 세상사의 혼란
와중에서 잠시 잊게 되는 진리를 상기하는 수단으로써 종교에서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말하거나 수행하기 위해 이들을 일종의 마술로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하거나 에고를 높이는 결과를 낳는데(이는 더 나쁘다), 이는 어쨌든 인간의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412
그대가 항상 말의 문자만을 다루고, 항상 문자를 핥아먹고, 항상 문자들을 씹어먹는다면, 그대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란 말인가? 그대가 굶주린 사람이 된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존 에버라드 413
사람들은 요청한 바를 항상 얻게 된다. 오로지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들이 요청한 바가 사실상 무엇인지는 그것을 얻을 때까지 결코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들이 원했다면 그들은 카스텔리오와 뎅크의 뒤를 따랐겠지만 그들은 칼뱅과 루터를 선호했는데, 믿음에 의한 정당화와 예정설 교리가 영원의 철학 교리보다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웠을 뿐 아니라 덜 엄격했다. 그런 교리가 사실이라면 마음 내키지 않는 자기부정self-naughting의 과정, 즉 영원한 실재에 대한 앎으로 해방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선행 조건을 거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덜 엄격할 뿐 아니라 분명한 교의와 추상적 진리를 삼단논법으로 증명하는 지성인들의 구미에 더 잘 맞았다.
신을 믿고 기다리는 일은 지루한 법이다. 논쟁하고, 반대파를 꼼짝 못하게 하고, 화를 내면서 그것을 ‘정당한 분노’라고 부르고, 그리고 마침내는 논쟁에서 주먹잘로, 언쟁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애로운 가호함benigant asperity'이라고 달콤하게 묘사한 박해와 처벌로 가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는가! 417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속박의 원인은 잘못된 믿음 또는 무지다.
무지는 완전히 극복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결국 항상 의지will의 문제임을
기억하자. 만약 우리가 모른다면, 그것은 모르는 것이 더 편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최초의 무지는 최초의 죄악original sin(원죄)과 같다.418
21 우상숭배
Idolatry
진리와 정의가 새로운 우상이 될 때
우리의 교육은 보다 원시적인 형태의 우상숭배를 비난하는 동시에 영원의 철학과 영성수행을 비난하거나 적어도 무시하고 있다. 최하단에는 허튼소리, 최상단에는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신성 대신에 숭배. 믿음. 경배의 대상으로서 정확히 인간적인 개념들과 이상들로 된 신전을 구축하였다.
학자 집단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는 물신숭배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정치적. 사회적 우상숭배든 간에 여기에 열성적으로 헌신하는 자들은 블랙베리만큼이나 흔하다. 420
다음의 내용은 1836년 토머스 아놀드가 자신의 옛 제자이자 미래의 전기 작가인 A.P.스탠리에게 쓴 매우 탁월한 편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광신Fanaticism은 우상숭배다. 거기에는 우상숭배라는 도덕적 죄악이 깃들어 있다. 즉 광신도는 무언가 자기 자신의 욕망의 산물을 숭배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지하는 자기희생마저도 외관상의 자기희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실상 전혀 가치를 두지 않고 있는 자신의 성질이나 마음의 일부를 가장 가치를 두는 것을 위해 제물로 바치기 때문이다.
내게는 도덕적 결함이 우상숭배로 보인다. 즉 우리 마음에 가장 맞는 어떤 생각을 세우고, 그것을 (그분께서는 완전함에 대한 모든 생각을 결합시켜 그것을 조화롭게 하고 연결시켜서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에 그분만 우상이 될 수 없으며 우상숭배를 고취시킬 수 없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놓는 것 처럼 보인다. 이제 내마음의 자연스러운 경향으로 볼 때, 즉 내 마음을 가장 좋은 상태에 둘 때, 진리truth와 정의justice는 내가 따라야 할 우상이 될 것이다. 그것들은 우상이 되기 쉬운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마음이 원하는 모든 양식을 공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숭배하는 한 존경, 겸손, 부드러움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은 진리. 정의, 그리고 이 모든 여타의 자질들을 포함시키셨다.... 편협한 마음은 사악해지기 쉬운데, 왜냐하면 그런 마음은 우리의 도덕적 본성의 모든 부분에까지 그 조심스러움을 확장시키지 못하며, 그렇게 무시하면 무시된 부분에서 사악함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자기의지를 포기하고 지속적인 묵상과 비집착을 통해 순간순간 신의 의지에 맡길때, 또 그렇게 하는 한 은총과 영감이 주어진다.
은총이 진실로 '초자연적인 경우, 전 성격 중 한 측면에서 일어난 개선이 다른 측면의 위축이나 퇴화를 초래하지 않는다. 423
견고함, 광신, 무자비함, 영적 교만들은 (자기의 힘으로 하거나 도움을 받더라도 개인이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아닌 목적의 성취에 전념할 때, 신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관념들이나 도덕적 탁월성을 과장하여 투사할 때 주어지는 유사은총에 의해서만 보강되는) 개인적인 노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성취한 금욕적인 자기개선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부작용이다. 윤리적 미덕 자체를 우상숭배 식으로 숭앙하는 것은 그 대상을 무효화시키는데, 아놀드가 주장하듯이 전면적인 발달이 부족하기 때문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장 고차원적인 형태의 도덕적 우상숭배 조차도 신을 가리고, 그럼으로써 깨달음과 해방을 주는 실상에 대한 앎을 얻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424
22 감정에 호소하기
Emotionalism
정서와 느낌의 우상숭배는 대가를 치른다
그대는 전적으로 타인에게 헌신할 뿐 결코 자기본위적이어서는 안된다는 믿음으로 모든 삶을 소비하였다.
자기애로 부터 훨씬 벗어나서 항상 관대하게 이웃에게 헌신한다는 내적
선언만큼 자만심을 만족시키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헌신은 실제로는
그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대의 자기애가 빈번한 자축self-congratulation의 경지에 이르면 그대는 거기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대의 모든 감수성은 그대가 자아에 충분히 만족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대가 지니고 있는 모든 감수성의 근저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대를 날카롭고 예민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나'다. 그대는 인간은 물론 신께서도 그대에게 만족하기를 바라며, 신과의 모든 거래에서 그대 스스로에게 만족하기를 바란다.... 425
사람들이 환상을 피하려고 애쓰는 공상보다 더위험한 환상은 없다.
우리를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만드는 것은 상상력이다. 상상. 느낌. 맛을 통해 우리가 찿는 확실성은 광신이 일어나는 가장 위험한 원천 중 하나다.
이것은 신께서 그대가 그대의 가슴에서 발견하게 만드는 허영과 부패의
심연이다. 그대는 진정한 겸손에 속하는 고요함과 단순함으로 그것을 지켜보아야한다. 자기자신의 불완전성을 바라보며 슬픔에 잠기는 것은 자기애일 뿐이다... 페늘롱 426
모든 이해를 넘어선 평화는 영spirit이 맺는 결실 중 하나다. 그러나 이해를 넘어서지 않은 평화도 존재하는데, 정서적인 자제심self-control과 자기부정self-denial이라는 더 겸손한 평화로서, 이는 영이 맺는 결실이 아니라 영의 결실에 바드시 필요한 뿌리 중 하나다.
불완전한 자는 진정한 헌신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 속에서 감각적인 달콤함을 찿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 회개Repentance란 메타노이아metanoia’ 혹은 ‘마음의 변화'다. 이것이 없다면 영적인 삶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영의 삶은 그 행위,생각,그 존재 자체가 진로를 방해하는 회개해야 할 죄악이 되는 그 ‘낡은 사람’의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필요한 이런 마음의 변화는 보통 슬픔과 자기혐오를 수반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이 지속되어서는 안 되며’ 양심의 가책이 고정된 습관이 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 중세 영어에서 '양심의 가책remorse’이 갖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또다시 물다 again-bite' 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놀람고도 자극을 주는 일이다. 이런 식의 야만적인 만남에서 누가 누구를 무는 것일까? 관찰과 자기분석을 통해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칭찬할 만한 자아의 측면이 불명예스러운 자아의 측면을 물고 스스로도 물려서 회복불가능한 수치심과 절망으로 인해 괴로움을 주는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페늘롱의 말을 빌면, “자신의 불완전성을 바라보며 슬픔에 잠기는 것은 자기애self-love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비난Self-reproach 은 고통스럽지만 바로 그 고통이 자아가 아직 온전하다는 뚜렷한 증거다. 태만한 에고에 주의를 고정시키고 있는 한 신에게 주의를 고정시킬 수 없으며,(주의를 먹고 살아가고 그런 영양공급을 끊을 때만 사라지는) 에고는 신성한 광명 속에서 녹아내리지 않는다.
428
사실상 신성한 근본바탕과 결합하는 앎에 목적을 둔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전체 중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부르심을 받지만,
선택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선택받는 자도 드물다. 431
23 기적
The Miraculous
영혼과 신 사이에 드리워진 방해물
물위를 걸을 수 있는가? 그대는 지푸라기 보다 낫지 않다.
공중을 날 수 있는가? 그대는 한 마리 파리보다 낫지 않다.
그대의 가슴heart을 정복하라. 그러면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니.
- 헤라트의 안사리 (p.434)
수피들은 기적을 영혼과 신 사이에 드리워진 '장막veils'으로 생각한다.
힌두교 영성의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한가지에 집중하는 명상one-pointed
contemplation의 부산물로서 구하지도 않았는데 찿아올 수 있는 싯다
Siddhis, 즉 심령능력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이런 능력의 개발은 영혼을 실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깨달음과 해방의 여정에서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쌓는다고 경고하였다. 435
24 의식, 상징, 성찬식
Ritual, Symbol, Sacrament
영원으로 통하는 문인가, 속박의 도구인가
영혼은 심상이 없는 묵상 속에서 실재와 결합하는 앎에 도달한다. 430
인간의 최종 목적을 성취하는 데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상징들이 적을수록 좋다.
확실히 이 모든 사람들이 숭고하다.
그러나 분별력이 있는사람을 나는 나의 참자아로 본다.
왜냐하면 그만이 나를 사랑하고,
나 스스로가 그의 헌신적인 가슴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긴 생을 통해
그의 분별력은 숙성하였다.
그는 나를 자신의 은신처로 삼고
브라흐만이 모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은 얼마나 드문가!
<바가바드기타> 442
모든 사물, 모든 사건이나 생각은 피조물과 창조주, 어느 정도 거리가
먼 신의 현시와 소위 드러나지 않은 신성의 빛 사이에 있는 교차점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 모든 사건이나 생각은 한 영혼이 시간에서 영원으로 통과할 수 있는 문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의례를 중시하고 성찬식을 중시하는 종교는 해방으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인간은 힘과 자기고양self-enhancement을 사랑하며, 신성시되는 모든 의례, 모든
주문형태, 모든 성찬 예식은 매혹적인 심령적 우주에서 흘러나온 힘이 육화된 자아의 우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이 때문에 의례를 중시하고 성찬식을 중시하는 종교는 동시에 해방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449
<우파니샤드>의 저자들에서 소크라테스, 붓다로부터 성 베르나르에 이르기까지 영적 삶을 살았던 모든 스승들은 자기에 대한 앎self-knowledge이 없이는 신을 충분히 알지 못하며, 끊임없는 묵상 없이는 완전한 해방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사물을 상징으로, 인간을 성령의 사원으로, 행위를 성찬sacrament으로 생각하도록 배운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우주와 그 근본 바탕과의 관게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자신의 형제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방법을 배운 사람이다. 451
"로고스가 내재함으로 인해 모든 것은 하나의 실재Reality를 갖게 된다.
그것들은 베단타의 경이로운 말처럼 환상이 아니고 성찬이다."
케네스 손더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와 주변 사물들이 로고스와 완전히 독립된
자체적인 실재를 갖는다고 믿고 있다. 이런 믿음이 그들의 감각, 갈망, 사적인 생각과 자신의 존재를 동일시하도록 인도 하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와의 자기동일시는 신성한 영향과 해방의 가능성으로부터 그들을 효과적으로 차단시키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 대다수에게 사물들은 상징이 아니며, 행위는 성찬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그들이 그렇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가르칠 필료가 있다. 452
25 영적 훈련
Spiritual Exercises
새로운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는 약의 사용법
영적 훈련이란 고독한 개인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신에게 비밀리에 기도할 때 그 사람이 이용할 수있는 장치다.
영적 훈련을 하는 경우 깨달음이 일어나거나 깨달음이 보장된다고 믿는 것은 우상숭배이자 미신에 불과하다. 이들을 모두 무시하면서 최종 목적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이들이 도움이 될지, 도움이 된다면 어떤 식일지를 알아보는 일마저 거절하는 것은 독선이자 완고한 반계몽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완전성이란 신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최고의 사랑Charity은 우리를 신과 인간에게 올바로 결합시키는 유일한 미덕이다. 그런 결합이 우리의 최종 목표이자 목적이며 나머지 모두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성 프랑수아 드 살 457
그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배웠을 때, 사랑받는 이the Beloved에게 닿게될 것임을 알라. 배워야 할 다른 비밀은 없으며, 나는 이 이상을 알지 못하느니. 헤라트의 안사리 460
12년 동안 나는 내 영혼을 연마하는 대장장이였다. 내 영혼을 고행의 용광로에 넣고 전투의 불로 태웠으며, 질책의 모루에 올려놓고 내 영혼을 거울이 될 때까지 비난의 망치로 세게 때렸다. 5년 동안 나는 내 스스로 거울이 되었으며 숭배와 신심의 여러 행위로 그 거울을 닦았다.
그런 다음 일 년 동안 나는 묵상 속에서 응시했다. 나는 자만심, 허영, 자기기만, 헌신에 의지하고 내 일을 칭찬하는 거들을 내 허리에 두르고 있음을 알았다. 그 거들이 닳아 없어지고 이슬람을 새로이 고별할 때까지 5년을 더 노력하였다. 나는 창조된 만물이 죽어있음을 보았다. 나는 죽어있는 만물 위에서 아크비르akbir를 네 번 낭송했으며 그 장례식에서 돌아왔다.
피조물의 개입 없이 오로지 신의 도움을 통해서만 나는 신께 도달하였다.
비스툰의 비야지드 461
수행자는 훈련 중에 태양이나 달, 연꽃처럼 보이는 것, 지하세계 혹은 하늘, 불과 같은 다양한 형태를 (상상을 통해서)본다. 이런 모습들은 모두 그를 철학자의 길로 안내한다. 이들은 그로 하여금 성문의 상태와 연각의 영역으로 옮아가게 한다.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이미지가 없는 상태에 있을 때는 진여와 일치된 상태가 드러나며, 온 국토에서 붓다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빛나는 손으로 이 수혜자의 머리를 만질 것이다. <능가경> 467
집중은 집중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속 산물이라는 사실로 인해 때로는 일종의 잘못되거나 불완전한 묵상을 초래한다. 진여나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본바탕은 의지. 상상. 느낌. 혹은 지성에서 자아중심이 없는(타인 에고 중심성도 없는) 사람에게서 드러난다.
소멸Annihilation이란, 묵상으로 말하면 "이미지가 없는 상태'이며, 활동적인 삶으로 말하면 시간 속에서 영원을 포착할 수 있고 삼사라가 니르바나와 하나인 완전한 비집착 상태이다. 468
"고정된 형상으로 신을 찿는자는 그 형상을 잡고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신을 놓치고 있다." 에크하르트
어떤 형태의 정신적 기도가 되었든 그것을 수행하는 길에 놓인 주요 장애물은 만물의 본성에 대한 무지(물론 의무교육이 실시되는 이 시대보다 더 최악은 아니다)와 자기이익, 격정 및 기술적으로 볼때 "좋은 시절'로 알려진 것과 관련된 긍정적. 부정적 정서에 대한 몰입이다.
수행을 해 나갈 때 정신적 기도의 목표를 향한 진전에 있어서 생기는 주요 장애물은 산만함distraction이다. 471
가장 도움이 되는 일부 영적 훈련은 실제로 산만함을 이용하며 자기포기, 정신적 고요함, 신과 관련된 수동성에 있어서의 이런 장애물들을 진보의
수단으로 변형시킨다.
분리된 개인적 자아가 더 커지면 거기에 비례해서 신성한 실상에 대한 자아의 자각이 줄어든다. 산만함에 대해 표면의지가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 분리된 개인 자아가 자동적으로 커지며, 따라서 신에 대한 앎과 사랑에 닿을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다. 신을 가리우는 우리의 백일몽을 없애려고 강제로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타고난 무지의 어둠을 심화시킬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산만함과 싸우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산만함에서 빠져나갈 길을 찿거나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 472
빛 속에 거주하면 비틀거려 넘어질 일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빛 속에서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으니까.
그대가 집 밖을 걸을 때, 그 빛은 그대 가슴속에 그대와 함께 현존하므로 자 여기. 자 저기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대가 침대에 누워있을 때 그대를 가르치기 위해 나타나고, 밖으로 방황하는 그대의 마음과 그대의 드높은 생각들 그리고 상상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복종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그대 생각을 쫓아가면 그대는 금방 길을 잃기 때문이다. 이 빛 속에 거주함으로써, 그 빛은 그대에게 죄악의 몸과 그대의 타락과 그대가 있는 파멸의 땅을 보여줄 것이다. 그대에게 이 모든것을 보여주는 그 빛 속에 서 있으라.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가지말라. 조지 폭스 479
26 끈기와 규칙성
Perseverance and Regularity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만일 그대가 “이제 충분하다. 나는 완전함에 도달했다.”고 말한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불완전성을 알게 만드는 것이 완전함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불교도들에게도 ‘아라한이 자신을 아라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아라한이 아니라는 증거’라는 유사한 취지의 말이 있다. 484
우리의 사랑하는 신부님(성 프랑수아 드 살)께서 자신의 영적 아이 중 하나에게 말씀하시길, “모든 사람에게 인내심을 가져라. 무엇보다도 너 자신에게 인내심을 가져라. 너의 불완전함으로 낙담하지 말고 항상 새로운 용기로 일어서라는 말이다. 나는 네가 매일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 기쁘다. 영적 삶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속 다시 시작하고 충분히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자신의 잘못을 참지 못한다면 이웃의 잘못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실패 때문에 초조해지는 실패를 고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유익한 교정correction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에서 나온다.” 장 피에르 카뮈 486
내적 기도에 전념하지만 어떤 때는 마음이 매우 흐릿해지고 감정이 아주 둔해져서 거기에 대해 스스로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드문 영혼들이 있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영혼이 제대로 교육받거나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경우 열등한 성질이 갖는 모순이 오래 지속되어 실망을 하고 기도를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묵상이 전혀 쓸모없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생각하거나 신을 향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시간의 손실일 뿐 아니라 전혀 가치가 없으며, 그러므로 시간을 다른 데 쓰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로 어떤 영혼들은 다른 방법이 아닌 무미건조한 기도를 통해 전능하신
하느님의 인도를 받지만 모든 묵상에서 어떤 만족도 느낄 수 없고 오히려 지속적인 고통과 모순만 느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속에 깊이 각인된 비밀스러운 은총과 용기로 멈추지 않고 오히려 온갖 어려움을 단호히 뚫고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내적 훈련을 계속해 나감으로써 그들의 영은 엄청나게 진보하게 된다. 어거스틴 베이커 487
27 묵상, 행위, 사회적 유용성
Contemplation, Action and Social Utility
무엇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가
영원의 철학이 언급한 역사상 모든 진술로부터 추출한 공리는 다음과 같다. 인간 삶의 궁극은 묵상contemplation 혹은 신을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자각하는 것이고, 행위action는 그런 목적의 수단이라는 것, 사회society는 그 구성원들에게 묵상을 가능하게 하는 한에서 선하다는 것, 적어도 소수 묵상가의 존재는 모든 사회에서 웰빙을 위해 필요하다는 진술이다.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철학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 삶의 궁극의 목표는 행위이며, (낮은 형태의 추론적 사고에서 볼 때) 묵상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고, 사회 구성원들의 행위가 기술과 조직에 진보(윤리적 · 문화적 진보와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진보)를 가져오는 한에서 선하며, 소수의 묵상가들은 완전히 쓸모가 없고, 그 사람들을 견뎌내는 단체에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현대의 세계관을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명시적으로 또 암묵적으로 모든 신문이나 잡지 광고란의 모든 페이지에서는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488
행위란 실재를 인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다. 진리의 깨달음은 수천만의 행위 속에서가 아니라 미묘한 차이를 분간하는 힘discrimination에 의해 얻어진다. -상카라
각각의 사물의 최종 목적은 사물의 첫 번째 창시자 혹은 원동력이 의도하는 바에 있다. 그리고 우주의 첫 번째 창시자이자 원동력은 지성intellect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최종 목적은 지성의 미덕이 되어야 하며 이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진리는 전 우주의 최종 목적이어야 하며, 이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지혜의 주된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육신의 옷을 입은 신성한 지혜는 진리를 알리기 위해 이 세상에 왔노라고 선언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489
옮긴이의 글
《영원의 철학》신성한 실재를 이해하고 거기에 접촉하고자 한 동서양의 철학자, 사상가, 성자, 현자들이 남긴 글과 체험을 망라한 선집의 형태로 되어 있다.
‘영원의 철학’은 세계의 본질인 ‘신성한 실재’를 인정하는 형이상학이자, 인간의 영혼에서 ‘신성한 실재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무언가’를 발견하는 심리학이며, ‘모든 존재의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인 바탕에 대한 앎’을 인간의 최종 목표로 두는 윤리학으로 ,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온 보편적인 개념이다. 모든 원시민족의 전통 구전설화에서 영원의 철학의 기초를 발견할 수 있으며, 모든 고등종교에서 완전하게 발달된 형태를 찾을 수 있다. – p14
즉 ‘영원의 철학’이란 ‘세계 대부분의 종교적 전통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 인간관, 윤리관’으로서, 이들 모든 종교적 지식이나 원리들이 전제하고 있는 유일하면서도 보편적인 진리를 말한다. 고도로 발달된 종교 및 철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이와 같은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영원의 철학’이라는 표현 자체는 16세기 이탈리아 구약성경학자 아고스티노 스테우코가 자신의 저서 〈Deperenni philosophia〉(1540)에서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 후 라이프니츠가 ‘역사를 초월해서 전승되는 형이상학적 근본진리’라는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했으며, 19세기 초월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와서는 헉슬리에 의해 영어권 대중들에게 알려져 뉴에이지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최근에 와서는 켄 월버가 ‘세계의 위대한 영적 스승, 철학자, 사색가들이 채택한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언급했고, 영원의 철학을 자신의 통합사상의 기본 전제로 삼으면서 또 다시 학계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501
영원의 철학에 따르면, 기독교 · 불교 · 유교 · 도교 · 이슬람교 · 유대교 · 힌두교 등 세계의 종교는 영원의 철학이 제안하는 보편적인 진리가 각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적용된 결과로 나타난 모습이다. 이 보편적 진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물질, 생명, 정신권의 근본바탕에는 신성한 실재가 존재하며, 모든 현상은 그러한 실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둘째, 신성한 실재는 분석적 사고를 통해서는 포착할 수 없으며, 더 높은 차원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셋째, 인간은 현상적 자아(ego)와 영원한 참자아(Self)라는 이중성을 지니며, 참자아는 신성한 실재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넷째,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러한 실재와 경험적으로 합일하는 데 있다. 수많은 성인 ․ 현자 ․ 예언가 ․철학자 ․신비가들은 시대적 ․문화적 ․지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보편 진리를 거듭 재발견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세속화되기 쉬운 종교에 대해 그 본질을 새롭게 환기시킴으로써 이를 혁신해왔다.
이 책의 첫 장은 “그대가 그것이다.
모든 존재의 근거’인 ‘신성한 실재’는, 사고와 언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체험을 통한 ‘직접적인 영적 앎’의 영역이다. 헉슬리는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 불교, 힌두교, 도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신비주의 등의 여러 경전을 면밀하게 탐구한 후,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들을 비교 분석하면서 본질적인 공통점을 찾아 종합했다. 책은 스스로 거듭나고 깨달음으로써 ‘신성한 실재’를 직접 통찰한 이들이 여러 시대와 장소에 걸쳐 토로한 420여 개 구절들을 소개하고 헉슬리가 해설을 붙인 지혜의 모음집이다.
가톨릭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윌리엄 로의 글을 가장 많이 인용했으며, 다양한 불교 경전도 인용하고 있는데, 〈능가경〉이 가장 많고, 그밖에 〈육조단경〉 등 선(禪)의 정수를 보여주는 내용들과 함께 대승과 소승, 교종과 선종의 핵심을 골고루 아우르고 있다. 이처럼 동서양 영적 천재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총결집시킨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사유의 지평, 그리고 해설에서 묻어나오는 체험의 깊이는 그의 천재성이 주는 경이감과 함께 의식이 고양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