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성격, 거룩함, 신성한 화신
Personality, Sanctity, Divine Incarnation
영국 제 8 공군 다섯 개 전투임무에서 의료인 입회인으로서 참가한 한 정신과의사가 말하기를, 엄청난 스트레스와 위험에 처한 인간의 경우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성격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주 일률적으로 반응하기 쉽다는 것이다. 86
때로는 예비훈련 없이 위기 하나만으로도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통상적인 자아를 잊고 잠시 동안 아주 다른 무언가가 되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재앙의 영향권 아래에 있을 때는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도 일시적으로 영웅, 순교자, 동료들의 행복을 생각하는 이기심없는 일꾼으로 변한다. 또한 죽음에 임박해서 비슷한 결과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87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 방해를 전혀 받지 않는 평화 속에서 삶이 정상적으로 흘러갈 때보다 위기가 닥쳐오는 시기에 이기심을 버리고 행동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진다. 삶이 순조로울 때는 우리의 소중한 자아를 잊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선택적으로 동일시했던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만드는 일도 없다. (의지를 내어 고행하면서 신을 아는 것은 예외). 우리는 완벽히 자유롭게 마음껏 성격에 젖어있다. 얼마나 젖어 지내는지! 이런 이유로 영적인 삶을 사는 모든 스승들은 소유물을 거의 갖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한 것이다. 88
성인(聖人)이란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이 위기임을 아는 분이다. 왜냐하면 모든 순간에 우리는 지극히 중요한 선택, 죽음과 영적 어둠으로 이끄는 길과 빛과 삶으로 이끄는 길 사이에, 오로지 시간적인 질서에 관한 관심과 영원한 질서에 관한 관심 사이에, 우리의 개인적 의지나 우리 성격의 어떤 투사물의 의지와 신의 의지 사이에 선택을 하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90
앎이란 아는 자 안에서 아는 자의 형식moded에 따라 존재한다.
인식자의 정신이 다중적이면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그가 알게되는 우주는
다신적이다. 궁극의 신성한 실재에 관해 붓다는 어떠한 언급도 꺼렸다.
그가 자주 언급했던 것은 오로지 '니르바나nirvana(열반涅槃)'였으며,
이는 자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하나로 집중된 경우에 오는 경험의 이름이다. 이 동일한 경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브라흐만과의 합일, 알 하이크와의 합일,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인 신성과의 합일이라고 불렀다. 93
크리슈나는 브라흐만의 화신이고, 고타마 붓다는 대승불교 학자들이 법신, 진여(眞如), 마음, 모든 존재의 근본바탕이라 부르는 것의 화신이다. 예수가 인간의 형상으로 구현된 신성의 화신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는 신의 화신이 오직 한 분뿐이라고 단정 짓는 점에 있어서 인도 및 극동의 교리와 다르다.
우리의 행동은 상당 정도 우리의 생각에 좌우된다. 우리의 행동이 사악하다면, 사고 패턴이 물질적정신적영적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의 화신이 한 분뿐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역사는 힌두교나 불교의 역사에 비해 더 많고 피비린내나는 성전(聖戰),
종파를 초월한 전쟁, 박해 및 개종을 강요하는 침략주의로 더럽혀졌다.
독립국가와 그 통치자들에게 사이비 신성을 부여한 불합리하면서도 우상숭배적 교리는 서양인들만큼이나 동양인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정치적 전쟁을 치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어느 한 순간에만 한정된 계시를 받는다는 사실이나 종교조직이 갖는 사이비 신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라는 명목으로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엄청나게 일어났던 대량학살이 신기할 정도로 거의 없었다. 구할 수 있는 증거로 판단하건데, 이 중요한 측면에 있어서 대중의 도덕적 수준은 서양이 동양보다 낮지만 예외적인 성스러움과 평범한 개인의 도덕적 수준이 더 낮지는 않았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교가 영원의 철학이 갖고 있는 수준에서 벗어나있다고 말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볼 때 이치에 닿지 않는다. 101
탁월한 동양학자인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의 표현을 빌면, “크리슈나 숭배자들이 비슈누계 경전에 등장하는 크리슈나 릴라는 한낱 역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속에서 쉼없이 전개되는 과정임을 인식하도록 주의를 받는 것과 똑같이, 대승불교 신도들도 역사적 사실의 문제에는 종교적 의미가 없다는 경고를 받는다.” 102
서구 신비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정신이 역사적 사실의 불행한 노예가 되는 것을 막았다. 에크하르트, 타울러, 로이스 부르크, 뵈메, 윌리엄 로 그리고 퀘이커교도들의 저술에서 영성화되고 보편화된 그리스도교 정신을 추출할 수 있는데, 이들이 기술한 내용은 사실 그대로의 역사 자체 혹은 후세에 누군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전개되는 과정’을 가리키고 있다. 103
인간은 만물의 신성한 본성이 정해놓은 길에서(즉 최고의 사랑charity으로써, 자아의 완전한 죽음과 전적으로 하나로 집중된 자각을 통해) 해방과
깨달음을 성취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성취한 경우, 신의 화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보여 줄 수 있으며 그들에게 이미 존재하는 잠재력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돕는다. 110
04 세상 속의 신
God in the World
그러나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리라
"그대가 그것이다" "모든 것에서 하나만을 보라" 신은 우리 안에도 저 밖에도 계신다. 영혼 속에도. 영혼을 통해서도 절대적 실재Reality로 가는 길이 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통해서도 절대적 실상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111
신의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또 개별적으로 모든 사람들 속에서 발견 된다.
각자는 그것을 전체로, 온전하게, 분리되지 않은채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모두 함께 소유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이며, 신의 이미지이자 우리 안에 평생 존재하는 근원인 우리의 영원한 이미지 속에서 밀접하게 결합되어있다. 우리의 창조된 본질과 우리의 삶은 이들의 원인eternal
cause에 대한 매개 없이 그이미지와 연관되어있다. 로이스부르크 112
깨달음이 완전해질 때 보살은 사물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사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는 변해가는 세계인 삼사라Samsara를 미워하지도, 니르바나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완전한 깨달음이 빛날 때 그것은 속박도 해방도 아니다.
푸루나붓다경Prunabuddha-sutra 118
신의 나라를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서만 발견하는 일은 그곳뿐만 아니라
마음 밖 세상, 사물, 살아있는 피조물에서 발견하는 일보다 더 쉽다. 그 일이 더 쉬운 까닭은, 내면의 절정은 외부의 모든 것을 자신의 영역에서 배제시킬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배제는 고통스러우면서도 금욕적인 과정일 수 있지만, 우리가 영적인 삶의 최고점뿐만 아니라 충만함을 알게 되는 내포의 과정보다 덜 힘들다. 내면의 정점에 배타적으로 집중하려면 유혹과 산만함을 피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부인하고 억압한다. 그러나 포함의 과정을 통해 신을 알려고 한다면, ~ 이들을 감수하면서 진보의 기회로 이용해야 한다.
삼사라(윤회)와 니르바나, 시간성과 영원성이 하나이자 동일하다고 보는 사람의 심리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은 대승 불교, 특히 선(禪)불교 문헌이다. 아마도 극동불교가 그 어떤 종교보다 영적 앎으로 가는 길(가장 온전하면서도 가장 높게, 또한 영혼 속에서 영혼을 통과하여, 세상 속에서 세상을 통과하여)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국과 일본의 유례없이 탁월한 풍경화는 본질적으로 도교와 선불교에 의해 자극된 종교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119
그대가 매일 아침 천상에서 깨어날 때까지는 세상을 즐기는 것이 결코 옳지 않다. 아버지의 궁전에 있는 그대를 보라. 그리고 하늘, 땅, 공기를 천상의 즐거움으로 바라보라. 마치 천사들 가운데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고귀하게 여기라.
바다가 그대의 핏줄로 흐를 때까지, 천국의 옷을 입고, 별로 된 왕관을 쓸 때까지 그대는 세상을 올바로 즐기지 못한다. 그대 스스로를 세상 전체의 유일한 상속자로 여기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그대와 마찬가지로 유일한 상속자이니까. 구두쇠가 금으로, 왕이 왕권으로 그렇듯이 그대가 신 안에서 노래하고, 축하하며 기뻐할 수 있을 때까지 그대는 결코 세상을 즐길 수 없다.
그대의 영sprit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때까지, 별들이 그대의 보석이 될 때까지, 그대의 걸음과 탁자에 익숙하듯이 그대가 언제나 신의 길에 익숙해질 때까지, 세상이 만들어진 희미한 무(無)를 깊이 알게 될 때까지, 인간의 행복을 소망하는 갈망이 당신 자신의 행복을 향한 열정과 똑같을 만큼 인간을 사랑할 때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하는 것을 신 안에서 기뻐할 때까지 그대는 결코 세상을 즐길 수 없다.
더 나아가 그대가 그것을 즐기는 아름다움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즐기도록 열심히 진지하게 설득할 때까지, 그대는 세상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은 무한한 아름다움을 비추는 거울이지만 그것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왕의 사원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은 인간이 어지럽히지 않는 빛과 평화의 지대다. 그것은 신의 낙원이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세상은 이전보다 인간에게 더욱 중요해졌다. 세상은 천사들의 장소이며 천국의 문이다. 야곱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신은 이곳에 계시고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곳은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신의 거주지이며 천국의 문이다. 토마스 트러헌 127
*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워즈워스를 또 다른 위대한 자연애호가이자 학자였던 성 베르나르와 비교하는 일은 흥미롭다. 워즈워스는 ‘자연이 그대의 스승이 되게 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봄철 숲에서 일어나는 한 충동impulse이 인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그대에게 말해주네 도덕적인 악과 선에 대해서, 모든 현자들보다 더 많은 것을.
성 베르나르도 유사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성스러운 과학과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를 나는 숲과 들판에서 배웠다.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 이외에 어떤 스승도 가진 적이 없다.”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경험자의 말을 들어라. 그대는 책보다 숲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교사의 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무와 돌들이 그대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표현은 유사하지만 그 내적 의미는 아주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에 따르면, 즐길 수 있는 건 오로지 신뿐이다. 피조물은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 그리고 경탄스럽고 초연하게 감사하며 즐길 수 있는 앎의 수단으로써 이용하는 대상이다.
대자연을 숭배하는 거의 모든 여타의 문필가와 마찬가지로 워즈워스는 영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피조물들을 이용(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그 이용자에게는 엄청난 자기훈련이 수반되는)하기보다는 피조물들의 즐거움을 설파하였다. 베르나르의 경우 그와 서신을 왕래했던 사람은 자기훈련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으며, 자연을 스승으로서 사랑하고 마음에 새겼지만 자연 자체를 신으로 사랑하지 않고 자연을 신에 이르는 수단으로서만 이용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131
자아가 소멸되었다는 생각은 파나fana(선禪의 무심無心)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이는 허물이다. 최고의 상태는 소멸도 사라진 것이다. 아트만-브라흐만이라는 내적 정점에는 황홀경이라는 ‘소멸로부터의 소멸’이 있다. 더 포괄적인 소멸로부터의 또 다른 소멸은 내적 정점에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세상을 통해, 신에 대한 충만하면서도 깨어있는 일상의 앎 속에 존재한다. 136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지금 그대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아파하라. 이 모든 것을 신성하게 행하라. 그대의 가슴hearts 이외에 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의 질서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기꺼이 하는 데에 신성함이 있다. - 드 코사드
이것은 《신심명》에서 간택함을 꺼리고 망령된 견해를 쉬며, 꿈이 사라지고 진리가 스스로 명백하도록 눈을 뜨면서, 지극한 도道를 따르는 것과 똑같다. (p.140)
05 최고의 사랑
Charity
모든 오류는 사랑의 부족에서 생긴다
사랑은 확실하다. 거기에는 오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오류는 사랑의 부족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 윌리엄 로 150
사랑은 앎의 한 양태로서, 사심이 없고 사랑이 충분히 강렬하다면 그 앎은 결합하는 앎이 되어 절대 확실성이라는 성질을 띤다.
사심 없는 사랑이 없는 곳에는(혹은 더 간단하게 최고의 사랑이 없는 곳에는) 편견에 가득 찬 자기 사랑이 있을 뿐이며, 그 결과 자아 및 자아 밖에 존재하는 사물. 생명체.마음과 영의 세계에 대해서 부분적이면서도 왜곡된 앎이 생긴다. 욕망이 넘치는 사람은 "천상의 섭리를 노예처럼 부린다".즉 그는
대자연과 영의 법칙을 자신의 욕구에 종속시킨다. 그 결과 '그는 느끼지 못하며' 그럼으로써 앎을 얻을 수 없다. 그의 무지는 결국 자발적이다.
그가 볼 수 없다면 '그가 외면하기' 때문이다. 151
우리는 진리 자체라는 우상을 만든다.
왜냐하면 최고의 사랑charity과 동떨어진 진리는 신이 아니라 그의 이미지나 우상일 뿐이기 때문인데,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지도 숭배하지도 말아야 한다. 파스칼 153
나는 신을 위한 혹은 신 안에 있는 사랑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런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 머물 수 없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사랑이란 신 그자체이므로. 제노바의 성 키타리나 156
감정적인 사랑은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
그런 사랑은 확실히 행위로는 결합시키지만,
본질로는 결합시키지 않는다. 에크하르트 160
죽고 재탄생하는 이 헛된 마음을 투영하고 직관적인 마음Mind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마음의 고요함을 통해서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초적이면서도 깨우침을 주는 마음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영적 수행을 위해서는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대의 출발점을 목표와 조화롭게 만들면, 올바른 수행으로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진정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고요히하고 그 본래의 순수함을 회복하려 한다면 흙탕물이 담긴 병을 깨끗이 할 때처럼 해야 한다. 우선 침전물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병을 세워 놓으면 물이 깨끗해질것이다.
이는 마음을 더럽히는 열망들로 인해 혼란스러워지기 이전의 마음상태에 해당한다. 그리고 나서 그대는 깨끗한 물을 조심스럽게 걸러낸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집중되어 완전한 결합에 이르면, 일체의 사물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 있음을 볼 것이다. 그곳에서는 열망이 들어설 여지가 없으며, 그것은 니르바나라고 하는 신비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순수함과 완전히 일치될 것이다. <능엄경> 162
영혼은 그것이 생기를 불어넣는 육체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랑하는 것에 의해 살아간다. 영혼은 육체 속에서 생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생명을 주며, 영혼이 사랑하는 것 속에 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최고의 사랑의 뚜렷한 특징은 사심없음, 고요함 그리고 겸손이다. 사심이 없는 곳에는 개인적 이득을 위한 탐욕이나 개인적 손실 및 처벌에 대한 공포가 없다. 고요함이 있는 곳에는 갈망과 혐오가 없으며, 존재의 모든 수준에서 나타나는 신성한 도(道)나 로고스에 순응하겠다는 지속적인 의지와 신성한 진여 및 자신이 그것과 마땅히 가져야 할 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자각이 있다. 겸손이 있는 곳에는 에고나 타인들(자신과 똑같은 약점과 오류를 지녔지만, 신과 결합하는 앎을 통해 그것들을 초월할 수 있는 동등한 역량을 갖춘 사람들로 인식되는)을 희생시켜 얻은 투사된 또 다른 자아의 비판이나 찬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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