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철학

영원의 철학 /넷

수선님 2019. 10. 20. 12:45

08 종교와 기질
Religion and Temperament

체질과 기질에 따라 그 길은 다를 수 있다

가리구 라그랑주 신부는 "모든 영혼은 신비스러운 삶으로 이끄는 먼 곳으로 부터 부르심을 받고 있다.인간적이면서도 사소한 죄를 마땅히 피할 정도로 신앙이 깊다면, 자신의 조건에 따라 각자의 성령Holy Ghost에 순수히 따른다면, 그리고 그들이 충분히 오래 산다면, 고귀한 완전함과 진정한 의미의 신비스러운 삶으로 이끄는 가깝고도 효율적인 소명을 받게 될 날이 올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내향형은 ‘분별력discrimination’을 사용하여 신성한 근본바탕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최상의 참자아 의식을 에고의 정신활동과 구별하는 법을 배운다. 265

신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일자로 파악하지 않는 사람들은 신뿐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서는 동료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한 필로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267

그리스도교 예술에서 구세주는 거의 언제나 호리호리하고 뼈가 가늘며 근육이 두드러지지 않게 표현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통적인 예수는 주로 외배엽형 체형의 남자로 생각되며, 외배엽형 성격 기질로 암시되고 있다. ~ 복음서 중심의 종교는 외배엽형 성격, 물론 모든 외배엽형 성격이 아닌 본성을 초월하기 위해 자신의 본성적 심리-생리적 특징을 이용한 사람, 영적 목적을 위해 자신의 특수한 다르마를 추구해왔던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는 종교다. 천국은 내면에 있다는 주장, 의식에 대한 무시, 율법주의, 조직화된 종교의 의례화된 일과, 신성화시킨 날짜와 장소에 대한 다소 경멸적인 태도, 일반적인 비현실성, 외현적 행동 뿐 아니라 욕망과 표현되지 않은 의도를 제어하는 것의 강조, 물질문명의 화려함에 대한 무관심, 빈곤을 가장 큰 재산으로 사랑하기, 가족관계 영역에서조차도 비집착을 수행해야 한다는 교리, 인간적 이상의 최고 목적에 대한 헌신이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정당성조차도 신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난 우상숭배적 일탈일 수 있다는 교리, 이 모든 것들은 외배엽 성격이 가지는 생각들의 특징으로서 외향형의 권력애호가와 외향적인 내배엽의 인간에게는 이런 특징들이 결코 자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269



09 자기이해
Self-Knowledge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깨어있다고 여긴다

살아있는 다른 피조물에게는 자게대한 무지ignorance of self가 본성이지만, 인간에게는 악덕이다.
보이티우스 275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에 대해 무지한 이유는 자기이해self-knowledge가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환상의 즐거움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기무지self-ignorance는 비현실적인 행동으로 그럼으로써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온갖 종류의 말써을 초래한다. 또 자기이해가 없으면 진정한
겸손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효과적으로 자기를 부정할 수 없으며, 자아에 내재하고 대개 자아로 인해 가려진 신성한 근본바탕과 결합하는 앎이 없기 때문이다. 276

자기이해 기술의 직접적인 목적은 '수행자는 신체와 관련해서 지속적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열심히 침착하게 마음챙김하여 세상에 흔한 갈망과 실의를 극복한다. 느낌,생각,개념들에 대해서도 그는 각각을 관찰하여 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침착하게 마음챙김 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현재 깨어있다고 느낀다. 《장자》 277

그대(인간)는 그대가 아닌 것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자다'
그대의 영혼 속에서 이 진실을 지각한다면 적들이 그대를 속이지 못할 것이며, 그대는 그들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시에나의 성 키타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왔고, 유배 중이다. 우리들 사랑의 힘은 신을 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유배 상태를 의식하고 있다.
- 로이스부르크 279


10 은총과 자유의지
Grace and Free Will

그대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


해방Deliverance이란 시간에서 벗어나 영원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만물의 영원한 본성에 복종하고 순응함으로써 성취된다.
존재에서 우리 자신의 의지self-will를 행사하여 계속 '은총의 상태'에 살기위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이다. 결국, 활동과 신성한 실재의 존재에 관련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우리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들도록 지도되어야만 한다. 마치 바람을 맞아 저절로 울리는 악기처럼 우리는 근본 영
Spirit이라는 바람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거나, 거기에서 스스로를 닫아버릴 수 있는 힘을 부여받고 있다. 282

영적 은총은 진실로 '내가 아니라, 내안에 계신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의지력을 발휘하여 자기의지self-will를 멀리한 사람들 외에는 지속적으로 충만하게 받을 수가 없다.
영적 은총은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본바탕에서 시작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최종 목적, 시간과 자아로부터 탈출하여 그 근본바탕으로 돌아가는 목적을 달성하는 일을 돕기 위해 주어진다. 286

이 승에게 물었다.
"도라는 것을 얻어 가질수 있습니까?"
"그대의 몸도 그대의 것이 아닌데, 어떻게 도가 그대의 것일 수 있겠는가?"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입니까?"
승은 이렇게 말 했다.
"천지가 그대에게 맡겨둔 형상일 뿐이지.
그대의 생명도 그대의 것이 아니라 천지가 맡겨둔 조화일 뿐이다.
그대의 본성도 그대의 것이아니라 천지가 맡겨둔 순리며.
그대의 자손들도 그대의 소유가아니라 천지가 맡겨둔 허물일 뿐이다.
그대는 움직여도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지 못하고,
머물러도 왜그런지 알지 못하며, 맛을 보아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천지의 강한 양기陽氣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도를 얻어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장자>289

梓慶(재경)이라는 목수가 나무를 깎아 ()를 만드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귀신같은 솜씨에 놀랐다. 노나라 임금이 보고 물었다. ‘자네는 무슨 기술로 이렇게 만드는가 ?’ 재경이 대답했다. ‘저는 목수일뿐 특별한 기술이 있겠습니까 ? 그러나 한 가지가 있기는 있습니다.
저는 거를 만들 때 기를 함부로 소모하지 않고, 반드시 齋戒(재계)를 하고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사흘을 재계하고 나면, 축하나 상을 받고 벼슬이나 녹을 타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닷새를 재계하고 나면 비난이나 칭찬, 잘 만들고 못 만들고 하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이레를 재계하고 나면 문득 제게 사지나 몸뚱이가 있다는 사실마저 잊습니다. 이때가 되면 이미 공무니 조정이니 하는 생각도 없어져, 오로지 기술에만 전념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외부적 요인은 완전히 없어집니다.
그런 뒤 산속에 들어가 나무의 본래 성질을 살펴 모양이 더할 수 없이 좋은 것을 찾습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서 완성된 거를 보게 되면 하늘과 하늘이 합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드는 것들이 귀신같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장자> 290


자기를 완전히없앤 사람들만이 온갖 것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all will be well'. 또 어떤 면에서는 이미 잘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성자처럼 인식하는 사람들만이 항상 그리고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신성한 실재는 사랑스럽고 자비로우며 현명한 힘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대가 준비되자마자 신께서는 자신을 그대 안에 쏟아붓게 될 것이다.
에크하르트

오 인간이여, 스스로를 알라!
그대는 선과 악이 격렬하게 여원히 투쟁하는 이곳에 서 있다.
모든 자연은 위대한 속죄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일체의 창조된 것은 헛된 시간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고통을 겪으며 고되게 일하고 있다.
그대는 잠들어 있을 것인가?
그대가 듣거나 보는 것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영원한 빛이나 영원한 어둠이 무엇을 가져오는지 그대에게 보여준다.
낮과 밤이 우리의 시간을 나누듯이 천국과 지옥이 우리의 생각.언어.행위를 나눈다.
그대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그대의 의지대로 행하라.
어떤 쪽이든 행위하는 자는 그대이다.
그대는 일시적이면서 영원한 자연의 활동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꼼짝하지 않고 서 있을 수 없다.
그대가 선과 함께 일하지 않으면 자연 속에 있는 악이 그대를 이끌 것이다.
그대 안에는 영원의 정점과 심연이 있다.
그러므로 방에서나 들판에서, 상점에서나 교회에서 그대가 뜻하는 바를 행하면 그대는 자라나 영원 속에서 수확할 씨를 심는 것이다. 월리엄 로


11 선과 악
Good and Evil

악마를 보지 못했다면, 그대의 자아를 보라


개별 영혼의 바탕은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본 바탕과 유사하거나 동일하며,
이런 신성한 근본 바탕은 말로 표현 할 수 없고 인격적 신으로 혹은 육화된 로고스로서 스스로 현시하는 신성임을 받아들인다면, 선과 악의 궁극적 성질은 무엇이며, 인간 삶의 진정한 목적과 마지막 목표는 무엇일까? 301

마음이 타오르고 생각도 타오른다. 마음-의식Mind-consciousness, 마음으로 받아들인 인상, 마음이 받아들인 인상에서 생겨나는 감각, 이들도 또한 타오른다.

그것들은 무엇과 함께 타는가? 탐욕의 불길, 분노의 불길, 미혹의 불길, 태어나고 늙고 죽는것, 슬픔과 비탄, 재난과 탄식, 절망과 함께 타오른다.
<붓다의 불길 법문> 302

악마를 보지 못했다면, 그대 자신의 자아를 보라. - 잘랄루딘 루미 303

영성의 단일성으로부터 다양한 시간적 존재로의 변화가 타락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은 영원의 철학에 대한 불교와 힌두교의 표현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고통과 죄악은 시간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개인적 존재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경우 신성한 근본바탕이 아닌 자아와 다자(多者)에게 욕망이 향해 있을 때 피할 수 없는 이런 고통과 죄악이 강화된다. 추측해 보건대 인간 이하의 존재에게도 (개별적으로나 유()와 종()으로서 집단적으로 볼 때) 선택의 힘과 유사한 무언가가 주어질 수 있다는 의견을 여기에 더할 수 있다. ‘인간만이 직립한다’는 특별한 사실이 존재한다. 판단하건대 다른 종이란 모두 현존하는 화석이 보여주는 종으로서, 이들은 진화적으로 더 진보한 것이 아니라 퇴화되고 소멸되었다. 309

이 모든 살아 있는 물질 중에서 오로지 인간으로서 구조화된 물질만이 어쨌든 정신적인 측면에서 더욱 발달할 수 있는 형상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나머지는 모두 현재 그대로의 모습으로 머물러있다. 우주 지성의 검열에서 인간을 제외한 살아있는 모든 물질은 그 생물학적 여정의 어느 시기에 결국 최선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최대한 유리한 형상을 취하려는 유혹에 굴복해버린 듯이 보인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들은 자유의지와 유사한 행위를 통해 분화specialization라는 빠른 응답과, 비록 낮은 수준이지만 존재의 완벽함이라는 현재의 황홀감을 선택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진화사 막다른 골목 끝에 서게 되었다. 이윽고 다양하게 표현된, 창조라는 최초의 우주적인 추락에, 그들은 인간의 자발적인 추락에 상응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생물학적 추락을 덧붙였다. ()으로서 그들은 신성한 근본바탕과 재결합할 수 있는 역량보다 자아의 직접적인 만족을 선택하였다. 이런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인간이 아닌 생명 형태는 (분화되지 않고 그럼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고등한 의식을 가진 인간의 형태에서나 가능한) 지고의 선()을 실현하는 것에서 제외됨으로써 부정적인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지고의 선을 위한 역량은 극단적인 사악함 또는 가능하다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달성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여러 면에서 동물들은 고통받지 않으며, 사람이 받는 정도만큼 고통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인간 종의 뚜렷한 징후 중 하나인 악마적인 사악함도 거룩함과 마찬가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원의 철학에서 선()이란 분리된 자아가 자아에게 존재를 부여한 신성한 근본바탕에 순응하고 마침내는 그 속에서 소멸되는 것이며, ()이란 분리됨의 강화, 근본바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교리는 일련의 부정적긍정적인 신성한 계율로서 혹은 사회적 유용성의 견지에서 윤리적 규범을 표현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모든 곳에서 금지되는 범죄는 모든 곳에서 나쁜 것으로 비난받는 마음상태에서 나온다. 310-311


12 시간과 영원
Time and Eternity

어떻게 시간적 상태가 비시간적 상태와 공존할 수 있을까


신은 항상 영원하고 현재인 상태에 있기때문에, 시간 관념을 넘어서는 그분의 앎은 그분의 현존이라는 단순성 속에 머물러 있으며, 과거와 미래의 무한함을 이해하면서, 모든 것을 막 이루어 지려고 하는 것으로 여긴다
보이티우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앎이 사건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신의 선견지명God's foreknowledge'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시간을 초월한 현재를 아는 것now-knowledge이며, 이것은 시간 속에서 피조물인 인간 의지의 자유와 양립 가능하다. 313

영원의 철학을 반대하는 이들은 홉스 이후로 영원한 현재의 존재를 부정해왔다. 이런 사상가들에 따르면, 시간과 변화는 근본적인 것이며 그것 말고는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미래의 사건은 완전히 불확실하고 신조차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신을 알파와 오메가로써는 묘사할 수 없다. 단순히 알파와 람다, 또는 중간에 들어가는, 지금 발음되고 있는 어떤 다른 일시적인 알파벳 철자로도. 그러나 심령연구협회가 수집한 일화적 증거와 수천 년 동안의 임상 실험을 거쳐 수집된 초감각 지각에 대한 통계학적 증거는 심지어는 인간의 마음까지도 예지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결론을 불가피하게 내리고 있다. 어떤 유한한 의식체가 3초 후 어떤 카드가 나올 지 알 수 있거나 다음 주에 어떤 조난사고가 생길 것인지 알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되는 무한히 멀리 떨어진 사건을 지금 알 수가 있는 무한한 의식이라는 개념이 불가능하지도 않으며 본질적으로 개연성이 낮지도 않다. 인간이 살고 있는 ‘겉보기의 현재’는 기지의 과거로부터 미지의 미래로 가는, 기억의 생생함 때문에 우리가 ‘지금now이라고 부르는 순간으로 간주되는 짧은 과도기적 부분 그 이상일 수 있으며 아마 언제나 그럴 것이다. 더 나가서는 비교적 먼 미래의 일부를 포함할 수 있다. 성에게 ‘겉보기의 현재’는 엄밀히 말하면 보이티우스가 언급한 ‘완전히 끝없는 생명의 완벽한 소유’ 일 수 있다. 315

육체는 항상 시간 속에 존재하고 영은 항상 여원하며, 마음은 스스로를 어느 정도 육체와 관련시키지만 원한다면 그 영을 경험하고 그것과 동일시할 수 있으며 영을 통해서 신성한 근본바탕과 동일시 할 수있는 인간 존재의 법칙에 따르는 양면성을 지닌 피조물이다. 영은 항상 영원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항상 영과 동일시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316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삶은 순간을 사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란 인간 이하의 피조물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가 공포를 몰아내고 비젼vison이 희망을 대신하며, 자기만족적인 회상이라는 긍정적 이기주의와 자책이라는 부정적인 이기주의가 무아selflessness에 의해 멈춰버린 존재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이란 영혼이 시간에서 영원으로 갈 수 있는, 은총이 영원에서 영혼으로 갈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시간 속에 있는 하나의 영혼에서 시간 속에 있는 다른 영혼으로 전달될 수 있는 유일한 간극이다. 317

우리의 조상이나 우리자신, 현생이나 전생의 존재로부터 형성된 의식적. 무의식적. 생리학적으로 기억된 모든 습관 때문에 세상은(우리 눈에 보이는 바대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기억된 이 나쁜 습관들이 우리로 하여금 다양성이 유일한 실재이며, '나', '나를',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궁극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니르바나Nirvana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Reality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에 있다.
실재Reality는 더 이상 우리에 관한quoad nos것으로 인식되지 않고(그것을 지각하는 우리nos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있는 그대로의 그 자체로 지각된다. 가슴이 순수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삼사라와 니르바나, 외양과 실상, 시간과 영원은 동일한 것으로 경험된다. 319


여러 가지 꽃에서 꿀을 모으는 벌처럼, 현명한 사람은 다양한 경전의 본질을 수용하고 모든 종교에서 좋은 점만을 본다. 《스리마드 바가바탐》
(p.334)

[출처] 영원의 철학 /넷|작성자 곡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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