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29(129-134)

수선님 2019. 12. 29. 12:45

조주록 강해


원문출처


129. '1구(一句)를 뛰어 넘어라'

조주선사가 상당하여 설했다.

“만약 제1구(第一句)에서 알면 부처와 조사(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第二句)에서 알면 인간과 천상(人天)의 스승이 되며, 제3구(第三句)에서라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1구(一句) 입니까?”

“부처와 조사(佛祖)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조주선사가 다시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묻는 것이 좋겠다.”

그 스님이 다시 묻자, “다시 인간과 천상으로 간다." 고 했다.

임제종의 개조(開祖)인 임제의현선사의 선어를 모은 임제록에는 위 3구(句)에 대하여 임제선사가 설한 것으로 나오는데, 조주선사도 이 3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누가 먼저 사용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제 1구에서 안다면 부처, 조사들의 스승이 되고, 제 2구에서 알면 인간, 천상의 스승, 제 3구까지 가서 안다면 제 자신까지도 구제하지 못한다.'라 하여 제1구에서 단박에 깨치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있습니다.

조주가 이 설법을 하니 한 수행자가 “어떤 것이 제1구(一句) 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제 1구에서 알아채서 기어코 불조의 스승이 되겠다는 각오인가요? 조주선사는 위 설법에서 말한 그대로 “부처와 조사(佛祖)의 스승이 된다.” 고 했다가 곧바로 말을 바꿔 '처음부터 다시 물어라'고 했습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때가 있는 것처럼 조주도 한번 말을 실수한 것인가요?

그 스님이 “무엇이 제1구(一句) 입니까?” 다시 물으니, 대답이 “다시 인간과 천상으로 간다(又卻人天去也)."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제 1구에서 알면 불조의 스승이 되고, 제 2구에서 알면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된다고 했다가, 여기서는 다시 인간과 천상으로 간다니 그렇다면 제 2구도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어쩌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는 제 3구만도 못하다고 말씀하신 듯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주는 여기에 이르러선 그 수행자에게 '이제는 3구에 대한 뜻풀이는 그만두고 너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고 찔러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조주의 답인 '다시 인간과 천상으로 간다'고 말한 뜻을 그 스님을 포함하여 여러분이 알아챈다면 제 1구를 알았을 뿐 아니라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었음을 인정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나 엄청난 뜻을 품고 있는 한마디 아닙니까? 이 한마디로 불조(佛祖)의 스승까지 될 수 있다니 제가 말도 안되는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글을 제대로 살펴보면 실제로 조주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 생각만이 아닙니다.

조주가 '처음부터 다시 물어라'고 말할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합니다. 선사의 말에 곧이곧대로 끌려가서 꼬박꼬박 대답만 하다 보면 마냥 세월만 헛되이 보내게 됩니다. 조주선사의 말씀은 '그대가 제 1구라는 말에 집착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기를 써서 알려고 하면 할수록 결국에는 인간과 천상으로도 가지 못하고 아마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너무 무섭게 들리지만 이제 그 뜻을 알아챌 수 있겠죠? 제 1, 2, 3구가 무엇이든지, 흰 색이든 검은 색이든 다 마찬가진걸 분별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래도 알아채기 어려우면서도 쉬운 것이 제 1구입니다. 여러분의 제 1구도 만들어 보고, 이 제 1구에서 깨달아 부처, 조사를 뛰어넘으십시오. 억!

​130. '나는 그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설했다.

“이는 그가 물어오지 않은 것도 아니며, 내가 대답해 주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한 스님이 물었다.

“큰 스님께서는 무엇으로 대답하시겠습니까?”

조주선사가 긴 한숨을 내쉬자 그 스님이 말했다.

“스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신다면 저를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대가 방금 나를 긍정했더라면 내가 그대를 저버린 것이지만, 그대가 나를 긍정하지 않았으니 내가 그대를 저버린 것은 아니다.”

“이는 그가 물어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라면 부정에 부정은 긍정이라, 이는 그가 물어오는 것이고, '내가 대답해 주지 않은 것도 아니다' 라는 말도 내가 대답해 주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달리 풀어 쓰면 '이는 그가 물어오는 것이고, 내가 대답해 주는 것이다' 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는 무엇이고, '그'는 또한 누구입니까?

전체적으로 말과 생각이 끊어지는 곳으로 몰아가는 법문(法文)입니다. 한 수행자가 조주선사의 설법에 헷갈려서 묻습니다. '선사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이며. 또한 무얼 가지고 대답하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조주가 그냥 긴 한숨을 내쉬니, '그것이 대답이라면 저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 빠뜨려 버리는 가르침입니다.' 라고 조주를 원망합니다. 조주는 '그대가 나를 긍정한다면 그대를 망쳐버린 것이겠지만, 그대가 긍정하지 않으니 망친 것이 아니다'고 대답합니다.

이것, 저것, 그를 찾지도 말고, 찾았으면 훌러덩 모두 벗어버리십시오. 조주가 저버린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수행자가 조주를 저버린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31. '굽지 않은 벽돌'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말했다.

“노승이 오늘 저녁엔 답을 하겠으니 물을 줄 아는 사람은 나오너라.”

한 스님이 나오자마자 절을 하니 선사가 말했다.

“예전에는 구운 벽돌을 던져 주고 구슬을 빼앗아 오려 했더니 이젠 굽지 않은 벽돌뿐이로구나.”

조주는 하루도 쉬는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도 학승들을 모아 놓고 가르침을 베풀고 있습니다. 수행자라면 우선 무엇을 물어봐야 할 지 생각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자 한번 나와서 불법에 대하여 물어보라! 호기롭게 나올 자는 누구인가?

한 수행자가 나와서 질문은 하지 않고 그냥 3배 절을 올립니다. '큰 스님의 가르침을 바라옵니다' 그러자, 조주는 구운 벽돌을 던지지 않고 굽지 않은 벽돌을 던집니다. 보배구슬은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 남의 구슬을 빼앗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구운 벽돌을 던져 주고 구슬을 빼앗아 오려 했더니 이젠 굽지 않은 벽돌뿐이로구나.” ​구운 벽돌은 직지인심이고, 구슬은 그대의 성품이며, 굽지 않은 벽돌은 생짜로 먹으려는 그대의 못된 심보입니다. 이 말이 보입니까? '오늘은 굽지 않은 벽돌 뿐이구만! 헐!

132. '개는 불성이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다(無).”

“위로는 모든 부처님에서 아래로는 개미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습니까?”

“그에게는 업식(業識)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화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무(無)자 화두가 탄생한 곳입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다(無)” "모든 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왜 개는 불성이 없습니까? “개에게는 업식(業識)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업식(業識)의 성품이란 중생이 육식(六識), 즉 눈, 귀, 코, 혀, 몸, 뜻(意)으로 식별하여 분간하는 것을 존재의 참된 모습(實相)으로 잘못 알고서 허깨비 같은 현상에 집착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그러나 개만 업식성(業識性)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이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 이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즉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모든 수행자가 궁극적으로 뚫어야 할 화두라고 합니다. '조주는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우리나라 효봉스님은 이 구자무불성 화두를 45세에 깨뜨리고서 다음과 같이 도를 깨친 노래를 읊었습니다.

‘바다 밑 제비의 집에서 사슴이 알을 품고

불속의 거미의 집에서 물고기가 차를 끓인다.

이 집안의 소식을 누가 알 것인가!

흰 구름은 서쪽에서 날고, 달은 동쪽에서 달린다.‘

선사들의 게송은 보통 우리 마음의 본바탕(體), 모습(相)과 그 작용(用)을 노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위 노래의 처음 두 연(聯)은 깨달은 뒤에 본래면목의 본체와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이 깨달은 소식을 누가 알 것인가 라고 반문한 뒤, 마지막 연은 하늘을 뒤엎고 땅을 파헤치는 작용(用)의 경지를 코드(code)로 노래한 것입니다.

한편, 이 화두에 대하여 석두희천(700∼790)선사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는데,

‘봄에 집안의 백가지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는가?

동쪽으로 가서는 서쪽으로 가는 이익을 보지 못한다.

흰 머리 자식이 검은 머리 아버지에게 나아가고

두 마리의 진흙소가 싸우면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노래에 제 나름대로 맞불을 한번 놓아보겠습니다.

‘내 고향의 봄에 피는 백가지 꽃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니

누구를 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없는 길을 만드는 나귀에게는 큰 소용 있으니

‘있다’ ‘없다’ 두 물줄기 속에 달을 놓치지 않으면

노란 머리든 파란 머리든 상관하지 않으리.‘

역대 대표적인 선서(禪書)인 무문관(無門關)을 지은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선사는 이 책에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 말해봐라, 무엇이 조사의 관문인가? 오직 이 하나의 무자(無字)가 바로 종문(宗門)의 한 관문(關門)이다. 마침내 이것을 가리켜 선종(禪宗)의 무문관(無門關)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꿰뚫고 지나가는 자는 조주를 친견할 뿐만 아니라 곧장 역대의 조사들과 함께 손을 잡고 함께 간다. 눈썹을 맞대고 동일한 하나의 눈으로 보고 동일한 하나의 귀로 듣는다. 어찌 통쾌하지 않으리오."

그리곤 노래하기를,

‘개의 불성이여 온전히 법령을 폈다. 잠시라도 유(有)와 무(無)를 건너면, 몸을 잃고 목숨을 잃는다.’

​ 이 구자무불성의 화두는 선종의 그 뜻을 완벽하게 드러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있음’이니, ‘없음’이니 그 말에 얽매여 헤아리다 보면 깨달을 날은 점점 멀어져 간다는 소리입니다.

여기에 세 분의 깨달은 자들의 게송과 말씀을 예시했는데, 한 마디로 유(有)와 무(無)의 개념과는 상관없는 화두이니, 오직 무(無)를 마음으로 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보통 선가에서는 처음에는 ‘동산이 물 위로 간다’ 등 다른 화두로 초견성(初見性), 즉 처음 자신의 본래면목을 자각(自覺)한 후에 완전한 깨침(究竟覺)에 이르기 위해 이 무(無)자 화두를 들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웬만하면 깨치기 힘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일단 초견성(初見性)에 이르는 것을 첫 목표로 삼아 마음 공부함이 바람직합니다.

133. '법신은 응신'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법신(法身)입니까?”

“응신(應身)이다.”

“저는 응신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대에게는 응신뿐이다.”

법신(法身)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응신(應身), 바로 부처의 3 몸(身) 가운데 화신(化身)이라, 법신은 응신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수행자는 ‘응신을 물은 게 아닌데요’ 라고 말하니 조금 싱겁게도 “너에게는 응신뿐이다.” 라고 하네요.

부처는 법신, 보신, 응신의 3가지 몸을 가지고 있는데 그 스님은 화신 밖에 가진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3신(身)이 모두 한 마음이라, 법신=보신=응신, 구분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을 모르니 아직까지는 응신뿐이라 한심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빨리 법신을 알아라! 한 몸(身)을 그 기능에 따라 달리 부를 뿐입니다.

134. '달이 공중에 떠 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밝은 달이 공중에 떠 있을 때(朗月當空時)는 어떻습니까?”

“스님은 이름이 무엇인가?”

“아무개입니다(某甲).”

“밝은 달이 공중에 떠서 어느 곳에 있느냐?”

‘밝은 달이 공중에 떠 있을 때(朗月當空時)'를 한번 마음속에 그려 보십시오. 내 마음 속에 환히 밝은 달이 허공 중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 법신이 그렇게 걸려 있단 말이죠. 이것을 느끼면 됩니다. 화두를 들 때도 의심이 옴짝달싹 못하게 마음을 꽉 채울 때쯤이면 휘영청 밝은 달이 허공에 걸려 있음을 확연히 느낀다고 합니다. 자! 그럴 때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머리의 정신상태는?

조주는 묻습니다. 그러할 때, 물론 그렇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가?” 무슨 소리입니까? 낭월당공시(朗月當空時)에는 자기 이름도 바뀝니까? 답은 ‘네, 바뀌어야 합니다’ 입니다. 그래야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름이 바뀌지? 이해를 못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이 수행자가 “아무개입니다(某甲).” 라고 하자, '그대의 밝은 달이 공중에 떠 있다는데 어디에 있단 말이냐?” 자기의 밝은 달, 청정법신을 제대로 찾아야 합니다. 어디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자기 이름이 바뀌었음을 압니다.그저 고향일 뿐입니다.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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