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은 부처님 이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발견하기 전이나
이 세계가 이룩되기 전부터 항상 존재한 법칙이며
앞으로 영원의 시간으로 존재할 법칙이다.
-명성 스님
십이인연十二因緣으로/윤회하는 /진리
명성 스님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하듯이 부처님께서는 인연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 이 인연, 즉 연기법은 부처님 이전이나 뉴턴 이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다. 뉴턴이나 부처님이 발견하기 이전이나 이 세계가 이룩되기 전부터 항상 존재한 법칙이며 앞으로 무궁한 영원의 시간으로 존재할 법칙이다.
《중아함경中阿含經》에 “만약 연기를 보면 문득 법을 보며, 만약 법을 보면 문득 연기緣起를 보나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법이라 하는 것은 곧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고, 또 진리는 곧 연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연기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잡아함경雜阿含經》십이부十二部에 이것을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하며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니라”라고 연기의 뜻을 말하였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 무정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서 어느 한 가지도 고립과 독존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비단 유정만이 인연으로 이루어 질 뿐 아니라 유정을 담아 가지고 있는 기세계器世界, 즉 무정물까지도 인연의 법칙을 따라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생성·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는 일명 인연으로서 십이인연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십이인연이라는 것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등이다.
1. 무명無明은 무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 사물에 대한 무지,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이 무명은 일체 번뇌의 근본이요, 또 일체 악법의 원인으로 고해의 생사를 되풀이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2. 행行은 과거세의 번뇌에 의하여 지은 선악의 업을 말하는 것이다. 즉 몸이나 뜻으로 지은 모든 업행業行을 말하는 것이다.
3. 식識은 인식의 주체로서 과거세의 업하여 받은 현재 수태受胎의 일념을 말하는 것이다.
4. 명색名色은 태중胎中에 있어서 점점 심신이 발육하는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명名은 정신적 작용이고 색色은 육체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5. 육입六入은 안·이·비·설·신·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6. 촉觸은 2~3세의 어린 아이들이 사물에 대해서 아직 고락의 인식 없이 다만 물건을 감촉하려고 하는 것이다.
7. 수受는 6~7세 이후부터 점점 사물에 대해서 고락을 인식하고 이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8. 애愛는 14~15세 이후부터 애욕심을 일으켜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려는 것과 같이 본능적 욕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9. 취取는 아집을 말하는 것으로, 이 아집은 애를 근본으로 하여 일어나는 취착심을 말하는 것이다.
10. 유有는 앞의 취착심으로, 업을 지어서 미래의 과보를 일으키는 유를 말하는 것이다.
11. 생生은 현재의 업에 의하여 미래의 생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2. 노사老死는 생으로부터 늙어서 명근命根이 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의 십이인연은 무명無明에 의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의하여 식識이 있고, 식에 의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의하여 육입六入이 있으며, 내지 유有에 의하여 생生이 있고, 생에 의하여 노사老死가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십이인연은 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십이인연중 무명·애·취는 혹장惑障이요, 행·유는 업장業障이요, 나머지 식·명색·육입·촉·수·생·노사는 고장苦障이라고 한다.
혹惑이라는 것은 마음의 병이고, 업業이라는 것은 몸의 병이며, 고苦라는 것은 생사의 과보果報이다. 중생은 미혹한 생각으로 인하여 업을 짓게 되고, 업을 짓기 때문에 고과苦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중생은 혹, 업, 고 이 세 가지 장애로 인해 끊임없이 수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악법의 근원이 십이인연으로부터 일어나 그 업으로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십이인연을 해탈하는 길은 십이인연의 근본이 무명에서 나왔으므로 무명의 실체가 없음을 깨달아, 무명이 멸함을 따라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내지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이라고 하였다. 즉 무명도 없고 무명이라한 것도 없으며, 노사도 없고 노사가 다했다는 것도 없는 것이다. 무명이 없음을 알 뿐만 아니라 무명이 다했다는 것도 없는 것이다. 무명이 없음을 알 뿐만 아니라 무명이 없이 다했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져야 한다. 따라서 십이인연의 과보로서 노사도 없을 뿐 아니라 노사가 다했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번뇌의, 즉 업의 근본이 되는 무명을 끊음으로써 일체 고통이 없는 해탈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1968.4.21
청룡사 강사 재직시
명성 스님
1931년~
1952년 선행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70년 동국대 불교대학원 졸업. 박사학위 취득
제3,4,5,8,9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1074년~1988년 운문사 주지
現 전국비구니회회장, 운문사 승가대학(원)장
염화실 카페 http://cafe.daum.net/yumhwasil/8Hqs/9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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