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 높은 사람은 모든 집착을 포기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며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움이나 슬픔을 당하여도
날뛰거나 좌절을 보이지 않는다.
-고산 스님
치기의 앙금이/응결될/무렵에는
고산 스님
부제:박제천 시인에게
글 받고, 아직 면식도 없으면서도 큰 반가움을 느꼈습니다. 시업詩業의 길을 걷고 있다니, 더욱 그러합니다. 이곳 쌍계사는 조만간에 있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벚꽃 내음이 들이닥칠 판입니다.
그것은 아시겠지만 구례읍에서 이쪽으로 삼십여 리, 화개마을에서 절에 이르는 십여 리 계곡길이 마치 터널처럼 벚꽃나무가 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바쁜 중에도 시간을 쪼갤 수 있다면 한번쯤 이 어지러운 벚꽃을 보시러 오시지요.
나는 시詩에 대해서 솔직히 말한다면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박 시인께서 근황을 말씀하고 내게 슬쩍 질문하신 ‘치기稚氣’의 존재가치 등에도 그것이 시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언저리로 말을 돌려 본다면 박 시인의 지내온 내력과 근황은 퍽 ‘행복’한 듯 보입니다. 이를테면 생명을 느끼고 그 후 베르그송의 <생명의 약동>이나 서산 대사의 그만이 가질 수 있었던 <뜰>이나 추사秋史의 <한마음>과 원감 국사의 <우중독좌雨中獨坐>의 말씀은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귀중한 사려라고 생각됩니다.
나의 경우에 있어 이와 비슷한 체험과 사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딱히 불문佛門에 귀의했다 해서 이러한 체험이나 느낌, 사고를 배제하려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깊은 산간山間으로 몸을 옮겼습니다만 때와 장소가 사람의 사람스런 자취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중독좌>나 추사의 <한마음>은 그것이 남이 보기에는 애처롭게 보였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스러운 면에서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아니할 듯합니다.
그것은 실로 우리에게 귀중한 무엇을 시사해주는, 우리가 체험해보지 못한 다른 체험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 있어 우중독좌의 체험은 무시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중독좌에 있어 ‘모든 새들이 깃들이지 못하는 것과 흐름이 다 한가지이지 못함을 서글퍼하는’ 사람이란 실상 몇 안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내 경우에 있어 그런 체험이란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있었을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서두에서 치기와 시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만, 실상 시뿐만 아니라 인간의 형성에 있어 모든 것, 이를테면 수행에 있어서도 이는 중요하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박 시인이 시 몇 줄을 쓰면서 ‘조주의 개’ 등을 원용해 동도자同道者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고, 그런 치기스러움이 시를 형성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실상 치기란 그 자체가 완성을 향한 물 같은 것이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한 개의 소금이 바닷물의 모임과 증발 등을 통해 ‘응결’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치기의 앙금이 응결되었을 때 훌륭한 결과, 즉 시가 되는 것이 아닌지요.
실상 모든 일에 있어 완성이란 있을 수가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치기란 생명이 끝날 때까지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많은 승려 시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나의 대답에 동감일 줄 믿고 싶습니다
1977.4.17
쌍계사 주지 재직시
고산 스님
1934년~
1948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74년 동국대 행정대학원 졸업
1994년 초대 조계종 호계원장
1995년 동국학원 이사
1998년 제29대 조계종 총무원장
現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쌍계사 조실
염화실 카페 http://cafe.daum.net/yumhwasil/8Hqs/95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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