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불교의 개척자들
이동호
/ 발틱연구소 소장·정치학박사
이 글은 발틱연구소 소장 이동호 박사가 <법보신문>에 연재했던 것이다. 제목 그대로 유럽불교의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추적한 매우 훌륭한 글이다. 유럽의 불교 역사와 현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한 자료이기에 여기에서 소개한다. -팔리문헌연구소-
프롤로그법보신문에서는 지난 2000년 2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유럽불교는 지금’을 연재함으로써 서구불교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유럽에서 불교의 연구뿐만 아니라 일상의 종교나 삶의 철학으로 뿌리 내리는데 기여한 주요 인물 중심으로 유럽 불교에서 불교의 현황과 역할에 대해 점검하는 ‘유럽불교의 개척자들을 월 1회 연재한다.(편집자)
최초의 동서양의 충돌은 알렉산더 대왕이 인디아를 침공한 때인 기원전 4세기경이었다. 그는 단순한 군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동양 원정에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문화 교류의 목적으로 대동했다. 아마 그때, 그리스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불교를 포함한 인디아 문화에 대한 지식을 본국으로 가져갔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로인해 불교가 고대 그리스 세계와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고, 기독교의 수도원도 바로 불교의 사찰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왜냐하면 불교도들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출가하여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하는 것을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편견-왜곡에서 대안사상으로수세기 동안의 침묵 뒤에, 유럽인들은 다시 불교에 대해 알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가 바로 16세기 초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동양으로 와서 불교를 접했으나, 지나친 편견과 왜곡으로 일관된 불교를 서구에 소개했다.?나는 내가 들었던 것이 사실인지 알고 싶습니다. 서 티베트의 구게(Guge)제국의 왕과 신하들이 기독교 신자로서 하나님의 진실된 계율을 잘 지키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내가 온 것은 만일 그들이 사실과 달리 하나님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 그들의 믿음에서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부족한가를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
1624년 11월 8일,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소속 안토니오 드 안드라데(Antonio de Andrade, 1580∼1634) 신부가 그의 동료 마뉴엘 마르케스(Manuel Marques) 신부와 서 티베트의 방문을 위와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초의 몇몇 기독교 선교사들의 불교 이해와 서구로의 소개에 대한 기여를 간과할 수 없다.
유럽에서 불교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본격 시작된 때는 19세기 초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자 아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불교를 통해 철학적인 세계관을 서구에 제대로 알린 첫 사람이었다. 당시까지 극소수의 인도학을 연구했던 학자들이 유럽어로 불경을 번역했고 이를 통해 불교를 이해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자기 집에 금빛 불상을 봉안하고 일상의 삶 속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의 철학적인 사고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유럽에 불교 및 불교철학을 학문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불교 연구와 소개를 주도한 사람은 프랑스의 동양학 연구자인 유진 뷔르누(Eugene Burnouf, 1801∼1852)이다. 1826년 그의 개척자적인 저서 [팔리에 관한 에세이(Essai sur le Pali)]를 독일 학자 라쎈(Lassen)과 함께 출간했으며, 1844년 [인도불교사입문], 1852년 [법화경 역주] 등을 펴내기도 했다. 그의 선구자적인 불교 연구와 그 영향을 후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유럽불교 연구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한다. 그의 뒤를 이어 실벵 레비(Sylvain Levi, 1863∼1935)의 공헌도 잊을 수 없다. 보기 드문 대승불교 경전의 발굴과 프랑스어로의 번역, 출판을 통해 불교철학과 역사 연구의 새 지평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뷔르누와 레비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의 훌륭한 불교학자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고 있다.
그의 벨기에 제자인 루이 드 라 발레 뿌쏀(Louis de La vallee Poussin)은 거의 불교백과사전 수준의 불교 철학 전반을 다룬 연구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런 불교 연구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게 된다. 덴마크의 빅토르 파우스볼(Victor Fausboll)은 1855년 법구경을 라틴어로 번역, 주석까지 달아 출판했다. 이것은 유럽에서 최초로 팔리 경전을 로마자로 완역한 것이었다. 또 다른 덴마크의 팔리어 학자로는 트레크너(V. Treckner)가 있는데, 팔리어 대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본부는 코펜하겐에 있으며, 스웨덴 출신의 유명한 팔리어 학자인 헬머 스미스(Helmer Smith)도 이 작업에 참여했다.네덜란드에서도 케른(H. Kern)이 수많은 산스크리트로 된 불교 경전을 편집·번역했으며, 1896년 출판된 그의 명저 [인디아 불교매뉴얼]은 여전히 오늘날까지 서구의 많은 불교 학도들의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네덜란드 불교 연구의 전통은 오늘날 드 용(J. W. Jong)과 후학들에 이어져 오고 있다.
독일에서는 헤르만 올덴버그(Hermann Oldenberg, 1854∼1920)가 있었는데, 영국과 독일에서 불교 연구를 주로 활발히 연구했다. 그는 팔리 율장을 편집했으며, 리즈 데이비즈와 밀접한 교류하기도 했다.
경전번역-포교활동 등 다양하지만 독일어권에서 불경의 번역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칼 오이겐 노이만(Karl Eugen Neumann, 1865∼1915)이다. 일생동안 외로운 역경작업으로 그는 건강과 재산을 잃었으나, 독일어권 유럽국가에서는 그의 헌신적인 노고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시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노이만의 번역 이전이나 이후의 그 어떤 번역도 노이만의 그것과 대등하지 않다. 부드럽고 자비스러우며 존경스런 부처님의 말씀이 이 독일어번역에서 가장 정확하고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 베를린의 의사였던 파울 달케(Paul Dahlke 1865∼1928)박사도 간과해선 안될 인물이다. 그는 역경, 불교 잡지 발간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1924년 독일 최초의 불교 사찰을 건립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 독일 남부의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 1868∼1945)의 현저한 노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팔리 경전 번역뿐 아니라 원시불교에 관한 관심과 연구도 그에게는주요 연구과제의 하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투치(Giuseppe Tucci, 1894∼1984)) 박사가 수십년 동안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로된 경전을 번역 출판함으로써 이탈리아에 불교를 소개하고 전파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유럽에서의 불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나라는 아마도 영국인들일 것이다. 리즈 데이비즈(T. W. Rhys Davids, 1843∼1922)는 스리랑카에서의 오랜 팔리어 공부를 하고 귀국해 유럽의 다른 동양학자들과 교류하면서 1881년 역사적인 팔리 경전회(Pali Text Society)를 설립했다. ‘초기 불교 문헌의 이해를 목적’으로 창립했는데, 그의 부인의 내조와 공동 연구는 동서양의 학자들을 한데 묶고 공동연구를 가능케 했다. 많은 불교학자들에게 있어 불교는 주로 학술적인 관심이었다. 그러나 지드 데이비즈에게는 고대사나 고고학 같은 새로운 분야의 연구가 아니라 생활종교 또는 삶의 철학, 원동력으로 늘 함께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정도에 따르니 내 삶이 만족스럽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대 영국불교의 기초는 크리스마스 험프리(Christmas Humphreys,1901∼1983)의 권선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출가자-불교학자 갈수록 증가프랑스에서는 대승불교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으나, 이와 달리 영국과 독일에서는 남방 상좌불교(Theravada)의 연구가 앞서 시작된 것이 흥미롭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초기 경전 중심으로 연구해서, 그 본래의 가르침에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강을 연구하는데 하류에서만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발원지부터 직접 보고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유럽 불교인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다양성 인정 가장 큰 매력오늘날 유럽대륙에서는 불교가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듯, 아니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 듯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불교 신자들의 수(약 700만에서 1000만명으로 추정됨)는 유럽인들 스스로 얘기했듯이 ‘20세기에 유럽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의 증거로 일견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문명국가인 유럽 최대 국가인 독일에서는 매년 10만명 이상이 기독교 교회를 탈퇴하고 있으며,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종교가 없다고 한다. 유럽연합으로의 통합에 박차를 가하는 유럽인들은 ‘다양성 속의 단일성’을 항상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런 생활은 일찍이 기원전 3세기경 불교를 신봉한 인디아의 아소카 황제가 선언한 말이 다시금 새롭게 들린다.?단지 자기 종교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종교를 멸시해서는 안 되며, 이런 저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종교의 성장을 돕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종교에도 봉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중략… 모든 것을 경청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신념에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하라’<2002. 1. 2 / 638호>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만일 나의 철학의 결과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불교라고 생각한다.”고 그의 유명한 저서 [의지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년)에서 역설했다.아투르 쇼펜하우어는 서구 지성사에서 가장 뛰어나고 비범한 인물중의 한 사람으로 서재에는 칸트의 반신초상과 청동불상을 모셔 놓고, 규칙적으로 ‘아트만(불멸의 자아란 의미)’이란 애견을 데리고 산책을 했다.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파니샤드를 읽었으나, 침대의 베개 밑에는 장전한 권총을 두고 밤손님을 대비하기도 했던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주목할 점은 불교와 힌두교의 기본적인 교리가 그의 철학적 사고체계와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역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바로 칸트주의적인 관념론과 불교의 사성제의 유일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놀랄만한 일은 쇼펜하우어는 동양사상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불교적 사고를 했던 것이다. 달리 얘기하면, 그는 서양철학의 전통안에서 독립적으로 연구했지만, 2300여 년전 완전히 다른 지적 전통에서 행한 부처님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결론과 유사한 이론을 펼쳤다는 점이다.
서구에서 유명 철학자들 중에서 쇼펜하우어만큼 불교를 깊이 연구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사고의 많은 부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저를 두고 있다. 1814년, 당시 유명한 동양학자인 프리드리히 마이어(Friedrich Majer)와의 학적 교류를 통해 ‘우프네카트(Oupnekhat)’를 접하게 된다. 우프네카트는 고대 인도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Upanishads)의 페르시아 번역본을 라틴어로 다시 번역한 것을 말한다. 그는 평생 이 책을 읽고 연구했으며, 이것은 그의 세계관의 굳건한 토대의 한 부분이 됐다. 그가 노년인 된 1851년 이 책을 평하기를, “이 책은 가장 값지고, 수준 높은 것이다. 지구상에서 내 삶의 위안이었고 내 죽음의 그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이를 극찬했다.
시대적 배경그의 명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세상에 나온 1818년 당시는 신성동맹의 시대로, 유럽 전체는 완전히 지쳐 쓰러져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여행하면서 무질서, 불결함, 농촌의 극심한 궁핍, 거리의 불안과 참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나폴레옹군과 반(反) 나폴레옹군은 그들이 통과하는 모든 국민의 얼굴에 파괴의 상흔을 남겨 놓았으며, 유럽은 온통 잿더미의 회색빛이 가득했다.이 전쟁의 자랑스런 승리자인 영국도 보리 가격의 하락으로 농부들은 궁핍했고, 산업 노동자들은 초기 산업혁명의 열악한 공장생활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잇따른 해고는 실업을 더욱 증대시켰다. 유럽에서 일찍이 이토록 무의미하고 처참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자유와 의지는 자취를 감추고 유럽의 정신도 생기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민감한 사춘기와 청년기의 쇼펜하우어는 암울한 시대를 경험했던 것이다.
성장과 교육1788년 2월 2일 발트해 연안의 자유 도시 단치히(Danzig, 오늘날 폴란드 도시인 그단스크 Gdansk)에서 부유한 상인인 아버지와 여류 작가인 어머니 요한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쇼펜하우어는 한창 상업활동이 활발할 때 성장기를 거쳐 현실적 감각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됐다. 1809년 괴팅겐 대학에 입학해 의학공부를 시작했으나, 두 학기만에 인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플라톤(Plato)과 이마누엘 칸트에 관해 열심히 공부했다. 이어 1813년에는 예나대학에서 ‘충족이유의 원리에 대한 네 가지 근본에 대해’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로 된 철학서와 문학작품에 몰두했다. 이후 그는 30세 때 드레스덴에서 필생의 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집필에 몰두해 1818년 완성했다. 그 후 1822년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부 강사가 됐으나, 당시 독일 철학계의 독재자로 군림하는 헤겔(Hegel)의 압도적인 명성에 눌려 이듬해 사직하고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831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만연해 마인강변의 프랑크푸르트(Frankfurt)로 이사해 한 마리의 삽살개와 함께 일생을 보냈다. 이 귀여운 개를 ‘아트만’이라 불렀으며, 거리의 장난꾸러기 꼬마들은 이 작은 개를 ‘작은 쇼펜하우어’로 불렀다. 그의 철학적 사고는 훗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철학자 니체 등에게도 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불교와 그의 철학불교의 사성제를 쇼펜하우어는 어떻게 이해해 자신의 철학에서 소화했을까. 부처님은 생노병사의 인간사 모두가 고통이라고 했는데, 쇼펜하우어의 삶에 대한 의지는 바로 이런 고통과 욕망에 의해서 지배되는 우주를 말한다. 그리고 그는 경험세계란 완전하지 않고 실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단지 표상일 뿐이라고 이해했다. 모든 고뇌는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불교이론에 대해 그는 고통의 원인은 의지이며, 이 세계는 의지로써 이해된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상과 고뇌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 희망은 팔정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 환상에서 구원되는 길은 미학적인 명상과 그러한 유미주의의 실천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먼저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벗어 날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바로 열반(涅槃, Nirvana)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소멸이라고 설명했다. 그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은 그것이 확실한 종류의 것이라면 유용한 것이 된다.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구별은 현상계의 본분이다. 그러나 일단 세계가 참으로 보여지면, 그런 것은 없어지고 만다. 달관한 사람에게는 마야(Maya)의 막, 즉 환각은 투명해지며, 구별은 단지 외관상의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자비를 통해서만 이러한 통찰에 이르게 된다고 이해했다. 또 그 자비는 타인의 고통을 동정하고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불교는 그리스도교보다 훨씬 깊이가 있다고 했다. 쇼펜하우어의 공헌첫째, 유럽의 수많은 철학자중에서 그는 최초로 불교를 철학적으로 심오하게 이해했으며, 지성계에 소개했다. 특이한 점은 우파니샤드 등 인도 철학을 접하기 이전에 벌써 2300여 년전의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과 비슷한 결론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는 것이다.
둘째, 유럽 불교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유명한 불교 경전 번역가인 칼 오이겐 노이만(Karl Eugen Neumann), 판사이자 동시에 고불교회를 창립한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 독일 최초의 비구승인 나냐틸로카(Nyanatiloka) 등 많은 유럽인들이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만큼 유럽 불교를 얘기할 때 쇼펜하우어가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유럽에 불교를 학문적으로 정리해 소개한 선구자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쇼펜하우어 약력 - 천재철학자 … 만년에 추앙△1788년, 단치히(Danzig)에서 은행가인 아버지와 여류작가인 어머니사이에서 출생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병합되자 다섯 살 때 자유도시 함부르크로 이사 △1805년, 아버지 사망(자살로 추정) △1809년, 괴팅겐대학 입학 △1813년 [충족이유의 원리에 대한 네 가지 근본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음. △1816년,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을 완성 △1819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함, 베를린 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나 헤겔의 압도적인 명성에 눌려 이듬해에 사직함. △1841년,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 문제]를 완성함 △1851년, [수필과 이삭줍기]가 발표된 뒤 일반대중들의 환영을 받기 시작, 학(學)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인생의 근원적 고뇌를 해소하려는 그의 태도에 많은 동조자가 속출하였다. △1860년, 9월 21일 폐마비로 사망. <2002. 2. 6 / 643호> 왜젠 뷔르누프(1801∼1852) 왜젠 뷔르누프는 1801년 4월 8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저명한 고전학자로, 왜젠 뷔르누프는 성장하면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는데 아버지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초중고와 대학교에서 뛰어난 실력을 연마한 후, 젊은 뷔르누프는 레오나르 드 쉐지(Leonard de Chezy)문하에서 산스크리트어의 지식을 더욱 심화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드 쉐지는 퐁 신부가 저술한 산스크리트 문법책을 독학하여 유럽 최초로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이 대학은 바로 1814년 프랑스 파리에 설립된 ‘꼴레쥬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이었다. 최초의 서양 불교학자2년동안 드 쉐지 교수 밑에서 연구한 후, 뷔르누프는 그의 동료인 크리스티안 라쎈(Christian Lassen)과 함께, 1826년 팔리(Pali)어에 관한 최초의 학술적인 연구업적이라 여겨지는 것을 출판했다(물론 당시 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벤자민 클로우(Benjamin Clough)가 2년 먼저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학술 연구서를 출판했다). 1926년부터 처음으로 불교 문헌학(Philologie Bouddhique) 강좌가 설립됐다. 6년 뒤 뷔르누프는 드 쉐지 교수의 뒤를 이어 ‘꼴레주 드 프랑스’의 산스크리트어 교수가 됐다.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에 관한 해박한 그의 지식은 정확한 문헌학적 재능과 결합해, 새로운 미지의 분야인 불교 연구에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처음 접하는 여러 불교에 관한 자료들을 탁월하게 해석해 불교에 관한 명확한 개념 정립을 했다. 이는 바로 오늘날 유럽 불교학의 기본 틀을 이루는 중요한 초석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뷔르누프는 오늘날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에 관한, 아니면 물질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를 탐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그런 과학적인 열정과 기대에 차서 적극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이런 자세는 1833년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 취임 첫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다.
범어-팔리어 등 언어학적 천재?우리는 이미 동양으로부터 왔을지도 모르는 가장 찬란한 빛에 우리의 눈을 감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의 주시해야 할 이 굉장한 사건을 이해할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사여러분, 이는 바로 인도 그 이상이며, 이 세계의 기원의 한 페이지이며, 바로 인류의 근본적인 정신사의 한 장입니다. 우리는 함께 이 것을 해독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영국인들에게는 위와 같은 연구 동기가 그렇게 강하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산스크리트어와 불교에 대한 지식은 단지 그들이 통치하고 있던 인도에 관한 지식을 더 강화해주는 정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 관한 식민지배욕망을 방해받은 프랑스인들은 단순히 영토를 소유하는것보다는 좀 더 고상한 성취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뷔르누프는 홋지슨(Hodgson)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중국인, 티베트인, 몽골인들이 불경 번역의 기본으로 삼았음을 인지하고 이 산스크리트어본이 바로 진짜 원전임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그의 팔리어 실력을 바탕으로 스리랑카어 번역본도 마찬가지의 권위가 있는 중요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얼마 뒤 아마 홋지슨이 수집하고 그의 동료 헝가리인 초마(Csoma)가 분류,색인한 티베트본 불교 경전에 관한 완결판이 파리에 도착했다. 초마가 편찬한 티베트어 문법책과 티베트-영어 사전을 추가로 무장하여, 뷔르누프는 이제 인도에서 불교의 시작에 관해 뭔가 분명히 확립할 수 있게 됐으며, 부처님의 역사성에 관한 문제와 불교 교리의 발전에 관한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기를 희망했다.
[법화경] 등 유럽언어로 첫 번역홋지슨으로부터 티베트판 불경을 받고 나서 몇 주안에 그는 법화경번역에 착수했다. 그러나 곧 그는 종합적인 입문서가 없이 바로 번역한 불교경전은 심지어 학술적인 연구가들에게도 큰 의미가 없을 것 임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결국 1844년, 방대한 분량의 저작 『인도 불교사 입문(L’Introduction a l’histoire du buddhisme indien)』를 출판하게 된다. 거의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이 책은 바로 그가 최초로 유럽, 유럽인들에게 인도 불교 역사, 불교 교리, 경전에 관한 상세한 학술적인 조사와 연구를 선물한 것이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로 쓰여진 자료에 전적으로 의지한 뷔르누프의 책은 가히 놀랄만했다.그는 혼돈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곳에서 새로이 합리적인 질서를 발견하여 구축하는데 최초로 성공했으며, 그 기본 형식은 오늘날까지 학자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뷔르누프는 이 입문서에 두 가지 연구를 덧붙여 완성하려고 했다. 하나는 팔리어 경전의 해석과 다른 하나는 산스크리트어본과 팔리어 본의 비교연구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 계획은 1852년 5월 28일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룰 수 없었다. 그가 번역한 법화경은 그가 죽은 해 10월에 출판됐은 데, 이는 산스크리트 경전에서 유럽언어로 완역된 최초의 일이었다. (물론 1837년 러시아 상 뻬쩨르부르그에서 출판된 금강경이 최초의 경전이다. 이는 러시아인 이삭 야콥 슈미트가 티베트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불교를 합리적인 지식체계로 구성그의 저서나 논문등에서 뷔르누프는 불교에 관한 그의 느낌이나 감정을 자연스레 나타내고 있으며, 철학적,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 의미를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교유했던 지인, 동료, 제자들의 몇몇 회고는 이러한 그이 모습을 잘 얘기해 준다. 그와 동시대의 산스크리트어 연구가인 막스 뮐러(Max Mueller)는 1845년 뷔르누프를 방문한 후 산스크리트어로 쓴 그의 일기에서 뷔르누프를 위대한 문헌학자이자 불교인으로 극찬하고 있다.
뮐러의 뷔르누프에 대한 좋은 인상은 그의 제자들의 회고와 겹쳐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인 계산으로 훗날 명성을 얻은 어네스트 레난(Ernest Renan)과 쥘레 바텔레미-셍-힐레르(Jules Barthelemy-Saint-Hilaire)는 ‘우리시대에 죽은 모든 문헌학자 중에 뷔르누프만큼 큰 명성을 남긴 학자는 아무도 없다’고 칭송했다. 이러한 칭송은 수십 년 뒤의 저명한 프랑스 동양학자였던 실벵 레비(Sylvain Levi)도 뷔르누프의 문헌학적 천재성과 연구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뷔르누프의 가장 큰 업적은 불교를 유럽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인 지식 체계로 구성한 점이었다. 뷔르누프는 홋지슨의 경전을 불교 연구에 진실되고 가장 확고한 기초자료로 평가했다. 그리고 당시 예수회는 본래 가지고 있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불교 수행 문화의 생생한 면을 인정했다.
뷔르누프 저작은 단지 동양학자들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인들도 감동시켰다. 프랑스 역사가 미셀렛(Michelet),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Wagner), 그리고 미국의 선험론자 쏘로(Thoreau)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불러 일으켜서, 불교에 관한 주제로 학문적으로 인기 있는 저술들이 홍수처럼 발표하게 하는 출발이 됐다. 뷔르누프가 크게 윤곽을 한번 잡아주니, 수많은 문헌학자, 언어학자, 작가, 시인들이 상세하게 그것을 열심히 채워가게 됐던 것이다. 왜젠 뷔르누프 연보△1801.4.8.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
△1819~1823 소르본느대에서 수학
△1824~1826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산스크리트어 수학
△1833 꼴레쥬 드 프랑스 산스크리트어 교수 취임
△1844 주저 『인도불교사입문』 출판
△1852.5.28 사망. 작고할 때까지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 후학 양성 및 활발한 연구 활동
△1852.10 그가 번역한 『묘법연화경』 사후 출판됨. <2002. 3. 20 / 648호>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 1832∼1904) 유럽 불교의 전래에 있어 영국인들의 기여는 대단히 크다. 당시 아시아로 진출해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식민지로 경영하고 있었던 영국은 불교 연구 및 불교의 서구 전래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서구 불교의 해석자’라고 일컬어지는 에드윈 아놀드 경이다.
5년간 인도에서 직접 생활아놀드는 1832년 영국 켄트지방의 그레이브센드(Gravesend)에서 태어났으며, 로체스터(Rochester)의 킹즈 스쿨과 런던의 킹즈 대학(King's College), 옥스퍼드의 유니버시티 대학(University College)에서 공부했다. 1852년 그는 옥스퍼드대 재학중에 ‘뉴다이게이트(Newdigate)상’을 수상하고, 1856년에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푸나(Poona)의 데칸 대학(Deccan College) 교장으로 임명됐다. 5년 뒤인 1861년 그는 인도에서 돌아와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라프(Daily Telegraph)'지의 편집기자가 되었으며, 1873년에는 편집인의 위치에 올랐다. 이 신문사에서 약 40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그 성과와 명성을 쌓아 갔다. 물론 편집인으로서 많은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스탠리(H.M. Stanley)의 리빙스턴(Livingstone) 찾기 사업을 위해서도 노력했으며, 1904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채식주의자 모임도 결성그는 언론인인 동시에 훌륭한 시인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879년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이라는 유명한 시집을 낸 이후에 『세계의 빛(The Light of World)』 제목의 시집만을 내었을 뿐,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 활동이 없었다. 그는 1885년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의 황폐함을 보도했으며, 이와 관련해 인도 정부에 관심을 촉구했다. 이러한 그의 실천적 행동은 1891년 ‘마하 보리회(Maha Bodhi Society)의 창립으로 이어졌으며, 이 단체는 후에 부다가야에 불교 대학 건립을 시도했다. 그는 또한 런던의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채식주의자 모임을 결성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놀드의 대표작인 『아시아의 빛』은 유럽을 비롯해 미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대기를 일반인들에게 최초로 알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아시아의 빛』은 독특한 형식, 이상한 이름들, 그리고 산스크리트 용어가 등장하여 곧 화제가 될 법도 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얘기가 당시 유럽에는 이미 크게 회자되고 있었음을 반증해 준다. 그럼에도 이 시집은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부처님의 도덕적 가르침은 서구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당시 인도에 관한 신비로움은 독자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부처님의 일대기는 서구인들에게 완전 선을 행한 인물로 뿌리내리게 했다.
이 시집은 곧 유럽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판됐으며, 영국에서는 60판, 미국에서는 80판에 이르게 된다. 대략 100만권이 팔려 나가 거의 모든 도서관에 소장, 비치되었을 정도로 부처님의 일대기로는 가장 잘 표현한 영어권 저술이란 찬사를 받고 있다. 그는 『아시아의 빛』서문에서 부처님에게서 받은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다.“인류의 삼분의 일 이상은 여기 묘사하는 인도의 왕자에 대해 도덕적, 종교적 믿음으로 경외한다. 존재하는 자료에 비록 불완전하게 드러나지만 그의 인격은 인류 사상사에 있어 나사렛 예수와 함께 최고로 숭고하고 점잖으며 성스럽고 가장 은혜롭게 보인다”.
이 시집이 쓰여질 무렵, 서구에서 일반인들이 부처님에 대해, 그리고 불교에 관해 알고 있는 정도가 극히 미비했으며 심지어 동양에 관한 학술지에서조차도 드물었다. 하지만 이 시집이 나온 이후 부처님과 불교에 관한 산문형태의 시도들이 크게 증가됐던 것이다.
아놀드는 이 시집을 준비하면서 모든 가능한 자료들을 이용했는데, 특히 스펜서 하디(Spence Hardy)나 뷔르누프(Burnouf)의 저서를 주로 참고했다. 그리고 그땐 이미 1875년에 영국에는 팔리어 사전이 로버트 세자르 차일더즈(Robert Caesar Childers)에 의해 출판되기도 했으며, 1881년에는 리즈 데이비즈(T.W. Rhys Davids)가 팔리 경전회(Pali Text Society)를 창립했다. 바야흐로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시기가 도래함을 의미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의 시집은 다양한 학문적인 배경에 힘입어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이다.아놀드는 인도 푸나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산스크리트를 익혔으며, 그의 탁월한 외국어 능력으로 인도의 이름과 각종 고유 명사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피츠 제럴드(Fitz Gerald) 등 일부 작가들과 함께 영어권 시인 중에서는 드물게 동양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시인으로 인정받게 됐다.
『아시아의 빛』 이외에도 그는 아시아 각국, 특히 그가 경험한 인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저술을 시도했다. 일반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도의 민요와 시들을 번역, 편집해 출판하기도 했으며, 『죽음과 그 후』(1889), 『연꽃과 보석』(1887) 『죽음의 비밀』(1885) 등 불교에 관한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이와 함께 일본에 관한 에세이와 4막으로 구성된 연극 『아주마-일본 부인』 (1893)의 대본을 쓰기도 했으며, 불교와 현대 과학과도 깊은 관계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강조했다.
‘대승 이해 부족’ 아쉬워
『아시아의 빛』에서 아놀드는 왕자 고타마가 부처가 되는 것에 앞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탄생과 유년 △결혼 △세 가지 징표 △부정(否定) △깨달음을 찾아 △깨달음 △귀의 △열반 등 크게 8부분으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개하는데 거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깨달음으로 이끄는 사성제 및 팔정도의 의미와 열반을 대중적으로 설명하려는 난해한 작업을 시도했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인해 서구인들이 동양을 어느 정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했으며, 유럽 최초의 비구 스님이 된 아난다 메테야(Allan Bennett)를 비롯해 유럽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그러나 불교를 대중적으로 이해시켰던 그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구인들이 불교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불교에 정통하지 못했던 그의 한계도 지적되고 있다. 에드윈 아놀드 연보△1832 영국 켄트 지방 그레이브센드에서 출생.
△1857 인도 뿌나 데칸 칼리지 교장
△1861 런던 데일리 텔레그라프 지 편집기자.
△1873 동 일간지 편집인
△1879 『아시아의 빛』 출판, 큰 호응
△1885 『아시아의 빛』 수정판
△1891 『세계의 빛』 출판, 반응 미비
△1904 사망. <2002. 4. 24 / 653호>
리즈 데이비즈 부부 토마스(1843~1922)-카롤린(1857~1942) 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즈(Thomas William Rhys Davids)는 어느 날 한 비구 스님의 죽음이 발단이 되어 야기된 분쟁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가만히 사태를 파악해보니 그 후임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의 제자와 다른 스님이 그 자리를 다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리즈 데이비즈가 이를 종합해 내린 결론은 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은 바로 ‘비나야(Vinaya)’라 부르는 법체(法體)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안타깝게도 오직 팔리어로만 읽을 수 있었다.그래서 리즈 데이비즈는 우난세 야트라물레(Unnanse Yatramulle) 스님으로부터 팔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종려 나뭇잎에 쓰여진 불교 경전을 수집하는데 몰두했다.그가 스리랑카에서 판사로 재직하던 20대 후반의 이 사건은 그가 불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도록 하는 동시에 한평생을 불교신자로서 살아가도록 했던 매우 중요한 요소다.
스님들의 분쟁해결 요청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즈는 1843년 5월 12일 영국 에섹스(Essex)의 조그마한 시골동네인 콜체스터(Colchester)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는 브라이턴 스쿨(Brighton School)을 거쳐, 브레슬라우대학(Breslau University)에서 그리스어와 산스크리트를 전공했다. 당시 그리스어는 유럽에서 라틴어와 마찬가지로 유럽언어의 뿌리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산스크리트는 인도와 불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언어로 부각돼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 시기는 바로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영국인들이 인도로 향하고 있었던 때였다. 리즈 데이비즈도 대학 졸업 후, 인도 동남쪽에 위치한 스리랑카로 가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다. 1866년에서 1872년까지 지방 순회 판사, 고고학위원회 위원 등 식민 지배에서의 법 집행을 하는 동시에 문화재 발굴과 약탈을 자행하는 자들을 옹호·방관하며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앞의 일화에서 나타나듯 이 사건을 계기로 열렬한 불교신자가 되어 불교 연구에 천착하게 된다. 그 후 1877년에는 억울한 소송 당사자들을 위해서 잠시 법정 변호사로도 활약한다.
스리랑카에서의 이런 활동이 계기가 돼 1882년 런던의 유니버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 팔리어 및 불교문헌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12년까지 계속 교수직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1904년에서 1915년까지 맨체스터대학 비교종교학 교수로도 활동하면서 영국에서의 불교연구 지평을 더욱 넓히게 된다.그에게 있어 중요한 변화는 1894년, 그의 나이 51세 때, 당시 37살의 카롤린 어거스타 폴라이와 뒤늦게 결혼했다. 평생 독신의 성실한 생활을 하며 마치 부처님의 수행시절 고행을 연상하듯이 실로 꿋꿋이 불교신자 및 불교학자로서 살아온 토마스 리즈 데이비즈의 일생에 있어서 두 번째의 큰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카롤린은 경제학회지 편집진의 한 사람으로 여성 및 아동 복지와 관련된 많은 단체에서 활동했는데, 토마스와의 만남을 통해 불교의 대자대비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평생 팔리성전협회 운영과 불교연구에 헌신했다.
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즈는 당시 영국 최고의 불교 전문가로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간추려 보면, 1881년 팔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를 창립해 1922년까지 회장으로 기초를 다지는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뿐만 아니라 1900년에는 ‘인도경전 시리즈(Indian Text Series)’를 잇따라 출간했으며, 1901년에는 ‘브리티시 아카데미(British Academy)’를 창립했다. 평생 동지 카롤린과의 만남또 1885년에서 1904년까지는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의 사무총장 및 도서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70이 넘어 은퇴할 무렵부터는 ‘맨체스터 가디안’이라는 신문에 불교와 인도에 관한 칼럼을 자주 기고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팔리-영어사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도반이며 부인인 카롤린의 정성스런 보살핌 속에 1922년 12월 27일, 서레이(Surrey)의 칩스테드(Chipstead)에서 서양불교사의 한 분기점이 됐던 자신의 79년의 생애를 조용히 마감했다. 이후 그의 성실한 불교연구와 모범적인 생활, 그리고 불교인으로서의 업적과 삶은 수많은 유럽인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으며, 그의 유업은 부인 카롤린에 계승되어 더욱 발전해 나갔다.
리즈 데이비즈와 비슷한 무렵 스리랑카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로버트 차일더즈(Robert Caesar Childers, 1838~1876)는 팔리어를 약 8년간 배워서 런던으로 돌아와 1872년에서 1875년에 걸쳐 624쪽에 달하는 「팔리어사전(A dictionary of the Pali language)」을 발간하게 된다. 이 사전은 리즈 데이비즈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됐으며, 좀 더 체계적인 연구 조직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하여 1881년 리즈 데이비즈는 ‘초기 영어 원전학회(the Early English Text Society)’의 사례를 본받아 ‘팔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를 창립하게 된다.
그의 동반자로서 불교를 연구 카롤린 어거스타 폴라이 리즈 데이비즈(Caroline Augusta Foley Rhys Davids)는 1957년 9월 27일 태어났다. 그녀는 대학교 입학 때까지 초·중·고교 과정을 가정에서 학습하고 런던의 유니버서티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그녀는 경제학회지 편집인으로 1891년에서 1895년까지 활동하기도 했다. 1894년에는 토마스와 결혼한 후 1896년부터 1914년까지는 여성 참정권 획득을 위해 주도적인 캠페인을 벌였으며, 1910년부터 1913년까지는 맨체스터대학에서 인도철학을 가르치는 강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1918년에서 1933년까지는 런던대학의 동방·아프리카대학(SOAS;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불교사를 강의했으며, 남편 토마스 리즈 데이비즈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팔리성전협회 회장으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봉사했다. 1942년 6월 26일 여름날 오후, 풍광이 좋은 서레이의 칩스테드의 거처에서 그녀는 향년 85세의 일기로 그토록 기원했던 불국토로 떠났다.
유럽대학에서 불교지도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즈는 수많은 불교 관계 저서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1878년 출판된 「불교」, 1896년 「불교의 역사와 문헌」, 1903년 「불교국 인도」를 비롯해 팔리 경전 중 자신이 번역하고 주석을 붙여 1899년, 1910년 1921년에 각각 출간한 「부처님의 대화록」(전3권)을 펴냈으며,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11판에 불교란을 대표 집필하기도 했다.이외에도 다수의 번역과 논문들이 있으며, 그의 말년에 집필하기 시작한 「팔리어-영어 사전」은 윌리엄 스테드(William Stede)의 편찬 작업이 더해져서, 1921년 출간을 시작으로 1925년에 모두 완간됐다. 뿐만아니라 그의 저서중 가장 유명한 「불교의 역사와 문헌(The History and Literature of Buddhism)」은 1896년 런던과 뉴욕에서 출판된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서구인들에게 읽히고 있는 베스트 셀러다.
초기영어원전학회 창립도이들이 창립한 팔리성전협회는 ‘팔리 경전 연구를 촉진하고 지원할’ 목적으로 시작돼 팔리 경전을 로마자로 출판하고 영어로 번역하며 사전, 용어 색인, 팔리어를 배우는 학생들을 위한 교본, 그리고 학회지를 발간하고 있으며, 현재 옥스퍼드의 헤딩톤(Headington)에 자리하고 있다.창설부터 1922년까지는 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즈가 회장으로 학회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부인인 카롤린 어거스타 폴라이 리즈 데이비즈가 남편의 유훈을 받들어, 1942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는 제2대 회장으로서 팔리성전협회를 굳건히 발전시켰다. 토마스와 카롤린 리즈 데이비즈 부부의 불교 연구에 관한 지대한 공헌은 오늘날 유럽 불교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이 불자 부부가 남긴 팔리성전협회는 오늘날 유럽불교에도 여전히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002. 6. 12 / 659호>
칼 오이겐 노이만(Karl Eugen Neumann, 1865∼1915)서구에서 불교를 이해하는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 중에서도 언어의 문제는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대부분 다른 문화를 토대로 출발한 내용과 형식을 수용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의 벽이 되고 있다.서구의 초기 불교전래와 수용에서의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중국어, 일본어, 티베트어로 된 불교 경전의 역경작업은 매우 험난한 길이었다. 한편으로는 원전과의 비교를 통해 철학적인 논쟁거리가 많아지면서 원전으로 된 경전을 중시하는 쪽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과 사르트르를 비교하기 위하여 누구나 고대 철학과 로만어 전문가가 될 필요가 없듯이 불교를 공부하는데 모두가 인도철학, 중국철학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이러한 어려움을 없애준 이가 칼 오이켄 노이만(1865∼1915)으로 그의 평생에 걸친 험난한 역경 작업은 초창기 서구불교의 탄탄한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했다.
팔리 경전 독일어 최초 번역팔리경전을 독일어로 최초로 번역한 노이만은 1865년 10월 15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에서 태어나 1915년 그의 50번째 생일날에 작고했다. 그의 아버지 안겔로(Angelo)는 빈의 왕실 오페라단의 테너 가수였는데 원래 유대교도였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헝가리의 귀족출신이었다. 1876년 독일 라이프찌히(Leipzig) 시립극장장이 된 아버지의 권유로 칼 오이겐 노이만은 토마스학교(Thomasschule)와 상업고등학교를 마치고 1882년부터 베를린의 한 은행에서 교육과 실무를 배워갔다.그러는 동안 불교에 관한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다양한 글을 접하면서 스스로 불교 신자가 되었으며, 불교 경전의 좀 더 편리한 접근을 위해 팔리어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 한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노이만은 그때의 심경을 훗날 친구인 드 로렌쪼에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1884년 당시 나에게 갑자기 밝은 해가 떠올랐다. 바로 쇼펜하우어였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내적인 삶이 부서졌다. 하루종일 은행일에 지쳐 돌아와서 새벽 3시 또는 아침까지 밤새워 철학 공부를 했다. 결국 외적인 삶마저 부셔졌던 것이다. 그리고 진짜 다시 공부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은행을 그만두고 1887년 부친이 시립극장장으로 활동하던 곳인 체코의 프라하(Praha)로 가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2년반 동안 즐겁게 다녔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해당하는 아비투어(Abitur)를 뒤늦게 성공적으로 마치고, 곧바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Humboldt Universitaet zu Berlin)에 입학해 인도학, 종교학, 철학을 5학기 동안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학생의 신분으로 빈 출신의 까밀라 노르트만(Camilla Nordmann)과 결혼도 하게 됐고, 1891년 마침내 라이프찌히대학교에서 리하르트 피셸(Richard Pischel)을 지도 교수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4세기 팔리어 경전인 사라상가호(Sarasangaho)에 대한 불교적 관점에서의 보론을 그의 번역과 주석을 더하여 발표했다.
하루 12시간 이상 역경 작업베를린에서 학업을 마친 노이만은 불교 경전 번역을 위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고향 빈으로 돌아와 역경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892년에 그의 첫 번째 불교 선집이 출판됐다. 이때 그 선집의 서문을 쇼펜하우어의 출생지인 라이덴(Leiden)에서 그의 104번째 생일날을 기념하며 적었다. 이렇듯 그와 쇼펜하우어는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어 1893년 『법구경』을 번역해 간행했으며, 1893년에서 1894년까지 약 1년간 영국 런던에서 일하고 난 뒤 1894년 자신이 마련한 여행, 체류 경비로 인도와 스리랑카로 긴 학술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을 통해 인도의 삶과 철학을 근본적으로 이해 할 수 있었으며 여행에 관해서는 그의 일기 속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894년 겨울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동양연구소(Orientinstitut)의 뷜러 교수(Prof. Buehler)의 조수로서 약 4년간 연구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물론 개인적으로 일과 후에는 집에서 팔리어로 된 불교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어려운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탄생한 그의 역경집은 여섯 권으로 묶여져 출간됐다.
이런 가운데 1906년 그의 주거래 은행이 파산하게 되자 그의 모든 금융자산의 참담한 손실을 보고 개인적으로 수년동안 극도의 곤궁함에 처하게 됐다. 부득이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려고 4000여 권이 넘게 소장하고 있는 그의 전문 불교도서관을 매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역경작업에 매진했는데, 하루 12시간 이상을 작업에 몰두할 때도 많았다. 그의 역경집은 그의 사후 일년 뒤 대부분 간행돼 많은 유럽인들에게 읽혀졌다. 그의 지독한 역경 작업은 육체적 건강을 해치게 되었으며, 1915년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는 세계 제1차 대전중이었음에도 징집되지 않고 돌아 왔지만, 그의 50번째 생일날 결국 폐렴으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야 했다.
사후 일년 뒤 역경집 대부분 발행그의 필생의 역경을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세계적인 대문호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노이만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불경 번역도 노이만의 역경에 견줄 수 없다. 그 부드럽고, 축제 같고, 경건한 부처님의 설법을 독일어 문체로 탁월하게 묘사함으로써 마치 곁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듯 하다"고 경탄했다. 노이만의 이러한 탁월한 역경작업으로 인해 그때까지 독일에서 마치 사교의 하나로 한쪽 구석의 좁은 곳에 머물러 있던 것을 독일어권의 모든 지역으로 알리게 되었다.지금도 독일어권의 사상가나 문학가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할 때면 대부분 노이만의 역경집을 출처로 밝히고 있다. 노이만이 표현한 독일어는 주로 쇼펜하우어의 용어를 많이 따랐으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뮤지컬의 짧고 간결한 시어적인 표현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원전에 가까운 아름다운 표현은 독창적인 예술어를 낳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독자들은 그 생소함을 두고 인도식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그래서 그의 번역체에 대해서 노이만 당대의 인도학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찬반이 분분했다. 독일어의 거울에 비추어 잘 반영된 번역이라는 찬사에서 문맹자를 위한 형편없는 번역으로 폄하하는 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찬사를 보내는 학자와 문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원전과 흡사" 찬사 잇따라그중 한스 루드비히 헬트(hans Ludwig Held)는 "노이만의 역어체는 한편으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다른 한편으로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영향을 받은 결실이며, 루터가 번역한 성경과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체와 견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결론적으로 "노이만의 부처님은 루터의 예수와 비견된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리하여 노이만의 역경집은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 즉 '책 중의 책'과 대등한 가치를 지녔다고 강조했다. 물론 노이만이 불교의 세계를 알려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로부터 대부분의 중요한 개념들을 도입하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으로 쇼펜하우어의 생각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거의 일치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이지만 헤르만 헤세를 비롯해 그의 역경전집에 대한 수많은 지식인과 저명인사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이 중에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 독일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영국의 버나드 쇼, 독일 현상학자 에드문트 훗설, 프랑스의 로맹 롤랑 등도 포함돼 있다. 특히 20세기의 위대한 소설가이며 문명 비평가인 토마스 만이 이 전집의 재발간 추천사에서 남긴 글은 유럽인들이 노이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이 역경집은 나로 하여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내 감동으로 읽도록 했고, 그 분의 가르침은 내 전생애의 여정에서 참다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키가 되어 주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역경전집은 나의 키르히베르그의 도서관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에게 가장 귀중한 소장품의 하나이기도 하다." <2002. 7. 24 / 665호>
파울 달케 (Dr. Paul Dahlke; 1865-1928) 파울 달케 박사는 1865년 1월 25일 동프로이센의 오스터로데(Osterode)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동안 그는 어려운 삶을 경험하면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경찰관, 회계 담당관 등 공무원 생활을 했으나, 대가족인 관계로 항상 쪼들리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초등학교를 마치고 파울 달케는 프랑크푸르트의 김나지움(인문계 중고등학교에 해당)을 다녔고, 이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의사 국가고시를 합격한 후, 그의 재능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동종요법(同種療法)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유능한 의료인으로 명성 얻어그렇다고 달케 박사가 단순히 치료나 하는 그런 평범한 의사는 아니었다. 그의 탁월한 치료 능력은 젊은 달케 박사로 하여금 단시간 내에 그 성과와 명성을 얻도록 했으며, 그가 개원했던 베를린을 벗어나 타지역에도 유능한 의료인으로 알려지게 했다.그러나 달케 박사의 천재성은 의사로서의 치료행위에만 스스로를 국한시키기에는 너무 활동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상의 의료활동이라는 직업적인 영역을 벗어나, 깊은 사고의 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외과의사로서의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만물이 진짜 있는 그대로"라는 현실에 아주 드문 예리한 통찰력을 보였다.달케 박사는 의학을 벗어난 다른 영역으로 관심을 기울여, 동양의 종교,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쇼펜하우어의 저서나 논문이 처음에는 영향을 주었으나, 곧 이를 넘어서 달케 박사 스스로 끊임없는 조사와 질문으로 계속 공부했다.
그는 불교를 처음 만났을 무렵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불교가 내 삶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어떤 감성적인 충격이나, 결정적인 사건의 모습은 아니다. 땅속의 씨 같이 천천히, 쉼 없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1898년에 와서 나는 나의 첫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가보고 싶었던 남태평양의 섬을 여행하고 귀국할 무렵 불교는 내 안에서 만개하고 있었다. 이듬해 즉시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분명한 목적지인 인도로 향했다. 그러나 단순히 인도를 둘러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불교를 보기 위함이었다."
달케 박사는 다음과 같은 회상도 더듬고 있다."1900년 봄에 콜롬보에 도착하여, 나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단번에 만나는 아주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내가 불교와 그 가르침에 정식으로 입문한 때는 바로 1900년이었다. 그후 나는 인도와 나의 조국 독일을 꾸준히 계속 다니게 되었다. 당시 나는 전혀 다른 기후와 피곤함으로 줄곧 아파야 했다."이런 고행 속에서 법(法)에 대한 내적 자각의 결과는 바로 수많은 저술로 나타났다. 서구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했던 것이다. 그의 주요 저서 대부분은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그중 몇 권은 네덜란드어와 일본어로도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1914년까지 달케 박사는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했다. 당시 그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을 휘젓는 혜성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한평생 그에게 가장 강한 관심과 매력을 끈 것은 다름 아닌 고대 불교 문화가 있었던 여러 장소였다. 그 중에서도 스리랑카는 그가 특별히 자주 찾던 곳의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독일로 돌아와서 전운이 감도는 불안한 상황을 보고, 더 이상 조국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런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의사로서 다시 병원을 여는 것이었으며,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사로서의 소명을 다했다. 곧 그의 옛날 환자고객들에게 소문이 나게 되었으며, 그의 유명한 의학 지식과 치료법을 다시 베풀고 나눌 수 있는 기쁨을 가졌다. 환자들에게 불교교리 가르쳐한편 의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알리는데 정열을 기울였다. 당시 서구인들은 불교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 요구가 점차 커지는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한 달케 박사는 기존의 입문서에다 이제는 신뢰할 만한 불경의 독일어 번역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미 팔리 경전의 독일어 번역 등 많이 있었지만, 대개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외국적인 것과 혼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달케 박사의 법구경 번역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번역이 아니라, 달케 박사 개인의 20여 년의 경험과 공부의 결과가 구체화된 상세한 설명, 각주가 붙은 원론적인 가르침이었다. 그 당시 달케 박사는 계간 「신불교(Neo-Buddhistischen Zeitschrift)」를 거의 혼자 힘으로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잡지에서 독창적이고 신선한 방법으로 불교가 삶의 모든 문제 해결에 어떻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를 잘 기술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을 알고 실천하는 문제는 불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저술 활동만으로는 여전히 미흡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불교의 집(Das Buddhistische Haus)'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모태신앙과 더 이상 부합하지 않아 고민하는 사람들이나, 물질주의는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만남의 장을 구상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수년 후 독일 화폐의 인플레이션이 최고조에 도달하여 매우 어려울 때, 베를린 북동부 교외에 위치한 프로나우(Frohnau)의 숲으로 둘러진 약 9ha의 땅을 구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그래서 달케 박사는 독일에 불교를 위한 확고한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하는 그의 큰 뜻을 실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천천히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문제는 건축비였는데, 매일 매일 낮 시간은 의사로서 일하면서 불교의 집 건축비를 벌고 밤에는 불경 번역과 집필로 매우 힘겨운 생활을 했다.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그의 계획을 완수하는데 심혈을 기울임에 따라 마침내 1924년 8월에 달케 박사와 그의 제자들이 이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불교의 집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생생한 표현이자, 기념물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의도였다. 이 불교의 집은 법당, 거주 공간, 도서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회합실이 따로 지어졌으며, 조용히 수련하거나, 불법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요사채와 객실이 있다.
오계 지키며 수행자 삶 지향이 불교의 집은 내적 정화, 순화의 장소로 자리 매김되었으며, 불교 승려의 삶과 서구의 생활 조건의 적절히 조화된 곳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요구 조건 둘 다 모자라기 때문에 이 곳은 절로서는 부족했다. 하지만, 이곳은 절과 일반 신도의 습관의 중도적 해결책의 모습이었다. 이곳 거주자는 기본적인 5계를 지켜야하며, 내적인 평안과 집중을 위한 노력은 바로 이 곳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어려움은 서구에서 쉽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탐욕과 생존의 무자비한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달케 박사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제자들의 이런 대담한 시도는, 마치 망망대해의 산더미 같은 험난한 파도에 직면한 조그마한 돛단배처럼 처절한 사투를 벌어야 했다.
마지막 수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불교의 집을 운영하면서 피로의 누적으로 심장병에 걸렸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또 다른 프로젝트인 북해의 질트섬에 수련의 집을 세우는 일을 추진했다. 결국 1928년 2월 29일 그가 사망함에 따라 이곳은 바로 2차 대전 후 독일 불교의 가장 중심점이 되었다. 주요 저서1903년 「불교 이해 요약」
1904년 「불교 이야기」
1912년 「세계관으로서의 불교」
1913년 「부처님 품으로부터」
1914년 「종교와 도덕으로서의 불교」
1919-1922 「팔리 경전에 관해」
1926년 「불교 : 인류의 정신적 삶에서의 위치」
1928년 「현실의 가르침과 삶의 길로서의 불교」
1918년 이후 「신불교 잡지」<2002. 9. 11 / 671호>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 1868-1945)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 박사는 1868년 2월 25일 남부 독일 바이에른 주 프랑켄 지방 뉘른베르그시 부근의 조그마한 마을인 롤호펜(Rollhofen bei Nuernberg)에서 대장간집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도의 집안이라 부모님은 그가 신부가 되기를 바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갈수록 믿음에 대한 회의가 깊어져 결국 다시 법학을 공부하게 됐다. 성공적으로 법학 공부를 마친 그는 법학박사의 학위를 취득하고 법조계의 판사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판사라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남들보다는 수월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지식인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아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접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서 출생쇼펜하우어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칼 오이겐 노이만이 번역한 불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불교의 깊은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후 주법원 판사인 그림 박사를 중심으로 하나의 작은 불교연구 및 신행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기독교도들간의 전쟁은 이렇게 그림 박사로 하여금 평화의 철학이자 종교인 불교에 관심을 보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림 박사가 불교활동을 본격화할 당시 북부 베를린에서는 파올 달케 박사가 활발한 불교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 박사는 파울 달케 박사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개신교인 루터 복음교도였던 달케 박사와는 달리 그림 박사는 로마 가톨릭신자였으며, 달케박사는 동프로이센 출신이였지만 그림 박사는 남부 바이에른 출신이었다. 또 달케 박사가 자연과학도(의학)에서 불교에 귀의한 것과는 달리 그림박사는 정신/인문학인 신학도였다는 점도 하나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1921년 7월 20일 그림 박사는 뮌헨에서 출판가며 번역가인 자이덴슈티커(Seidenstuecker)와 함께 '독일불교회(Buddhistische Gemeinde fuer Deu tschland)'를 창립했다. 이어 1924년 '삼보회(Loge zu den drei Juwelen)'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나, 나치정권이 들어서면서 또다시 1935년 6월에는 '고(古)불교회(Altbuddhistische Gemeinde; ABG)'로 단체 명칭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이 불교 단체는 2차대전이 끝난 뒤인 1951년 12월 18일 비영리종교단체로 등록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독일 내 가장 오래된 불교단체로 자리하고 있다. 그림 박사는 중년이후 천식을 앓고 있어서 53의 나이로 조기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악화된 건강상태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욱 불교연구 및 활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불교적 세계조명(Buddhistischer Weltspigel)」이란 잡지를 발간했는데, 이때 자이덴슈티커가 편집인, 발행인 겸 기고가로 함께 동참했으나 1차 세계대전 후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정권동안에 고불교회의 활동이 금지되고 심지어 그림 박사의 활동도 매우 엄격히 통제되고 관찰되었다. 그가 쓴 글은 물론 출간한 책이나 잡지들까지 모두 강제 몰수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당연히 모임의 활동도 완전 금지 당했다. 이런 까닭에 그림 박사는 답답한 뮌헨을 벗어나 풍광이 좋은 암머호반가의 우팅(Utting am Ammersee)으로 이사를 하게 됐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교를 우수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독일불교의 선구자격인 칼 오이겐 노이만과 자이덴슈티커를 수년동안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대학에선 신학 공부에 전념그러나 안타깝게도 2차 세계대전 후 곧 세상을 하직하게 되며, 이곳 그의 저택은 오늘날까지 그가 창립한 고불교회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의 묘비에는 절친했던 동료 판사가 그를 일컬어 '바이에른의 가장 인자한 판사에게(Dem mildesten Richter Bayerns, 영역 Bavaria's most benevolent judge)'라고 애도한 추도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의 사후 고불교회는 프랑스인 루이 안시아노(Louis Ansiano 1893??1961)가 이끌었다. 그림박사의 딸인 마야 켈러-그림(Maya keller-Grimm)과 그의 제자 중 여러 불교저작들로 잘 알려진 막스 호페(Max Hoppe, 법명 담마팔로)가 실제적으로 주도하다가 1951년 공식적으로 단체를 이끌게 됐다. 1977년 말 켈러-그림여사는 단체와 야나출판에서 손을 떼고 은퇴하게 된다. 하지만 고불교회는 1948년 이후 격월간 「야나」(Yana 수레라는 의미)를 오늘날까지 꾸준히 발행해 오고 있다.
그림 박사는 달케 박사와 마찬가지로 탁월한 글 솜씨가 있었다. 그래서 차근차근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학습해 팔리어로 된 불교 경전을 추려서 번역하기도 했다. 일생동안 수많은 글들을 발표했으며, 총 10권의 책을 썼다. 「삼사로 Der Samsaro」(1935년초판, 1960년 재발행), 「행복 Das Glueck」(1933년 초판, 1979년 재발행), 「당신을 위한 불도(佛道) Der Buddhaweg fuer dich」(1935년 초판, 1974년 재발행)와 「불교의 과학Die Wissenschaft des Buddhismus」(1923년 초판, 1978년 재발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을 꼽는다면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 이성의 종교(Die Lehre des Buddho, die Religion der Vernunft)」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1915년 뮌헨의 피퍼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출판됐으며, 1957년 15판이 발행되면서 더욱 내용이 보강됐다. 그리고 1979년에는 18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주저인 「부처님의 가르침」은 국제적으로도 영어, 불어, 심지어 베트남어로도 번역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그 자신이 불법을 공부하고 실제 수련한 것을 바탕으로 잔잔히 썼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도반이었던 자이덴슈티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1916년 1월 10일자 편지에서 자이덴슈티커는 그림 박사에게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불서 10권 저술'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심오하게 적합하게 표현한 것은 다른 어디에서도 여태껏 보지 못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네. 초월적인 주체에 대한 긍정과 강조는 무엇보다 나를 기쁘게 했네…'그림 박사의 저작들은 2차 세계대전 후 다시 발행되고 미발표 글들은 「야나」를 통해 소개됐다. 그리고 그의 딸 마야 켈러-그림 여사와 막스 호페의 주도로 그림 박사의 평소 생각과 사상을 정리해 「위인의 빛 속에서- 질의 응답으로 본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불교 교리서를 1979년 발행했다. 그리고 마야 켈러-그림 여사도 아버지 못지 않게 불교 공부와 활동을 하면서 1977년과 1979년에 「부처님의 영토에서」란 불교 서사시를 두 권으로 발행하여 널리 알려 지게 된다. 그가 남긴 저작과 가르침은 그가 창립한 고불교회를 중심으로 독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고불교회 지부를 결성하여 공부하도록 했다. 평화롭고 잔잔한 남부 독일 암머호반가의 우틴에는 매년 두 차례 막스 호페가 중심이 된 세미나가 열리고 있으며, 일요일마다 불교 강연, 법회, 단체 수련, 참선, 그리고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02. 10. 16 / 676호>
크리스마스 험프리(Christmas Humphreys, 1901∼1983 )
일반적으로 법에 미친 종교의 영향은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인류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와 법은 가시적으로 확연히 구별할 수 없다. 금세기까지도 이러한 관계는 비교적 밀접하다. 예를 들어 영국의 불문법(common law)은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교구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늘날 영미법은 어느 정도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저명한 법학자 집안서 출생그러면 한 개인인 판사의 종교가 어떻게 법적인 사고와 해석, 접근에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 문제의 답은 판사의 정치적 신념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판사 개인의 종교가 판결에 미치는 정도는 그가 얼마나 신행활동을 하고 있느냐의 정도와 밀접하리라 생각된다.
아시아권 바깥의 경우, 특히 서구에서의 불교신자인 판사의 법적 사고와 판결에 미치는 불교의 영향은 놀랄만하다. 지난번 독일의 게오르그 그림 판사를 두고 동료 판사가 말한 '바이에른의 가장 인자한 판사'라고 했던 것처럼 이번에 소개하는 크리스마스 험프리 판사는 영국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물론 서구에는 다수의 불교 신자인 판사들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그 수가 훨씬 더 많다. 판사 크리스마스 험프리는 저명한 법학자 트라버스 험프리 경(卿)(Sir Travers Humphreys)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등법원 판사로도 봉직했으며, 그의 어머니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 사법재판소의 판사로 활동한 명문가였다. 미국과 서구에서 크리스마스 험프리는 지칠 줄 모르는 불교 대중화의 선구자로 그리고 영국에서는 불교 신자들의 리더 역할을 한 사람으로 매우 널리 잘 알려져 있다. 물론 법조계에서의 명성과 성과는 마찬가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단독으로 혹은 공저한 책이 무려 37권이 되는데, 그 중 3권만이 법률서적이고, 나머지 34권은 불교 관계 저술일 정도로 불교인으로 더 비중 있게 생활했음을 볼 수 있다.
『불교』 『불교탐구』 등 불서 34권 저술이 세 권의 법률 서적도 흥미롭게도 주로 심각한 법률 연구보다는 '무엇이 진짜 범죄인가'라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1951년 출간된 『불교(Buddhism)』가 있으며, 『선, 삶의 길(Zen, a Way of Life)』, 『불교탐구(Exploring Buddhism)』 등이 있다.
캠브리지대 재학 중 불교에 심취시간이 지날 수록 험프리는 더욱 불교에 심취하게 된다. 캠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홀에서 공부하는 동안 불교에 완전히 귀의하였다. 그의 형이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는데 이 엄청난 충격의 가족사가 험프리가 새로이 영성적인 추구를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이런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고통스런 죽음과의 부딪힘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다.
1924년 최대 불교기구 '불교회' 창립1924년 험프리는 최고의 법률가의 모임인 인어 템플의 정회원이 된다. 인어 템플(Inner Temple)이란, 4대 주요 법원 중 가장 오래되고, 부유하고, 가장 배타적으로 특별한 모임이다. 여기서 우리는 험프리의 엘리트적인 배경과 성장을 엿 볼 수 있다. 실제로 험프리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영국 주류사회바깥의 다른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영국 상류층 사회 계급의 전도 유망한 판사로 보였다.
공개강연-수련회-출판 불교 전파 주력바로 이해 1924년, 험프리는 아시아권 바깥의 최고, 최대의 불교 단체인 불교회(the Buddhist Society)를 창립하게 된다. 이 불교 단체는 일반 불교 신자에게 어느 특정 종파에 치우치지 않으며, 공개 강연, 출판, 수련회 등을 통하여 영국사회에 불교를 전파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중도(The Middle Way)」라는 계간지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 할아버지와 같이 험프리는 형법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를 연구, 실천하는 과정에서 더욱 불교 연구를 더하게된다. 1934년 그는 '오울드 베일리(the Old Bailey)'라고 더 잘 알려진, 런던 중앙형사재판소(Central Criminal Court)의 검사가 된다.1950년, 고등형사 재판소의 수석검사가 되었으며, 1955년 최고형사재판소의 정검사가 되었다. 1959년 왕립 재판소의 최고 검사가 되어 비단으로 된 법복을 입게 되었다. 이제는 형사 사건을 다룸에 더 이상 공격적인 역할이 아닌 변호해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험프리는 검사로서의 역할에 많은 의문을 가져서 판사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1942년부터 판사에 대한 관심이 있어 온 그의 희망이 오랜 검사 생활 후인 1968년 남들은 은퇴하고도 남은 68세에 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1962년 험프리는 런던 중앙형사재판소장이 되었으며, 1968년 같은 재판소에서 종신 판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법복을 벗은 1976년까지 판사로서 봉직하였다.
WFB 부회장-달라이라마 지원법조인으로서 일생의 최고 중의 하나는 바로 2차 세계대전후 일본 도쿄에 설치된 도쿄전범재판소에서의 전범재판이었다. 재판 절차가 마무리되고,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많은 불교 지도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인연이 된 불교 지도자들과의 교류와 협조는 그가 훗날 세계불교도 연맹(WFB)의 부회장으로 봉사할 수 있었으며, 달라이라마의 망명 정부를 지원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험프리에게는 그가 검사가 된 것도 업(Karma)라 생각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업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고 생각하였다. 그 뒤 그가 판사가 된 것도 업이라고 스스로 보았다. 그가 종신판사직을 수락한 것도 당시 영국에서 사형제도의 폐지와 맞물려서 가능하였다고 한다. 판사로서 한 개인의 생명을 빼앗는 반인륜적이며, 반인권적인 재판을 너무나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재판과 함께 불교 공부를 병행하며, 업보(karma)와 환생(reincarnation)에 대한 개념을 연구하여 책을 쓰기도 하였다. 물론 판사로서 그는 '점잖은 판사(gentle judge)'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사형을 선고한다는 것은 그 범죄에 또 다른 제도적인 범죄를 더하며, 그 죄인의 가족, 친구, 지인들 모두에게 상황자체를 더욱더 나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하였으며, 그가 판사로 죽을 때까지 봉사하려고 한 이유는 이러한 사형을 폐지하는데 이바지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불교회 회장으로 활동도그래서 험프리 판사는 중형, 사형선고를 하지 않고 관대한 처분을 하여서, 당시 검사들은 매우 흥분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았다.1976년, 너무 관대한 처분이 문제가 되는 가운데 그는 종신 판사직을 스스로 사직하게 된다. 그리고 불교 활동에 전념하고 그가 1983년 4월 사망할 때까지 영국불교회의 회장으로 봉사하여, 오늘날 서구불교의 탄탄한 뿌리를 다지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된다. 험프리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불교 신자로서의 판사의 역할 모델로 본보기가 되며, 다른 법조인들에게도 신앙, 지혜, 그리고 자비의 정신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은 놀랄만하다. 그가 그의 주저인 『불교』(1951년)에서 밝힌 선(禪)에 관한 얘기를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보자.'선은 불교의 극치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진리의 성벽에의 폭격이며, 어떤 개념에 바탕을 두거나, 조각품을 이용하거나, 의식이나 절을 하지 않으며, 매우 독특하고 고유한 것이다.
주요 저서와 활동1924년 불교회 창립
1951년 『불교』(Buddhism)
『선, 삶의 길』(Zen, a Way of Life)
『불교탐구』(Exploring Buddhism)
1976년 영국 불교회 회장
1983년 불교회 활동하다 사망 <2002. 11. 13 / 680호> 냐나틸로카 스님(Nyanatiloka, 1878-1957)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불교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 경전의 역경과 출판을 통해서였다. 불교인들의 목숨을 건 전법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말로 번역된 서적을 통해 비로소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여명기가 지나자 서구 불교에 새로운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시아 불교국가, 그리고 불교인들과의 접촉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서구 불교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서구 불교의 첫 장을 열었던 저명한 불교인들은 아시아의 불교국가를 찾아 직접 불교 수행을 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학문과 수행을 겸비한 훌륭한 스승으로 불모지 서구에 불교의 싹을 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나라는 남방 불교국가인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이었다. 특히 태국은 미얀마 혁명으로 세계불교평의회(WBF)의 본부가 미얀마의 랑군에서 태국의 방콕으로 불가피하게 이전하게 된 후부터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됐다.
가톨릭 학교서 바이올린 연주서구 불교를 이야기 할 때 1901년은 상당히 중요한 날이다. 유럽인이 최초로 사미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테이프를 끊은 인물은 바로 영국 출신 화학자인 알란 배네트 맥그레고르(Allan Bennett Mcgregor, 1872-1923)로 그는 다음해인 1902년 미얀마 아캅(Akyab)에서 비구계를 받고, 유럽을 통 털어 최초의 비구가 됐다. 이때 그가 받은 법명은 아난다 메떼야(Ananda Metteya)였다.2년 후인, 1903년 9월, 이런 드문 예가 독일에서도 일어났다. 독일인 안톤 궤트(Anton W. F. Gueth). 가톨릭 학교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던 그가 미얀마에서 사미계와 비구계를 받고 정식 불교 수행자가 된 것이다. 그의 1878년 독일의 비스바덴에서 태어났지만 입적은 1957년 스리랑카에서 맞이했다. 어쩌면 그의 전생의 고향은 바로 스리랑카였을 것이다.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21세 한창 나이였던 1899년의 일이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인간을 해탈시켜 신과 합일한다는 신지학 강의를 듣고 불교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신지학 수학 후 불교에 입문그러나 그의 이런 변화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프리카로 선교활동을 떠나겠다는 꿈을 품었을 만큼 종교적이었던 그에게 불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또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프랑스 파리에서 음악 공부를 하며 수 차례 아시아 지역으로 연주회를 다녀온 것을 기회는 그는 적지 않게 불교를 접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그의 출가는 상당히 파격적으로 이뤄졌다. 1902년 그는 평생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았던 음악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불교 공부를 목표로 꿈을 안고 인도로 떠났다.
그러나 인도의 불교는 이미 사그라들어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한줄기 서광이 비친 것은 스리랑카에서였다. 스리랑카를 방문한 그는 유럽 최초의 비구인 영국 출신의 스님인 아난다 메떼야의 소식을 접했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얀마로 떠났다. 그리로 마침내 1904년 2월 비구계를 수지하고 독일인으로는 처음으로 불교 수행자가 됐다. 그의 법명은 냐나틸로카(Nyanatiloka). '세 세계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팔리어를 열심히 공부했으며, 1905년에는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된 불경의 그의 손에 의해 출판됐다. 그리고 1906년에는 유명한 『부처님이 말씀』이 출판됐다. 그의 육성을 담은 첫 번째 출판물이었다. 이 책은 영국인 제자 실라카라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고, 이어서 러시아에서도 번역돼 출판됐다.
그는 1910년 유럽에 불교 사원을 건립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다시 돌아왔다. 9년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첫 번째 전법지로 정했던 곳은 스위스 남부 루가노 지방.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스위스의 겨울은 너무나 혹독했다. 유럽에서의 불교 사원 건립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그는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 불교도들의 불교 성지라 할 수 있는 수행처가 마련됐는데 바로 뽈가스두바(Polgasduwa) 섬이다. 그는 이곳을 섬 토굴(Island Hermitage)이라 명명했는데, 15개의 수행 토굴을 갖추고 있으며, 프랑스 엔지니어 베르기어(R.A. Bergier)가 기증한 것이다. 베르기어는 그 후에도 인접한 작은 섬인 메티두바도 보시했다.
평화스럽게 수행에 전념하고 후학을 키우던 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14년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인도양 해변에 가까운 도단두바 마을 부근에 15채의 스님용 토굴이 차근차근 들어서 있던 평화스러운 섬에 암운이 깔렸다.
인도양 해변에 스님용 토굴 조성전쟁으로 인해 뽈가스투바에서 생활하던 독일인들이 모두 철조망에 갇히게 됐고,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나중에 오스트레일리아로 강제 송환돼 전쟁 포로의 고통을 겪게 됐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그에게 고통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다. 시련은 있었지만, 그는 남방 불교와 전혀 다른 불교 체계를 갖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이다. 수행자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던 그에게 다행히 중립국으로의 여행이 허용됐다. 그는 1916년 중국으로 가서 중경의 한 절에 머물면서 앙윳따라 니까야의 번역을 계속했다.
그러나 얼마있지 않아 중국도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그는 한카우에서 반(半) 포로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역경 작업에 매진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그는 일본의 저명한 교학자 와타나베 교수를 만나게 됐고 다이쇼 대학교에서 팔리 경전 강의를 맡게 됐다. 그 후 그는 일본에서 수년간 강의와 역경 작업을 계속하면서 정진에 몰두했다.
1957년 가을 실론서 입적1926년 그는 일본 생활을 끝내고 태국을 거쳐 다시 실론으로 돌아갔다. 12년 간 비웠던 토굴에 비로소 다시 귀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이곳에서 수행과 역경작업을 이어 갔으나 그리 오래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39년 유럽에서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화스런 섬'의 수행처를 뒤로 한 채 또 다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히말라야 기슭의 데하라 둔에서 24명의 독일인, 그러니까 냐나틸로카, 그의 수제자 냐나뽀니카(Nyanaponika), 라마 고빈다(Lama Govinda), 달라이 라마의 가정교사로 7년 간이나 티베트에 살았던 하인리히 하레(Heinrich Harrer) 등이 함께 살게 된다. 이번에는 성직자로서는 인정되지 않았으나 강제 노동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들과 함께 하면서 냐나틸로카는 역경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실론의 세나나야케 수상이 1946년 그와 제자 모두를 폴가스두바로 돌아 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냐나틸로카 스님은 실론 시민권자로, 1957년 가을 입적했다. 실론 정부는 국장으로 성대한 예를 표했다.
1979년 그의 제자 냐나뽀니카와 뷔예세케라 교수(prof. Wijesekera)는 그의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냐나틸로카 100년사』를 발간했다. 그가 설립한 '섬 토굴'은 수 십 년 동안 계속 독일과 유럽출신 불교도들의 성지가 됐다. 지금도 서구인들에게 불교 수행의 좋은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스위스인 파울 뷔르츠(Paul Wirz)라는 사람은 가족과 함께 인접한 파라뿌두바섬에 살며 1984년 비구니 선원을 설립했다. 섬 3개가 유럽인들의 불교 수행처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2002. 12. 4 / 683호>
알렉산드라 다비드-네엘(Alexandra David-Neel, 1868-1969)
'알렉산드라 다비드 네엘은 매우 독특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독립심이 강하며, 유럽인임에도 불구하고 산스크리트어와 불교 철학에 조예가 깊습니다. 또 티베트인들과 별 불편 없이 대화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티베트어를 능숙하게 구사한 여행자는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라사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입니다.' 〈달라이라마의 찬사 중에서〉1921년 2월 5일 아침 겨울해가 떠오르는 히말라야 산록. 티베트 승려 복장을 한 53세의 프랑스 여인과 그의 안내자며 양자인 티베트 용덴 라마는 티베트 동북부의 쿤붐 절을 출발했다. 그녀가 지리적, 정치, 행정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염원했던 라사방문이 이뤄지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알렉산드라 다비드 네엘은 1868년 10월 24일 파리 쌍-만데에서 태어나 1969년 9월 8일, 프랑스 동남부 디느에서 그녀가 설립한 명상의 집(샴텐종)에서 101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입적했다. 그녀의 긴 일생은 거의 전부 새로운 것에 대한 탐험과 공부라는 두 가지 열정으로 가득했다. 유년기에는 매우 불안정할 정도로 소란스러웠고, 소녀시절에는 매우 반항적이었다. 또 숙녀가 되어서는 무정부주의자로, 그의 인생 40대 이후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는 20세기의 가장 현명한 자유사상가의 한 사람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그녀의 다방면에 대한 관심과 그에 상응하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즉 아나키스트, 문화인류학자, 언어학자, 불교학자, 여행가, 오페라 프리마돈나 등 실로 폭넓은 삶의 족적을 남기고 있다. 이중 그녀의 중반 이후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 바로 불교다.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스스로 불교학자이자 불교신자로 불리길 원했고, 그렇게 나머지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녀는 한때 오페라의 여자주인공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단순히 오페라를 위해 이 도시 저 도시를 다니는 여행에는 차츰 흥미를 잃어갔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의 틀을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녀는 관객들의 큰 박수소리에서 대자연의 메아리를 떠올렸고 그들의 칭찬 속에서 티베트 스님들의 법문을 갈망했다. 이런 가운데 그녀는 1890년부터 약 일년간 인도를 여행하게 된다.
티베트 불교 관련 책 저술어릴 적 세례를 받을 때 맺어진 그녀의 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인도 전역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여행은 그녀로 하여금 유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동양의 철학에 심취했고 인도 북부에서 우연히 들은 티베트 음악은 그녀를 깊은 감동으로 몰고 갔다. 히말라야 정상에서 경외감과 마력을 느끼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불교적인 삶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36세 때인 1904년 아프리카 북부 튀니스에서 우연히 만난 필립 네엘과의 만남은 그녀가 불교답사 및 연구에 전념하도록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철도공학도였던 남편 필립의 후원으로 티베트와의 긴 인연을 맺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911년 남편의 이해와 후원을 기반으로 그녀는 평생소원이었던 티베트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남편에게 18개월간 티베트를 답사할 것을 약속하고 떠난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은 끝이 아니라 동양으로의 긴 여정의 단편에 불과했다. 이해심 많던 필립도 결국 훗날 그녀가 티베트 용덴 라마를 양자로 입양하면서 결별하게 된다. 그러나 양자 용덴 라마는 양모 알렉산드라와 함께 험난하고 위험천만한 티베트로의 여행을 떠난다. 특히 당시 방문 금지 지역인 영혼의 라사를 천신만고 끝에 방문하고 그 여행기를 1924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한 파리 여인의 라사여행』이란 책은 서양여성 최초의 라사방문기라는 점뿐만 아니라 서구인들에게 신비의 땅 티베트를 상세히 소개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티베트의 종교와 권력」 등 인도와 티베트, 중국에 대한 연구와 논문 발표, 책 저술 등으로 활발히 발간하며, 한때는 브뤼셀의 한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기도 했다.1911년 프랑스 정부 후원으로 아시아 국가들을 연구하기 위해 인도, 실론, 미얀마, 중국, 조선, 일본 등을 여행하며 13년간 아시아에서 머물렀다. 이 여행초반기인 1912년 4월, 당시 인도 칼림퐁에 망명 중이던 제13세 달라이라마를 알현하고, 티베트 언어이해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티베트어 학습과 함께 티베트 불교연구에 본격적으로 천착하게 된다. 그녀는 티베트의 많은 사원을 일일이 다니며, 관련 불교 문헌을 꼼꼼히 읽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고승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를 배웠다. 시킴의 한 사원에서 소년 승려 용덴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5세의 용덴은 다비드 네엘의 제자가 된 후 평생 그녀를 수행하며 아시아와 유럽 각지를 여행했다. 그리고 1929년 정식으로 그녀의 양자가 된 용덴은 1955년 프랑스 남부의 디느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양모의 연구를 도왔다.
그녀는 1914년부터 1916년까지의 기간을 '완전한 고독이 내 영혼을 쉬게 한 시기'라 회고하고 있듯 공부와 수행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1차대전으로 인해 그녀는 어쩔 수없이 인도에서 일본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경험한 일본은 그녀가 경험한 히말라야의 웅대함과 경외함에 비추어 너무 초라한 것이었다. 이어 조선의 해인사, 금강산 유점사 등을 돌아보았으나 결국 그는 티베트에 대한 그리움으로 중국을 거쳐 라사로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부처님이 고행을 위해 설산을 향해 갔듯 2600여 년 뒤 프랑스의 한 백인 여성이 그 길을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1923년 10월 중국 운남성을 출발해 다섯 달 뒤인 1924년 2월 기나긴 여정 끝에 마침내 신비에 쌓인 라사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1925년 귀국했을 때는 '봉쇄된 나라에 도달한 국민적 영웅'으로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한 파리여인의 라사여행』을 영어와 불어로 출판하게 됐고, 잇따른 강연 등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당시 프랑스 가스통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독자들의 속편 요청으로 『티베트 마법의 서』(1929), 『강도와 신사의 나라』(1933) 등도 발표했다.
달라이라마도 그녀 활동 격찬오랫동안 후원해준 남편 필립과 결별한 그녀는 1928년 프랑스 동남부의 조그마한 읍인 디느에 안식과 수행을 위한 도량인 '삼텐 종(명상의 집)'을 짓고 이곳에 정착한다. 알프스 서남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이 곳에서 명상과 저술에 몰두해 『라마교 입문』과 최초의 소설인 『다섯 지혜를 가진 라마승』 등 많은 저술을 발표했다. 그리고 1937년, 69세 되던 해에 영원한 그리움의 땅 티베트 여행을 다시 계획한다. 이 때는 결별했던 필립이 다시 도움을 주어 마침내 티베트로의 여행이 다시 시작된다. 그러나 여행 중인 1941년, 그녀의 남편인 필립 네엘의 사망소식에 '평생의 친구를 잃었다'며 슬퍼했다. 1946년 일흔 여덟에 귀국해 『티베트 불교도의 비전』, 『티베트 미공개 문헌』 등 저작을 발표해 좋은 호응을 얻는다. 이런 가운데 1955년 11월, 40년 동안 함께 지내온 양아들 용덴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녀는 독서, 명상, 저술을 계속하다가 1969년 9월 8일 명상의 집에서 한 세기가 넘는 기나긴 인생 여정을 마감했다. 다시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땅 '그 곳'으로 돌아가고픈 소망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한번 더 여행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새롭게 여권을 갱신했지만 결국 티베트로 다시 향하지 못하고 이곳 '명상의 집'에서 입적했다.1982년과 1986년 달라이라마는 명상의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업적과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금지된 도시 라사로 들어간 최초의 서양인이었던 그녀와 수행동반자였던 양자 용덴의 유골은 1973년 2월 28일 인도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 뿌려졌다. 삼텐종은 알렉산드라 다비드 네엘의 기념관이 됐다. <2002. 12. 25 / 686호>
아난다 메테야(Ananda Metteya, 1872∼1923) 영국의 첫 비구인 아난다 메테야 스님은 영국인들의 정서에 맞는 불교를 전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한국인 최초의 신부라고 하여 해마다 9월이 되면 큰 기념일로 간주하고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 초기 한국 천주교가 당시 조선 왕조의 억압정책이라는 어려운 환경을 견디며 뿌리내리는데 큰 역할을 한 평신도 정하상 바오로도 같은 날 축도되고 있다. 이렇듯 선구자적 일을 한 분의 행적을 더듬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물론 한국불교 전래사 속에서도 이차돈의 순교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
25년 런던의 노동자 집안서 출생오늘날 서구에서는 '서구 불교종의 친구들(The Friends of the Western Buddhists Order : FWBO)'은 불교가 서양으로 가서 그 문화에 맞게 모습을 바꾼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서양인들에게 맞는 불교를 새로 창조했다는 칭송이 자자한 단체이다. 이 단체를 세운 사람은 영국의 상가락시타(Sangharakshita) 스님이다. 스님은 데니스 링우드(Dennis Lingwood)라는 이름으로 1925년 서남부 런던에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바로 영국 최초의 비구였던 알란 베네트(Allan Bennett) 즉, 법명 아난다 메테야(Ananda Metteya)가 2년 전인 1923년에 입적한 곳에서부터 겨우 수백 야드 떨어진 곳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지리적으로 근접한 이러한 인연을 두고 상당히 놀라워하고 있다.
아난다 메테야 스님은 본명이 찰스 헨리 알란 베네트(Charles Henry Allan Bennett)로 영국의 신비주의자이며 '황금 새벽의 은둔자 모임(Hermetic Order of the Golden Dawn)'이라는 중요한 핵심회원으로 알라이스트 크라울리(Aleister Crowley)가 바로 그의 스승이었다. 크라울리는 그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그의 제자 베네트를 가리켜 '내가 지금까지 만나서 알게 된 가장 고상하고 부드러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묘사하였다. 베네트는 공부를 하면서 처음에는 신비주의에 경도되었다. 그는 런던에서 늘 빈곤 속에서 살았으며 천식이라는 지병을 앓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신비주의를 넘어 불교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어 갔고, 주위의 친구들에게도 그러한 모임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그의 스승 크라울리는 스승인 베네트가 바닥에서 공중 부양하는 것도 보았다고 한다. 베네트는 런던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며, 마튜 마더스(S.L. Mathew Mathers) 에 입양되어 자랐다. 마투 마덜스는 황금 새벽의 은둔자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이 모임에서 그는 프라트 레히 아우어(Frater Lehi Aour: 그곳에 빛이 되소서 라는 뜻 let there be light) 불렸다. 베네트는 홀레슬라이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잉글랜드 배스(Bath)에서 과학 연구에 매우 흥미를 갖고 연구하였다. 젊은이로서 그는 화학실험실에서 일했으며 곧 화학자로서의 입지를 굳혀간다. 그러나 그의 양모는 로마카톨릭을 믿도록 강요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신비주의 모임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신비주의 모임에 빠져 한때 이곳에서 열심히 수련했다.
청년기엔 신비주의에 심취자기 마음의 반의식적이고 초규범적인 모습의 경계선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독약을 먹기도 할 정도로 점점 신비주의에 빠졌다. 그는 런던의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에드윈 아놀드 경(Sir Edwin Arnold)의 유명한 불교 저서인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을 탐독했다. 나이 스물 여덟에 그는 불교를 더 심도있게 공부하기 위하여 동쪽으로의 여행을 결심하게 된다. 날씨가 온난한 아시아의 스리랑카에서 지병인 천식을 치료할 생각도 있었다. 가난한 그의 여행경비는 스승인 크라울리의 한때 애인이었던 어느 대령 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어 가능하였다.
1900년 베네트는 실론(오늘날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캄부루가무와(Kamburugamuwa)란 소읍에서 빨리어를 공부하게 된다. 이어서 수도 콜롬보로 옮겨와 유명한 요가 스승인 구루 쉬리 빠라난다의 문하로 들어가 하타 요가를 배우며 명상 기술을 전수 받게 된다. 그 후 미얀마에서 1901년 12월 8일 사미계를 받게 된다. 미얀마 스님인 타누 박사로부터 스님이 되기 위한 수련 지도를 받는다. 일정기간 수행생활을 거친후 1902년 5월 21일 부처님오신날 정식으로 비구계를 받게 된다. 미얀마 'Akyab'에서 '아난다 메테야'를 수계명으로 받은 것이다.
그 법명은 자애의 축복(bliss of loving kindness)이라는 뜻이다. 이 법명은 그에게 너무나 적절했는데 그가 특별히 개인적으로 동정심과 연민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비와 진실의 불법을 서구에 뿌리내리고, 승가를 유럽에 새로이 만들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와 1903년 '국제 불교회(International Buddhist Society)'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그의 자애로운 전법과 인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6개월도 채 안되어서 다시 천식이 매우 악화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다시 미얀마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천식으로 고생했음으로 그의 주치의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가라고 권유하였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장도에 올랐으나, 곧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그래서 영국에 곧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며 런던에서 극작가 클리포드 박스(Clifford Bax)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영국에서 불교의 대의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좥불교평론(Buddhist Review)」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주치의의 권유인 캘리포니아는 삶에서 멀어지고 지병과 빈곤의 삶 속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불교에 대한 연구와 전파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라 '아리안의 지혜(The Wisdom of the Aryes)'란 책을 1923년 런던에서 출판하고, 같은 해 3월 9일 런던 서남부에서 입적하게 된다. 사후 발행된 『미얀마의 종교(The Religion of Burma)』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아난다 메테야 스님은 출가이후 영국이나 서구 사회에 서양인들의 정서에 맞는 불교를 전파하는데 진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귀국 후 '국제불교회' 창립여기서 잠깐 서양인중에서 과연 누가 최초로 스님이 되었냐고 하는 문제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초의 유럽인으로 스님이 된 사람은 고든 더글러스(Gordon Douglas)로 스리랑카에서 아소카(Ashoka)란 법명으로 수계하였다. 일본인 두 사람으로부터 불교의 기본 교리를 배우고 일본, 중국, 스리랑카를 여행하였다. 스리랑카에서 빨리어로 된 불교를 배우고 마힌다(Mahinda) 대학장이 되나 곧 1900년 4월 입적하게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 스님을 추모하기 위해 아소카 '사캬부타회(Ashoka Sakyaputta Society)'를 결성하고 회관과 도서관 그리고 학교도 건립하였다. 수계한지 일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기에 죽게 되자 비교적 덜 알려지고 그 중요성이 적은 것은 분명한 것 일게다. <2003. 1. 22 / 690호>
[출처] 유럽불교의 개척자들- 이동호 / 발틱연구소 소장·정치학박사|작성자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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