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따와나 일묵스님

자신에 대한 화를 버리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다-제따와나 일묵스님

수선님 2019. 12. 29. 12:11

 

수행에 대한 방법을 알지만 실제 수행을 해 보면 뜻대로 잘 안 되죠? 이건 수행을 하기 위한 기본이 덜 된 경우더라고요. 수행을 하기 전에 내면의 준비가 잘 돼 있지 않으면 장애가 많이 생기고 뜻대로 잘 안되더라고요. 이런 경우 몇 가지 요소가 있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 많은 경우 수행에 있어 큰 장애요소가 됩니다

수행은 마음이 편해야지 할 수 있어요. 마음에 화가 많으면 법을 받아들일 때 저항감을 불러 일으켜요. 속에서 자꾸 거부감이 일어나게 되고, 수행의 장애 요소가 됩니다.

수행은 바른 방법으로 해야 하고, 수행자가 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해요. 후자도 아주 중요해요.

요즘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 때문에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법 하나 얻기 위해 목숨 걸고 가야 했었죠. 중국의 현장스님도 법을 구하러 히말라야 산을 넘어 인도를 가야 했는데, 이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거든요. 이렇게 얻은 법이니 얼마나 귀하게 여겼겠어요. 헌데 요즘은 앉아서 유튜브로 모든 것을 접할 수 있고, 유명한 외국 스님들 법문도 다 볼 수 있죠. 편리해진만큼 예전 신도들만큼의 신심은 없어졌어요. 쉽게 얻으면 그것의 소중함과 귀함을 잘 모를 수 있어요.

내 마음의 그릇을 키워야 무엇이든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어요. 특히 법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더 그렇죠. 자기에 대한 분노가 많으면 이미 마음이 굳어 있어요. 마음에 안 드는 것에 대해 자꾸 저항을 하게 됩니다. '내 생각엔' 이렇게 해석하여 거부하게 되면, 법문이 잘 안 들어오고 들어와도 투쟁하게 됩니다. 받아들여서 해 보고 판단하기 전에 결점부터 찾게 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어요.

전 이 부분을 잘 몰랐어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의외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적고 반대의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건 화랑 관계 있어요. 화를 계속 방치하면, 이 화가 사실 자신을 겨누게 됩니다. 이 화가 다시 밖으로 분출되어 세상과 충돌하게 되고..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는 거죠. 자신에게 내고 있는 화를 잘 모르므로 방치되기 쉽죠. 마음은 점점 뻣뻣해지고, 어떤 좋은 이야기도 마음에 안 들어가게 됩니다. 인간의 욕망 중 '오욕'이 제일 큰데, 요즘은 돈이 제일 크죠. 가난과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큰 스트레스가 되고 이것에 대한 불만이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비난이 되며 화를 내게 됩니다. 외모를 갖고 찬양하는 풍조도 그렇죠.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외모를 드러나게 내세우는 것을 저급하게 여기는 마음은 있었거든요. 요즘은 외모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투자도 많아지고 외모에 대한 비하도 넘쳐나고.. 그러면 스트레스가 많아지죠. 머리 나쁜 것, 능력 부족한 것, 인간관계 안 좋은 것, 가족이 화목하지 않은 것 등등.. 가족 분위기는 특히 오랜 시간 축적되어 큰 영향을 끼칩니다. 어릴때부터 사랑받은 사람, 천대받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도 큰 차이가 난다고 해요. 이게 안 풀리면 수행을 해도 방해를 계속 받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불교적으로 재해석해 봅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여러분들에게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거죠. 과거 때문에 현재 고통받을 필욘 없습니다. 한 순간에 극복되진 않겠지만 터닝포인트가 생기면, 수행을 계속하면 다 녹아 버리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해 주세요. 자신의 고질적인 번뇌를 이해하셔야 해요. 잠재되어 있는 것은 조건만 형성되면 끊임없이 튀어나와 여러분을 힘들게 하거든요.

현재에 대한 불만, 과거의 아픈 기억, 미래에 대한 불안감, 건강에 대한 염려-우리 삶은 이런 것들에 크게 지배받고 있어요.

과거의 아픈 기억과 현재의 불만족이 결합하여 우리 삶을 악순환으로 돌아가게 하죠. 이런 순환고리의 깊숙한 곳에 들어가 보면 사견이 있습니다. 현재 가난하다고 하여 계속 가난할 것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을 서글퍼 해 봐야 그것이 바뀔 것도 아니잖아요. 요즘 오포시대, N포시대 모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미래에 대한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아예 포기하는 풍조가 형성돼 있어요.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이게 단멸론이죠. 현재의 내 모습이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닌데, 이것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자본의 힘에 대해 반대하는 데모를 많이 했어요. 타인이 가진 것을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는 건데, 이런 행동은 사회와 자신에 대한 분노만 키우는 거예요.

세상은 우연 발생에 불과하며, 내 현재는 내 탓이 아니라는 견해를 바탕으로 하는 사람은 분노를 버리기 어렵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더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의 무능을 탓하고, 분노를 키워가면 점점 더 악화되어 갑니다. 이렇게 되면 더 좋아지진 않습니다. 타인에게도 위험한 요소가 됩니다. 정서적으로 선악에 대한 개념도 잘못 형성되고, 정서적으로 늘 불안하고... 묻지 마 범죄 같은 것이 많이 생기는 원인이죠.

불선법 중 '후회' 가 있어요. 이것은 '참회'와 달라요. 후회는 과거의 일로 자신을 계속 괴롭히는 것이고, 참회는 자기의 잘못에 대해 이해해서 다신 그것을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예요. 같은 경험도 그것을 후회로 만들지 참회로 만들지는, 장애를 겪은 사람이 어리석은가 지혜로운가에 따라 다른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누구에겐 장애물, 누구에겐 디딤돌이 되는 거죠. 중생들을 괴롭게 만드는 젤 큰 요인은 사견입니다. 잘못된 견해를 사실이라고 고집할 때 바꿀 방법이 별로 없어요. 누구도 완벽하게 갖추고 태어날 순 없어요. 다 무엇인가는 부족합니다. 이것을 계속 불만으로 삼으면 스스로를 병들게 만드는 요소가 될 뿐이예요. 붓다께서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다 본인 탓이라고 했어요. 현실의 단면만 잘라 보면 세상이 불공평해 보일 수 있죠. 이게 사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붓다께서 자업자득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배워서 이해해야 합니다. 현재는 과거의 내가 만들었고, 미래는 현재의 내가 만들어 갑니다. 부모님과의 만남은 절대적으로 전생의 업이예요. 전생에 술을 많이 마시고 수행도 하지 않았다면 현생엔 반드시 멍청하게 태어납니다. 전생에 인색했던 사람이 이생에 복을 갖고 타고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일단 수용하셔야 해요. 가난은 인색과 관련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부터라도 베푸는 것이 가난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됩니다.

법구경에 보면 이런 부부가 나와요. 너무 가난하여 상의가 한벌밖에 없었던 부부... 그래서 동시에 외출할 수 없어 늘 교대로 나갔죠. 남편이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웃옷을 보시하고 싶어졌는데 정말 이것 한벌뿐이니 오랫동안 망설이게 됩니다. 결국 보시를 하게 되는 순간, 그는 '현생의 내 가난은 전생에 이런 순간에 닥쳤을 때 내가 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내가 언제 다시 부처님을 만나겠는가. 지금 보시해야 한다'생각했습니다. 사실 전재산을 보시한 셈이었죠. 이것은 아주 어려운만큼 수승한 보시예요. 그런만큼 바로 좋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맛지마니까야'에 보면 몸이 자주 아픈 사람은 결국 전생에 남을 많이 괴롭힌 사람이란 구절이 나와요. 수명이 짧은 사람은 살생을 많이 했다고 하고.. 이런 식으로 복이 부족하면 그것을 보충하는 쪽으로 이생에 노력을 하시면 됩니다. 현재의 문제를 지혜롭게 바라보세요. 얼굴이 못생긴 사람은 화를 많이 낸 경우라고 하니까, 자애심을 많이 내심 좋죠. 남을 탓하면 문제가 해결 안되고 계속 겉돌게 됩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인과 때문이라고 이해하세요. 그런 식으로 불만을 버리세요.

그러나, 이것은 다 결정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숙명론도 사견입니다. 현재가 미래를 만듭니다.

업은 실체가 없어요.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계속 '내가' 들고 있기 때문이죠. 당장 놓을 순 없어도 계속 놓는 연습을 하시면 약화되어 갑니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인데 거기 우리 마음이 빠져 있을 뿐이예요. 한 걸음 물러서 보면 과거의 한 기억일 뿐일 수 있어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고요. 실체가 없다는 것을 관찰하고 반조하다 보면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생각은 반복될수록 굳어지고 실체화되거든요.

조건 따라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 현상 중 하나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고 실체화하면 거기서 못 벗어나요. 악행은 다시 안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과거에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선 너무 집착하고 꺼내어 괴로워하지 마세요. 다 지나가 버린거예요. #앙굴리말라 다 아시죠? 앙굴리말라는 스승을 잘못 만나 잘못된 거예요. 스승님의 부인이 앙굴리말라를 유혹했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해서 남편에게 반대로 앙굴리말라가 자신을 유혹하려 했다고 말했고, 스승은 앙굴리말라를 파멸시키는 주문을 겁니다. 그에게 천 명을 죽이고 오면 큰 가르침을 주겠다고 한 거죠.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살인마가 됐고, 999명을 죽였죠. 눈 앞에 있는 마지막 한 명을 죽이면 1000명이 완성되는 순간 붓다가 나타난 거죠. 안 그랬으면 앙굴리말라는 친어머니를 살해했을 거예요.

앙굴리말라는 붓다를 만나 아라한이 됩니다.(원래 무척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가장 극적인 변화죠. 999명을 죽인 업도 아라한이 되는 순간 그 과보를 받을 수 없어요. 다만, 그 생에 드러나는 인과를 피할 수는 없었죠. 탁발만 나가면 대중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죠. 피하지 않다가 결국엔 맞아 죽어요. 앙굴리말라의 일화에서 앙굴리말라가 왜 그런 살인마가 됐는지를 보셔야 해요. 처음부터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없어요. 지혜롭지 못한 선택이 있고 지나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예요. 누구나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여러분은 다 붓다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어요. 다만 지혜가 부족해 어리석고, 복력이 부족해 삶이 좀 힘들 뿐이예요.

애시당초 못난 인간, 어쩔 수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번뇌 때문에 힘들 뿐입니다. 사리불 존자도 전생에 술에 취해 사랑하는 아들을 잡아 먹은 적이 있어요. 목련 존자도 전생에 부모를 때려 죽인 적이 있어요. 이런 짓들에 이 분들이 계속 매여 있었다면 아라한이 될 수 없죠! 부족함은 부족함으로 그냥 받아 들이시면 됩니다. 누구나 다 부족한 부분이 있어요. 자학하지 말고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해 실현 가능한 노력을 하세요. 현명한 사람이 되세요.

악행을 후회하지 말고 자학하지 마세요. 과거는 다 선행으로 덮어 버리시면 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선행 뿐입니다. 앙굴리말라가 아라한이 되지 않고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세세생생 얼마나 많은 과보를 받았을까요? 온갖 지옥에서 절대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요. 여러분의 껍데기를 어리석음과 번뇌가 잔뜩 덮고 있어도 그것을 벗어나면 지혜가 발현됨을 믿으세요. 이런 마음으로 수행을 하세요. 번뇌는 영원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무상함. Anicca!

자신을 학대하여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을 존중하세요.

저희 모친은 저 어릴 때 저보고 맨날 '귀한 자식, 귀한 자식' 해 주셨어요. 그 덕에 제가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부모를 죽이는 극악무도한 짓을 한 목련 존자도, 999명을 죽인 앙굴리말라도 아라한이 될 수 있어요! 자신을 존중하세요. 물러나지 마세요. 부족한 현재의 나보다는, 내가 가진 가능성을 생각하세요. 무궁무진한 여러분의 가능성을 믿으세요.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세요. 공덕이 부족하면 공덕을 쌓고,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쌓고... 과하게 욕심내지 마시고요.

위빠싸나야말로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겁니다. 자신에게 화가 많으면 이것을 못해요.

'척' 하고 '포장' 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못합니다. 솔직한 지금 모습을 그냥 인정하세요. 일시적인 모습일 뿐인걸요. 변하는 과정입니다. 스스로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자애(메타)수행의 시작은 '자신에 대한 자애'부터 출발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위선입니다.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는 존재에게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나를 존중해야 나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