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따와나 일묵스님

장애요소(번뇌)를 버리는 방법-제따와나 일묵스님(3/3)

수선님 2019. 12. 29. 12:23

(2편링크)

(2018년 수요법회입니다.)

장애요소의 밑뿌리엔 무명과 갈애가 깊숙이 숨어 있는 거예요.

갈애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와 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는데, 이 세 가지를 불교에선 특별히 '번뇌' 라고 해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그리고 어리석음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너 정돈 끼워 줄게 하고 하나 더 넣은 것이 사견입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선 사견을 넣기도 해요. 번뇌는 우리가 윤회하게 만드는 가장 고질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경전에선 무명과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세 가지만 이야기하는데 주석서에서는 사견까지도 넣어서 보통 이야기하기도 한다는 거죠.

특히 번뇌, 장애요소는 우리가 보통 사마타 수행할 땐 잘 안 드러납니다.

이건 주로 삼매를 바탕으로 해서 반조하는 깊이 있는 위빠싸나에 들어가거든요. 조건을 찾는 거는. 그런 걸 찾을 때야 비로서 잠재성향 등 고질적인 번뇌들이 드러납니다. 이건 나중에 수행을 크게 두 가지 파트로 나눌 수 있는데, 장애요소를 버림으로써 삼매에 들어가는 파트가 있고, 삼매의 힘을 바탕으로 원인을 찾는 파트가 있어요. 이 두 가지가 수행의 큰 흐름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의 두번째 경, '모든번뇌경' 에 보면 번뇌를 버리는 방법이 7가지로 설명돼 있어요. 무조건 수행하는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는 감각기능의 단속을 통해 버려야 할 번뇌가 있어요.

수행의 전반적인 과정에 대해 설해 놓은 경전을 보면 감각기능의 단속에 대해선 절대 빠지지 않고 언급해요. 그만큼 중요한 거죠. 계를 지키는 고급버전이라고 보면 돼요. 우리 육문을 잘 단속해서 번뇌가 일어날만한 대상을 애초에 차단하고 마음이 가지 않도록 잘 단속하는 거죠. 여기엔 바른 기억이 중요해요. 이것이 선법이고 이것이 해로운 법이구나 하는 걸 잘 알아야 해로운 법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유익한 법이 일어나게 하죠. 안이비설신의를 잘 단속하는 것이 우리가 첫번째로 장애요소를 버리는 방법이고.

두번째는 수용하는 건데, 이건 의식주를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수행하면서도 먹고 자고 이런건 필요하잖아요. 먹는 음식을 통해 일어나는 번뇌를 일어나지 않게, 그것이 하는 방법이 수용하는 지혜를, 예를 들면 옷이란 건 더위 추위 벌레에게 물리는 걸 막아 주고 우리 몸의 부끄러운 것을 가려 주는 그런 용도로 보면 되는데 멋이나 나를 뽐내는 쪽으로 맘이 가면 뭐가 거기에 달라붙겠어요? 욕망이 달라붙겠죠. 그래서 스님들은 사미라고 하잖아요. 가사, 남방 스님들은 치마 같은 거 입고 그 다음에 추울 때 겉가사 딱 이렇게 세 가지로 살아가요. 저희들도 정해진 색깔로 살아요. 오늘 뭐 입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있는 대로 입는 거죠. 머리도 깎아 놓으니까 멋 낼 필요도 없잖아요. 이런 게 우리한테 일어나는 쓸데없는 번뇌를 상당히 줄여줍니다. 옷을 수용함에 있어 필요한 정도에서 그치지 않으면 번뇌가 일어날 수 있죠.

스님들도 사소한 거에서, 가사를 좀 더 부드럽고 좋은 천을 입고픈 욕망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경전에도 가끔 스님들이 가사에 대해 욕심을 내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걸 막아주는게 수용이죠. 이런 마음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음식은 밥 먹을 때 우리 공양하는거 있잖아요. 이 음식이 어디로부터 왔을까, 온갖 욕심을 버리고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이런 게 나오잖아요. 몸을 유지하고 불편함을 쉬고, 청정범행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는거지 음식 자체를 즐기기 위해, 식도락을 위해서는 아니죠. 요즘 세상엔 먹방이라고 먹는 거 갖고 탐욕을 자극하는 그런게, 갈수록 오욕락을 자극하는 이런게 많은데 수행자들은 이 음식을 자기 몸을 지탱하고 수용하는 정도로 받아들여야 해요.

거처도 추위 더위를 물리치고 기후 변화에서 생기는 위험, 한가롭게 수행을 하기 위해 편안한 그런 거죠. 이게 별거 아닌거 같지만요 미얀마에서 수행해 보면 처음 가면 판자촌을 주거든요. 나중에 개인 꾸띠 줘요. 안에 화장실도 있고. 단체 꾸띠 쓰는 사람은 거기 보면 욕망이 일어나요. 저기 가면 훨씬 좋을거 같고 왠지 수행이 더 잘 될 것 같은데. 그런 것도 거처를 수용하는데 지혜가 부족한 거예요. 거처는 주어진대로 하면서 추위 더위 등의 외부에서 보호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이게 수용을 통해서 번뇌가 일어나는 걸 버리는 거구요.

세번째는 모든 번뇌를 수용으로 이겨내긴 힘들어요. 인내해야될 게 있어요.

예를 들면 여기서 맨날 음악 트는데 이건 방법이 없어요 참아야 돼. 그냥 그것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저걸 소리라고 인식하고 거기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 그런 건데 기본적으로는 외부의 큰 자극에 대해선 인내하고 인욕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참아야 될 일들이 상당히 많잖아요. 특히 더위, 추위, 이런 건 참아야 되고 또 배고픔 이런거 다 참아야 되고 경전에 보면 추위, 더위, 배고픔, 기갈, 모기, 바람, 태양, 뱀, 악의적이고 불손한 말- 괜히 가는데 옆에서 욕하고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런건 인내해야 돼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죠. 부처님께서도 탁발 나갈 때 외도들이 와서 욕하고 그랬어요. 그럼 부처님은 '저들은 저들이 할 일을 하는 거고 여래가 할 일은 인욕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런 게 인내로써 극복해야 하는 거다 이말이고요.

신체적으로 오는 괴로움, 아플 때 이런 것도 그건 참아서 넘겨야지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물론 수행하면 좀 덜 아프긴 하겠지만 아픈 동안엔 참는 방법밖엔 없어요.

또 하나 네번째는 피하는 겁니다.

옆에 호랑이가 오는데 달려가면 되겠어요? 피해야죠. 독사 뱀이나 절벽이나 웅덩이, 늪지, 시끄럽고 어지러운 자리 이런 건 피해야 하고 악우-악한 친구들은 피해야 합니다. 번뇌 보면 버리는 방법에서 이것도 일종의 큰 틀에서 보면 수행이랄 수 있는데 단속을 통해서 버리는 거, 수용을 통해서 버리는 것, 인내를 통해서 버리는 것, 피해야 하는 것들 - 어떤 건 피하는 게 좋다는 거예요.

다섯 번째는 '봄' 으로써 버려지는 거죠.

본다는 건 바른 견해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 사성제인데요, 봄으로써 버려지는 건 사견과 의심입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사견, 예를 들어 감각적 욕망이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이건 생각만 하는 건 사견이 아닌데 집착하는 건 사견이잖아요. 사견과 집착이 함께 하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버릴 수 있겠어요? 아 감각적 욕망은 진짜 괴로움이구나 하고 봐야 해요. 여기서 본다는 건, 눈으로 보는게 아니라 빨리어로 '다사나' 라 해요. 지혜로 관찰해서 아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버려진다는 거죠.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의심이 있을 수 있잖아요. 정말 윤회하느냐, 이런 것도 우리가 뭐를 보면 버릴 수 있어요? 왜 존재가 태어나는가, 즉 연기를 보면, 이건 집성제와 관련 있어요. 존재가 왜 일어나는지, 괴로움이 왜 일어나는지 그걸 보면 의심이 사라진다는 거죠. 봄에 의해서 사라지는 거-주로 수다원하고 관련 있어요. 이게 꼭 수다원은 아니지만, 사견이나 의심은 바른 견해로 보는 것만 가지고도 사라질 수 있다는 거예요.

수다원을 '견도' 라 해요. 견해 자체가 싹 바뀌는 것만 가지고도 번뇌가 사라진다는 거예요.

이걸 비유를 하자면, '물의비유경' 이 있어요. 그걸 보면 사람들이 물 속을 계속 떠다니며 윤회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물 속에 맨날 빠져 있어요. 그 사람은 뭐겠어요? 감각적 욕망에 푹 빠져 있는 거죠. 어떤 사람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건 뭐겠어요? 여러분들이죠. 가끔 수행하는. 그리고 수행이 깊어진 사람은 욕망에 별로 빠지지 않고 그냥 물 위에 있는 경우. 이렇게 세 가지 부류가 있어요. 근데 사실 물 속에 있는 건 위험하잖아요. 그래서 아예 뭍으로 가려고 하게 되는거죠. 태어나지 않는 것이 행복이다라 생각하고 강물을 떠내려가다 방향을 확 틀어서 옆에 뭍이 있다는 걸 보는 거 있잖아요. 그게 견도입니다. 수다원. 저게 진짜 안전한 곳이고 열반이구나.

그러면 떠내려가다가 방향이 확 바뀐 상태잖아요. 아 이렇게 가야 열반이 이루어지는구나, 아는 게 수다원입니다. 그런 게 지금 말한 봄에 의해서 버려지는 거예요.

그 다음에 제도와 수행에 의해 버려지는 게 있어요.

수행에 의해 버려진다는 건 칠각지를 계발한다는 거거든요. 보는 것만으로 버려지지 않는 번뇌는 수행에 의해 버려지게 됩니다. 제도에 의해 버려지는 생각은 감각적 욕망에 의한 생각, 즉 그릇된 사유가 버려지게 걸 이야기하는 거죠. 이것도 먼저 사성제에 대한 이해, 사성제란 게 바른 견해라는 걸 보면 사성제에 의해 바른 사유를 하고 이런 걸 버릴 수 있겠죠 그쵸? 이건 단순히 견해 뿐 아니라 계속 닦음으로써 그 밑뿌리에 있는, 방향이 바뀌었다 해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계속 물로 떠내려가는게 있잖아요. 물을 건너가는 노력을 하는 과정이 있고 가다 보면 물가에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그 다음엔 물을 완전히 벗어나 뭍에 도달한 상태 이렇게 해서 네 가지 성자를 나누거든요.

방향을 튼 사람은 뭐가 되겠어요. 수다원이고, 물을 건너가고 있는 사람은 사다함, 완전히 건너진 못해도 땅에 발을 디딘 사람은 아나함 정돈 되겠죠. 이 때는 물이 담겨 있는 부분은 존재에 대한 욕망 정도입니다. 그것마저 완전히 벗어나면 아라한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수행을 통해서 버려진다. 이건 조금 더 수준 높은 단계를 이야기하는 거죠. 아까 말씀드렸듯 처음엔 장애요소가 해롭고 이것은 무상고무아란 걸 통해서 내려놓는 방식으로 삼매를 계발하고, 이 계발된 삼매를 바탕으로 조사, 조사할 땐 항상 사성제의 관점/틀에 따라 조사할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건 원인을 찾는 거예요. 좀 쉽게 이야기하면. 고성제에 대한 통찰은 앞에 수행할 때 썼잖아요? 좀 더 깊어지는 건 원인을 찾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선정 정도를 경험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적어도 우린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사견이 뭐냐 하면, 감각적 욕망이 행복이라고 하는 사견이 대표고, 행복한 느낌 자체가 행복이다라고 보는 게 크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계속 존재하면서 그 느낌을 느끼고 싶은 거예요. 더 이상 태어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태어나면서 그 느낌을 즐기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존재해서 태어나서 그 느낌을 느끼는 게 더 성가신 일이고, 본질적으로 느낌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느낌이 나중에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이해하고 이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면,

행복한 느낌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죠.

그렇게 된 사람을 수다원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수다원이 되면 느낌 자체가,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다라고 보는 것으로 완전 전환되면 수다원이죠.

그 다음에 느낌 자체가 괴로움이란 견해는 바뀌었다 하더라도 즐기던 습성이 남아 있잖아요. 이쪽이 열반임을 알아도 아직은 물 속에서 놀며 물을 건너가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이게 바로 사다함이예요.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습관은 완전히 사라져요. 그런데 뭐가 뚜렷이 부각됩니까? 벗어남의 행복이 너무 좋은거예요. 이 정도 행복이면 내가 영원히 존재하면서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이 들 수 있겠죠. 존재에 대한 욕망이 아직은 남아 있어요. 즉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버려져도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있어요. 그것마저 버려진 게 아라한이 되겠죠.

이게 제가 말씀드린 수행의 과정하고도 관계있는데, 우리가 몸에 마음을 붙이고 선정에 들어가는 과정이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과정입니다. 선정의 행복을 경험해 보면 수다원까진 아니더라도 감각적 욕망이 저열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잖아요. 여기서 벗어나면 선정의 행복을 맛보는데 이게 바로 출리의 행복, 벗어남의 행복이잖아요? 이 행복마저도 나와서 보니 영원하지 않은 거예요. 선정에 들었을 때 너무 행복하고 좋았는데 선정이 끝나면 평상시 맘으로 돌아오는 거야. 그래서 이것조차도 영원하지 않고 이것도 역시 불완전하고 괴로움의 요소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벗어남의 행복에 대한 갈애조차도 버려지게 됐을 때 소위 말하는 아라한이 될 수 있는건데,

선정에 들어갔다 나와서 선정에 드는 조차도 무상고무아임을 관찰하고 아라한이 되는 예가 경전에도 여러군데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삼매를 호흡 수행이나 몸 관찰을 통해 일단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장애요소를 가라앉히고 삼매를 얻는 쪽으로 작용을 하고, 이 삼매의 힘을 이용해서 원인을 추정하거나 사성제의 관점으로 반조하는 과정을 거치면 이게 굉장히 깊은 통찰을 계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사성제 수행에서 호흡 수행과 마음관찰 혹은 걷기 수행과 마음관찰을 어떻게 하는지 설명드렸고, 오늘은 그런 수행을 통해서 지혜가 계발되어 어떻게 장애요소와 번뇌가 소멸되는지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사마타나 위빠싸나 이런게 부처님 당시, 여러분들도 니까야를 많이 보시겠지만 니까야를 관찰해 보면 사실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획일적으로 규정해 놓진 않았거든요. 그냥 팔정도를 이야기하시는 건데,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이런 것도 보면 사마타 따로 위빠싸나 따로 이런 게 아니잖아요. 그냥 그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삼매도 닦이고 지혜도 계발되는. 물론 삼매를 닦는 과정에서는 삼매에 좀 더 무게가 실리지만 삼매 후의 반조에는 지혜에 훨씬 무게가 실려요.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수행을 하시면 더 경전에 부합되고 여러분이 삼매를 닦는 과정에서도 번뇌를 버리는 노하우가 터득되고, 삼매를 바탕으로 더 깊은 지혜도 계발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보통 여기 왔다갔다 하실 때 버스 타고 오는 시간 있고 가는 시간 있잖아요. 그런 시간이 사실 여러분한테 수행하기 제일 좋은 시간입니다.

제가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따로 시간을 내서 수행한 적이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제가 한창 수행을 열심히 할 때는 박사 과정 시험을 준비할 때 였거든요. 그래서 하루에 8~9시간 정도 시험 준비를 해야 했어요. 그 나머지 시간은 학교 가는 시간, 또 그 사이 아르바이트도 가야 하고, 밥 먹고 쉬는 시간, 등을 이용해서 제가 원하는 시간을 이렇게, 소위 말해 자투리 시간이 있잖아요. 세속의 일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 외 남는 시간을 쓸데없이 시간 보내기보단 그것을 수행으로 활용하는 거죠. 알바갈 때 지하철 타고 버스 타는 시간이 저한텐 무척 좋은 시간이죠. 그 때 수행 목표를 채울 수 있으니까. 또 밥 먹고 나면 포행하잖아요. 내 나름대로 목표가 있었거든요. 그 땐 '옴마니반메훔'을 하루 3만번 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걸 틈틈이 하는 거예요.

초보자때는 하루 24시간 주고 하루종일 수행하라 그래도 잘 안 됩니다.

힘이 안 생겨요. 자기 할 일 하면서 남는 시간에 수행을 하면 하루 종일 깨어 있게 돼요. 정신이 뭔가 일할 땐 일하는 거에 집중되고, 그 나머지 시간을 깨어 있는 시간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그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훨씬 더 수행에 도움이 된단 말이예요. 세속 공부할 때도 굉장히 집중해서 하게 돼요. 하루 잠 자는 시간 외에는 수행하는 걸로 거의 채워지게 된다, 그게 오히려 수행을 빈틈없이 하는데 도움이 된다. 여러분들도 이동할 때 왔다갔다 하고 그런 시간을 수행의 시간으로 활용하면, 예를 들어 걸어갈 때 걷기걷기 하면서 가는 거예요.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왔다갔다 할 때 앉아서 호흡 보시면 되고. 그것도 지루하면 경을 봐도 되고, 법문을 들어도 되고.

수행이라는게 꼭 반드시 앉아서 하고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선한 마음이 이어지면 되거든요.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선한 마음이 이어지면 계속 선법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내가 수행을 해서 선법이 일어나게 할 수도 있지만, 경을 볼수도 있고, 법문을 들을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하루를 다 수행으로 채워 나가면 그런 것만 해도 수행에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오히려 초보자 땐 그렇게 수행해야 해요. 처음부터 시간 많이 투자해서 수행만 한다고 수행이 잘 되는게 아니예요. 오히려 왔다갔다 하는 시간도 다 수행으로 활용하면 시간이 길어지거나 늦어져도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게 되죠. 시간을 그렇게 활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좋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