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수요 법회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이루기 위해 욕망이 바탕이 되면 뭔가 넘치게 되고 과하게 되고 또 멈추지 못하고 이게 분명 아닌줄 알면서도 욕망에 못 이겨 부당한 일을 수용하게 되고 이렇게 되잖아요. 지혜가 바탕이 되면 적절하게 하게 된단 거예요. 이것이 내가 해야 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내가 노력해서 계발해야 할 것인지 버려야 할 것인지를 알고, 계발해야 할 것은 계발하는 쪽으로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런 빤야찬다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수행을 할 수가 없거든요.
결국은 하고자 하는 의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의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욕망이나 어떤 사람은 분노에 의해 그런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저 사람한테 한번 무시당했고, 저 사람이 잘됐다고 나를 깔보고 그러면 그거를 이겨내기 위해서 내가 잘된걸 한번 보여주겠다 하는 동력으로 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 불선한 마음을 동력으로 일어나는 의욕은 우리가 버리고, 빤야찬다 지혜를 바탕으로 무엇을 하는건 우리가 해야 될 것이죠. 또 메따-자애심을 가지고 뭔가를 하려 하는것도 우리가 해야 되는 거잖아요. 이런 건 노력해 계발해야 되는 것들이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 하는 것이 의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정말 욕심을 통해 일어나는 건가, 어리석음을 통해 일어나는 건가 이런 걸 잘 분별을 해서 겨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지혜가 바탕이 되고 자애심, 연민 이런게 바탕이 되서 뭔가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라는 거죠.
잘못하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의욕도 없고 현실에 푹 퍼져 있고 이런 걸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는 일치하지 않아요.
우리가 뭔가를 이루기 위해 의욕을 일으키는데 단지 그 동력이 탐욕이나 성냄이 되게 하지 말고, 지혜나 자비가 동력이 되도록 하는게 중요한 거죠. 그라고 모, 하지 않는다, 무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가르침이다. 불교는. 뭔가 하려 하면 어긋난다. 이런 말들도 있는데 그게 바로 아무 의욕도 없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수행하는 사람들에겐 법을 만난 이 생에, 내가 할 수 있는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뭔가를 해내고 말겠다는 의욕같은 것이 중요하단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의욕이 있는 사람은 능동적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이 사람한테 자문도 해 보고 저 사람한테 자문도 해 보고 막 의욕적으로 좋은 방법을 찾아서 원하는 걸 얻게 되는데 의욕이 약한 사람들은 굉장히 수동적이 됩니다. 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고.
수행도 마찬가지거든요. 잘해야겠다는 의욕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그 시간을 쪼개서 수행하는 시간을 만들어 내려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수행 안하려는 쪽으로 마음이 가겠죠. 실제 우리 뇌가 작동하는 것도요, 수동적으로 작동하는 거하고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게 기억되는 게 다르다고 하거든요. 학교 공부도 그렇잖아요. 선생님이 막 억지로 하라 그래서 하는 경우는 머리에 잘 남지도 않고 세월 지나면 금방 잊어. 그런데 자기가 막 알려고 노력해서 아는 것들은 훨씬 기억도 잘 되고 오래 남고 그런게 있다는 거죠.
수행도 똑같습니다. 의욕이란 건 아주 중요한 겁니다. 다만 이 동력이 탐욕이나 성냄이 되지 않게 하고 지혜나 자비가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거고, 이 의욕 자체는 수행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란 거죠.
그래서 네 가지 성취 수단 중 의욕이 들어가잖아요. 뭔가를 이뤄낼 때는 의욕이 충만해야 한다.
여러분들도 부처님 일대기 보면 부처님이 되려는 사람들은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숯불로 되어 있더라도 그걸 걸어가야만 부처가 된다면 포기하지 않을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런게 다 의욕입니다. 뭔가 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욕 같은게 있었을 때 뭔가 이뤄낼 수 있다는 거. 이건 우리 마음을 굉장히 능동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잘하기 위해 이것도 찾고 저것도 찾는 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수행을 잘 할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관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하나가 정진인데요,
이 정진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아까도 말했지만 너무 아무 것도 하지 말라 뭘 하려 하는 거 자체가 문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이런 마음들은 바른 것인가 그릇된 것인가 그게 중요한 거지 이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정진이란 것도 욕망을 바탕으로 해서 뭔가를 애를 쓰고 노력하는 건 나쁜 쪽으로 갈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내가 저 놈을 괴롭히기 위해 몰래 밤에 가서 저 놈을 위해를 가하겠다 이런 것도 능동적으로 마음을 일으키고 노력하는 거잖아요. 근데 그런 건 나중에 분명히 자기한테 불이익이 오고 괴로움이 커지는 상황이 발생하겠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릇된 노력과 바른노력, 그릇된 노력은 버려야 될 것이지만 바른 노력은 해야 된다.
이건 뭐냐 하면 우리가 번뇌를 내려놓는 것도 멍하니 있으면서 내려놓는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거야. 오히려 선법을 계발하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함으로써 불선법이 버려진다는 거죠. 여러분이 선법을, 팔정도를 계발하지 않는데 어떻게 불선법이 버려지겠어요. 칠각지를 계발하고 팔정도를 계발하고 사념처를 계발해야 번뇌가 사라질거 아니예요. 이걸 계발하는 것이 위리야-바른 노력, 바르게 정진해야 그런 법들이 일어난다는 거죠. 경전을 보면 그릇된 정진을 조건으로 여러가지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난다. 이건 해로운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바른 정진을 조건으로 여러가지 유익한 법들이 일어나고 수행의 완성을 이루는 이것이 이로운 것이다'
도인이 되면 아무 것도 안 하고 즐기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건 여러분이 나중에 아라한이 되면 그렇게 하시고, 지금 수행을 하는 그 과정에서는 계속 선법을 계발하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을 하는 것이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이루겠어요. 세속에서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성공하는 경우는 없거든요. 자기가 열심히 노력을 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듯이 특히 수행은 노력하지 않으면 다 어디로 가냐 하면
익숙한 쪽으로 흘러갑니다. 탐욕을 즐기고 성냄을 즐기고,
그쪽으로 좇아가게 되기 때문에 노력을 해야 하는데 노력을 욕심내면 안돼요. 한꺼번에 다 이루려 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한 단계 한 단계 해 나가야 합니다. 이게 너무 마음만 앞서고 이러다 보면 초반에 지쳐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미얀마에 있을 때 보면, 한국에서 스님들이 많이 오는데 스님들이 오면 보통 이제 신심이 나거든요. 새롭고 분위기도 좋고 이러니까. 그래서 한 달 가까이는 거의 새벽부터 저녁까지 엄청나게 열심히 합니다. 근데 그렇게 하는 스님들이 대체로 한 달 이상 버티는 걸 못봤어요. 대부분 일찍 가요. 제 풀에 자기가 지쳐서.
뭔가 한 달 바짝 하면 결과가 나타날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데 막상 해 보면 별 게 없어
수행법에 문제가 있나 보다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그건 뭐냐 하면 너무 마음이 앞서다 보니 노력을 좀 과하게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게 오히려 부작용이 나는 거거든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1단계, 2단계 해서 어느 정도 단계별로 어느 정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공부가 잘 되면 거기부터 조금씩 늘려가는 거죠.
지난 시간에도 제가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렸지만 수행을 할 때 처음부터 너무 많이 하려 그러지 말고, 예를 들어서 이번에 처음에는 내가 쓸데없이 보내는 그런 시간들부터 수행으로 확보를 하고 그러다가 수행이 잘 되면 조금 더 시간을 확보하고 그렇게 단계적으로 늘려가면 무리가 안 따르거든요.
수행시간을 계량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예요.
내가 적어도 수행하는 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은 하겠다. 한 시간을 좌선하겠다, 이렇게 하면 못 할 가능성이 많아요. 저는 사실 다른 종교지만 이슬람교에서 하는 하루 5번, 비행기 타고 가다가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 시간만 되면. 근데 그런게 알게 모르게 굉장히 큰 힘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하루에 5번을 항상 그렇게 한다는 것은 자기 삶의 습관이 되고 녹아나게 되는데, 우리가 그런걸 가볍게 생각할 부분이 아니거든요.
여러분들도 한 시간 연속으로 하지 않더라도, 예를 들어서 5분을 수행했다고 하면 요즘 스마트폰 다 있으니까 5분 메모지에 기록해 놓고 10분 수행했다 하면 10분 기록하고 그걸 하루에 총체적으로 봤을 때 여유있게 할 수 있게 되죠, 그럼 그 다음엔 두 시간 이렇게 늘려 나가다 보면 소위 말해서 마음의 힘이 생겨 가지고 그게 어렵지 않게 나아갈 수 있는데, 원래 공부 못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계획을 엄청나게 세우잖아요. 하루 6시간하고. 그럼 조금 하다 보면 제풀에 지쳐서 안하게 되거든요.
그냥 조금씩 조금씩 늘려가면서 자기 수행의 힘을 길러서 하고,
한시간 하고 나니 시간이 많아, 그럼 하지 말란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그 다음엔 여건 되는대로 더 열심히 하면 돼. 근데 제가 말하는 건 하한선, 적어도 하루에 요거는 안 하고 지나가진 않겠다 하는 나름대로의 목표 기준이 있을 필요는 있다는 거예요. 적어도 하루 한 시간은 하면서 거기에 시간이 나면 더 하고 이런 거는 좋거든요.
그러면서 그 하한선을 조금씩 올려 나가다 보면 수행을 꾸준히 끌고 나가는 힘이 생기고요.
경전에도 보면 우리가 수행을 앉아서만 하는 게 아니라 행주좌와 이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우리가 앉아서나 걸을 때나 일상 생활 속에서 수행이 이어질 수 있도록, 짬짬이 시간될 때마다 하는 게 의외로 많은 시간이 확보가 됩니다. 우리가 하루 중 그냥 보내는 시간들이 많거든요. 오늘 휴가철이라 오는 중에도 시간 많이 걸리는데 그걸 수행으로 잘 활용하면 그게 막힌다고 짜증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이 수행하는 시간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시간들을 잘 확보해서 수행으로 활용하고 꼭 수행을 안해도 법담을 나누거나 법문을 듣거나 책을 보거나 이렇게 하는 것도 그거 자체가 아주 깊이 있는 수행은 아니더라도 선한 마음이 계속 이어지니까 선업이 자꾸 쌓인단 말이예요. 그런게 또 실제로 선한 마음들이 수행하는 걸 서포트해주는 쪽으로 다 적용을 하거든요. 그런 선한 마음을 이어가는 것도 아주 좋은 정진에 해당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좀 애를 쓰고 사람 몸 받기도 힘들고 사람 몸 받아서도 법을 만나기가 아주 힘든 건데 이렇게 사람 몸 받았을 때 한 걸음이라도, 조금이라도 선업을 더 많이 짓자, 이 생에 아라한이 되면 젤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선업을 많이 짓고 이생을 마무리하는 자체가 되게 큰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들한테 그런 비유를 자주 말씀드리지만 경전 이름이 정확히 기억 안나는데, 까끼자루경(?)인가 아마 그럴 거예요. 손도끼처럼 생긴 걸로 나무를 자꾸 파잖아요. 그걸 자꾸 쓰다 보면 손잡이가 평평하던 게 쏙 들어가 버린단 말이예요. 그걸 하루 딱 찍고 나서 얼마 들어갔나, 또 한 번 찍고 나서 얼마 들어갔나 이라믄 그게 보이겠어요? 안 보인다 이거예요. 아무 생각없이 열심히 쪼다 보면 일년 지나고 이년 지나면 나무가 안으로 쏙 파여서 들어가 있다 이거예요.
수행도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눈 앞에 자꾸 결과를 두고 내가 되고 싶은건 이건데 왜 안 되나, 왜 빨리 안되나, 하루 했는데 이틀 했는데 왜 안 되나 이렇게 하다 보면 그거에 대한 불만족만 늘어가지 수행이 안되요.
천 계단을 갈 때 제일 좋은 방법은 그냥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고거에만 집중해서 가는게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럼 지루하지도 않고 언젠가는 끝에 가는데, 한 계단 올라가서 올려다 보고 또 한 계단 올라가서 올려다 보고 이러다 보믄 그 자체가 스트레스 받는 일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수행을 하는 요령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자꾸 뭔가 결과를 바라기보다는 뭐를 하라 그랬습니까? 그런 결과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뭔가를 알고 그걸 하나하나 채워 나가고 성숙시켜 나가는 그게 이제 수행의 과정이고 정진의 과정이다 이거예요. 우리가 어차피 사람마다 근기가 다른데 부처님 당시 제자들처럼 부처님 법문 한 마디 듣고 바로 아라한이 될 수 있으면 제일 좋을텐데 그렇지 못하죠.
그렇다면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역량이 있고 아라한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이 있잖아요. 그거를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충족시켜 나가고 성숙시켜 나가다 보면 사람들이 점차점차 성장하고 이런거지.
부처가 되고 싶다고 욕망만 일으키면 그게 뭐가 되겠어요? 그게 까마찬다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선사어록에 보면 이런 말 나오거든요.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라. 그런게 뭐냐 하면, 진짜 그분들 죽이라 그랬겠어요 그 말이. 그렇게 되려 하는 그 마음을 없애야 한다는 거예요. 목적은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걸로 가져야 하지만 실제 걸어가는 것은 어때야 된다는 거예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돼. 자기가 역량이 되는 만큼 한 걸음 한 걸음 가야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게 정확한 구절인줄 모르겠는데, 뜻은 정수리에 두고, 우리가 하는 말은 발에다 두라는 그런 말이 있거든요. 뜻은 우리가 머릿속에 멀리 두더라도 실제 그거를 가야 되는 그 길은 한 걸음 한 걸음 그게 중요하거든요. 작은 노력이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엄청 큰 이익을 주는건데, 뜻을 저 멀리 해 놓고 그것만 바라고 자기가 현재 해야 될 일을 안 하면 그건 얻어질 수가 없는 일이겠죠.
그런게 인제 정진을 해 나가는 노하우다 이거죠. 그냥 자기 앞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우리가 게임으로 쳐서 열 가지 단계가 있다면 1단계부터 가야 될거 아니예요? 1단계를 하고 나서 2단계 가고 3단계 가야지 한꺼번에 바로 10단계를 간다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그 과정에서 여러분 지난번에 했듯이 때로는 인내하기도 하고, 때로는 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수행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한 걸음 한 걸음 가지는 거라는 거죠. 정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근데 이 정진이 욕심을 바탕으로 하는 정진은 별로 이익이 없고 성냄을 바탕으로 하는 정진도 별로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만,
지혜와 자비를 바탕으로 한 노력은 굉장히 큰 이익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혜를 이야기하는건데, 불교에서 말하는 이 지혜가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불교에서 5력이라 말할 때 신심, 정진, 사띠/기억이 있고, 선정/삼매, 지혜가 있는데 이 모든 선법 중 최고가 뭐라고 했어요. 지혜. 지혜 안에 다 들어간다. 코끼리 발자국 안에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 들어가듯이 지혜 안에 모든 것이 내포된다. 그래서 지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요. 이 지혜란 것이 수행을 이끌어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축입니다.
아까 4여의족에서는 의욕이 있고 정진이 있고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은 사실 선한 마음을 이야기한다고 보시면 돼요. 여러분들이 선한 마음이 강해도 뭔가 이루어낼 수 있거든요. 예를 들어 제일 강한 마음이 뭐겠어요. 선정의 마음같은 건 굉장히 강한 선한 마음이잖아요. 이런 걸 통해 원하는 걸 다 이룰 수 있는 거거든요. 이건 간단히 넘어가고,
지혜는 전적으로 선한 거죠
지혜가 있으면 상황을 풀어나가는데, 아까 말했듯 어리석은 사람은 결과만 바라보고 가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결과를 이루기 위한 조건을 봅니다. 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선 뭐가 필요한가,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떤 노력이 필요하고 어떤 마음을 내야 하는가 이걸 아는 게 지혜라는 거죠. 우리가 보통 제일 손쉽게 얻을 수 있는게 지식인데, 지식도 아주 손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혜보다 쉬운 건 뭐냐 하면 남들이 애를 써서 경험을 통해 얻어 놓은거 책이나 이런걸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이건 아직 자기껀 아니라는거예요. 그쵸? 아직 자기걸로 체화된 건 아니니까.
지식하고 지혜는 다릅니다. 지혜는 자기가 스스로 경험에 의해 얻어진 걸 이야기하거든요. 수행의 여정이란게 있는데 그 과정을 잘 끌고 가기 위해선 뭐가 있어야 하겠어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리석게 하면 노력은 진탕 하는데 얻는게 없어요. 내가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적을 수 있다는 거예요.
지혜가 있으면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많은 걸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지혜가 되게 중요합니다
[출처] 수행상식 바로 알기-제따와나 일묵스님(2/3)|작성자 넝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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