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수요 법회입니다)
번뇌를 완전히 버리는 방법은 지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사성제란 지혜를 깨닫고 번뇌를 소멸하고 아라한이 되는 이런 과정을 거치거든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보면 항상 이것이 괴로움이라고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라고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꿰뚫어 알고, 이것은 번뇌다, 이것은 번뇌의 일어남이다, 이것은 번뇌의 소멸이다, 이것은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다, 이걸 알면서 아라한이 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경전에 항상 나옵니다.
이건 뭘 의미하냐 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번뇌는 싸워서 버리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번뇌가 왜 안 없어져 싫어 없애야 돼! 이러면서 버려지는 게 아니란 거예요. 이 번뇌를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번뇌를 이해하고 꿰뚫어 알아야 한다, 이 번뇌의 속성을 명확히 앎으로써 우리가 번뇌를 버릴 수 있다는 거죠.
이 번뇌를 버리는 툴이 사성제입니다.
지식이란 건 지식이란 툴에다가 우리가 자꾸 꿰어 맞추려는 그런 방식으로 가지만, 지혜는 안 그렇거든요. 사성제라는 지혜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인데 이 관점을 터득함으로써 번뇌가 버려지는 방식이란 거죠. 세상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라 이해하는 사람은 존재에 대한 욕망이 안 일어나겠죠. 존재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것은 존재가 행복이라 생각하는 미련이 있으니까 계속 그거에 대해 집착이 일어나는 거라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지혜를 통해서만 번뇌는 버려진단 거예요. 우리가 반야심경에도 보면 반야지를 계발해야 그걸 통해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그런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사성제는 결국 존재나 세상의 진리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그 진리를 꿰뚫어 앎으로써 그 번뇌로부터 벗어나는거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억누르고 도피하는 것으로는 일시적으로 번뇌로부터 피할 수는 있지만 그건 완전히 번뇌가 버려진 건 아니란 거죠.
그래서 선정이라고 하는 것도 일시적으로 번뇌가 가라앉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번뇌가 완전히 소멸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런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아는 지혜-위빳사나란 수행법이 나오게 된 거잖아요. 부처님 당시에도 상당히 선정력이 높은 사람은 있었단 말이예요.
지혜란 걸 통해 번뇌가 버려진단 걸 다시 한 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참고 이런 건 일시적으로 번뇌를 가라앉히는 효과는 있지만, 완전히 번뇌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번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번뇌 자체가 단순히 적이 아니라 여러분의 지혜가 생기게 하는 스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지혜가 잘 생기지도 않아요.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에 '기반경' 이란 경에 보면, '괴로움이 불법에 대한 신심이 생기는 기반이다' 라고 했잖아요. 고생을 좀 해 봐야 법에 대한 소중함도 알고 이 법에 따라 수행을 하면서 지혜가 계발이 되는 거거든요.
번뇌를 통해서, 번뇌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지혜가 생기는게 되게 많거든요.
우리가 예를 들어서 탐욕이란 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탐욕의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이건 대상에 집착하는게 속성인데 그 밑뿌리엔 어리석음이 숨이 있기 때문에 집착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영원하지 않은걸 영원하다고 붙들고 앉았고, 괴로움인데 행복이라고 붙들고 앉았고, 나라고 할만한 것도 없는데 내가 있다고 붙들고 앉은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자꾸 거머쥐고 안 놓으려 한다는 거잖아요. 이런 거에 대한 이해가 되면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것들이 아닌게 되거든요.
여러분들도 다 그런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지고 나서 헤어짐 도저히 못 살 것 같고 죽을 것 같고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나서 마음이 식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고 너무나 큰 생각 이런데, 그런 생각 자체가 뭐를 통해서 일어납니까? 조건 따라 일어나는 거잖아요. 이것도 조건이 변하면 변할 수 있는거다, 이렇게 이해하면 어떤마음이라도 지나고 나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있어요. 단 이걸로 인해 오는 과보는 있을 수 있어요.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한 과보는 있을 수 있지만, 이게 절대적이거나 변치 않는 건 아니란 거죠.
조사어록에 보면 이런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제자가 스승한테 묻는데 '깨달은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습니까?(인과불락입니까?)' 이렇게 물어요.
맞습니까? 아라한은 인과불락입니까?
아라한이 된다고 과보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분은 말해줘요.
'인과불락이 아니라 인과불매다'
무슨 말입니까? 매자가 무슨 매자예요? 어리석을 매예요.
아라한이 되고 나서 부처님도 과보는 받았잖아요. 과보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게 아니라, 인과에 불매하다. 이런 행위를 하면 어리석은 것인지 안다. 수행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건 아니지만, 인과를 알면 적극적으로 해로운 건 안 하게 되고 유익한 것은 계발하는 쪽으로 마음이 쓰일 거 아니예요 그쵸? 그럼 과보가 일어날 것도 훨씬 적게 일어난다는 거죠. 우리가 과거에 지은 악업이나 살면서 지은 악업을 어쩔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후회한다고 악업이 사라집니까?
업을 소멸할 수 있는 방법은 사성제를 깨달아 아라한이 되고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아야 업장이 소멸되지 그렇지 않으면 업장이 소멸되지 않아요.
자기한테 악업이 있단 걸 안 사람은 선업을 더 지으려고 애쓰고 선업쪽으로 가야 해요.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사람들이 업이란 것을 너무 숙명론적으로 '이런 업은 이런 과보가 온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 안하셨거든요. 소금덩이경이라고 많이 보셨잖아요. 그쵸? 똑같은 소금이라도 여기(옆 물컵)다 놓으면 짠물이 되지만, 여기 오는 데 있는 그 홍천강에다 물을 넣으면 홍천강 물이 짜지지 않잖아요. 업이 절대 독단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업도 상호 작용을 한다는 거죠 서로서로. 선업이 많으면 악업이 결과를 맺는 걸 방해하게 됩니다. 근데 악업을 많이 지었는데 악업이 많다, 그러면 이 악업을 도와 더 큰 과보가 일어나게 하는거죠. 그러니까 똑같은 허물을 지었다 하더라도 선업이 많은 사람은 이 과보가 적게 나타나고, 똑같이 허물을 지어도 악업이 많은 사람은 훨씬 크게 나타난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이걸 단순히 '내가 이런 업을 지었으니 이런 과보가 왔다' 이렇게 보는 건 바람직하게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선업이 부족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부터라도 선업을 많이 지어서 그 선업의 힘이 훨씬 더 강해지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우리가 우리한테 일어나는 걸 바라보는 자세예요.
불선업보단 선업의 힘이 훨씬 강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불선업을 많이 지었지만, 불선업의 힘보다는 선업의 힘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특히나 위빳사나 지혜라든가 이런 지혜가 생긴 사람은 자기가 지은 악업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힘이 훨씬 강해지거든요.
여러분들이 수행자라면 결국 우리가 보세요. 괴로움이 있을 때 믿음이 생긴다는 건 뭐에 대한 믿음이겠어요? 우리가 맹목적으로 부처님을 믿거나 스님을 믿거나 제일 중요한 게 뭐겠어요?
부처님이 설한 이렇게 하면 우리에게 이익되고 이렇게 하면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건 선법이고 이건 불선법이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내 마음에서 이런 건 유익하고 이런 건 유익하지 않다 이런 걸 확실히 믿고, 내가 해로운 마음을 일으켰다면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선업이 일어나도록 하는 그게 여러분들이 노력해야 될 방향이고 의욕을 일으켜야 될 방향이라는 거죠. 자꾸 과거를 돌아보고 내가 과거에 왜 이랬을까 이런 거를 하는 것은 별로 여러분에게 큰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거예요.
이런 건 해야 합니다. 인과에 어둡지 않잖아요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인과에 어둡지 않으니까 자기가 잘못했던 거에 대해서 참회하고 다시 그런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은 같이 기울여야 되겠죠 그쵸? 무조건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아무 것도 아니야 그렇게 할 건 아니고 과거에 내게 허물이 있다, 이건 해롭다, 이건 나에게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다시 그것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마음은 가져야되겠죠 그쵸? 그런 걸 우리가 참회라고 합니다. 이건 지혜의 영역에 해당해요. 그런데 왜 그랬을까 난 나쁜 사람이야 이러면서 자기를 계속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은 뭐에 해당하겠어요? 그거야말로 후회입니다. 이런 건 우리 삶을 유익하게 하고 좋은 쪽으로 가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드는 쪽으로 간다는 거예요.
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지혜롭게 끌고 가야 되지 잘못 가면 수행을 하면서 오히려 자기를 더 못살게 군다거나 괴롭힐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수행을 할 때 여러가지가 있지만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수행할 때 자기 롤모델같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 사람처럼 되야 되겠다, 저도 옛날에 부처님도 부처님이지만 사리불 존자를 되게 좋아했어요. 사리불 존자같은 분이 되야되겠다, 이런 자기 나름대로 롤모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건 말 그대로 우리의 목표인 거지 그거하고 여러분이 똑같진 않잖아요. 모르죠. 있을 지도 모르죠. 제가 눈이 어두워서 못 보고 있을수도 있는데. 근데 그런 롤모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롤모델과 현재 자기의 모습이 일치하는 건 아니예요. 우리가 그 롤모델을 정해 놓고 그 롤모델의 삶에다가 나를 끼워 맞추고 날 그대로 적용하려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우리가 무엇이 되려 할 필요는 없거든요. 무엇이 되려 하면 자꾸 조작이 일어나고 억지로 날 끼워 맞추려 하게 되는데 사람은 다 존재마다 존재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고 나름대로의 가치가 다 있습니다. 그 중에서 뭐만 하면 돼요?
자기한테 있는 번뇌를 소멸하는데 주력하면 돼요.
번뇌를 버리면 그 번뇌가 버려진 그 상태가 자기의 진짜 모습인거예요.
그걸로 충분한데 내가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하는게 수행의 어떤 참고가 되고 나도 저런 분처럼 노력을 해야겠다 이 정도지 똑같이 맞출 순 없어요. 수행이란 게 무슨 벽돌 공장에서 벽돌을 찍어내듯 똑같은걸 찍어내는게 아니잖아요. 부처님 당시에도 보면 부처님 제자들이 아주 많았지만 그분들이 다 똑같진 않았잖아요. 어떤 분은 지혜 제일, 어떤 분은 신통 제일, 어떤 분은 지계 제일 다 달랐잖아요.
그건 왜냐하면 그분들이 살아 온 여정이 다르기 때문에 번뇌가 버려진 그 상태도 다 달랐던 거예요. 법구경에 보면 그런 사람도 나오잖아요. 아라한이 됐는데도 말이 거친 거예요. 그 이야기 보신 적 있죠? 아라한이 됐는데도 말을 막 거칠게 해서 다른 스님들이 보고 저 사람은 아라한이 아닌거 같다, 하면서 부처님께 여쭤 보니까 부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저분은 번뇌가 남아 있는게 아니라 굉장히 오랜 생 동안 보면 전생에 많은 생을 신분이 낮은 집안에 태어났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는 말을 쓰는게 거칠어서 그 버릇이 남아 있었던 거지 그 사람 자체가 번뇌가 아직 소멸되지 않은 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게 뭘 이야기하냐하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내용들이 사람마다 특성이 다르고 이런 거지 그게 번뇌가 사라졌다 해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되진 않는다는 거죠.
그게 여러분들의 진짜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비록 짧지만. 아라한이 되는 기간만 그런 모습이 있겠지만.
여러분들이 너무 수행을 자기 이상향을 만들어 놓고 그 이상향에다 나를 끼워맞추려하기보단, 그건 오히려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되고 싶은데 잘 안돼.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옛날에 수행할 때 성철스님 같은 분을 보면 아 저 스님처럼 살아야겠다. 또 미얀마 가서 파욱 사야도 보면 아 파욱 사야도처럼 계를 잘 지키고 살아야겠다. 또 다른 훌륭한 스님을 보면 아잔차 스님같은 분을 보면 또 그에 맞게 살아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이런 거 있잖아요. 미인 중에 코가 제일 이쁜 미인, 눈이 제일 예쁜 사람, 두상이 제일 예쁜 사람. 다 모아 갖고 해 놓으면 오히려 안 이쁘거든요. 그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갖고 있는 그 모습이 아름답고 그게 사실은 더 좋은 모습인건데 그걸 여러사람 좋은거 다 짜깁기해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날 맞추려고 하면 그게 수행에 더 어색해지죠.
현실하고 이상은 다른 거거든요. 그 이상대로 내가 가지지 않아요. 그 과정이 있어요. 그 과정에서 번뇌가 버려지면서 자기만의 고유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오는 거지 그게 이상적으로 해 놓은 그대로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수행을 하는 것은 제가 볼 때 별로 바람직하지 않고,
여러분들의 모습은 여러분 모습 그대로가 아름다운게 있어요. 단지 그게 번뇌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잘 안 드러날 뿐이거든요.
그런 걸 그대로 두고 우리한테 있는 그런 부정적이고 나한테 방해되는 요소를 어떻게 하면 버릴 수 있을지 계속 의욕을 일으키고 그런 방향으로 노력을 하고 지혜를 쓰고 선한 마음을 계속 일으켜서 우리 마음을 계속 선하게 만들고 이렇게 해 나가다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점점 사람이 좋아질수밖에 없고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이걸 이상향을 만들어 놓고 나는 왜 이렇게 안돼 난 왜 못났어 이렇게 하다 보면 오히려 이상향이 날 괴롭히는 요소가 될 수 있거든요.
이상향을 만들더라도 내가 가는 길은 결국 뭐밖에 없어요?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지혜롭게 해서 선한 마음 많이 일으켜서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번뇌를 버리는 것 외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그런 방법으로 노력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그래야 그게 소위 말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수행을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 불만이 생깁니다. 옛날에 저분들은 저렇게 했는데 왜 난 이거밖에 안돼. 난 왜 이렇게 못났을까 이런 식으로 자꾸 가게 된다는 거죠. 그냥 그런거 생각하지 말고 자기한테 부족한, 나를 괴롭히는 해로운 마음들을 하나하나 버려 나가다 보면 기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변해가는 거에서 만족하고 그런 것에서 오는 희열과 행복을 수행의 동력으로 삼으면 수행이 조금이나마 덜 힘들고 또 그 나름대로 동기 부여가 되면서 수행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수행을 하는 방법은 여러분들도 많이 들었는데 실제 저 산을 가야된다, 실제 거기를 걸어가는 건 다른 문제잖아요. 걸어갈 때 여러분들의 마음 자세가 되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어차피 쓰러지게 돼 있어요. 공부는 자기 뜻대로 안됩니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서 묵묵히 길을 가는 거예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고 그러면서. 계속 가다 보면 다시는 쓰러지지 않는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는데 그런 길을 묵묵히 갈 때 필요한 지혜를 하나하나 터득해 나가는 것이 진짜 지혜다 이거예요. 그런 지혜가 계발이 되면 얼마든지 우리가 원하는 그 길을 갈 수 있고, 설사 이생에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지혜롭게 가면 그 길을 가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진다 이거예요.
즐겁고 행복하게 갈 수 있다는 거죠.
오늘은 제가 그런 쪽으로, 수행을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이끌어 가느냐 이런 거에 대해서 여러분들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많겠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는 개념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출처] 수행상식 바로 알기-제따와나 일묵스님(3/3)|작성자 넝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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