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수요법회입니다.)
여러분들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오장애요소도 다 뭐 때문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어요? 장애요소 자체는 행은 아니지만 장애요소와 함께 일어나는 그걸 뭐라 합니까? 장애요소가 홀로 일어나는 건 아니란 말이예요. 장애요소가 일어날 때도 업이, 의도가 일어난단 말이예요. 장애요소가 일어날 때 일어난 그 의도가 해로운 업이 되는거죠. 장애요소가 일어나는데도 항상 모든 해로운 법이 일어나는데는, 이 말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건, 모든 해로운 법의 조건이 뭐라 할 수 있어요? 무명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항상 업이 일어나기 때문에, 행위가 일어나기 때문에 모든 불선한 행위도 다 무명을 조건으로 일어난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감각적 욕망이나 성냄이나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무명을 조건으로 일어납니다.
무명이 사라지면 장애요소도 완전히 다 사라지게 되겠죠.
예를 들어서 무명 때문에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감각적 욕망과 함께 하는 의도, 탐욕과 함께하는 의도죠. 예를 들어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을 계속 즐기고 싶어하잖아요, 그쵸? 이 즐기고 싶어하는 이면에는 뭐가 있겠어요? 권력이란 대상을 잡고 놓치 않고 즐기려는 그 밑엔 어떤 어리석음이 숨어있겠습니까? 권력이 영원하다고 착각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서 그걸 계속 거머쥐고 계속 즐기려 한다면 그게 뭐가 돼요? 이런 게 인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는 그 뿌리엔 뭐가 있는 겁니까?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겠죠.
또 하나 뭐가 있냐 하면, 감각적 욕망이란 좋은 거라 막 즐기는 그 속에는 뭐가 있겠어요? 감각적 욕망이란 대상이 있잖아요. 주로 색성향미촉인데 이거에 대한 생각을 즐기는게 또 법에 대한 거거든요. 대상 자체가 영원합니까? 근데 이 대상이 마치 영원하다 생각하고 돈도 영원하다 생각하고 붙들고 집착하고 그런게 다 어리석음, 그리고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귀한 물건 있어요. 예를 들어 (녹음기 가리키며) 이게 되게 비싼 거라고 칩시다. 이걸 내 것이라 생각하는 마음이 숨어 있잖아요. 이 집착하는 속에는 이건 내거다란 마음이 숨어 있거든요. 이건 내 것이 아니잖아요. 부처님께선 무아를 가지고 설명하셨는데,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또 뭐에 해당합니까? 이건 무명에 해당합니다.
무명이 있기 때문에 집착이 생겨납니다. 먼저 왜곡되고, 그 왜곡된 것에 대해 집착하는 거죠.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 자체가 부처님은 뭐라 그랬습니까? 이 감각적 욕망은 유익한 법입니까 해로운 법입니까? 해로운 법이잖아요. 괴로움을 유발하는. 보통 사람들은 이걸 뭐라고 생각합니까? 행복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행복이라 생각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집착을 하겠죠 그쵸?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는 원인을 추적해보면, 조건을 들여다보면 항상 어리석음이 그 속에 깔려 있다는 거예요.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깊이 있고 근원적으로 버리기 위해선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는 뭐를 봐야 합니까? 감각적 욕망이 왜 일어나는지 알면, 그 원인을 깨면 버리기가 쉽다는 거죠. 여러분이 감각적 욕망이 행복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누가 하지 말라 그러면 저게 좋은 건데 이러며 계속 이야기하고 행복이란 견해를 갖고 있고 그런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리석음보다 더 강한게 견해거든요.
근데 그런 걸 갖고 있으면 안하는게 아니라 참는 겁니다. 내 마음으로는 이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안 좋다 그라니까 억지로 참다 보니 잘 버려지지가 않아요. 계족 재발돼요. 근데 내가 심리적으로 완전히 이건 괴로움이고 정말 이건 가까이 하면 날 괴롭게 하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마음이 크게 전환이 되거든요. 그렇게 됐을 땐 버리기가 훨씬 쉽다는 거죠. 이런 감각적 욕망이 제일 고질적인 번뇌 중 하나인데 이것이 일어나는 뿌리엔 항상 어리석음이 있다는 거예요.
욕망 중에서도 여러분들이 고질적으로 잘 안 놓아지는 번뇌가 있거든요. 욕망도 사람마다 자신이 집착하는 형태가 좀 달라요. 사춘기 때는 성욕 같은게 왕성하고 나이 들면 돈이나 명예에 욕심이 가고, 사람마다 욕심이 가는 형태가 다른데 이걸 잘 파악해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원인이 무언가 파악해서 그걸 잘 이해하면 무명을 조건으로 감각적 욕망과 함께하는 의도가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무명이 깨지면 이게 버려진다는 거죠. 사실 우리가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왜 자꾸 하냐 하면, 그 원인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만 갖고는 번뇌를 버리기가 쉽지 않아요.
원인을 찾다 보면 그 속에 숨어 있는 잠재성향이나 자기의 고질적인 모습들이 드러나거든요.
그래서 그런 원인을 찾는데 특히 모든 번뇌는 기본적으로 무명이란 원인이 깔려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게좋구요. 특히 감각적 욕망의 원인이 되는 것이 그렇고요.
또 감각적 욕망이란 것이 있으면 이 욕망에서 뭐가 일어나냐 하면, 감각적 욕망이란 내가 뭔가 즐기고 싶고 얻고 싶은데 그걸 얻지 못하면 뭐가 일어납니까? 그게 적의-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또 화가 날 때 그걸 해소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요? 여러분 스트레스 받으면 뭐합니까. 영화 보러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그러잖아요. 그게 뭡니까. 화가 나는 자기의 괴로움을 감각적 욕망을 즐김으로써 해소하는, 이게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 세속에서 많이 쓰는 방법입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걸 즐김으로써 그걸로 괴로움을 해소하려 하는거죠. 먹는 거, 좋은 걸 보러 가거나, 음악을 듣거나 이런 게 다 감각적 욕망을 통해서 해소하는 거예요.
감각적 욕망과 성냄은 서로서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욕망 때문에 화가 일어나는거고, 화 때문에 또 욕망이 일어나는거죠. 이 두 가지는 약간은 동일 차원의 원인이라 할까요. 그런데 무명이라 하는 건 이거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어떻게 보면 감각적 욕망과 성냄은 평행선상에서 서로 원인이 된다고 한다면 무명은 훨씬 더 뿌리 깊은 그런 원인이다 말할 수 있죠.
무명을 원인으로 화가 일어나죠.
여러분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잖아요. 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왜 일어납니까? 물론 삶에 대한 애착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있지만, 이 애착의 밑바탕엔 뭐가 있냐 하면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 그리고 또 내가 영원하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어차피 태어난 사람은 죽을수밖에 없는데 안 죽으려 하는 것도 어리석음이거든요.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고자 하는 거. 그래서 화가 일어나는 것도 그 밑뿌리에는 어리석음이 항상 숨어 있어요.
이거에 대표적인 어리석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것이 무상고무아라는 걸 모르는 것, 또 이 법이 해로운 법인지 유익한 법인지 모르는 거 이것도 어리석음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서 화가 일어나면 이걸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해요? 해로운 법이 일어났다고 이해해야 하는데 이걸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하다 이렇게 하면 이 화가 점점 커질 거 아니예요. 특히 사람들이 속기 쉬운게 자기가 일으킨 이 화가 정당하고 정의를 위한 것이고 이런 것이 화를 내면서도 그 화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런 게 있죠. 그치만 그런건 아니죠. 어떻게든 화라는 건 화고, 우리가 화를 안 내고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에서 뭔가 대처를 하는 것은 그게 화를 내는 건 아닌데, 내가 내 맘에서 같이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것도 화라고 이해해야 하죠.
무명을 조건으로 욕망이 일어나거나 화가 일어나는 그 첫번째에는 그 대상이 무상고무아임을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고, 크게 보면 또 하나는 이 법이 해롭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어리석음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 된다, 괴로움의 일어남의 원인이 된다고 꿰뚫어 아는게 집성제를 꿰뚫어 아는 거잖아요. 그걸 모르는건 뭐에 해당하겠어요. 그것도 어리석음에 해당하겠죠. 그런 것도 어리석음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런 어리석음이 있으면 이런 욕망과 성냄이란 것은 이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고 욕망과 성냄이란 것이 서로서로 원인이 되는데 사실 좀 더 근원적인 걸로 보면 화가 일어나는 건 항상 그 속에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것도 원하는게 일어나는 집착을 하는 뿌리에는 항상 어리석음이 숨어 있고, 무명이 숨어 있고.
가장 근원적인 번뇌는 무명과 탐욕, 어리석음과 탐욕이예요. 감각적 욕망과 성냄은 서로가 대등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화가 있고, 화가 있으면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게 되는데, 탐욕에는 감각적 욕망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욕망이 있죠. 이건 조금 더 수준이 높은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해태 혼침이라 하는 것도, 무명 때문에 해태 혼침이 일어날 수 있는데 해태 혼침은 이건 좀 더 거친 번뇌이기 때문에 반드시 탐욕이나 성냄과 함께 일어납니다.
해태 혼침은 따로 일어난다기보단 탐욕과 함께하거나 성냄과 함께 해요.
그래서 해태 혼침이 일어났다 그러면 내가 이게 탐욕 때문에 일어났는지 성냄 때문에 일어났는지 이런걸 볼 필요가 있어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좌선할 때 계속 졸려. 이건 뭐를 바탕으로 일어나냐 하면, 수행이 잘 안 되고 따분하니까. 따분함도 일종의 성냄이잖아요. 그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또 앉아 있는데 뭔가 몽롱하게 선정은 아닌데 편안한 그런게 있어요. 생각이 없고 멍한 상태. 그런걸 즐기고 앉아 있는건 뭐를 바탕으로 한 해태혼침이겠어요? 그건 그 상황을 즐기는 거잖아요. 그 멍한 상황을.
해태 혼침은 그 속에 보면 탐욕이 있거나 성냄이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의 원인은 뭐가 돼요. 탐진치의 구조만 잘 알면 나머진 다 응용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해태 혼침도 대체로 보면 그 속에는 탐욕과 함께하거나 성냄이 함께하는데 탐욕과 성냄은 그 밑뿌리에 어리석음이 함께 있어요.
해태 혼침도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거예요.
후회도 마찬가지죠. 들뜸과 후회라고 할 때 들뜸이란 건 어리석음이 있음 항상 일어나는 거고, 후회라는 건 내가 과거에 잘못한 거라든다 해야될 걸 안한거에 대해서 화를 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후회도 뭐하고 함께, 화의 영역이란 말이죠. 화도 밑뿌리에 보면 내가 뭔가 원하는게 있고, 그거보다 더 들어가 보면 항상 어리석음이 숨어 있다.
여러분은 아라한이 아닌데 아라한처럼 실수를 안하려는 것도 어리석음이죠.
사람은 원래 불완전하거든요. 존재 자체가 완전하지 않고, 뭔가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은데 이게 완전하길 바라는 것도 어리석음이거든요. 여러분이 스스로가 내가 참 부족하고, 존재 자체가 원래 완전하지 않다는 것만 알아도 자만심 같은게 상당히 놓아집니다. 그리고 내가 좀 못한다고 자기를 너무 학대하지도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한걸음한걸음 나아가는 것밖에 없지 내가 원하는 결과를 딱 맞춰 놓고 그게 언제까지 안되면 나는 안돼! 하며 자기를 푸시하는 이런 방식은 수행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세속적으론 좋을지 몰라도.
출가해 보면 나는 몇 년 내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나가겠다!이런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는 스님들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꼭 무리를 하게 됩니다. 자기 상태에서 그 정도 수준이 아닌데 막 8시간씩 용맹정진을 하다가 몸에 무리가 가서 오히려 수행을 방해하는 쪽으로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런건 다 욕심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차근차근 현재 닥친 거 하나하나 열심히 그렇게 하는게 바람직하죠.
(계속)
[출처] 원인을 찾는 방법1-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가 있다(2/3)|작성자 넝쿨
'제따와나 일묵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욕망-이해하면 버려진다(1/4) (0) | 2020.01.12 |
---|---|
원인을 찾는 방법1-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가 있다(3/3) (0) | 2020.01.12 |
원인을 찾는 방법 1-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가 있다(1/3) (0) | 2020.01.12 |
수행상식 바로 알기-제따와나 일묵스님(3/3) (0) | 2019.12.29 |
수행상식 바로 알기-제따와나 일묵스님(2/3) (0) | 2019.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