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따와나 일묵스님

원인을 찾는 방법1-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가 있다(3/3)

수선님 2020. 1. 12. 11:03

(2018년 수요법회입니다)

2편링크

의심이란 거 자체도, 장애요소 중 의심도 어리석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명확히 파악이 되면 의심이 안 일어날거 아니예요. 이것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면 의심이 일어날거 아니예요. 과연 나라는게 있나 없나? 이것도 의심이잖아요. 부처님은 죽으면 윤회한다고 했는데 진짜 윤회 하나 안하나 이런 것도 다 뭐가 돼요? 이게 의심이잖아요. 진짜 윤회한다고 확신을 하고 확실히 꿰뚫어 알고, 정말 나라고 할만한 건 없다고 확실히 알면 의심이 안일어나거든요. 그래서 의심이란 것도 항상 무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장애는 여러분들이 자주 접하는 거고, 오장애의 원인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가를 이야기하려 부연설명을 드렸는데 장애요소 속에도 장애요소가 일어나는 뿌리에는 어리석음이 있다는 거죠. 이 어리석음은 진리에 대한 어리석음, 존재 자체가 무상고무아임을 철저히 꿰뚫어 아는 이게 고성제잖아요. 그쵸? 존재가 태어나는 원인은, 해로운 법은 괴로움을 일어나게 만들고. 팔정도나 칠각지 같은 유익한 법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태어남에서 벗어나는게 완전한 행복이다라는 이런 걸 철저하게 이해하는게 그게 지혜잖아요 그쵸?

지혜가 없으면 계속 어리석음에 노출이 되어 헤매게 된다는 거죠.

감각적 욕망이 행복이다라고 보는 것도 대표적인 어리석음이라는 거죠. 여러분이 가장 많이 노출돼 있는 어리석음입니다.

감각적 욕망의 행복이 부처님은 괴로움. 감각적 욕망 자체가 해로운 법이라 했잖아요. 그걸 확실히 꿰뚫어 아는 것도 지혜고, 그걸 모르고 계속 거기서 헤매는 뿌리엔 어리석음이 숨어 있다. 그걸 이해하시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장애요소를 들여다 보면 장애요소는 항상 원인이 있어요. 그 원인을 찾다 보면 그 원인을 어리석음까지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항상. 그 어리석음을 깨는 것은 지혜거든요.

사성제에 대한 통찰이 깊어지면 어리석음이 깨져요.

그럼 번뇌를 지탱하고 있는 가장 뿌리에 있는 게 어리석음이니까 이 지혜가 생겨 어리석음이 깨지기 시작하면 위에 있는 번뇌는 다 스스로 무너지게 돼 있어요. 지금 우리가 밭에서 여름엔 풀이 많이 난단 말이예요. 풀 껍데기만 뽑으면 풀이 금방 다시 자랍니다. 비만 와도. 그래서 뿌리채 뽑아야 하죠. 뿌리채 뽑아 햇빛에 말려야 다시는 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밑뿌리엔 모든 뿌리가 어리석음이란 걸 이해하는 건 굉장히 유익합니다.

불선한 행위가 일어나는 거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렸는데 이 무명이 있음으로 장애요소가 일어나고 그 장애요소 때문에 우리가 굉장히 많은 괴로움을 겪고 있다 이걸 알면 우리가 뭐를 이해할 수 있냐 하면 무명 자체가 위험한 것이구나, 정말 해로운 것이구나 란걸 이해할 수 있잖아요.

그럼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잖아요. 여러분들도 수행을 하는 이유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건데, 이 괴로움의 원인이 무명과 갈애, 탐진치, 이것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에 수행을 하잖아요. 무명의 위험성을 아는 사람은 사마타 수행을 하거나 위빳사나 수행을 하거나 보시를 하거나 계를 지키거나 이런걸 할 수 있겠죠 그쵸? 이건 여러분들처럼 수승한 사람들은 이렇게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 이렇게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하면 다음 생에 좋은데 태어난다더라, 선업을 많이 지으면 선처에 태어나서 우리가 아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더라, 선정을 닦으면 내가 색계에 태어나서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더라, 뭐 이렇게 해서 수행을 할 수도 있잖아요.

무명을 조건으로 선업이 일어나는데는 크게 보면 두 가지 조건, 내생의 행복을 위해서, 또는 현생의 행복을 위해서 선업을 짓는 경우가 있고,

두번째는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런 선업을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겠죠?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그래서 무명이라는 걸 바탕으로 해서 보통 일반적인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니들 이런 좋은 일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또 이렇게 보시도 많이 하고 이렇게 하면 이걸로 다음 생에 천국에 태어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선업을 많이 짓는 경우도 분명히 선업은 선업입니다.

불교적으로 보면 뭐가 바탕이 돼 있죠? 천국이 영원합니까? 윤회하는 것이 행복이란 것도 어리석음이고, 태어난 천상이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거죠. 그런 걸로 인해서 선업을 지은 것이므로 이것도 무명을 조건으로 선업이 일어난다 말할 수 있겠죠 그쵸?

근데 여러분들처럼 무명의 위험성을 이해하고 무명에서 벗어나 완전한 행복을 이루고자 사마타 수행도 하고 위빳사나 수행도 하고 그렇게 선정에 들기 전까진 욕계 선정이예요. 선정에 들어야 색계, 무색계 선정. 그렇게 수행을 하면서 선업을 쌓는 이게 뭐가 되겠어요? 이건 뭐가 되겠어요? 무명으로 인해 선업이 일어난 건 맞죠. 근데 이건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극복하기 위해서, 무명을 타파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한다거나 또 이런 식으로 가게 된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가 무명 때문에 장애요소가 일어나니까 무명을 버림으로써 장애요소로부터 벗어날 수 있잖아요 그쵸? 그렇게 해서 수행을 하면 이 무명이 조건이 되서 오히려 지혜가 생겨날 수 있는 거죠. 무명 자체가 위험하다 이것도 지혜잖아요. 그쵸? 무명이 왜 일어나는지 아는 것도 지혜에 해당하겠죠.

무명은 또 왜 일어납니까? 무명은 무명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고 번뇌 때문에 일어난다고도 합니다.

여러분 마음의 어지러움 때문에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무명이 문제가 되어서 다시 또 무명 때문에 무명에 압도되서 해로운 법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 무명이란 것이 조건이 되서 오히려 그거 때문에 선업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제가 옛날에 뭐라 했냐 하면, 오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뭐가 생깁니까? 칠각지가 계발되잖아요. 그쵸? 우리가 번뇌라고 하는 것이 그 자체 속성으로 보면 해로운 것이고 이게 우리에게 여러가지 불이익을 주지만, 또 번뇌나 무명 이런 해로운 법들을 극복하는 그 과정에서 지혜가 생기잖아요. 지혜가 생기고 선법이 일어나잖아요. 해로운 법은, 무명도 마찬가지에요. 무명 자체가 해로운 법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이 무명 때문에 뭐가 또 일어나기도 한다는 거예요? 선업도 일어난다. 선한 행위. 그러니까 어느 한쪽 면만 있는건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이 무명에 빠져 버리면 무명이란 것이 우리 삶에 굉장히 해로운 것이 될 수 있는데, 이 무명의 위험성을 이해하고, 이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이해하면 무명이란 조건으로 이런 선업이 일어난다. 위빳사나 지혜도 생기고 사마타 집중력도 생기고 이렇단 얘기죠.

또 한편으로 더 나아가서 여러분들이 색계에 태어나면 신통도 하고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더라. 그래서 나도 한 번 신과 같은 존재가 돼 봐야되겠다, 이렇게 하고 만약에 선정을 계발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죽어서 색계에 태어나지만 색계에 태어나서 천신으로 오랜 수명동안 온갖 복락을 누리겠지만 그것도 선업이 다하면 다시 또 욕계라든가 이런데 태어날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해서 선정을 계발하는 건 외도의 선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윤회해서 좋은 데, 정말 자기가 원하는 데 태어나기 위해서 선정을 계발하는 거죠. 이건 색계 세상, 나란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색계에 태어나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고, 혹은 색계가 영원하다는 어리석음이 있을 수도 있죠. 그런 어리석음, 무명을 바탕으로 해서 닦는 경우가 있고, 부처님께서 선정을 닦으면 법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선정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청정해지고 깨끗해지면 그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법을, 현상계의 실상을 볼 수 있고, 그걸 통해서 사성제를 깨달아 아 존재 자체가 정말 무상한 것이구나, 괴로운 것이구나, 이런 것을 깨닫는 쪽으로 활용을 한다면 그거는 선정을 닦는 것이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닦는 거잖아요 그쵸?

두 가지 방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벗어남의 행복, 선정의 행복이란 게 감각적 욕망보단 차원이 높은 행복인데, 이 행복을 색계에 태어나 영원히 누리고 싶다. 이런 쪽으로 가면 이게 인제 그건 천신으로서 영원히 살고 싶다 이런 쪽으로 가잖아요. 그럼 이건 윤회의 과정에 있는 거고,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해서 선업을 짓는 거죠. 근데 이 어리석음을 완전히 깨려면 선정이 필요하다. 법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하니까. 그래서 그런 쪽으로 활용해서 선정을 활용하고 존재 자체의 실상을 봐서 아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고 이건 무상하고 무아고,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쪽으로 활용한다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쪽으로 활용되는 거죠.

그리고 무색계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겠죠. 무색계의 과보는. 몸이 없으니까 얼마나 좋겠어요 무색계는. 거긴 마음만 있는 존재니까. 여러분 사실 몸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되게 많잖아요. 나이 드신 분들은 더 절실히 느끼죠. 사는 거 자체가, 아픈 데가 많아지고, 이런 게 다 몸으로부터 오는 고통인데. 무색계는 아예 몸이 없는 존재니까 가고 싶은 곳도 맘대로 갈 수 있고 정말 좋은 존재다, 그래서 난 무색계에 태어나서 영원히 행복을 누려 보겠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것도 있을 수 있잖아요. 이런 건 보통 외도들이 그렇죠.

그런데 이 무색계 선정을 이용해서 그걸 통해서 법을 보고 깨달음을 얻고자 닦는다면 그건 무명이란 걸 깨기 위한, 그걸 극복하기 위한, 타파하기 위해 닦는 그런 식이겠죠.

전체적으로 보면 이 무명 때문에 선업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 선업이 좋은 데 윤회하기 위해서,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닦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게 대부분 외도, 불교 외적인 존재에서는 보통 어떤 특정한 존재가 되기 위해 선업을 닦는 경우도 있고, 불교에선 무명을 버려서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욕계 선업은 무명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그리고 선정, 색계나 무색계 선정을 닦아 그걸 통해서 아주 깊이 있는 깨달음의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 닦는, 이런 방식으로 가면 무명을 조건으로 선업이 일어나는데 이건 특히나 완전히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무슨 말씀인줄 아시겠죠?

그래서 사실 우리가 짓는 모든 행위들에서는 그 어리석음이 직접적으로 지원을 해서 어리석음에 압도되는 것도 있지만, 이 어리석음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꿰뚫어 알기 때문에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리석음을 깸으로써 완전히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게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입니다.

무명이란 건, 그 자체로는 괴롭고 안 좋은, 해로운 속성을 갖고 있지만 그걸 통해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도 어떤 면에선 여러분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여러분한테 있는 그것을, 자기한테 있는 무명이나 번뇌가 일어난다 해서 무조건 안 좋게만 보지 말고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란 거죠. 거기에 빠지면 계속 안 좋은 쪽으로 가는 거지만, 아직은 아라한이 아니기에 번뇌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아라한도 아닌 사람이 번뇌 일어났다고 짜증낼 필요는 없다 이 말이예요.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는데, 그들을 통해서 지혜를 계발되게 하고 선한 행위가 계발되게 하는 쪽으로 작동하면 되지 그거 자체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자기를 자학하고 이렇게 하는 거는 어리석은 일이다.

지난번에도 한번 말씀드렸지만 위빳사나 수행 때 자기를 들여다 보면 자길 인정 못하고 자기를 거부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쉽거든요. 그런게 자기 번뇌를 잘, 번뇌 이게 안 좋은 면만 있는게 아니라 선업의 스승, 조건도 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모든 해로운 업, 특히 해로운 업이 일어나는 것, 선업이 일어나는 것에 무명이란 원인이 있다는 걸 설명드렸고요, 다음에는 다른 방향에서 원인 찾는 거를 또 한번 설명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무명을 가지고 설명드렸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여러분이 지혜를 계발한다는 자체가 지혜가 계발되는만큼 무명이 소멸되기 시작하는 거거든요.

무명과 지혜는 반대잖아요.

명지와 무명, 위짜가 명지, 아위짜는 무명이잖아요.

우리가 수행을 통해 지혜가 성장하는만큼 무명이 사라지는거예요.

처음에는 사견이 일어날 정도의 무명이 사라지는 거고, 나중에는 감각적 욕망이 일어날 정도의 무명이 사라지는 거고, 그 다음에는 완전히 무명 자체가 뿌리채 뽑히는 거고.

우리가 지혜를 계발하지 않고서, 지혜가 계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명이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명을 깨는 소위 말해 툴이 뭐냐, 사성제에 대한 통찰이란 거죠.

존재에겐 왜 무명이 있느냐, 이건 부처님도 말씀하신 바 없습니다.

무명이 언제부터 시작됐느냐 이거랑 비슷한 건데, 원래 이 존재란 건 있어 왔고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건 이 존재들이 언제부터 시작됐으며 이런거까진 말한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어찌됐든간에 존재가 있고 존재에게 번뇌가 있음으로 인해 괴로움이 일어나잖아요.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설하셨어요.

그래서 이거에 대표적인 법문이 독화살 비유. 내가 독화살을 맞았는데 이 독화살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누가 쐈으며, 이런 걸 알기 전까진 독화살을 빼지 않으면 죽을거 아니예요. 현실은 독화살을 맞은 게 현실이란 거예요. 독화살이 어디서부터 날아왔는진 모르지만 독화살을 빼는 방법은 부처님께서 설했다 이거예요. 그걸 빼고 나서 고민해도 되는 문제죠. 그 땐 별로 관심이 없겠죠.

그래서 인제 부처님께서도 그건 설하지 않았어요. 알 수 없다. 시작이 언젠진 알 수 없다 보시는거죠. 중요한 건 우리에게 그런 번뇌가 있고 태어나 윤회하는 것도 현실이고, 번뇌가 있는 것도 현실이고, 그런데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태어난 존재의 본질이 뭐고, 왜 태어났는지도 부처님께서 설했고, 어떻게 하면 벗어나는 방법, 벗어나는 길도 설했습니다.

이 법에 따라 수행하는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지 이 법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언제 시작됐으며 이렇게 하다 보면 계속 생각만 하지 실제 그거로부터 벗어나진 못한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