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불교

불교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수선님 2020. 1. 12. 11:11

불교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법륜스님 본지 발행인

직지인심 견성성불

“불교는 종교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 수행으로서의 불교,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정토회는 수행으로서 불교를 추구합니다.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고타마 싯타르타 태자가 출가하고, 수도하고, 깨달음을 얻고, 많은 사람에게 설법하신 근본불교 정신입니다. 죽어서 어디 가고 다음 생에 부자로 태어나고 하는 기복신앙이 아니고, 지금 내가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괴로움이 없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 온갖 속박에 묶여 사는 게 아니라 자기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운, 자기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경을 많이 읽어야 할까요, 참선을 많이 해야 할까요, 절을 많이 해야 할까요? 그런 것도 다 부분적으로 필요하지만, 근본은 자기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불교의 종지宗旨인‘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입니다. 우리도 이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명상도 하고, 경전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자기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화장실에서도 할 수도 있고, 목욕탕에서도 할 수 있고, 저잣거리에서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일하는 가운데에서도 늘 자기 마음의 상태에 깨어 있으면 일하는 게 곧 수행이 됩니다. 그래서 선禪에서는‘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앉아서만 참선하는 게 아니라 농사를 지으면 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종지에 의하면,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서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산속에 있어야만 수행자가 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자기 마음의 상태에 깨어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처한 그 자리에서 수행자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선종의 가장 위대한 스승인 육조 혜능 대사는 스님이 되어 수행한 후에 법을 계승한 게 아니었어요. 길 가는 탁발승의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느낀 바가 있어서 경을 독송하던 스님에게 물어봤더니 그분이“나는 잘 모르오. 하지만 저기‘홍인’이라고 하는 위대한 스승이 있다고 하니 한번 찾아가 보시오”라고 말했어요. 당시 혜능 대사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해다 팔아서 겨우 끼니를 때우고 있는 가난한 청년이었는데, 염불하던 스님은 청년의 질문을 받고 하도 기특해서 위대한 스승을 찾아가 보라고 일러준 것이었습니다.

청년이 “제가 노모를 모시고 있어서 못 갑니다”하니까 자기가 탁발한 돈을 건네주면서 “그럼 이걸 노모님께 우선 드리고 한번 찾아가 보시오”해서 스승을 찾아갈 수 있었던 거예요. 이렇게 혜능 대사는 정식으로 승려가 된 것도 아니고, 스님이 되려고 찾아간 것도 아니고, 법을 물으려고 찾아간 건데, 스승은“저 방앗간에 가서 방아나 찧어라”한 거예요. 그래서 방앗간에 가서 방아를 찧고 있는데, 스승이 와서 질문했고 혜능 대사가 대답하니 거기서 마음과 마음이 계합을 했다 해서 스승으로부터 법을 계승했습니다.

혜능 대사는 승려가 되어서 법을 계승한 게 아니라 승려가 되기 전에 이미 법을 계승한 거예요. 하지만 아무도 이걸 인정 안 해줬습니다. 그래서 16년이나 산속에서 사냥꾼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숨어 살다가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세상에 나와서 법을 설했습니다. 선의 전통이라는 게 이런 거예요. 관념이나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는 거지요. 여러분은 이런 전통을 계승해서 공부하므로 어떻게 공부할 것이냐가 중요하지, 승려가 되느냐 안 되느냐, 이런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선자체가 이런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평하는 마음 들여다보기

제 경험을 얘기해 보자면, 우리 한국 불교가 하도 혼란스러워서 종정 스님을 지낸 서암 큰스님께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제 얘기를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떤 한 사람이 말이야, 논두렁 밑에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네. 그 곳이 절이야. 이것이 불교라네.”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은 사람이 스님이고 기와집이 절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청정하면 그 사람이 수행자라는 거지요. 또 그런 사람이 논두렁 밑에 앉아있으면 그곳이 바로 절이고, 그게 불교라는 말씀이셨어요. 그런 깨우침을 주셨기 때문에 정토회는 큰 기와집을 짓고 승복을 입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게 아니에요. 그곳이 비록 식당이라 하더라도, 가정집이라 하더라도, 교회나 성당이라 하더라도 정말 마음이 청정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거기서 부처님의 법을 나눌 수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수행자이고, 바로 그곳이 절이라는 관점으로 지금껏 활동을 해온 거예요.

저도 젊을 때는 우리 불교계가 많이 실망스러워서 개혁하려고 혁신 운동도 해봤습니다. 그래서 스승이신 불심도문 큰스님께 제가“지금 불교계가 엉망입니다”라고 또 불평했어요. 그랬더니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탑 앞에 소나무가 되어라.”

소나무가 작을 때는 탑의 그림자가 자기를 가린다고 자꾸 탑을 탓합니다. 그런데 소나무가 크면 저절로 탑을 가리게 되지요. 그러니까‘탑 앞에 소나무가 돼라’는 말씀은, 소나무가 어릴 때는 탑 그림자 때문에 고생하지만, 소나무가 크면 저절로 탑을 가리기 때문에 그런 불평, 불만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결국 우리의 불평, 불만이라는 것은 다‘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들었을 때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불편이 상대편에게서 오는 것일까요? 그러면 이것은 경계를 탓하는 것이 됩니다. ‘그 불편이 내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하고 자각할 때 이것이 ‘직지인심直指人心’이에요. 눈을 바깥으로 돌리지 말고 안으로 돌려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문경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냄새도 나고, 다리도 아프고, 밑에서 찬바람도 올라오지요. 그러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럴 때 이 불편함이 이 화장실로부터 온 걸까요? 만약이 불편함이 화장실로부터 온다면 이 화장실을 좌변기로 전부 대체하면 해결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인도에서 온 우리 스태프들은 좌변기가 제일 불편했다는 거예요.

그 불편함은 좌변기로부터 온 게 아니라 내 습관, 내 업식, 내 카르마로부터 온 것입니다. 재래식 화장실에 습관이 든 사람은 좌변기가 불편하고 좌변기에 습관이 든 사람은 재래식 화장실이 불편해요.“모든 괴로움은다 나로부터 일어난다”는 수행문은 내가 뭘 잘못해서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업식으로부터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뜻이에요.

나의 습관을 보는 관점

‘불편함이 일어나지만, 이 불편함은 나의 업식, 습관으로부터 일어난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불편이 불평, 불만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이 불편이 화장실로부터 온다’는 생각이 들면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는 곳에,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이렇게 냄새나고 불편한 화장실을 만들었느냐?’하는 불평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밖을 탓하는 거예요. 불편함이 안 일어나는 게 수행이 아니에요. 불편함은 습관의 차이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불편함이 습관의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불만은 안 일어나요.

예를 들어“네가 말을 그 따위로 하니까 내가 화가 나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내가 화나는 것은 그 사람의 말 때문이 아닙니다. 서로의 생각이나 견해는 다를 수 있으니까 ‘아,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는구나!’이렇게 받아들이면 내 생각과 다른 데서 일어나는 불편이지 그 사람의 말이 틀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네가 틀렸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건 다 너 때문이다!’하는 겁니다. 이런 걸 두고 우리가 ‘자기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팔만대장경을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기본 관점하에서 마음의 상태를 늘 놓치지 않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면 지금 법사 수계를 받는 분들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느냐고요? 놓칩니다. 그래서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불평도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수행자는 그렇게 하다가도 ‘내가 놓쳤구나. 내가 수행적 관점을 놓쳤구나. 내가 알아차림을 놓쳤구나’하고 금방 되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너 때문에 그랬다. 당신이 말을 그렇게 해서 그랬다’하면서 이걸 붙들고 있으면 그건 수행의 관점을 놓쳐버린 것이 됩니다. 절에서 10년을 살고 20년을 살고 30년을 살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도 이 관점을 딱 놓쳐버리는 순간 ‘너 때문에 그랬다’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늘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시시때때로 이것을 놓칩니다. 그러나 순간은 사로 잡혔다 하더라도 하루 만에 놓아야 하는데, 대부분은 하루, 이틀, 열흘, 이렇게 움켜쥐고 남을 미워하면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이때 “내가 너와 살고 싶지 않으니 헤어지겠다”이렇게 솔직하게 말을 해야지“너 때문에 못 살겠다”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건 남을 탓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게 더 좋기 때문에 이리로 가겠다”하거나 “나는 이렇게 살겠다”라고 해야 합니다. 마음이 불편한 것은 나의 문제이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관점을 정확하게 갖고 꾸준히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반반이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70%, 80%, 90%…. 이렇게 점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하는 자세예요. 이런 관점이어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고, 법을 계승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놓쳐버리면 승복을 입고 있든 지위가 어떻든 얼마나 오래 살았든 그는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삶을 온전하게 스스로 컨트롤하는 사람, 놓치더라도 다시 원상 복구하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소승小乘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플러스 알파’로 다른 사람의 삶에 조금 도움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대승大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함과 검소함의 길

부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는 ‘겸손해라’이고, 다른 하나는 ‘검소해라’입니다. 검소하게 사는 건 뭘까요? 부처님께서는 버린 옷을 주워 입었습니다. 그것을 분소의糞掃衣라고 해요. 또 음식은 남이 먹다 남긴 것을 얻어 드셨고, 잠은 나무 밑에서 주무셨습니다. 이게 검소하게 사는 거예요. 여러분이 굳이 얻어먹지 않고, 쓰레기통을 뒤져서 옷을 입지 않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검소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검소해야 합니다. 사치하고 화려하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어요. 집이 부자라도 마찬가지예요. 집이 부자인 건 부자인 거고, 또 부자이니까 남을 도와줄 수 있어서 좋지만, 내가 수행자라면 집에 돈이 얼마나 있든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남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목에 힘을 주고 그러면 누가 밥을 주겠어요? 그러니 항상 겸손하고, 잘난 척하면 안 됩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그런데 겸손한 것과 비굴한 것은 다릅니다. 검소하게 살기 때문에 누구한테 얻으려고 껄떡거릴 필요가 없어요.

비굴할 이유도 전혀 없어요. 왕을 만나도 비굴할 일이 없고, 계급이나 신분이 높은 양반을 만나도 비굴할 일이 없게 돼요. 그러니 오늘 계를 받고 법사가 되면 비굴해서는 안 됩니다. 신부나 목사나 스님이나 이런 사람을 만나도 비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내가 법사다!’이러면서 교만해야 하는 것도 아니죠. 그분들을 존경하는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또 심리적으로 약간 억눌리는 비굴한 자세를 가져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고,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라는 겁니다. 수행자는 검소한 것을 자랑스러워해야지, 옷을 좀 초라하게 입은 걸 가지고 남한테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마하가섭존자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처럼 검소해서 사람들이 멸시했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부처님만은 그분을 존중하셔서 부처님과 동격으로 대우를 하셨어요.

선종에서는 전통적으로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할 때 주는 게 두 가지입니다. 발우와 가사입니다. 발우와 가사를 전한다는 건 검소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얻어먹는 음식이 화려할 수가 없잖아요. 주워 입는 옷이 화려할 수가 없잖아요. 검소하게 살라는 뜻에서 옷과 발우를 법의 징표로 주는 것입니다. 오늘 법사 수계를 할 때 여러분에게 발우를 주는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해 말한다면, 수행자라는 것은 번뇌가 없고, 괴로움이 없고, 속박이 없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늘 조마조마하면서 불안해하고, 근심∙걱정이 많고, 남을 원망하면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어요. 수행자는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야 합니다. 어쩌다 들떴다가도 금방‘내가 놓쳤구나’하고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것은 결혼했느냐, 직장에 다니느냐, 이런 것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토회에는 완전히 들어와서 수행하는 출가수행자가 있고, 또 사회생활∙직장생활∙가정생활을 병행하면서 수행하는 재가수행자도 있습니다. 두 가지 길을 함께 열어놓았습니다. 이건 정토회에서 처음 만든 게 아니라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열어놓으신 길입니다. 우리는 그 전통에 따라서 출가법사와 재가법사 수계를 동시에 같이하는 거예요. 그런데 불교가 종교화하면서 출가 수행자는 사제 계급이 돼버리고, 재가수행자는 신자가 돼버린 거예요. 우리는 부처님 법으로 다시 돌아와서 출가∙재가에 관계없이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게 삶의 목표입니다.

* 이 글은 월간정토 2018년 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